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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야쿠자 보스 무토는 인맥을 동원해 아내의 소원인 배우 지망생 딸을 영화에 데뷔 시키려 하지만 딸의 말썽으로 촬영이 무산된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토는 직접 제작자로 나서 야쿠자 조직원들을 스탭으로 동원한다. 얼떨결에 무토의 딸과 엮여 영화 감독으로 소개 된 코지는 강제로 이 영화의 연출 의뢰를 받게 된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코지는 일생의 영화를 찍는 게 소원인 영화광 히라타와 3인방 '퍽 바머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는 리얼리티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마침 앙숙인 두 야쿠자 '무토파'와 '이케가미파'의 결전을 실시간으로 찍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영화다:액션 영화에 미친 아마추어들은 전통복에 환장한 야쿠자와 출소하는 아내를 위해서 항쟁 당일 영화팀을 꾸리는 야쿠자 두목의 도움을 받아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영화에 담는다. 영화는 2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내내 산지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온갖 골때리는 연출과 황당한 상황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2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관객을 흡입하는 힘이 강한 작품이며, 재미로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무난하게 추천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 색다른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메인 플롯은 야쿠자나 갱스터 물에 가까운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메인 플롯에 영화광인 히라타와 퍽 보머스Fuck Bombers의 존재를 이중나선처럼 연결지은 것일까? 그리고 왜 제목은 '지옥이 뭐가 나빠'인 것일까?


왜 제목이 '지옥이 뭐가 나빠'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제목에서 지옥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선정하긴 했지만, 정작 극 내부에서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대응되는 뚜렷한 무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지옥이라는 키워드가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설적인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과 지옥이 뭐가 나빠를 대칭시켜야 한다. 시네마 천국은 어렸을 적에 영사기사 알프레도에게 영사기술과 영화를 배운 토토가 영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사랑과 슬픔,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네마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토토와 영화의 관계일 것이다:영화는 그의 삶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차지하였으며, 다양한 고전 영화들이 그의 삶을 관통하듯이 지나간다. 마치 다시 손에 잡을 수 없는 빛바랜 추억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옥이 뭐가 나빠는 다르다. 지옥이 뭐가 나빠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영화들은 우리가 '고전영화'라고 부르는 그런 고상한 것들이 아니다:이소룡의 용쟁호투의 직접적 인용과 파일럿 무비에서 드러나는 챤바라 물(베고, 베고, 베고, 또 벤다!), 야쿠자물의 인의와 시대착오적인 시대극의 모습들, 코카인을 한껏 들이키고 보이는 싸이키델릭한 환상이나 신체절단이 난무하는 고어 영화의 영향 등등 그야말로 '입에 차마 담기에는 너무나 천박하고 유치한' 물건들 뿐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토토와 정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토토는 영화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였고(어렸을적 부터 그는 영사기사를 했었다), 성공을 하여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지위를 성취하였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하며, 한때 자신들의 아지트였지만 지금은 망해버린 극장에서 스크린도 아닌 브라운관으로 만든 파일럿 무비를 보고, 또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히라타와 그 친구들에게 '지옥'이다. 처음 사카키와 만난 이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채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결국 사카키가 무위도식하는 자신들의 상황에 분노하여 히라타 일행과의 절교를 선언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그들이 메인스트림에 오를 수 없다는 점에서(10년이 지나 폐허가 된 극장과 오락기기들처럼) 영화는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굴레에 대해서 늘어놓는 히라타의 장황하면서 바보같은 신념이다: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도 영화의 신은 우리에게 어떤식으로 기회를 줄지 모른다. 히라타가 말하는 영화에 대한 사랑은 바보같고 장황하며 앞뒤가 안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하며 확고한 열의와 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10년 전과 현재를 오가면서 리드미컬하게 진행된다:무토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무토의 아내에게 당해서 실패한 이케가미는 무토의 딸인 미츠코를 만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동시에 무토는 자신의 아내 덕에 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빚을 졌으며, 동시에 일련의 항쟁으로 CF로 잘나가던 딸의 성공가도를 망친다. 재밌는 점은 이 둘의 주된 행동 원인이 미츠코라는 케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케가미는 자신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준 미츠코를 숭배(?)하고는 남자의 결단은 기모노다! 라 외치며 시대착오적인 야쿠자를 꾸리며, 무토는 야쿠자의 인의에 대한 일장설교를 늘어놓으며 일생일대의 결전을 앞두고 아내에 대한 인의를 지키겠답시고 영화팀을 만들어버린다. 미츠코로부터 시작된(엄밀하게 본다면 그 바보 같은 CM 덕분일 것이다) 이 비상식적인 황당한 행동들에는 히라타 같이 바보같지만 확고한 열의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바보 같은 행동들은 야쿠자 영화의 클리셰에 대한 비틀기이다:조직원 사이의 의리라는 클리셰는 바보같은 영화 만들기로 바꾸며, 남자의 결단은 시대착오적인 기모노를 향한 결단이 된다.


그리고 히라타, 이케가미, 무토 외에도 영화에는 바보와 또라이들이 가득하다, 아니 바보와 또라이들 밖에 없다:얼떨결에 영화감독이 된 코지는 코카인을 한껏 흡입하고는 이마에 칼을 박고 몸개그를 하지 않나, 미츠코는 10년전 어린 시절부터 피웅덩이 가득한 바닥을 바라보며 시체 청소부를 부르고 성장한 뒤에는 맥주병 키스를 하는 등의 광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을 바라보라며 히라타와 싸우던 사카키는 기회가 생기자 다시 그 바보같은 노란 추리닝과 쌍절곤을 들었으며, 사카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점장은 자신의 음식점에서 깽판을 치던 사카키를 바라보며 따봉을 외쳐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며 바보같은 자기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왜 영화는 이렇게 확고하면서 바보 같은 미학과 철학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히라타의 시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친구들과 야쿠자들이 경찰에 의해 죽어버린 후 겨우 필름과 녹음 테이프를 회수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한 히라타는 달려나가면서 해냈다! 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의 환상속에서 히라타 일행의 아지트였던 극장이 부활하고 여지껏 등장한 배우들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부와 명예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었다(그는 그런 쓰레기 같은 영화는 자신은 안 만들겠다고 극 중 내내 반복한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쿨했던 영화들의 존경이자 그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미학의 결정체였다. 그렇기에 그가 찍은 영화, 지옥이 뭐가 나빠에는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바보들이 가득한 것이었다.


