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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하나의 작전, 서로 다른 목표 당신이 믿었던 정의가 파괴된다. 사상 최악의 마약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 국경 무법지대에 모인 FBI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CIA 소속의 작전 총 책임자 맷(조슈 브롤린), 그리고 작전의 컨설턴트로 투입된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극한 상황 속, 세 명의 요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숨쉬는 모든 순간이 위험한 이곳에서 이들의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네이버 영화)


드니 빌뇌브란 감독이 갖고 있는 강점이란 무엇일까? 고작 두편의 영화(프리즈너스와 그을린 사랑)만을 본 본인이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본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영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은 고발하는 침묵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을린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게있는 이야기와 별개로 선정적인 멜로드라마와 폭력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소재의 자극적인 부분을 이야기 외적인 부분인 카메라 워크와 미장센을 통해서 통제한다.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영화의 시선 속에서 선정적인 이야기들과 폭력은 마치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조용해지고 얌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을린 사랑의 충격적인 진실이 관객에게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이 그 존재를 은연중에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그 충격적인 '진실'을 통해서 이야기가 역전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히 진실을 통해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는 영화 장르적 개념으로서의 '반전'과 다르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그렇게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 미학은 진실이란 이름의 반전을 이용하여 관객의 머리채를 잡아 젖히며 '이걸 봐, 이걸 보라고!'라고 강요하고 폭로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은 그 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프리즈너스의 두 주인공을 보자:아버지는 자식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범인을 고문하지만, 관객과 아버지는 그가 은연중에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차라리 그가 범인이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 또다른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관객의 시야 내에 무거운 바위처럼 자리를 잡으며 관객에게 그 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또 돌려도 그 진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관객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하며, 그 진실이 도달해야 하는 숙명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렇기에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 있어서 반전의 개념은 영화의 극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애게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바로 관객이 영화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시카리오는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강점들이 살아있는 영화다. 영화의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는 마약을 둘러싼 르포 형태의 픽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그 내용 자체도 장르적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약을 없앨 수 없다면 통제하겠다는 맷의 극중 발언과 사상은 이미 다른 영화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많이 묘사되었었고, 그 최대 수혜자가 미국이라고 미국을 은연중에 돌려까는 톰 클랜시 원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긴급명령으로 이미 20년전에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카리오에는 추악한 진실로부터 정의를 대변하는 유일한 대변자인 라이언 박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전적으로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정의와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시카리오는 그 불편한 진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외면되고 있는 마약과 관계된 이야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시카리오의 재밌는 부분은 극중 주인공인 케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전원 '남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CIA, FBI, 마약단속반, 국경수비대 등 같은 군과 치안에 관련된 종사자들이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을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에는 남성적-여성적인 이미지들이 극도로 거세되어 있다:마초적인 이야기나 로멘스 같은 것을 거세함으로써 영화에는 남자들만의 세계와 케이트라는 이방인이라는 추상적이지만 명확한 막을 구축한다. 이러한 성적인 이미지의 거세는 케이트 머서라는 인물을 '전문가'로 묘사하는 동시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고생하는 외부자의 이미지 양측으로 구축하게 된다. 그렇기에 시카리오는 어떤 의미에서 유능한 커리어 우먼의 분투기라 할 수 있는 제로 다크 서티의 분위기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에서 마야가 그러한 외부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고 끝내는 목적을 달성했던 것과 다르게, 시카리오에서의 케이트는 타협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전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거세하고 있는 시카리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단 한 시퀸스에서는 이 섹스의 이미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맷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상황에 지쳐버린 케이트는 동료의 소개로 남자 경찰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나잇을 하려는 남자가 부패에 연루되었음을 직감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본다. 케이트는 그를 제압하려 하지만 역으로 죽을 곤경에 처하게 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알레한드로가 나타남으로서 살아나게 된다. 일견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 시퀸스처럼 보일 수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이전과 이 이후에서 일절 성적인 긴장감이나 남성-여성의 벽을 다루는 내용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퀸스조차도 성적인 긴장감이나 로맨틱, 반전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로멘틱한 분위기나 성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우울함과 피로감의 끝에서 쉴 자리를 찾아 기대는 듯한 카메라의 부감과 관조함은 이 시퀸스의 흐름이 여타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여성-남성의 관계나 섹스에서 빗겨 나가 있음을 드러낸다. 


