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모 유명 블로그에서 1980년대 90년대 애니메이션의 향수에 빠져서 현재 2000년대 애니메이션의 모에 코드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조를 가리켜 모에노포비아(의역하자면 모에 공포증)로 규정하고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흔히 '과거가 최고이고, 현재는 과도한 상업성으로 인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과거에 존재하였던 상업성을 철저히 무시한다고 보았죠. 그리고 모에 코드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하였죠.

 뭐, 기본적으로 그 블로그의 기준에 따르면, 엄밀하게 저도 모에노포비아의 분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의 작품들이 현재 나오는 작품에 비해서 좋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나오는 작품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모에 코드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는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이 섞여있는 복합적인 것이고, 이에 대해서 약간 코멘트하고자 합니다.

 저는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소위 모에 코드는 사실상 과거의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성적인 코드에 전형적인 틀을 부여한 것으로 봅니다. 사실, 30년 전인 1980년대나 2000년대나 작품에서 표현방식만 다르지 결과적으로 팬들이 반응하는 방식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첫 마크로스 TV판 같은 경우에도 그 당시에도 애니메이션의 팬들이 미사 팬과 민메이 팬으로 나뉘어져서 열렬한 공방전을 벌이는 등(이미 여기서부터 누님계와 로리 또는 소꼽친구계가 등장한걸지도...) 여성 케릭터에 대한 강렬한 팬심의 표현이나 파생상품(마크로스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파생 음반이 많이 팔리죠) 등으로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에반게리온도 팬들 사이의 메인 히로인 논쟁이 끊이지 않았구요. 모에 코드는 이러한 일련의 경향에 정형성을 부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기에, 모에 코드의 등장은 일종의 '흥행 공식'의 등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미국 헐리우드에서도 블록버스터가 성공하기 위한 일련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죠. 특히 이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이후로 독립적인 공식이 되었고, 이러한 공식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면서 오타쿠 계층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고 있는 것이 교토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에 코드에 있어서 가장 큰 주축이구요. 그외에 오타쿠의 자학적인 속성과 현학적인 속성에 모에 코드를 입혀서 공략하는 샤프트(절망선생과 바케모노가타리)나 AIC 등등 모에 코드는 지속적으로 본류에 세부 공식을 덧붙이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표현방식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과거 일본 애니메이션 자체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모에 코드 자체는 하나의 '표현 방식'입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간에,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혹자는 모에 코드라는 상업적 조류에 의해서 과거의 작품성이나 내용이 훼손된다고 주장하나, 실상 과거 작품들도 상업적인 측면을 중요시했다는 것(특히 파생상품들과 관련해서), 그리고 소위 작품성과 실험성이 가장 극대화된 94년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나온 작품들(소위 선라이즈 라인에서 등장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선라이즈 황금기')이 결국 상업적인 실패하여 모에 코드로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에대한 큰 반증입니다. 더군다나, 현재의 모에코드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 중에서도 괜찮은 작품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고(특히 흑의 계약자 1기는 모에코드의 측면에서도 훌륭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실험적인 작품들(케모노즈메 등을 위시한 괴악한 작품들)은 90년대 이후로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변화한 것은 없다 라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조류에 대해서 몇몇 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은 존재합니다. 일단 먼저 모에코드가 전반적으로 작품의 질을 어느정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함량미달의 작품은 다수 존재하였지만, 근래에 들어서 작품과 작품 사이의 차이점을 찾기 힘든 경우도 은근히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모에코드로 인해서 애니메이션 시장이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는 경향입니다. 사실, 초기 모에코드를 주도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같은 작품은 오타쿠/비오타쿠를 떠나서 전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놀라운 포용력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로 모에코드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폐쇄적인 성향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럭키스타 같은 작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타쿠를 노린 작품이었죠.(저는 아직까지도 그 작품이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후로 럭키스타 같은 작품들이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진입장벽이 지속적으로 높아졌다고 저는 봅니다. 그로 인해서 수요인원은 점점 특정한 부류로 한정되고, 특정한 부류의 수요를 감당하다 보니까 또한 시장은 폐쇄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고.....이러한 악순환이 현재 애니메이션 시장을 망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애니메이션 시장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넓은 시야와 새로운 수익구조입니다. 모에코드를 충분히 일반인들도 즐기고 끌어당길 수 있는 정도로 표현한다든가(특히 올해는 그런 의미에서 케이온이 선전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기본적인 모에코드를 지녔으면서도 내용적인 보강을 이끌어낸 작품들이 현재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파생 상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시장 구조가 등장해야만 현재 모에코드 일색의 애니메이션 시장이 어느정도 다변화될 수 있을거라 보입니다.



덧.상당히 긴글이 되었군요. 그나저나 요즘 뭐 재미있는 신작 없습니까?(듀라라라 빼고)
작년 10월 달 라인이 워낙 개판이라 뭐 하나 손댈 엄두도 안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