또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영화 바깥의 현실과 교차시키는 메타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서 바라볼 수도 있다:지옥이 뭐가 나빠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의해 성공하고 거기까지의 과정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장년층의 시네마 천국이 아닌, 소위 싸구려 영화에 심취하여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도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위해 오늘과 미래를 내던져버리는 요즘 시대의 청년층의 시네마 지옥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히라타와 그 일행들은 오히려 되묻는다:그런 시네마 지옥이 뭐가 나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사랑은 B급 영화의 매력처럼 바보같지만 멋있으며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옥이 뭐가 나빠의 B급 정서에는 '음험함'이 대단히 옅다:영화의 유쾌함도 유쾌함이지만, 동시에 영화가 피가 엄청나게 난무하는 성인용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섹스에 대한 묘사가 적은 점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케가미의 미츠코를 향한 사랑은 전적으로 동경 또는 숭배에 가까우며, 무토는 자신의 연인을 아내에 대한 의리 때문에 내친다. 야쿠자들은 두목의 황당한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칼 싸움을 넘어서 총을 꺼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마저도 유쾌하고 즐거운 놀이처럼 묘사한다. 즉, 영화는 피와 절단이 난무하는 B급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어떤 '음험함'이 들어갈 요소를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배제하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이 뭐가 나빠는 소노 시온의 자전적인 영화라고도 생각하기도 한다. 히라타가 마지막에 달리면서 외친 해냈다! 라는 기쁨의 함성은 소노 시온 스스로의 외침일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바보 같은 영화를 드디어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보'라는 수식어는 욕설이나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애정어린 칭찬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 뭐가 나빠는 정말로 좋은 의미에서 바보 같은 영화이며, 그런 바보 같은 것에 애정을 가진 젊은 세대를 위한 시네마 천국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






끝으로 지옥이 뭐가 나빠 엔딩곡을 첨부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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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친구들을 대신해서 체포되어 교도소에 복역되었다가 출소한 후, 레오 핸들러는 이제 그의 인생을 다시 제대로 되돌려 놓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전과자에게 녹녹하지 않고 사촌이자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에리카는 이미 자신의 오랜 친구 윌리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있는데. 레오는 지하철 회사를 운영하는 삼촌, 프랭크를 만나 윌리와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에 빠져들며 살인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그는 이 세계 속에서 가장 냉혹한 조직의 공격대상이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모를 발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더 야드의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대국민 사기극에 가까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평범한 장르 영화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과정과 방점을 찍는 부분에서 여타 장르 영화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들은 기존의 장르영화의 공식에 비추어 보면 전적으로 '엇박자'에 가까운 영화들이다. 그렇기에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가 갖고 있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박자로 만들어진 그래이의 영화는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깊은 향기를 갖고 있다. 더 야드 역시도 그러한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유대인 가족에서 자란 그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영화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반대를 부모로부터 받았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걸었던 복잡한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성장배경이 그에게 있어서 가족에 대한 악감정과 트라우마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리틀 오데사나 투 러버스에서처럼, 가족을 향한 그의 감정은 트라우마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긍정적인 감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즉,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루는데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의 접근방식은 '양가적'이다. 그리고 이 양가적인 접근이 서로를 양 끝으로 잡아당기면서 극에 붙잡혀 있는듯한 축축한 감성과 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 제임스 그래이는 최고의 가족 영화 감독이다.


더 야드 같은 경우에는 제임스 그래이 버전의 '대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여기에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온 탕자(레오)가 있고, 그 탕자는 가족 사업에 뛰어들면서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대부와 더 야드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적으로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의 관계론의 문제다. 대부에서 콜레오네 패밀리의 관계는 돈 콜레오네-마이클 콜레오네라는 아버지와 그 밑의 자식들과 방계의 형제들(또는 조직원들)의 가부장적 관계가 중심이다. 제목인 대부Godfather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가족의 수장이자 고독한 폭군이 주변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것이 대부의 이야기 핵심축이 되며, 그렇기에 대부에 있어서 조직과 가족은 가족의 형태를 넘어서 작은 사회, 더 나아가 인생의 은유로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의 더 야드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더 야드에 있어서 가족의 관계는 가족의 수장과 그 밑의 하부 구성원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히 레오의 이모부 프랭크가 회사와 가족을 이끌며 가족-정치의 구심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자신의 의견과 반하는 레오나 레오의 어머니의 견해에도 화를 내지 않으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오히려, 가족 내부에서도 배신과 음모가 판을 쳤던 대부의 가족과 다르게 더 야드의 가족은 분명하게도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오가 일을 망쳤을 때도 프랭크는 그를 제거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가족으로서 뒤를 돌봐주려 했었고, 망가지기 전의 윌리와 레오의 관계 역시도 서로의 뒤를 봐주는 밀접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더 야드의 인물 관계는 전적으로 '수평적'이다:프랭크와 그의 가족들, 레오, 윌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진심으로 위하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제임스 그래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가족의 사랑이란 감정적인 지원과 함께 무시무시한 감정적인 파괴를 수반한다고. 더 야드에 있어서 관계는 역으로 모든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윌리는 레오를 친구와 친척으로서 사랑하지만, 동시에 에리카와 레오가 사촌 이상의 밀접한 관계일 수 있다는 의심이 레오와의 관계를 뒤틀어버리게 된다. 또한 프랭크 자신과 가족의 파멸, 에리카의 죽음 역시도 이러한 사랑의 양면적인 부분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더 야드의 가족과 인물관게를 넘어서 암흑가와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 역시도 '수평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윌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레오에게 설명할 때,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 받는다'라는 호혜적이면서 단순한 원칙으로 묘사한다. '내가 거절못할 제안을 하지'라고 이야기하는 대부의 관계와 다르게(왕과 신하의 관계) 더 야드의 암흑가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해주면서 지속되는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이 수평적인 관계는 서로에 대한 '평등한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윌리와 거래하는 위원장이 도청을 두려워하여 옷을 벗고 알몸으로 거래를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바깥의 세계는 호혜관계로 유지되지만 동시에 그 관계는 호혜가 끊기게 될 때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균형이 무너지고 위험에 처해지는 순간은 경쟁사에게 매수당해 윌리의 제안을 거부하는 역사 관리인이 등장할 때와 같이 '더이상 서로에게 필요가 없어질 때'이다. 


이렇게 영화는 가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윌리와 레오라는 두 주인공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레오는 여타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그는 항상 우울하며 아버지(아버지에게 부재한 그에게 있어 이모부인 프랭크라고도 볼 수 있겠다)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려하며, 어머니와 가족 내의 여성들에게 공감하기는 하지만 세계는 냉혹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유지되기에 이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레오는 귀향 이후 성실하게 살고자 했었다:하지만 범죄자라는 낙인이 그에게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막았으며, 그리고 이모부의 호의를 쉽게 질 수 없었기에(누구라도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윌리와 함께 암흑가에 발을 담게 된다. 재밌는 점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레오는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파악하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을 주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월리의 경우에는 레오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생은 역사 관리인을 죽이기 전까지는 탄탄대로였었으며 레오와 다르게 쾌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일처리에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잠재되어 있는 불안 요소가 있다:그것은 바로 그의 외부자적 신원이다. 경쟁사 직원이 윌리를 도발하면서 '너는 절대로 그들처럼 될 수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그는 라틴 계열이며 명백하게도 프랭크와 레오의 가족의 일원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에리카와의 결혼을 통해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안정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관리인과의 관계가 틀어지듯이 그의 업적은 단 한번의 실수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윌리와 레오라는 케릭터는 어찌보면 제임스 그래이의 개인적인 경험이 두명의 케릭터로 쪼개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늘 우울한 모습에 가족과의 사랑, 안정, 그리고 험악한 세상을 알아나가는 탕자의 경험을 레오가, 그리고 유대계열로서 사회에서도 겉돌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에 불안정했던 자신의 삶의 경험을(투 러버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화 시킨 것이었다는 진술을 믿는다면, 제임스 그래이의 경험과도 이는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윌리가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부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제임스 그래이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이면서 탈정치적이다. 이주민(유대인 또는 윌리 같은 라틴 계열)이라는 배경은 영화 내에서 서사를 구축하지 않지만 영화는 은연중에 그러한 배경을 깔아둠으로서 '이야기를 형성하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의 배경에 존재하면서 하나의 '중력'을 형성한다: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케릭터들은 이러한 중력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한다. 투 러버스나 리틀 오데사 같은 영화에서는 한명의 인물이 겪는 이 양가적인 감성은 배경에 젖어들어가며 탈출이 힘들어지는 축축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구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더 야드는 두 영화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한 명의 케릭터가 감당하는 이야기의 무게는 두명의 케릭터가 나눠서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홀로 남겨진 레오가 지하철에 다시 앉아서 카메라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다른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기묘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레오는 아버지의 방식(프랭크의 방식)을 거부하였고, 모든 사건들은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에리카는 죽었고, 윌리는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났다. 오히려 둘이 함께함으로서 갖고 있었던 안정과 균형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의 레오의 응시는 단순한 응시를 넘어서 어떤 무게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야드는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제임스 그래이 영화의 최고는 투 러버스라고 생각하지만, 더 야드 역시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래이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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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고질라 2014 감상은 여기서 확인해주시길(http://leviathan.tistory.com/1865)