왜 시카리오는 자극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섹스를 자극을 최대한 억누르는 방향으로 다뤄낸 걸까? 그것은 케이트가 '남성'과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일반적이고도 정상적인 섹스는 '상호합의' 하에서 서로 합을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이 시퀸스 전까지 처해있었던 상황은 불편함과 피로함의 연속이었다. 어떤 임무인지도 모르고 맷에게 끌려다니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법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녀가 임무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표면상의 악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며, 케이트는 등을 돌려서 떠날 수 있었음에도 떠나지 않고 영문 모를 일들을 마주하며 남는다. 그러나 케이트가 마주하는 일들은 그녀를 피로하게 만들며, 동시에 상황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남자'와 섹스를 시도하는 것은 상황과 타협하는 맥락을 만들며, 전희의 도중에 부패의 증거를 보고 남자를 밀어내는 것은 가장 외롭고 피로한 순간조차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케이트의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케이트가 거부하고자 하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케이트와 맷이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카르텔의 폭탄 테러로 FBI 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끔찍한 사건의 대책 회의에서 맷은 조리를 신고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케이트가 '당신은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라는 표정으로 맷을 바라보자 맷은 능글맞게 자신을 소개한다. 맷이란 케릭터는 케이트와 다르게 이런 일들이 '익숙한' 인간이다:그렇기에 케이트의 끊임없는 거부와 항변에도 능글맞게 웃어넘기거나 귀찮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진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듯이, 알레한드로는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케이트와 대립되는 맷과 남자들의 세계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움직이는 세계이며, 케이트가 속한 일상의 법과 정의, 규칙의 경계이자 그 너머이다. 멕시코 후아레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들은 항상 상존한다(잠깐 잠깐 삽입되어 들어오는 맥시코 경찰의 일상을 보자;아들과 함께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침대 옆 의자에는 산탄총이 놓여있다.) 하지만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통제해야한다는 맷의 표현처럼, 이 폭력들은 교묘하게 통제되어 있으며 세계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다. 케이트가 저항하고고 좌절하는 영역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인 동시에, 법과 규칙 너머의 세계다.  


영화는 이를 카메라워크와 풍경을 통해서 은연중에 프레임 안에 합치시킨다:미국-맥시코의 국경을 멀리서 잡아내는 부감의 풍경은 마치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적인 사건들이 일상적이고 무심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또한 미국과 맥시코의 경계를 다루는 카메라는 법과 무질서라는 이분법적으로 마치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은 맥락을 깔아두며, 영화의 클라이맥스의 미장센으로 귀결되는 발판을 제공한다:영화의 마지막, 맷과 케이트는 국경을 오가는 카르텔의 땅굴을 확인하고, 이 곳을 급습한다. 해질 무렵 땅거미 속으로 무장한 델타포스 대원들과 CIA, FBI 요원들이 하나 둘 어둠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모습은 영화가 어둠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진상, 세계를 움직이는 추악한 논리 속으로 들어감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시퀸스에서 케이트는 두가지를 알게 된다:알레한드로가 맥시코 카르텔에 의해서 가족을 잃고 복수를 꾀하는 전직 검사였음을,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이 마약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통제하기 위함이었음을 말이다. 시카리오는 영화 전반에 부감의 카메라워크를 깔아두고 클라이맥스의 순간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물들을 통해서 관객이 법과 무질서, 그리고 그 상위의 통제하는 '힘'을 한 데로 어우르는데 성공한다.    


결국 모든 것은 CIA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고, 케이트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집에서 알레한드로의 협박 아래 이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행해졌다는 CIA의 서류에 사인하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무기력하게 끌려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눈다: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서 왜 그녀는 끝까지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누며 저항하는 것일까? 그것은 알레한드로가 속한 남자들의 세계, 법과 무질서 양측을 모두 '통제'하는 세계에 대한 미약한 저항의 표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아레즈로 카메라를 다시 돌린다:경찰인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축구시합에 나가서 축구를 한다. 하지만, 총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폭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 속에 알레고리처럼 침투되어 있으며, 싸워야 하는 것은 폭력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논리와 알레고리, 그 논리를 돌리는 힘 그 자체라는 것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고도 잔혹하며 흥미로운 영화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악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 악과 싸워야 해.

