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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작년 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대유행은 20년 중반을 지나는 지금까지도 전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전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과 대규모 격리 등은 사회와 경기에 안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안받거나 명백히 '득을 보는' 흐름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음식 배달이나 택배 등 외부 공간이 아닌 집이라는 환경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산업들일 것이다. 일례로 배달의 민족과 같은 음식 배달업이나 이 분야에 종사하는 업체들은 작년 대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쿠팡 같은 경우 급격한 성장과 기업의 명과 암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것이 요즘 기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언택트Untact 소비 트렌드다.

 

물론 기업들이 이러한 단어에 꽂혀서 트렌드 장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코로나의 영향이 일시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쿠팡이나 음식배달, 택배 등등의 산업 역시도 기존에 존재하던 수요가 외부 효과로 인해서 늘어난 것이고, 이전부터 꾸준한 수요로 자기 자리를 확고한 분야였다. 하지만 코로나가 일으키는 변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코로나는 새로운 수요와 산업의 발굴이 아닌 기존의 산업 내의 요소들의 균형을 변화시키는 화학적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흥하고 있는 음식 배달 산업 같은 경우를 보자. 이전에는 이들이 기반하는 산업은 외식 산업이었고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나 외식 산업 전반을 보조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사람들이 배달을 통한 외식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배달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벤트가 되었다. 이 학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소비 패턴이 바꾸었고, 사람들은 점포라는 공간보다도 외주화된 배달 인프라와 플랫폼의 형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변한 소비 패턴이나 산업 구조가 이후에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코로나의 대유행이 장기화되어 시장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크긴 하지만, 기존에도 있었던 잠재성(충분히 흥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을 발휘할 수 있는 트리거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적 변화의 역치를 낮추는 역할로 코로나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이나 취미활동 기준에서 코로나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흥미롭게도 여타 산업군이 코로나로 인해서 급작스러운 변화(여행 관광산업의 몰락, 배달과 택배 등 집을 중심으로 한 산업의 급부상)를 맞이한 것과 달리, 게임 산업은 그 여파가 겉으로는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2020년 게임계는 조용한 편이다. 몇몇 게임들은 발매가 연기되었고, E3는 취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소한(?) 사건들을 제외한다면, 2020년 게임계가 조용한 것은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PS4와 XBOX ONE 다음 세대의 콘솔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도 이렇게 중간에 낀 세대들은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을 보여주는 경향성이 있는데, 큰 회사들의 역량이 모두 다음 세대 게임을 만들거나 마케팅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게임 산업 자체도 코로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일단 먼저 수요 자체가 성장한 것이 있다:일례로 코로나 사태 이후, 닌텐도는 3월 동물의 숲 신작을 출시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은 전적으로 '코로나로 인해서 스위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기할만한데, 이 열기는 국내에서 스위치 품귀 현상을 오랫동안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상반기의 게임들 중에서 동물의 숲 신작 만큼의 성공을 거둔 게임이 소니나 액스박스 진영 쪽에 없어보이긴 하지만, 상반기에 특기할만한 이쪽 콘솔의 게임들이 '거의 없었다' 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수요 관점에서의 성장을 제외한다면, 산업과 개발 관점에서는 재택 근무 이슈가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것이 소비를 하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몇몇 소소한 이벤트들에 이 재택 근무 이슈가 영향을 크게 끼치기도 하였다:일례를 들자면 닌텐도의 스위치 라인업 공개 및 게임 개발에 차질이 있다는 것이다. 