2009년, 태양계에서 외계생명체의 존재가능성을 발견한 우주 탐사선이 외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화하던 중 멕시코에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후 나타나기 시작한 괴생명체로 인해 나라의 절반이 감염구역으로 지정되어 격리되고. 그로부터 6년 후. 삼류 사진가 ‘앤드류’(스쿳 맥네이리)는 멕시코 인근으로 여행을 떠난 출판사 사장의 딸 ‘샘’(휘트니 에이블)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임무를 맡는다. 샘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간단한 임무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여권을 도둑 맞으며 크루즈에 오르지 못하고, 어떻게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감염구역의 중심을 지나가야 하는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무방비 상태로 감염구역을 지나가던 그들은 ‘괴생명체’와 맞닥뜨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영화 몬스터즈는 솔직하게 아주 잘 만들었다고 평하기는 힘든 영화이다:드라마는 어딘가 붕뜬것 같이 추상적이며, 극에 있어 긴장감은 없고(물론 의도한 것이라지만), 장르 영화로 보기에도 어딘가 비정형적인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몬스터즈는 편하게 앉아서 시간 때우기용으로 보기에는 부적합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동시에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영화 고질라 2014의 감독으로 더 잘 알려진 가렛 에드워즈의 데뷔작인 몬스터즈는 고질라 2014에서 드러난 괴수영화에 대한 그의 독특한 미학과 접근법이 그저 맨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소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이 작품은 독특한 미학 덕분에 괴수영화라는 장르영화 자체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 시퀸스를 보자:영화는 야간 투시 카메라로 미군들은 발키리의 비행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다 갑작스럽게 거대한 괴수와 조우하고 교전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괴물과의 교전에서 밀리는 미군들이 공습 지원을 요청한 후에 철수하고 와중에 부상을 입은 민간인과 울부짖는 괴수, 그리고 미사일이 폭발하면서 '괴물들Monsters'이라는 제목이 등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인간과 괴물들 사이의 폭력적인 갈등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9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이런 격렬한 장면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덤덤하고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무언가에 가깝다.


그렇다면 영화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의 이질성은 괴물에 대한 '상식'에 가깝다. 우리가 전쟁영화나 괴물영화에서 자주 보듯이, 전쟁이나 괴물이라는 스펙타클에 대한 전형성을 구현한 지점이 바로 첫 시퀸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전형적인 스펙타클이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 이후, 카메라는 주인공인 사진가 앤드류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그는 사진가다:사장의 딸인 샘에게 이야기 하듯이 그는 사진을 찍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가 찍는 것은 괴수가 부수고 난 뒤의 '여파Aftermath'들이다. 무너진 건물과 잔해, 폐허, 그리고 아이들이나 사람들의 모습들 등등. 


영화는 앤드류의 사진처럼 영화 전반에 괴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괴수를 감추고 일상을 보여주고자 노력을 한다. 텍시기사의 표현대로 '괴물이 오더라도 달리 갈곳이 있습니까? 여기서 살아야죠'라고 하듯이, 사람들은 괴물의 위협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어찌보면 그들의 삶은 괴물 이전이나 이후나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이다: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해맑게 웃으면서 산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괴물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질 수 없다:격리구역을 건너기 전의 마을에서 보듯이, 거대한 철벽과 죽은 사람들의 기록들, 폐허가 된 과거의 흔적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동시에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즈에서 괴수는 정말로 기묘한 존재이다:직접적으로 그들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괴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공기 중에, 삶 중에,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몬스터즈의 괴수는 전적으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괴물들은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인류를 구원/파멸하기 위해서 원시의 어둠속에서 문명의 빛으로 진격하는 여타 작품들의 괴물과는 전혀 다르다. 엄밀하게 본다면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아젠다'가 없다:그들은 놀라운 크기와 경이로운 번식속도를 가진 채로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서 인간의 삶은 완벽하게 바뀌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통제불가능하고 이해불가능한 외계에서 온 타자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그들을 막기 위해서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방벽을, 그리고 격리구역의 건설을,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방독면'을 들고다니면서 외부의 오염에 대비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진정으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일까? 영화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그렇기에 영화 속의 괴수는 아젠다가 없다:타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죽여야 한다의 부재) 대신에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무조건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우리가 이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앤드류는 오랫동안 괴물들의 시체와 사람들의 일상을 찍어왔다. 하지만 그와 샘이 직접적으로 괴물을 보게 된 것은 그들의 위험천만한 귀국의 여로를 통해서 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괴물들이 탄생하는 과정을(나무에 심어놓은 포자가 강물로 흘러들어가, 다시 그들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들이 갖고 있는 야생의 흉포함을(조우한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괴물, 파괴된 마을), 그리고 괴롭히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밀수꾼들의 증언)을 배우게 된다. 그 이전까지 이들에게 있어서 괴물은 TV와 사진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리고 공기 중에만 떠돌아다니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밀입국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은 괴물이 어떤 존재임을 바라보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 중에 앤드류와 샘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이들은 처음 서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서먹한 타인의 관계에서 마지막엔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집에 돌아가기 싫어요, 사실 샘의 이러한 감정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을 뿐)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학적 변화의 촉매에는 '괴물'이 자리잡고 있다:그들의 여정 자체가 TV 스크린과 사진이라는 프레임 내부에 갇혀있던 괴물들을 실제로 만나고 목도하는 과정이었으며, 괴물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경험을 통해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바깥의 타자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한 그들이 어떻게 마지막에서 용기를 내어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괴물이 더이상 타자를 넘어서 이제 '경이와 신비'를 내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의 빛나는 촉수가 서로를 더듬고는 어둠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신비한 장면을 통해서, 타자가 갖는 경이와 신비에 매료되고 타자(괴물들을, 그리고 샘과 앤드류는 각자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은 공포와 함께 신비와 경이가 공존하는 존재로 화한다.