 하나의 악이 다른 악을 정당화하진 않아.


혹은 다른 악을 부정하지도 않지." 



-영원한 친구, 존 르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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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남들은 볼 수 없는 무언가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19살 제이는 멋진 남자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한 그 날 이후,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불안에 떨게 한 것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존재가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알 수 없는 정체는 언제 어디서나 제이 앞에 나타나 그녀의 일상을 서서히 옥죄어오고, 악몽보다 더한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제이. 이 기이한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으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팔로우는 겉으로 보기엔 전형적인 하이틴 호러 영화처럼 보인다:섹스를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집요하게 쫒아오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이로 인해서 생기는 사건들의 이야기는 이미 존 카펜터의 할로윈 이후로 수도 없이 반복되고 변형된 이야기다. 하지만 팔로우가 독특한 부분은 전형성이 색다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감독은 팔로우를 제작할 때, 호러 만화인 '블랙홀'을 많이 참조하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크로넨버그와 B급 호러 영화 특유의 신체 변이에 초점을 맞춘 블랙홀과 팔로우 사이에는 큰 접점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10대들의 성과 불안, 섹스를 통해 전염되고 공유되는 불안과 감성을 다룬 블랙홀은 팔로우라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열쇠다.


보통의 영화에서 섹스는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관음증적인 코드로써 삽입되기 쉽다. 또한 이것을 피해가려는 수많은 창작자들도 스스로의 무의식과 관습, 습관에 내재되어 있는 관음증적인 시선이나 성적인 편견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이 편견을 재생산하기도 하였다. 엄밀하게 보자면, 섹스를 주요한 소재나 주제로 다루는 작품은 성적인 자극을 거세해야 하며 이는 섹스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확고한 자기 인식에 의해서 가능하다. 팔로우는 이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성공하고 있다:팔로우에서 섹스는 성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팔로우에서 섹스는 중요한 행위(그것을 옮기는)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삭막하고 메말라있으며 불안하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작중에서 행해지는 모든 섹스를 어딘가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행위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팔로우에서 나오는 섹스와 그것의 이미지는 '성병'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성병의 이미지는 이미 B급 호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 소재이기도 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사용되는 섹스를 통한 성병과 감염의 이미지는 섹스가 갖고 있는 파괴력과 힘을 드러내며 영화가 깊이 영향을 받은 블랙홀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로우의 특이점은 성병 특유의 끈적함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팔로우에서 섹스를 통해서 전이되는 것은 성병 특유의 신체적이거나 내부적인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바깥에서 오며, 뛰지는 않지만 감염자가 어디에 숨어있든 끝까지 따라오는 집요함과 정시성, 그러고 피할 수 없는 숙명론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러한 '그것'의 특징은 극중에서 주인공들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불안에 떨게 만든다. 그것은 프레임 바깥에 있더라도 여전히 주인공을 향해서 오고 있다. 이 정시성과 숙명적인 분위기에 기반한 공포는 여지껏 호러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함을 보여준다. 보통의 호러 영화에서 유령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는 주인공과 관객을 놀래키기 위해서 연출된 타이밍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것이 놀랍고 무섭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의 리듬과 템포를 알면 쉽게 이에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팔로우의 그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속도가 느리기에 따돌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회피할 수 없으며 프레임 바깥에 있더라도 주인공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성실하게 오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유령에 놀라기 보다는 그것이 언제 주인공에게 도착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각 시퀸스의 장면들을 세밀하게 살펴보게 된다. 이는 주인공이 공유하는 공포와 불안을 관객들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막연하지만 확실한 불안감과 죽음에의 공포는 팔로우를 청년들과 섹스를 소재로 한 호러영화 중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는다.


팔로우 특유의 이러한 분위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집단에서부터 분석을 시작함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팔로우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어른'의 존재가 거세되어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할 뿐, 영화는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또래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또래집단은 보통의 하이틴 영화에서 등장하는 활발한 집단과는 다르다. 이들은 무언가 적극적으로 하거나 밝다기 보다는 어딘가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누워있거나 각자의 할 일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친구들은 주인공이 처한 황당한 상황(내 눈에만 보이는 존재가 나를 따라오면서 공격하는데, 이게 섹스로 옮겨간다)을 이해하면서 같이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오로지 섹스를 통해서만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은 조력자인 동시에 안타깝게도 방관자일 수 밖에 없다.


