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잠입액션 게임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양대산맥이 있다:스플린터 셀 시리즈와 메탈기어 시리즈. 이 둘은 잠입이라는 테마를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구축하는데, 메탈기어 시리즈가 MSX 시절의 아케이드 게임으로부터 그 게임 시스템을 이어받으면서 시리즈 및 시대에 맞게 게임을 추가하고 다듬고 재구성하는 쪽이라면, 스플린터 셀 시리즈는 고전 잠입게임인 씨프로부터 빛과 그림자, 소리를 이용한 잠입의 개념을 계승하여 그것을 극한의 형태의 시뮬레이션으로 구축한 쪽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1] 그리고 이러한 '시뮬레이션'의 성격은 세번쨰 작품 카오스 이론에서 정점을 찍는다:소음, 노출도, 조명 강도 등에 따라서 좌우되는 잠입시스템과 복합적으로 구성된 맵구성 등등 카오스 이론은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카오스 이론의 문제점은 바로 그 특유의 복잡성에 있었다:게임은 너무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나머지, 초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구조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스플린터 셀 시리즈는 카오스 이론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서 진입장벽을 낮추려는 시도한다. 이중간첩 이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 컨빅션은 그런 실험의 극단적인 연장선상에 있었던 작품이었다. 복잡한 잠입 시스템은 제거되고 게이머는 어둠속에 있으면 은신한 것으로 간주된다. 빛에 노출되지 않으면 화면이 흑백조로 바뀌며 적들은 플래이어를 '거의' 탐지하지 못한다.[각주:2] 이러한 잠입 기제와 다층적인 스테이지 구조가 적들을 마킹하고 한꺼번에 제거하는 지정&수행의 추가 등과 맞물리면서 게임은 잠입게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숨바꼭질 '학살' 게임이 되었다. 게임은 개성넘치고 재밌는 지점이 많았지만, 긴 개발기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았으며[각주:3] 동시에 최고 난이도에 맞춰놓고 플래이를 해도 쉬울 정도였고, 무엇보다 플래이는 전략적인 선택이 없는 직선형의 구조였다. 여기서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는 컨빅션의 직관적이며 쉬운 잠입을 끌고오면서 동시에 기존의 시리즈의 다양한 전략적 움직임을 게임에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조화를 꾀한다.  


게임은 컨빅션과 같은 그림자를 이용한 잠입기제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컨빅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림자에 숨으면 눈 앞에 있어도 눈치 못채던 극단적인 컨빅션과는 다르다:기본적으로 그림자는 내가 발각될 '가능성'을 줄여주는 기제에 불과하다. 어둠 속에 숨어있어도 적들은 피셔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이번작에서는 그림자를 꿰뚫어볼 수 있는 적들을 하나의 정식 카테고리로 추가하고[각주:4] 적들이 색적 범위가 늘어나는 등 그림자는 더이상 만능의 잠입 기제가 아니다. 그리고 전작의 지정&수행이 한번에 다섯명의 적을 처형해서 일방적 학살을 방조하였다면, 이번작의 지정&수행은 최대 3명까지만 처형할 수 있으며 심지어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제한적으로 처형을 막는 적들[각주:5]이 뻔질나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점들은 컨빅션에 대한 일종의 반성이라 볼 수 있는데, 컨빅션에서 플래이어를 너무 강력하게 만든 나머지 게임이 쉬워졌던 지점들을 모두 정리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에 게임은 플래이어에게 다양한 도구와 장비, 그리고 무기를 주고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들을 부여한다. 컨빅션에서는 5개의 가제트를 모두 들고다니면서 화려하게 무쌍을 펼쳤다면, 블랙리스트는 자신의 게임 플래이 스타일, 미션과 스테이지 상황에 따라서 장비와 무기를 바꿔가면서 플래이를 해야한다. 게임은 이러한 플래이 성향을 3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한다:비살상 은신 잠입 위주의 고스트 스타일, 살상 잠입 위주의 팬서 스타일, 잠입하지 않고 학살 닥돌 위주의 어설트 스타일[각주:6]. 그리고 전작의 처형 시스템을 개편해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처형을 채울수 있게 바꾸고[각주:7], 달리면서 처형을 할 수 있는 등 3가지로 세분화된 시스템에 맞게 기본적인 동작들도 조정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시리즈가 잠입을 강제하는 쪽에 가까웠다면, 블랙리스트가 보여주는 미덕은 이 다양한 스타일 모두를 포용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은 게임 스타일 자체에 효율에 차등을 두지않는 점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론 게임 내에서 꼭 고스트-어썰트 스타일로 플래이 해야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게임은 기본적으로 스테이지를 어떻게 플래이할건가에 대해서 강제하지 않는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점수 계산법'이다. 게이머가 행한 스타일에 따라서 게임은 점수를 계산하는데, 어떤 플래이 스타일로 하든 감점 없이 오로지 게이머가 한 행위를 합산하고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가를 보여줌으로서 마치 게임은 '나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한다'라고 이야기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블랙리스트가 다른 시리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점수 계산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이로인해 게이머는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고자 하는 의욕, 좀더 효율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의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플래이 스타일에 걸맞는 첨단 장비들을 제공함으로서 그것을 조합해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한 플래이어의 머리굴림을 요구하는 지점들이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블랙리스트 스토리를 다루는 싱글 미션 이외에 12개의 코옵/싱글 부가미션을 탑재하고 있다. 