타자로서의 위험과 신비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고질라 2014의 미학과도 맞닿아있다:괴물들에게는 아젠다가 없으며, 그저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고질라와 무토가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선 채로 그저 그들의 본성대로 싸울 뿐이라면, 6년전에 불현듯 지구에 나타난 이 외계생명체들 역시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생명체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타자적 존재로서의 괴물들을 직접적인 스펙타클이 아닌 분위기와 공기중의 존재감으로서 인간에게 신비와 경이, 공포를 자아내게 만든다. 


물론 영화는 몇몇 부분에서 뚜렷한 한계를 갖는다. 드라마 측면에서 영화는 어딘가 애매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 마지막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대사의 선택과 연기가 뒷받침 되었다면 결말 부분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지껏 다른 장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갖고 있다. 그러한 독특함이 고질라 2014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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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욥기 41:31 에서 33






〈리바이어던〉은 황홀하고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당신을 상업화된 어업의 위험한 세계로 깊숙이 데려갈 것이다. 제작자들은 뉴 잉글랜드의 해안 – 허먼 멜빌의 『백경』 에 영감을 주었던 장소 – 의 예측불허의 파도 속을 항해하는 거대한 어선에 동승하여, 어부들의 거칠고 힘든 세계를 무시무시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포착했다.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레비아탄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 괴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서의 악마들이나 괴수가 그러하듯이, 레비아탄 역시 성서 이전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레비아탄은 기원전 1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우가라트 왕국의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서, 바알신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현대적인 종교의 표본으로 볼 수 있다면,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 같은 존재들은 근대적 종교(물론 근대적이라 해도 2000년 이상 되었지만) 이전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것은 인간이 인격신을 섬기기 전에,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과 동물의 형태가 서로 결합한 성스러운 존재, 자연에 매료된 인간이 만들어낸 원시적 신앙의 잔재인 '괴물'인 것이다.


(http://leviathan.tistory.com/1845 에서 괴물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간략하게 기록해두었다)


다큐멘터리 레비아탄 역시 이러한 미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떠한 설명없이 담담하게 바다 위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손질하는 과정을 약 90분 동안 그려낸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그 90분 동안 어떠한 메세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출렁거리는 바다와 황홀한 어둠, 물소리와 피에 물든 물거품, 그리고 갈매기 때들까지. 레비아탄은 영상과 미학적으로 놀라운 쾌거이며, 관객들에게 원시의 황홀함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레비아탄이 어떤 쾌거를 거두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르적'으로 그나마 유사한 작품과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유명한 프로그램인 '생명을 건 포획Deadliest Catch'은 대게잡이 어선과 그 선원들의 삶을 그려낸 프로그램으로서 디스커버리 채널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어떻게 본다면, 바다위에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레비아탄과 생명을 건 포획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이 도달하고 있는 결론은 완벽하게 다르다:생명을 건 포획은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게나 바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서 웃고 울고 하는 선원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바다라는 공간보다는 배 위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생명을 건 포획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레비아탄에게 있어서 인간의 '드라마'는 완벽하게 거세된다. 어부들은 침묵 또는 꼭 필요한 정도의 말만 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영화 내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또한 영화는 배 위뿐만 아니라 배 주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도 많은 초점을 맞추며, 갑판 위에서부터 갑판 바닥, 크레인까지 다양한 각도로 바다와 조업활동을 다뤄낸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생명을 건 포획과는 다르게 레비아탄은 조업활동과 바다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재밌는 점은 레비아탄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거북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부정할 수 없다:생선 손질을 할 때 잘려나가는 생선의 머리와 무자비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세토막 나는 홍어(라고 생각된다)의 모습들, 그리고 손질된 생선을 바다로 흘려보낼 때의 핏물과 다양한 부유물들, 죽어가는 생선의 모습들 등등 레비아탄은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낄만한 장면들을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쏘아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가학성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가학성이란 누군가를 가해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아탄에 있어서 그런 의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 다음에는 물소리와 고요함, 그리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다. 레비아탄이 보여주는 바다는 생명력이 과잉으로 넘치고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그로테스크함을 '에너지가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모습'이라고 누군가는 정의내리기도 하였다. 레비아탄의 바다는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과 함께 배 위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 그것이 바다라는 공간에서 아우러질 때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포착한다:이러한 것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이 바로 생선을 손질한 부속물과 핏물이 바다로 버려질 때, 바다가 선홍색으로 물드는 동시에 수면 바깥으로 언뜻 무수히 많은 갈메기 때들이 잡히는 장면이다. 죽음과 생명이 바다라는 장소에서 무심하게 어우러지며, 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원시 인류가 매료되었던 원시적인 괴물과 자연의 이미지에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레비아탄에 있어서 바다와 물은 모든 것이 한 곳에서 만나는 공간이자 매게체이며, 인간이 원시적 황홀함을 느끼는 미학적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아름답게 구현함으로서 관객에게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감정을 제공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레비아탄이 드러내고 있는 재밌는 부분은 바로 다큐멘터리가 촬영되는 방식일 것이다. 어떤 영화든 영화를 찍는 '촬영자'의 존재는 관찰당하는 피사체의 움직임을 변화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생명을 건 포획으로 돌아가 보자. 물론 이 프로그램이 레비아탄과 지향하는 바가 정반대라는 것은 앞서 밝혔지만, 여기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이다:이 프로그램에서 선원들은 끊임없이 조업 활동에 대한 자신의 코멘트와 함께, 인간적인 감정, 희노애락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이 끈끈한 유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프로그램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꾸며진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에서 소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선정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다르다:이 다큐멘터리에서 피사체들은 카메라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있는(아마도 머리에 헤드셋 형태로 붙인 카메라라 추정된다) 사람마저도 조업활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카메라가 선원들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하는 순간에도 선원들은 당혹스러워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레비아탄에서 카메라는 바다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그것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현장감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정반대로 카메라 자체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촬영자가 피사체의 삶에 놀라울 정도로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레비아탄이 촬영되는 카메라의 앵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각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에 있어서 인간은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양한 곳에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런 주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넘어서, 몇몇 장면들은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에 촬영되었다. 이는 제작자들이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에 대해서 깊은 탐구를 하고 고민을 하였기에,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하고 기록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레비아탄의 이 원시적이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재발견되었다'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비아탄은 놀라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바다와 어둠,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는 황홀함 등의 이미지를 재발견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내었다. 어떤 의미에서 레비아탄은 훌륭한 시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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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등장하는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ㅠ



올해 가기전에 볼 생각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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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본능에 충실한 거친 삶을 살아온 삼류 복서 알리. 그는 5살 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누나 집을 찾게 되고 클럽 경호원 일도 시작하게 된다. 출근 첫 날, 알리는 싸움에 휘말린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를 돕게 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려 연락처를 남긴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문득 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감상)