팔로우에서 섹스는 단순하게 쾌락을 찾는 행위 그 이상이 된다:섹스를 통해서 주인공은 주변사람과 자신의 공포와 불안을 공유하며 또래집단 내에서 은밀하게 오가는 성적인 욕망의 교차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과 그녀의 친구가 섹스를 함으로서 시선을 공유하는 동시에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역으로 새로운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섹스는 유일하게 불안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점점 더 나락으로 밀어내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옮겨붙기 전에 주인공이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욕망들의 공유는 섹스가 갖고 있는 힘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후에 불안에 떨면서도 몸을 섞음으로서 시선을 공유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써 바라보는 세상을 공유하고자 하는 소통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소통의 행위로써 섹스로 옮겨지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을 던지지는 않지만, 동시에 이를 추론할 수 있는 정황증거들을 던져주고 있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클라이맥스 직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주경계를 넘어서 박물관에 가는데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과 그것이 정말로 별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말 큰일 처럼 느껴진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클라이맥스에 그것이 주인공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습이나, 어른들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모습 등을 통해서 영화는 어른의 존재를 제거하는 동시에 어른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차용한다. 즉, 섹스는 어떻게 보면 정말로 별거 아닌 삶의 일부 같은 행위지만, 젊은 세대의 무의식 속에서는 마치 어겨서는 안되는 금기로써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기를 어김으로써 생겨난 죄의식과 불안감은 올곧게 금기를 어긴 행위자에게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금기를 어긴(섹스를 행한) 사람들을 쫒아온다. 그리고 이 뚜렷하지 않은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범을 늘림으로써 같은 세계와 시선을 공유하는 것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죽였다고 생각한 그것의 존재가 주인공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뒤쫒아오는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공고하게 만든다.


영화 팔로우는 섹스라는 소재를 자극적이지 않게 다루면서도 그것의 본질에 깊숙하게 접근한 작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불안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프레임 내에 공포의 존재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주인공과 관객들이 그것일 지속적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러영화로써도, 하이틴 영화로써도, 그리고 섹스를 다룬 영화로써도 팔로우는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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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얍 땜빵 얍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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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래는 트위터에 쓰려다가 스포일러 때문에 일부러 블로그로 뺀 짧은 글입니다.


경성학교는 그야말로 괴이한 영화다:겉으로 보이는 영화의 문법은 호러로 보이지만, 정작 그 끝에는 특이하게도 SF의 문법이 지배하고 있다. 경성학교의 당혹스러운 부분은 바로 이 장르적인 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과연 폐쇄된 공간과 집단에서 생기는 일을 다룬 호러를 지향하는가, 영하의 황당한 결론처럼 SF를 지향한 것일까?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경성학교는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SF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전개나 마무리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경성학교가 보여주는 SF의 세계는 단순하게 장난스러운 시도가 아닌 나름대로의 진지한 고찰과 고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마무리만 훌륭했었다면 경성학교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독특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란 공간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공간이다:기본교육을 통해서 개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국민이라는 표준을 삽입한다. 그렇기에 학교는 통제의 공간이자 훈육의 공간(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극중 고립된 여자들만이 입학하는 요양 기숙사 학교라는 고립된 환경과 함께 훌륭한 황국 신민을 만들어내는 교육과 인체실험을 통해서 강인한 병사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에 맞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신과 육체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성학교가 취하고 있는 교육론은 충분히 SF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름, 호명 방식의 차이에 따라서 영화는 두 세계를 분류한다:일본식 이름을 통해서 교육받는 신체와 자아를 드러내며, 동시에 진짜 이름, 한국어 이름을 통성명함으로써 인간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경성학교에서 재밌는 점은 폐병의 알레고리를 뒤집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거동에도 무리가 있을 정도로 힘들었던 주인공은 전형적인 결핵, 폐병 환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 강화제를 투여받으면서 점점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간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영화의 마지막에는 적극적인 반격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반적으로 영화가 갖고 있는 이런 저런 재밌는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재밌는' 부분에서 멈추었다고 생각한다:영화는 각각의 중요한 요소들을 영화 내에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정작 하나로 합쳐놓고 보았을 때의 그 화합은 부분의 합에 못미친다는 느낌이다. 좀 더 다듬고 이야기를 전개시켰다면 경성학교는 분명 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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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 