루머에 의하면 닌텐도는 타회사에 비해서 재택 근무와 같은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가 타 게임회사에 비해서 상당히 늦었다고 알려져 있었고, 실제 동숲의 성공 이후 신형 콘솔 발매까지의 공백을 스위치가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그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점을 잃은 것이 닌텐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기회를 잃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리고 다소 흥미로운 '변화'들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게임 산업과는 조금 '엇나간' 분야이기는 하지만, 미니어처 게임이나 보드 게임, 그리고 이를 둘러싼 취미나 산업들(미니어처를 만들거나 보드 게임에 활용할 수 있는 3D 프린팅 취미활동이나 Paetron 같은 후원 활동 등)이 급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가 소비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로 인해서 대면 접촉이 어려운 미니어처 워게임 시장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게임 자체가 하기 어려운(대면 접촉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워해머 40k의 새로운 판본의 한정판인 인도미투스가 유래없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공식적인 언급은 없지만, 여러 해외 리테일 샵의 증언이나 한정판이 전세계적으로 모자라서 MTO 형식으로 주문 생산까지 하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난 점까지)이 그러한 변화의 주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일어난 일이 비슷하게 비디오 게임에서도 일어난다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두 분야는 어느정도 겹치긴 해도 서로 명백하게 다른 수요층과 소비 패턴을 가진 분야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서브 컬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둘은 큰 틀에서 가족과도 같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고,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러한 현상이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도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트리거를 당길만한 큰 사건이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형 콘솔의 발매'라는 이벤트는 코로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있고, 역대 콘솔 런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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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파 크라이 6가 2021년 2월 발매 예정으로 공개되었다. 이번 6편은 가상의 열대 국가를 배경으로 독재자 악역과 대립하는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한다. 6편의 설정은 사실 놀랍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설정이고 발상이다. 이미 4편의 구도(독재자 페이건 민과 저항 세력들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직접적으로 써먹은 부분이고, 2편(아프리카)과 3편(태평양의 섬들) 모두 직접적으로 열대 지방을 다룬 적이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이전 작품들을 상기하게 만드는 구조가 파 크라이 6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파 크라이 시리즈는 의식적으로 시리즈의 숫자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배경과 테마를 바꿔왔다. 그 속에는 게임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라는 근본적인 결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파 크라이 시리즈는 처음 크라이텍에서 만들어졌지만, 유비가 프랜차이즈를 인수하고 2편을 만들면서 우리가 아는 '파 크라이'가 초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파 크라이 2는 지금의 파 크라이 시리즈(3편 이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실험적인 특징들을 많이 갖춘 게임이었고(총기 자체도 소모품이었다던가 등), 몇몇 부분은 지금의 파 크라이 시리즈보다도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파 크라이 시리즈가 대중화 된 파 크라이 3부터였을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점으로는 1편과 2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활이라는 무기 체계가 등장한 것이었다. 이 활이라는 무기는 파 크라이 3의 특징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무성무기에 머리를 맞추면 적을 한방에 보낼 수 있어서 초반에서 중후반까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곡사 무기이기 때문에 항상 적과 플레이어의 거리를 계산해야했었다. 때문에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지속적으로 맵과 공간에 대해서 인지하고 행동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적 초소 공략 같은 경우 정교한 스테이지는 아니었지만 플레이어와 적을 다양한 축적의 공간에 배치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었다:플레이어는 원거리에서 탐색하고 저격하며 상대를 제압할 것인지, 아니면 적의 사각에 숨으면서 근접해서 한 놈씩 죽일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반적인 아레나 스테이지를 풀어나가듯이 정면 돌파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파 크라이 3의 구조(다양한 축적과 플레이 방법을 지닌 오픈월드 스테이지의 구조)가 콘탠츠와 시스템의 확장 측면에 있어서 대단히 어려운 구조였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파 크라이 시리즈, 아니 FPS의 전제는 총기라는 도구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총기의 사거리가 최소 몇백 미터 단위라는 점이 게임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플레이어는 시야만 확보된다면 몇백미터 바깥에 깨알 같이 보이는 상대방을 저격총이나 소총으로 하나씩 처리할 수 있고(물론 탄도와 낙차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쪽은 시간이 걸리지만 더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상대가 시야에 나올 때까지 포지션을 고수해야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시간이 오래걸린다는 점에서 재미가 없는 방법이다. 