자크 오디아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뚜렷한 주제나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나 목표는 없으며, 영화는 불현듯 끝을 맺는다. 예언자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예언자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야기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혹은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왜 톰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는가? 사실, 앞선 두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영화 두 편만으로 그의 영화세계 전반을 다루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두 작품이 가져다주는 강렬하면서 비슷한 인상들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본인이 생각하는 자크 오디아르가 그려내고자 한 이야기는(혹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뚜렷한 대안도, 해결책도 없기에 영화는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러스트 앤 본은 오디아르 영화 세계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러스트 앤 본은 어떤 의미에선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두 단편소설을 이어붙였다는 러스트 앤 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두 개의 갈림길로 쪼개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리를 잃고 재기하는 돌고래 조련사의 이야기와 떠돌이 같은 삶을 살면서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하류 인생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접점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야기가 두개로 갈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이야기는 명백하게 맞닿아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은 바로 알리와 스테파니의 육체이다. 이 둘이 왜 맞닿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크 오디아르 영화들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 영화의 키워드를 뽑자면, 본인은 '소음과 분노'라고 요약하고 싶다.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머릿속이 핏빛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지만 분명한 탈출구나 원인,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그 핏빛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소음이 되고 불안감이 되며 머릿속을 넘어서 서성임으로 나타나다가, 종국에 가서는 무지막지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오디아르는 그런 불안을 육체의 형태로 구체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예언자에서 주인공이 마피아 보스에게 숟가락으로 눈가락이 파일뻔한 장면을 보자. 그 뒤에 주인공은 혼자서 고통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욕지거리를 한다. 맞은 뒤의 빨갛게 부은 상처 부위가 고통과 짜증을 동반하지만 그것 자체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자크 오디아르에게 있어서 육체와 폭력의 관념을 그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와 폭력의 문법은 표현을 넘어서 극을 지배한다: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을 보자. 톰이 폭력적이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벗어나고자 한 피아노로부터 좌절되었을 때, 그는 비트가 강하고 시끄러운 랩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다. 낮은 음이 베이스가 되어 세계와 단절된 막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막은 내부의 불안과 분노를 가중시킨다. 아버지 세대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자식 세대는 고독속에 갇혀서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키워나간다. 그것이 결국은 엔딩에서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 마피아를 향한 폭력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트 앤 본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법을 따르고 있다:처음 도입부에서 알리와 그 아들이 무전여행하는 장면은 어딘가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다.(남은 음식을 주워먹는다던가, 히치하이킹을 한다던가) 특히 도둑질을 하는 장면에서처럼, 도둑질 직전의 불안감과 도둑질 후에 터져나오는 급박한 상황 등은 불안함과 폭발이라는 힘을 모두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관점에서는 알리의 경제 계층적 상황에도 빗대어 볼 수 있다: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기댈 곳도 없다. 그렇기에 항상 주변에는 불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알리는 '교양있는 지성을 가진 중산층'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안을 '우아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이 불안을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주로 듣는 박자가 강한 음악처럼 '분출되는 폭력과 섹스'이다.


영화 중반부터 후반까지 알리는 스테파니 이외에도 다양한 여자들과 섹스를 하거나, 불법 스트리트 파이트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쫒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과 누나와 매형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이것이 바로 그가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그는 생명력이 강하지만 정제되지 않고 불규칙한 리듬을 가진 자신만의 박자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단순무식한 방법론은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리듬을 선사하게 된다.


알리와 다르게 스테파니는 정적인 템포를 유지한다:그녀는 돌고래 조련사로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며, 동시에 다리를 잃은 이후에도 경제적인 불안은 없어보인다. 알리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적 요인의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면, 스테파니의 문제는 육체의 상실로 인한 침묵이다. 다리를 잃은 이후, 그녀는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고 메스를 숨겼다가 뺏기는 시퀸스에서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폭발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신의 상처받은 몸뚱이와 고독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알리와 처음 만났을 때 하였던 것이 바로 클럽에서 남자를 꼬시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후에 알리에게 스테파니가 고백을 하기를 남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스테파니의 행동과 케릭터는 자칫 넘기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자신의 육체의 활력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타자가 느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스테파니의 '자신감의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녀가 자신의 외부에서 박자와 생명력을 찾아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로인해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방식이 섹스와 수영이라는 점(덧붙이자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장면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이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알리와의 섹스는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의 섹스는 쾌락의 문제라기 보다(물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박자를 몸에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섹스를 할 때 스테파니가 알리에게 천천히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침묵하던 그녀의 삶이 다른 박자를 몸에 받아들이기 거북하고 낮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박자와 리듬을 얻고(그전까지 휠체어를 타다가 의족을 통해 스스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은 트라우마의 원인인 범고래와도 조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만든다.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범고래가 사고를 일으키기 전, 물 바깥의 음악소리가 물속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되어 불안감과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범고래 역시도 물 바깥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새로운 박자를 얻은 스테파니가 범고래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을 넘어서 범고래를 이해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알리는 스테파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라는 안정을 얻게 된다:불법 스트리트 파이트 매니저가 스테파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숨었을 때, 알리는 스테파니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알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무례한 행위를(스테파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꼬셔서 나가는 것) 쉽게 저지른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그렇게 제멋대로의 박자에 맞춰서 살던 그가 스테파니의 분노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와의 이 묘한 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한다. 어찌보면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활력을 찾았듯이, 알리는 스테파니를 통해서 신뢰와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알리는 도망가듯이 누나 집을 나오고, 스테파니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자신의 스트리트 파이트의 재능을 종합격투기에서 살리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홀로 연습을 하던 알리는 시합을 하기 직전 아들과 만나다가 아들이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게 된다. 자신의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쳐서 아들을 기적적으로 구한 알리는 스테파니의 통화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불안에 대해 토로한다:이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전까지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지 않았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들의 비정형적인 관계가 사랑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리와 스테파니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러스트 앤 본에서 사랑은 미사여구나 상용구에 잡혀있지 않았으며 육체와 삶, 그리고 이것이 구체화되는 '박자'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기묘하지만 무게가 있으며, 독특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러스트 앤 본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불안은 안정을 얻게 되고, 내지른 주먹의 고통은 더이상 불안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신체의 일부로서 '거기 있음'을 인정받고 고요한 독백의 대상이 된다. 자크 오디아르는 이전의 영화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과 분노를 훌륭하게 그려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러스트 앤 본을 통해 그려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름다우며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독백을 인용하며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그보다 더 많은 동물도 있는데 

고릴라는 엄지손가락 뼈 5개를 포함 총 32개다. 


어쨌든 손 하나에 뼈가 27개가 붙어있다니.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다면, 

몸에서 나온 칼슘으로 저절로 뼈가 붙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주먹을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러스트 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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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2014년도 2학기 모대학 종교학 수업 감상문으로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에서부터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파이의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한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한 가족들은 상상치 못한 폭풍우을 맞이하고 화물선은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가까스로 구명선에 탄 파이만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 그리고 바나나 뭉치를 타고 구명보트로 뛰어든 오랑우탄이 함께 탑승해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진짜 주인공은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벵갈 호랑이리처드 파커였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파이는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점차리처드 파커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태평양 한가운데서 집채 만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 하늘을 나는 물고기, 그리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의 섬 등 그 누구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게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의 말미에 밝혀지듯이 파이의 이야기에는 두가지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첫번째는 파이가 들려준 호랑이와 조난 당한 이야기, 두번째는 사람들과 조난당하고 난 뒤 끔찍한 경험을 한 이야기. 보통 인터넷 등지에서는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가, 혹은 파이가 끔찍한 행위를 했는가 여부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오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접근방법에는 중요한 결점이 있는데, 바로 두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극초반 시퀸스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동물들(호랑이=파이, 하이애나=주방장, 얼룩말=다친 선원, 오랑우탄=어머니)이 어떻게 해서 모두 죽고 파이(=벵갈 호랑이) 홀로만 남았는지는 설명해주고 있지만, 첫번째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와 벵갈 호랑이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공존하는 노력은 두번째 이야기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파이는 두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일까? 어느쪽이 과연 진실인 것일까? 일단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진실은 어느 한쪽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파이가 이야기한 두가지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선 모두 사건에 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파이가 벵갈 호랑이와 함께했던 표류기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의 이성(아버지가 이야기했었던)과 그의 야성이 갈등을 벌이다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화해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한다(파이는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고, 호랑이는 파이에게 식인섬의 위협을 가르켜 준다)