전작이 분량 부족으로 많은 욕을 들어먹은 것에 대한 반성이라도 되는 듯이, 12개의 코옵/싱글 부가미션은 모두 합치면 상당한 분량을 자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각 미션들(스토리/부가미션)의 스테이지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일직선 진행에 숨바꼭질을 할 수 있는 아레나 형식의 스테이지를 던져주는 하지만, 컨빅션에 비교하면 다양한 클리어 조건과 스테이지 구성을 보여주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는 일반적인 밀리터리 슈터물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의 적이 있고, 미국은 그 적에 무력하게 당할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홀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미국의 적들을 박살낸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이러한 과정을 상당히 리드미컬하고 급박하게 그려낸다. 주인공들보다 한발 앞서있는 적들을 쫒기 위해서 무모한 도박을 하고, 전쟁의 위협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드는 등 급박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단순히 스팩타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구성되는, 역전된 인과를 보여주는 콜옵/배필식의 이야기와 다르게 블랙리스트는 짜임새가 있으며 이야기 자체로도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스토리의 모든 장점들은 마지막 F벙커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 특히 이 게임의 슬로건이자 핵심 키워드인 '다섯번째 자유'에 대한 QTE는 게이머를 맥빠지게 함을 넘어서 게임이 게이머가 여태까지 경험했던 모든 경험을 게이머 눈 앞에서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느낌마저 만들어낸다. 다른 자유를 지키기 위한 '다섯번째 자유'의 존재는 여태까지 기존의 밀리터리 슈터류들이 숨기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행동의 원동력을 정면으로 끄집어내서 정식화시킨 하나의 기제화 시킨 무언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다섯번째 자유의 존재가 없었더라도 이야기는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의 존재로 인해서, 게임의 스토리는 확고한 행위의 원천과 뭔가 멋들어지는 지지 기반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8] 하지만 F벙커에서 벌어지는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십시오'라는 버튼 액션은, 다섯번째 '자유'라는 것은 고작 버튼 누르는 자유에 불과한가? 그리고 그런 도를 지나친 과격함을 보여주고서는 그것을 다섯번째 자유로 포장하는 지점이 과연 스토리에 있어서 필요했는가? 싶은 그런 느낌과, 마지막 엔딩영상에서 보여주는 다섯번째 자유의 껄끄러운 지점들은 게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망치기에 충분했다.[각주:9]


결론적으로 블랙리스트는 재밌는 게임이며, 제값은 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스토리의 결론은 황당함을 넘어서 아방가르드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또한 기존의 올드 시리즈 팬들, 카오스 이론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있어서는 블랙리스트는 뭔가 어중간한 무언가로 비쳐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지점들에 대해서 좀더 너그러워진다면, 스플린터 셀 블랙리스트는 잠입 액션 게임으로서 매력적인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 씨프에서 화살로 불을 꺼서 그림자를 만들고 그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처럼, 스플린터 셀에서도 조명을 총으로 쏴서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잠입 기제이다. [본문으로]
  2. 플래이어가 노출되는 지점은 바로 빛에 노출되거나 소나고글을 가진 적에게 노출당하는 것 두가지 밖에 없다. [본문으로]
  3. 이는 컨빅션이 한번 엎어진 프로젝트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4. 컨빅션에서 소나고글을 쓰는 적들이 희귀하게 나온데 반해서, 블랙리스트에서는 야간 투시경을 쓴 적들이 진짜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나온다. [본문으로]
  5. 헬멧을 쓴다던가, 중장비를 입고 나온다던가. [본문으로]
  6. 물론 학살-닥돌이라고는 하지만, 블랙리스트의 전투는 정면 돌파라기 보다는 측면 공략의 성격이 강하다. [본문으로]
  7. 네개의 충전 게이지를 주고, 암살은 4개를 한꺼번에, 헤드샷은 2개를, 일반 킬은 1개를 채우는 식으로해서 총 4개를 다 채울 경우 지정&수행을 할 수 있게 바뀌었다. [본문으로]
  8. 예를 들어, 다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법, 절차, 심지어는 그 권한을 준 대통령마저도 쌩까버리는 강력한 자유를, 단지 주인공들의 감과 과감함이 아닌 그보다 '상위'의 무언가에 주는 그런 지점들이 있다. [본문으로]
  9. 다섯번쨰 자유와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중이며, 앞으로 블랙리스트 자체는 논하지 않더라도 '다섯번째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꾸준히 언급할만한 지점이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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