시대는 리메이크와 리부트를 요구하고 있다:한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대중문화 작품들은 다시 한번 시대적 해석을 통해서 재탄생되어서 그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경향이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한계,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창의력의 고갈과 새로운 옛 것의 발견을 통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흐름으로도 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맞을 수도 있거나, 틀릴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가 모르는 제 3의 요인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역시 그러한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과 경향성을 재쳐두고 본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프랜차이즈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 구태의연함이 갖고 있는 우직함이 현대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 이상을 작품이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서브컬처 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분류되는 수많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장르를 뛰어넘어서 '종말'의 이미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종말'이라는 테마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종말'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었던 절망이나 희망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간은 종말에 의해서 절망하고 미쳐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종말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인간을 옭아매고 있었던 가식적인 제도, 문화, 시스템 등을 무너뜨리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종말한다면 과연 문자의미 그대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가진것 뿐일까. 혹은 더 끔찍하게도,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세계의 밑거름이 되는 종말의 잿더미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영원히 조금씩, 더 끔찍한 방향으로 망해버리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이토 케이카쿠의 소설들(학살기관이나 하모니)을 보자:세상이 멸망할 것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인간들은 그 멸망과 종말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그 종말을 마치 '일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J.G. 발라드의 소설을 보자:물에 빠진 세계에서 인간들은 종말에 도취되며 종말의 더위 속으로 녹아서 사라진다. 발라드의 멸망 3부작에서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아니다. 여기에서 종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융합'되는 것, 익숙해지는 개념에 가깝다. 즉, 어떻게 본다면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나 새로운 시작이 아니다:종말은 그저 환경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적응'을 수반한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도 그러하다:관객들이 마주하는 매드맥스의 세계는 의외로 '정상적'인 세계이다. 제한된 자원인 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쥔 이모탄 조는 물을 자원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자식들이자 병사들인 워보이나, 워보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인 브리더, 여성 모유를 착유해서 식량을 쥐고, 물을 자원으로 무기 농장의 무기나 가스 타운의 석유와 교역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마치 정상적인 사회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모탄 조가 지배하는 분노의 도로는 마치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모탄 조가 죽고 퓨리오사가 리더로 되는 것이 시터델의 필연적인 멸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결론내리기도 하였다. 이모탄 조의 방법론은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방식의 접근이다:멸망과 그에 대한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이모탄 조가 만들어낸 분노의 도로는 구세대의 절망, 아니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 왔었던 절망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 변화시킨 사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모탄 조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종말 이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구시대로부터 이어내려져 온 반복된 절망, 우리가 오랫동안 적응해왔었던 오래된 종말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빈부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전쟁의 영광과 약탈의 문제 등등. 인간은 항상 이런 미친 것들에 적응해왔었다, 그리고 순종하였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효율적인 세계의 종말 아래서 인간은 착실하게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미쳐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이며,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특유 아래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 특유의 막나가는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말초적인 행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종말 이후 각자의 방식대로 미쳐버린, 아니 세상에 '적응'해버린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차용하고 있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패미니즘 담론이다:남성은 파괴하며, 여성은 생산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1980년대스러운 오래된 담론(패미니즘도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 점을 숙지하여야 한다)을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써먹고 있다. 메인빌런에서부터 거대한 가족을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모탄 조), 사람을 잡아먹는 양복입은 식인종 자본가(피플 이터), 사람을 고문하기 좋아하는 폭력적인 무기상(무기농장 주인)을 설정해놓고, 그와 대칭되게 도망가는 자들을 '여성 브리더'로 설정해놓은 점에서부터 이미 철저하게 스테레오 타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영화를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만드는데 주요한 동력이 된다. 이전 칼럼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이야기는 도로라는 공간과 함께 속도와 속력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칼럼을 요약하자면 도로라는 공간 끝에 놓여있는 도착지, 그리고 그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성이자 운동량인 속도가 매드맥스 시리즈 속의 케릭터들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원화된 케릭터 군상들은 강력한 대비를 이루며 방향을 가진 운동을 완성한다:여성들로 구성된 브리더와 퓨리오사, 그리고 맥스는 시터델을 등을 진 체 희미한 희망을 쫒아 녹색의 땅을 향해서 정처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남자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악당들이 뒤쫒는다. 