 

하지만 호랑이와 파이의 표류는 단순하게 표류 자체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파이의 일생과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종교가 놓여있다:파이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고 이슬람과 기독교, 힌두교 등을 다양하게 접하고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현재 자신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는 것은 리차드 파커와 교감을 하려 했었던 경험이 아버지에 의해서 좌절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종교에 대한 관심을 잃는 것이 호랑이의 야수성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이단적인 철학자인 조르주 바타유의 이론을 끌어들여보고자 한다:바타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이라는 의식적인 행위로 인해서 인간은 여지껏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도 경험하지 못하는 불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노동으로 대변되는 이성은 모든 것에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육신이라는 한계에 갇혀있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성욕, 식욕, 파괴욕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만들었다:금기는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는 법칙이 아니라 어길 수 밖에 없는법칙,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법칙을 어기고 돌아오는 사람들(전쟁에서 상대 군인을 살인하는 것)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서 존재한다(전쟁에서의 살인을 속죄하고 그 살인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는 것이 바타유의 해석이었다.

 

그렇기에 동물을 숭배하는 초기 종교들의 모습을 바타유는 인간의 금기에 대한 특이한 사고에 기반하였다고 보았다:원시인들 또는 고대인들은 아무렇게나 먹고 사냥하고 죽이고 성교하는 동물들이 인간이 구속되어 있는 금기를 모를 리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동물들이 그 금기를 알면서도 자유롭게 어기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타유는 이러한 동물의 신성함이 초기 종교 의식에 있어서 동물을 사용한 희생제의가 흔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동물이라는 신성한 존재와 생명을 열어재낌으로써 닫힌 존재를 순환되는 연속체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그렇기에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연속된 세계의 안정감을 잠시나마 느끼고자 했다는 것이 희생제의의 의의라는 것이다.

 

물론, 바타유의 견해는 극론이며 객관적인 자료나 관찰에 근거하였다기 보다는 추상적인 이론과 이단적인 사고 실험에 근거하고 있는 이론이다.(바타유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발상을 하는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닐까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유를 인용한 것은 바타유가 종교와 인간 본성에 대해서 보여준 광인의 번뜩임과도 같은 통찰력이 날카롭게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리차드 파커와 파이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쓸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하였던 아버지는 리차드 파커의 파괴적인 야수성을 아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낸다. 재밌는 점은 바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서 표류자들이 잡아먹은 선원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실제로 1884년 표류중에 벌어진 굶주림으로 벌어진 인육취식 사건의 피해자 이름이라는 것이다. , 리차드 파커는 단순하게 호랑이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야수적 본질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파이가 리차드 파커의 잔학한 모습을 보고 소통의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파이가 종교 자체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은 이해하고 화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인 야수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그 역할에 있어서도 종교 역시도 무의미한 무언가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와 호랑이는 공존하며 소통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러한 화해의 과정에 있어서 종교의 힘은 강하게 드러난다:비슈뉴 신과 예수와 알라를 한 데 뒤섞어서 파악하는 인도인다운 종교관념은 상당히 인상깊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에게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 파이는 하나의 사건을 두 개의 이야기로 쪼개서 설명하는가 라는 지점이었다. 만약 그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었더라면, 굳이 호랑이와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나와서 미어켓과 식인섬이 거쳐가는 판타지 미스터리 활극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진짜 처음 일어났었던 일에 대해 덧붙여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과정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인터넷 등지에서도 어느 한쪽이 오롯하게 진실인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심한 것을 생각하면(물론 대부분은 전자가 진실이라고 단정한다) 파이의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파이가 이야기를 두 개로 쪼개서 이야기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그것은 바로 경전과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소설과 서사가 모든 것을 일방향적으로 정의한다고 규정하고, 그에 대칭되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통에 주목한 적이 있다. 소설에는 화자가 있고, 작가가 있으며, 의도되어있는 주제가,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결론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소설은 근대적인 산물이었다:고독하게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홀로 읽는 개념의 텍스트가 바로 소설이었으며, 고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국민들로 구성된 근대 국가에 프로파간다를 설파하기 위한 텍스트 구조 및 문법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이야기는 오로지 뼈대만으로서 전달해야 하는 정보주제없이 교훈을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의 서사가, 의도되어있는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은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캄비세스는 그 포로를 능욕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병사들의 승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고서 그는 그 포로가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항아리를 갖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 속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뒤 그가 자신의 시종, 한 늙고 초라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표현을 해 보였다.”(역사 제 3 14)

 

이 이야기에서 헤로도토스는 사메니투스가 왜 슬퍼하였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 판단과 해석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벤야민이 주목한 이야기의 미덕이란 바로 정보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공백또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만이 이러한 이야기의 미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뛰어난 소설과 대중매체 작품들은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감상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들을 고전이라 지칭한다.

 

종교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우리가 종교의 경전이라는 텍스트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대명령이거나 영원불멸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곱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종교였기 때문에? 아니다.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소위 세계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들이 경전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전파하고자 한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묵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에 그 가르침과 경전에 무게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 경전은 완성된 진리 및 정보가 아니라 인간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텍스트, 즉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파이가 두가지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그것은 어느 한쪽 버전의 이야기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닌, 두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보고서 말미에 ‘…그 어느 누구도 뱅갈 호랑이와 함께 오랫동안 표류해서 살아남지 못했었다라는 결론 역시도 중의적이 된다:파이는 그러한 끔찍한 재앙을 겪었음에도 야수성과 이성 어느 한쪽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라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경험했던 그가 영화 엔딩에 가족과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살아남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문학이나 예술, 더 나아가서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 감상을 끝마치기 전에 한 가지 궁금점이 남아있다:그렇다면 정글 속으로 사라진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벤야민이 적절한 어구를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을 끝으로 이 감상을 끝마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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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상 역시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사막의 라이온은 20세기 초기에 벌어졌던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의 20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이며 등장인물도 역사적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당시 끊임없이 벌어졌던 강대국의 제국주의 전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1910년부터 리비아를 침공하였으나 29년까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새 지후관 그라치아니를 파견한다.


한편 그의 상관 베드윈족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로서 전직은 교사이며 적을 물리치는 것만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코란의 정신을 이어받아총을 들고 나선 탁원한 전술가이다. 이탈리아군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지속되지만 무크타르는 사막전과 산악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킨다. 평화라는 미명하에 작전상의 협상이 벌어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 수백 마일에 4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수천 톤의 철조망 작업을 행하영 베드윈족 5천명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고 무크타르를 생포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함으로서 1931 9 16일 전쟁을 종결한다.