 

총기의 전능함 문제가 두드러진 오픈월드 게임의 예시는 다른 게임이지만 파 크라이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먼 친척인 브레이크 포인트다. 브레이크 포인트는 근접해서 적과 싸우는 것이 상당히 리스크가 크고, 체력 회복 등에 여러 제약 조건이 있기 때문에 난전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드론으로 최대한 태깅을 한 후, 무성 저격 소총 등을 이용해 적을 하나씩 제거한 뒤, 도저히 처치 불가능한 적들은 직접 돌입해서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 과정은 가장 확실하지만 지루한 방법이고, 무언가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판단과 전략, 순발력이 들어가기 보다는 단순한 노동+실수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불편함의 결합이었다.

 

파 크라이 3는 이러한 문제를 다소 단순하게 풀어내는데, 1)초중반 무성 무기 자체를 활만 준다, 2)소음기 단 저격총을 쉽게 주지 않는다 3)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최대 소지 탄약수가 제한된다 였었다. 이를 통해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근-중거리 무기(활과 권총, SMG, 최악의 경우에 쓸 수 있는 돌격소총 까지)를 선택하고,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고 게임에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적을 헤드샷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소음기 단 저격총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게임의 노력이 무색해질정도로 게임이 쉬워지기 시작한다:시야가 확보된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적들을 저격총 하나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 크라이 3 이후의 문제는 이러한 만병지왕 총에 대해 게임 매카니즘 상 그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저격소총 뿐만 아니라 돌격소총에 소음기를 달 수 있게 해서 잠입에 유리하게 만들지 않나(4편 이후), 들고 다니는 탄환의 양이 점차 증가한다든가, 휴대용 유탄발사기가 권총 카테고리로 들어온다든가,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이 늘어나는 등(4편에서 경기관총이 좋아지는 점 등)이 그러했다. 심지어는 5편은 굳이 활 같은 무기를 사용할 필요 없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게임은 파 크라이 3의 활이라는 기믹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활이라는 병기가 갖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파 크라이 3 이후 활은 개근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의 기믹을 이어받는 다양한 무기들이 추가되었다. 4편에서는 반자동 석궁이, 5편에서는 새총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파 크라이 3편에서 처음 보여주었던 충격이나 게임 플레이에 유화된 모습은 3편 이후 찾아볼 수 없었다.

 

파 크라이 3 이후의 파 크라이 시리즈는 3가 갖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가 이미 3편에서 끝나버렸는데도 계속해서 그 원칙을 고수하는데 있다. 여전히 게임은 다양한 축적(전초기지를 공략하는데 원거리에서 저격을 하거나 근거리 암살로 풀어나가는 등)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스테이지의 축적 구조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3편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고, 게임은 총기를 이용한 게임 플레이를 강화하는 방향을 선택하여 그러한 축적을 '무화'시키는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파 크라이 3가 잘 만들어진 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10년 가까이 콘탠츠를 구성하는 구조(전초기지 해금 같은)만 고쳤을 뿐이다. 어크 시리즈가 위처와 같은 RPG를 밴치마킹하면서 어크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른 장르의 영역으로 성공적으로 이동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파 크라이 6편, 더 나아가 시리즈 자체에 필요한 것은 3편이라는 모델을 포기하는 '용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는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어린이 피해자들에 대한 통계를 담담하게 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어른, 그리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 어린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구축한다. 이 구도는 익숙한 클리셰이자 대중문화나 이야기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도덕율을 관통하는 구도다. 그 도덕율이란 먼저 온 자들이 뒤에 올 세대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이 도덕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새로 사회로 들어온 자들이 사회를 채울 수 없을 것이고 사회는 점차 말라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가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상대적으로 영아 생존율이 낮고, 노동하는 청장년 계층이 나이 어린 세대원보다 더 중시되는 근대 이전 시대에는 이러한 도덕율과 감수성이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대라도 '부녀자'를 쉽게 죽이는 관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를 손쉽게 살육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좀 더 정확하게 짚자면 아녀자를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는 일이 더 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 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어린이라는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율이 틀을 갖추고 당위성을 강하게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어린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위와 같은 현대적인 도덕율과 딜레마(실제로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전설적인 영화 이후, 많은 수의 좀비물들(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몇몇 좀비물들에서 대중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은 산업 사회와 도시 문명의 도래 이후 등장한 '대중과 군중'에 대한 공포를 스펙타클로 다루었다. 대상화된 대중이자 주인공과 관객들로부터 유리된 존재인 좀비들은 그야말로 낯선 사회와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좀비물은 좀비(=대중과 현대사회)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미하면서 다양한 맥락을 쌓아올려왔다.