영화의 케릭터 조형은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단순해진 대신에 '깊이'를 더한다. 깊이를 가진 다양한 케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케릭터는 맥스와 퓨리오사일 것이다. 먼저 퓨리오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의 대중문화에서도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싸우는 여전사를 다룰 때 '헐벗은 눈요깃거리'나 '모성성' 등의 스테레오 타입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퓨리오사의 신선함은 그런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전통적인 '전사'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처음에는 이모탄 조의 소유물을 빼돌려 그를 분노케하려 하지만, 녹색 땅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희망에 벅차오르다 좌절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동인 자체는 분노Fur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인간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밝은 불꽃같은 분노까지 그녀는 전적으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케릭터이다. 


재밌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퓨리오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칸느 영화제 시사회 GV에서 기자는 '여자가 이렇게 분노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샤를리즈 테론에게 던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밑도 끝도 없이 멍청한 질문을 영화/연예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자가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퓨리오사라는 케릭터가 갖는 특수성은 영화 내적인 것이 아닌 영화 외적인 것이다. 여지껏, 분노에 이끌려서 싸우고 투쟁하는 여성 케릭터는 흔치 않았다. 더욱이 삭발을 하고 한 팔을 잃은 채 눈가에 엔진오일을 바르는, 기존의 성적인 코드를 제거한 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 케릭터 자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물론 퓨리오사의 케릭터 자체도 깊이가 있는 뛰어난 케릭터인 것도 한몫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맥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 시리즈에 등장한 멜 깁슨의 맥스는 정상적이고 능글맞은 마스크 밑에 폭발할 것 같은 광기를 숨기고 있는 케릭터였었다. 하지만 톰 하디의 맥스는 그와는 다르다:톰 하디의 맥스는 광기가 폭발할 거 같은 위험을 느끼기 보다는 어딘가 망가져버린 이미지, 전쟁통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전장을 떠도는 군견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켜야할 것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톰 하디의 맥스는 환영이나 환청 등의 형태로 구현된 '죄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멜 깁슨의 맥스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맥스의 언어사용일 것이다. 톰 하디의 맥스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단문이나 툴툴 거리는 목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톰 하디의 맥스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 같은 모습을 더욱 강화한다.


기존 시리즈의 맥스는 협상을 하는 솜씨 좋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기술을 판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에 득이 되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생존의 측면에서 기술을 팔아먹고 사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방향성과 비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 없는 '자원봉사'로 공동체를 위기에서 끌어낸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이 맥스 역시도 강하다. 다만 맥스는 그 자신이 공동체에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항상 공동체를 뒤로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왜 맥스는 항상 떠나는 공동체를 뒤로 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톰 하디의 맥스는 그것이 환영이나 환청의 형태로 등장하는 죄책감으로 묘사한다. 그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과 자신은 공동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학이 그를 언어를 잃어버리고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형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전적으로 기존 시리즈에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방향성으로 재해석된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가 다른 시리즈의 맥스와 차별화되고, 더욱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맥스가 사람들의 방향성을 '반전'시킨 것이다. 여지껏 시리즈에서 맥스는 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에 조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만 그 자신이 어딘가에 뛰어들어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는 헛된 희망에 걸어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쳐왔었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공동체에 조언을 한다:소금 사막 너머의 무의미한 희망에 걸지말고, 시터델을 점령하여 우직하게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그것은 맥스 자신이 과거에 하지 못했었던 것에 근거한 조언이다. 이 방향성의 반전과 함께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이제 여지껏 도망자들을 압도한다고 생각했었던 이모탄 조와 그 일당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고, 반대로 도망자들은 헛된 희망이 아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손에 쥐게 된다.