 사막의 라이온은 제국주의 열강 시기에 있었던 식민지 지역민들의 저항들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년간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운 오마르 무크타르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전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반 제국주의 비정규군, 파르티잔의 사례이자 표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크타르와 그의 반제국주의 파르티잔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중요한 구심점으로 내세운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는 이슬람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무력과 확장에 특화되어 있는 종교이기에 무장 파르티잔들의 전술적 교리로써 기능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효율적이며 제국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위한 지역민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종교는 지역민들의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이슬람이라는 문화가 이러한 파르티잔의 문화를 부추기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라는 구심점이 지역민들을 뭉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레바논 같은 이슬람-기독교 갈등 지역에서는 기독교 민병대가, 미얀마에서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한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가 인간과 지역, 그리고 국가와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사람을 조직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 부흥의 역사가 정복전쟁의 역사,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화전양면 정책의 결과물로 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라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만약 무력적이고 호전적인 확장만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될 리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발원했던 역사적인 특성상 코란과 교리에 많은 군사적이고 호전적인 부분들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의 맥락을 감안하여서 재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슬람 파르티잔들에게 있어서 아주 극명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그에 대립하였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탈레반이다. 마수드는 아프간 전쟁 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그는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프간 전후 이후를 생각하며 여성의 교육과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수피즘 책을 들고다니며 읽는 등 다른 사상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같은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들은 익히 알려진대로 수많은 인권 탄압과 유적 파괴, 학살, 테러 등의 행위를 자행하거나 방조하였다.