 

영화는 이 좀비와 군중을 '어린이'로 채워넣으면서 좀비물 장르에 도덕적 딜레마를 뒤섞는다. 어린이 좀비의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닌 대중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덕적 딜레마 그 자체'가 된다. 미래세대, 사회의 희망, 그리고 약자 등등,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터부이며, 심지어 몇몇 대중문화권에서는 자극적이라 여겨 쉽게 다루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러한 현대적인 도덕율과 아이 살해의 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사회의 붕괴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이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아동살해라는 끔찍한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한 어른을 심판하는' 소설과 영화 등의 클리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동물들의 대회의나 5월 35일 같은 작품이나 좀 더 더 폭을 넓게 본다면 미하엘 엔더의 모모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클리셰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서 어른들의 악행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린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견 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절망은 그런 클리셰를 넘어 더 깊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어른을 죽이는 괴현상에 대한 '트리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몇몇 추측과 감염에 대한 묘사, 마지막 엔딩의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클리셰의 결론과 영화의 내용들이 대치된다는 것이다: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러한 구도의 작품들은 결국 어린이들이 어른을 심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세대가 어른 세대를 용서하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른을 죽이는 시퀸스를 구성하는 히스테리컬한 컷과 신경을 긁는 음향 연출, 그 사실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린이를 죽일 수 없는 주인공의 딜레마를 다루는 연출까지 영화는 그 어떠한 안전장치 없이 헐리웃에서 제작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더 사람을 몰아붙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모든 희망의 가능성조차 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 영화는 스페인 군부독재 말기에 제작되었고, 군부 독재와 억압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영화에 깊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그러한 사회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절망감은 당시 스페인 영화계에 깔려있는 깊고도 강렬한 감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시절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일 것이다:종교는 자본가와 결탁하여 카드놀이나 하고, 성체는 모욕당하며, 희망은 없고 파시스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을 쏴죽인다. 영화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당시 스페인 군부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들은 극을 일반적인 장르 안전장치 바깥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절망감을 그저 감정에서 끝내지 않고 논리적인 구조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화 교환원의 죽음을 다루는 시퀸스일 것이다. 이 시퀸스는 교회라는 공간을 죽은 여자의 옷을 들고 춤을 추는 소녀들 - 시신을 성희롱하는 소년들 -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어린이들로 3등분한다. 영화 내내 보여지는 긴장감 넘치는 구조와 다르게 묘한 맥락을 가지는 이 장면은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초현실적으로 축약하는 부분이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 아래서 살해한 타인의 재물을 갈취하고(소녀들), 성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며(소년들), 그것을 고해성사하여 퉁치는 모습(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 자체가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 인간 만마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어른을 살해하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서 이 모든 것이 '놀이'라고 이야기한다:놀이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 실제를 모방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실제'를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폭력 사용하는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닌, 어른의 폭력이 아이의 폭력으로 대물림되는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세대의 순환고리라 이야기하는 영화의 절망감은 많은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절망의 논리구조 아래서, 영화는 전개 내내 이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감과 광기로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이래도 선(아동 살해)을 안넘을래?', '선을 넘어도 답이 있을거 같아?'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붙이는 영화는 많은 대중문화의 금기들을 뛰어넘는다. 주인공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이를 쏴죽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태아에 의해서 내부에서부터 내장이 찢겨져 나가 죽으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변해버린 아이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달려나가고, 변해버린 아이들과 싸우며 절규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다. 이 모든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절망감과 긴장감은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정말로 훌륭한 호러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공포를 넘어서 '절망감'을 사회적 도덕률과 터부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도색 좀 그만하고 게임하고 글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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