영화의 모든 액션씬들이 잘 짜여져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클라이맥스의 추격씬은 그야말로 예술적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맥스 이전의 러닝타임까지 도로는 도망의 공간이었으며, 어디론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방향성을 반전시킴으로써 도로는 이제 근거없는 희망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공간으로, 더 나아가 최후의 결전에 걸맞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맥스는 클라이맥스 시작에서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능동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하여 사람들을 이끈다. 혹자는 이 영화를 퓨리오사 일행과 이모탄 조 일당들의 싸움이고 맥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조언으로 맥스는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의 맥스 케릭터들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압도해버린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시터델 점령이 성공한 이후, 맥스는 일행과 함께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시 떠나기를 선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였지만, 정작 스스로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조지 밀러 감독은 톰 하디와 함께 매드 맥스 시리즈를 3편 더 찍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3편의 매드맥스를 통해서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본인은 그것이 맥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3부작에 걸쳐서 맥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방황 끝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정착? 죽음? 구원? 본인은 맥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은 아마도 희생이나 죽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예정된 비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에 있어서 영웅의 몰락은 예정된 결말의 일부이다. 그러나 맥스는 영웅이 아니다. 앞서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영웅은 아닌, 맥스라 불린 남자'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본인은 매드맥스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져오는 사람, 문제를 해결하지만 스스로는 정착할 수 없는 슬픈 숙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은 우리에게 세상의 질서나 이상을 교육하는 신화가 줄 수 없는 무게를 준다.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고뇌한 사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었지만 정작 그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그 무게와 교훈은 신화의 압도적이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대칭되며 사람의 손에 잡히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본인은 만약 새로운 매드맥스 시리즈의 3부작이 마지막에 맥스가 죽는다면, 그 끝을 어느정도는 얼버무리듯이 끝났으면 좋겠다. 좋은 이야기들은 끝을 열어놓아서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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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느 날 지도 한 장을 들고 홀연히 할리우드에 나타난 미스터리 소녀 ‘애거서’. 그녀가 여배우의 매니저 일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나타난 후 모든 이들과 실타래처럼 엮이면서 그들의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번 배역만은 꼭 따내야 하는 위기의 여배우 ‘하바나’, 최고의 아역스타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벤지’와 그의 부모,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렌트카 운전 기사 ‘제롬’. 그들과 ‘애거서’의 엉킨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어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벤야민은 일찍이 기술복제 시대와 예술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서 영화의 가능성과 위험을 다룬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영화 제작 시스템, 특히 헐리웃 스타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영화의 가능성은 아우라의 거세를 통해서 수많은 대중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헐리웃 스타 시스템은 이러한 영화의 아우라 거세를 숨기고, 마치 배우에게 실제 아우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속여서 대중을 거짓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적용되는 명제이다:벤야민이 주목한 영화의 계몽 가능성과 함께 배우에 대한 광적이며 물신적인 집착의 위협이 여전히 영화를 둘러싸고 팽팽한 길항 작용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맵 투 더 스타즈는 그러한 길항 작용에 대한 이야기다:헐리웃과 스타의 삶이라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친상간'이라는 키워드가 그것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근친상간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운명 사이의 파국이 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일찍이 B급 SF 호러에서부터 폭력과 섹스를 붓과 캔버스 삼고 새로운 영화 세계를 구축한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신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비교해 본다면 스파이더(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영화)와 데인저러스 메소드(새로운 인간이기를 꿈꾸는) 사이의 어느 중간에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기나긴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에 최초로 입성한 크로넨버그가 헐리웃을 바라보는 시선은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고 암울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축을 두고 전개된다:한 쪽은 화재로 사망한 전설적인 여배우 어머니를 두고 그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하바나, 다른 한쪽은 화상자국이 심하게 남은 애거서이다. 불이라는 이미지는 이 둘을 엮어주는 중요한 매게이다. 그리고 이 '불'의 이미지는 헐리우드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매력(꿈의 실현)과 파괴 양 측면을 모두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로 엮여있다는 것이다:하바나는 어머니를 '성적으로' 사랑했으며, 애거서는 어렸을 적 자신의 동생 벤지와 결혼식을 올리다가 화상을 얻었으며 부모 결혼의 비밀(근친상간에 의한)을 앎으로써 아름다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근친상간의 이미지가 둘러싸고 있는 시놉시스의 뼈대는 바로 하바나 어머니가 출연한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를 둘러싼 갈등을 형성한다.