어떻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두 집단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주 세밀하지만 중요한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은(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전통과 경전은 만들어진 그 시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전통과 경전이 만들어진 시대가 갖는 권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닫혀있는 폐쇄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문제는 종교의 본질은 장소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매세지 그 자체이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경전과 전통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경전이나 그 어떤 텍스트, 이야기, 전통 등은 현재 시대의 맥락에 따라서 재해석되고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경전에서 메시지 그 자체를 재해석해서 발굴해내지 않는 한, 경전에 적혀있는 가르침은 책 사이에 끼워져서 향기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해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곡해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슬람-레반트 국가, 통칭 IS가 코란의 말씀대로 어린이 십자가형, 성노예, 대량 학살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 분명 코란에 조항 자체로도 어긋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도 이를 행하는 것은 이러한 곡해의 문제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균형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오마르가 이야기했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했듯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실, 율법과 가르침 등의 사이에서 능동적인 균형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면 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더 이상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기제가 아닌 삶의 구심점이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흐마드 샤 마수드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어떻게 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것이 지하드란 말인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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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상문은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영화는 먼저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에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가 폴란드계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 담배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을 인수하고,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대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의 도움을 받아 공장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게 된다. 쉰들러는 성공가도를 달리며 큰 돈을 벌게 되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행위를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바뀌게 된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대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일명쉰들러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대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쉰들러 리스트는 훌륭한 휴먼드라마이다. 자극없이 절제된 이야기와 카메라 워크, 그리고 흑백의 모노톤을 통해서 빛바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갖고 있었던 껄끄러움이 쉰들러 리스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미국인 라이언 일병이 살았던 다사다난한 미국을 어떻게 보았을 것이며, 특히 베트남전이라는 불의를 그가 어떻게 보았을까? 이를 쉰들러 리스트에 역으로 적용하여 본다면, 학살의 아픔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레바논 전의 샤브라-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이나 중동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을까?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치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를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주변국가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연이은 충돌, 혹은 레바논전 당시의 샤브라 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 등등 되찾은 시온의 역사는 그들이 발 붙일 땅을 찾는 과정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주변국에게 투영하여 돌려주려 하는 것 마냥 잔혹하며 무자비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혹자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자신의 땅을 떠나 2000년간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비추어 볼 것이다.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곳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수많은 민족들과 부족들이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사라져갔지만, 유대인은 그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기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가라타니 고진은 유대교는 최초로 국가와 사회가 멸망해도 살아남는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고 평가한다) 혹은 유대인이 유럽이라는 세계에서 타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은 그런 강력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 고리대업을 하면서 유대자본을 형성하고 강력한 경영정신으로 무장한 상인 집단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간에, 유대인이란 유럽을 넘어서 오랫동안 전세계의 타자였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으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타자로서의 유대인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우리 아닌 것에 대한 적개심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례로 수업시간 중 일부 감상한 지붕위의 바이올린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전통과 전통바깥의 존재들, 예를 들어 황제라든가 외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외부자에 대한 폐쇄적인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떤 사회이든 경직되면 경직될수록 외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믿음처럼, 자신들은 하나님에게서 선택받았으며 언젠가 그들의 땅을 수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외부의 사회에 대해서 나 이외에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사고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들이 2000년 동안 돌아가기 원했던 가나안의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물으면 본인은 그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유대민족은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주변국과 수많은 민족의 피와 눈물을 흩뿌리며 그 땅을 지켜내고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고향에서 그들은 완벽한 타자이다. 그들이 떠난 뒤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고향에서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들이 원주민이겠지만)을 몰아내고자 하고 있기에 그들 자신이 바로 그들의 고향에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비극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유대교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 왜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는가?’라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유대인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을 특별한 이유또는 서사적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그저 그들은 선택받았기에 선택받은 자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믿음으로서 유대인은 유럽 역사와 사회에 있어서 타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유대인만이 유럽 사회에 있어서 단 하나뿐인 타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는 집시가 있었다, 현명한 여자(Witch)가 있었다, 장애인, 고아, 과부, 정신병자 등등의 다양한 타자가 있었다. 타자들은 사회에서 무력하게 우리 집단 또는 다수 집단으로 포섭되고 배제되어 왔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그들 자신으로 남아있었으며 이는 사회 윤리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사회나 집단은 항상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자신과 똑같은 색으로 물들이고자 한다. 다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며 배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그 다름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고, 감내하며 인고하여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의 역사는 확장하여 본다면 전세계의 소수자들과 타자들의 역사. 발터 벤야민이 역사에 있어서 비상상황이란 없었다. 역사는 언제나 비상상황이었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주장하였던 것은 2차세계대전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잔혹성이 아니라 전세계 역사에 내포되어있었던잔혹성 자체였었다. ,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닌 전세계가 타자를 향해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으로 비추어볼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유대인이야말로 타자의 운명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명을 띄고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전세계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재판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의 법정이 아이히만을 유대민족만을 위한 광대와 괴물로 만들고 있는 동안, 유대인 학살이 갖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타자를 향해서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배제를 도외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타자와 함께 살기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쉰들러는 성인도, 지식인도, 위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전쟁으로 한탕 벌어보려고 했었던 부패한 상인이었으며 여자와 돈을 밝히는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가 벌었던 전재산을 쏟아부어가면서 1100여명의 유대인을 구하고, 패전 후 도망치기 전에 자신들이 구했던 사람들 앞에서 이 금뱃지로 두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이 차로 열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울부짖는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그는 확연하게 변하였다:그것은 바로 그가 유대인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였다는 지극히 단순하며 인간적인 능력에 기초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스카 쉰들러가 보여주는 것은 선의 평범성의 개념이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악의 개념과 다르게, 오스카 쉰들러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이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 혹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천년의 고난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 유대인과 유대교가 걸었던 수난의 역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과 세계 곳곳에서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비극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스라엘에 묻힌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에 적힌 어구를 인용하며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오스카 쉰들러는 흔해빠진 기회주의자요 부패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거대한 악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악에 대항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귀족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닌 부패한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의 영혼에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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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 마사유키라는 이름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할 것이다:그는 2008년 망념의 잠드를 감독했으며, 2012년 후세-말하지 못한 내사랑을 감독하였고, 이 둘 이외에는 감독을 맡은 작품이 없다. 게다가 사실 이 두 작품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생소한 작품들인데, 흥행 측면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재미 자체로만 본다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와 후세라는 두 작품 만으로도 미야지 마사유키는 다른 애니메이션 감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망념의 잠드와 후세의 서사가 갖는 특징은 피해자-가해자의 이분법적이며 대칭적인 이야기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중지와 화해로 마무리 지음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스펙타클이나 볼거리를 주는 재미가 아닌 독특한 이야기의 중지로 귀결이 된다. 망념의 잠드에서는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가 대결하는 장면에서 한쪽(희망)이 다른 한쪽(절망)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산 자의 희망을 대표하는 아키유키가 자신의 이름을 이름없는 죽은 자들의 집합인 히루켄 황제에게 줌으로서 이름을 받지 못한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다. 후세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속의 괴물과 영웅의 대결을 재현하는 시노와 쇼군의 싸움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시노가 쇼군을 마무리 짓지 않음으로써 끝난다.(네녀석 혼을 빨아먹었다간 나까지 기분이 나빠질거 같아) 이 독특한 중지의 미학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와는 차별적이라 할 수 있다:한쪽이 다른 한쪽을 쓰러뜨리고, 그 과정을 볼거리로 구축하여 관객에게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스펙타클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 차별적인 지점이,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봐야하는가?'라는 지루함과 짜증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과 미학이 갖는 독특함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축축하고 무거운 우울함'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울함과 축축함은 하나의 중력을 구성하여 극중의 케릭터와 관객들을 옭아멘다. 이 중력과 축축한 우울함의 미학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했다. 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니 영화 감독은 못될 것이라고.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했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감독이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비밀이 있다:가족에는 애정어린 지원과 무시무시한 감정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것을" 이 애정과 파괴의 상반되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치관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는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하며, 그것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와 리틀 오데사를 예로 들어보자:이 두 영화는 아주 클리셰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죄자는 불현듯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며(리틀 오데사), 실연의 고통을 가진 남자는 두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투 러버스) 하지만, 일반 장르적 클리셰들과 이야기들과 다르게, 영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색체'가 존재한다:이 두 영화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쓰이는 BGM들(서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 단성 성가 같은 BGM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의 성가를 연상케 한다.)과 어떤 이야기 내에서 '유의미한' 화소로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화들이 배경으로 자리잡는다.(제임스 그레이는 러시아 유대계 가정 출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 유대계가 갖는 문화적 특수성은 어떤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폴 윌레만이 '영국 흑인 영화가 영국 흑인 민족주의적이지는 않다'라고 서술하였듯이, 이들의 배경은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즉, 민족이라는 배경이 서사의 주요한 동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 윌레만이 주목한 것은, '다문화'라는 개념자체가 하나의 폭압적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우리가 다문화 가정이라는 사례를 볼 때, 다문화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입지 않는' 전통 복식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분명하게 구획되고 구분되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탈을 쓴 하나의 '울타리'이다:문화란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섞이고 거부하는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갖는다. 과연 순수하게 현재의 문화로부터 구분되는 '전통문화' 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가?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문화는 민족이라는 커뮤니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지 않지만, 그 커뮤니티가 실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다뤄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사례는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재즈 싱어를 예로 들 수 있겠는데, 랍비였던 아버지와 흑인 분장을 하고 재즈가수 질을 했던 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통문화라는 분명하게 구획지어진 '선'과 '자리'를 주고, 결국은 아들이 아버지의 랍비직을 계승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아버지로의 전통문화로의 회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재즈 싱어의 전통문화와 신세대 문화는 이데올로기 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후술할 랑시에르의 미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임스 그레이는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영화에 분명한 배경으로 깔아두려 한 것일까?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주변에 깔아둠으로서 극 내의 케릭터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 배경은 케릭터를 젖어들게 만들며, 동시에 중력으로서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다:왜 투 러버스의 주인공은 가족을 떠나서 비유대인인 미쉘과 도망을 치려 하는 것이며, 왜 리틀 오데사의 주인공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 리틀 오데사를 예전에 떠났었던 것일까? 이는 위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발언을 대입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중력은, 안착한 자들에게 있어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더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파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이 중력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중력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 두 감정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에서 드러나는 방향성과 선호가 아닌, 양가적이고 공존하며 동시에 구획되거나 구분되어질 수 없는 중요한 두 감정이기에, 케릭터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힌다. 이는 영화내에서 분명하게 깔리고 있는 유대문화라는 배경이, 그들을 유대문화의 색으로 물들이며 동시에 그들을 축축하고 무겁게 사로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들을 유대문화라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에 근거해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임스 그레이의 이 두 작품들은 우열이나 분명한 구획을 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주 평범한 장르영화적 클리셰를 이야기라는 측면이 아닌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고, 관객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들어간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주인공은 떠나버린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있는 그의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영화는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은 안정과 변화, 안착과 떠남, 사랑과 이별 등의 상반된 관계의 감정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끼며, 보통은 구획되고 구분되어질 상반된 감정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감정의 충만함, 동시에 이 두 감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선호나 구획지음, 구분 등의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대등하게 다뤄낸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 역시 비슷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임스 그레이의 감수성이 좀더 미묘한 순간들과 어찌할 수 없는 우울과 중력에 젖어들어감을 다뤄내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들은 대중문화 서사의 스펙타클과 도덕적 이야기를 거부함으로서 이를 구현해낸다. 잠드의 경우에는, 서브 플롯의 마지막에서 아키유키의 아버지는 폭탄테러의 가해자와 자신이 머리에 총을 쏴서 쓰러뜨린 군소속 지휘관을 함께 간호하며 살아간다. 후세에서는 모든 일의 원흉인 쇼군의 징벌을 포기한 뒤 에필로그에서 악역인 쇼군은 극중의 강박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모습으로 재등장하며, 동시에 도덕적인 징벌을 요구하는 서브플롯을 은연중에 관객에게 제시할 뿐 그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음(이테츠루의 아들이 목잘려서 저잣거리에 난 것은 관객들이 손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정보이나, 그것은 구체적인 이야기의 화소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으로서 묘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즉, 미야지 마사유키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단죄와 징벌을 거부하며, 그보다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폭력의 중지와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미야지 마사유키의 거시적이며 분명한 목표에 의해서 서사는 재배치된다:극에서 적을 향한 폭력과 징벌을 위한 스펙타클 그리고 도덕적인 카타르시스는 배제되고, 피해자-가해자가 뒤섞이며 전투와 클라이맥스 장면들은 비극적인 순간들을 반복하는 시지푸스의 영웅들의 격돌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닌 비극에 사로잡혀서 폭력을 반복하는 케릭터들의 우울이 밖으로 스며나오는 일종의 디아스포라이다. 동시에 제임스 그레이의 케릭터들이 떠남과 안착함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혀있었듯이, 미야지 마사유키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우울에 사로잡힌다:징벌도, 속죄도, 단죄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명확하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별되지 않는 폭력의 순환 과 그로인한 우울 속에서 인물들은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야지 마사유키 작품의 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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