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근친상간'적이라 할 수 있다:과거의 작품을 '과거의 이야기+현대의 배우, 방법론'으로 만들어냄으로서 과거의 산물인 현대의 영화 산업이 자기 부모와 결합하여 자신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가 갖고 있는 근친상간적인 함의가 현재의 영화 산업에 있어서는 대세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21세기, 정확하게는 2010년대 전후로 들어오면서 유명한 과거 작품의 리메이크는 대중문화의 핫한 트랜드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리부트'라고 칭하고 있다:하지만 이 리부트 열풍의 근간에는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배우 그리고 각색을 첨가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적인 이미지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리부트 열풍이 일어나는 것일까? 혹자는 21세기 인터넷으로 만들어진 대중 문화가 더이상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을 소비하는 아카이브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본인도 여기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벤야민은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나 영화산업이 배우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를 낳고 이를 통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배우와 작품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가 무너질 수 없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낸다면, 그 전설을 자가복제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근친상간적인 리부트는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근친상간이라는 테마와 함께 이 영화의 제목, 스타를 향한 지도Map to the Stars에서도 드러나듯이 영화는 단순하게 헐리웃의 현재 관점에서의 자가복제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을 넘어서 대중문화의 역사 전반에 깔려있는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애거서는 근친상간적인 결합 자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실제로도 영화 산업 이전에도, 인류는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적인 관점에서 복제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다. 애거서가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듯이 인류가 자신이 영향을 받고 시작했던 이미지와 결합하여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런 자가복제적인 이미지를 근친상간의 형태로 표현한 것은 이미 '그 자체에 파국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일찍이 사드가 그의 저서에서 자동기계적인 육체와 섹스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섹스는 그 자체에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스스로 극단적인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이를 두가지 형태로 보여준다:첫번째는 애거서가 하바나를 죽이게 되는 계기 자체가 하바나와 제롬과의 섹스를 목격한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애거서와 벤지가 갖고 있는 환각으로 대표되는 정신병(근친상간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의 이미지이다. 이 두 이미지들은 근친상간이라는 형태가 자체가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에는 불에 대비되는 '물'의 이미지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불로 대변되는 열정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물의 이미지는 은연중에 이 불과도 같은 결합이 파멸할 것을 암시한다. 욕조에서 물을 뒤집어쓴 채 등장하는 하바나의 어머니 환영, 수영장에서 익사한 배우의 아들, 수영장에서 나오는 죽은 아이들의 환영, 수영장 근처에서 분신하는 벤지와 애거서의 어머니(그리고 분신하기 전엔 욕조 안에 물을 받아놓고 홀로 흐느낀다) 등등. 영화는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서 자기 파괴적인 아름다운 불꽃과 차갑고 축축하며 기분나쁘게 끈적한 물의 정적인 이미지를 동치시킨다. 영화의 결말 역시 이러한 숙명에 의해서 애거서와 벤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별을 바라보며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 남매의 결말은 근친상간적 자기 복제가 가져다 줄 파국 그 자체인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최초 헐리웃 입성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야말로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영화산업 및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니들은 죄다 근친상간범들이야!'라고 외치는 크로넨버그의 독기와 자신의 이미지를 내다버리는 혼신의 연기를 줄리안 무어의 연기는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는 크로넨버그 영화의 최대 걸작에는 못미치지만, 리부트 열풍이 부는 요즘같은 시대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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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3부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의 최신작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2015년 5월에 개봉하였다. 사실 전세계적인 리부트 열풍을 감안한다면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등장은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아주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현상은 영화의 개봉 직후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여성이 중심이 된 영화이며, 심지어는 '패미니즘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마초영화에 감히 패미니즘 따위가!'라고 광분하며 길길이 날뛰기도 하였지만 대체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라는 이미지를 정립하고 그 빛이 퇴색해버린 오래된 프랜차이즈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였다는 점에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두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첫번째, 매드맥스 시리즈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마초적'인 프랜차이즈인가? 그리고 두번째, 매드 맥스 프랜차이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정립한걸 제외하면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이 없었던 것일까? 이 칼럼에선 이러한 두가지의 질문을 토대로 매드맥스 삼부작을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를 리뷰하기 위한 밑바탕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첫번째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마초적인 작품이냐는 질문에 대한 고찰이다. 일단 답을 먼저 내리자면 1편이 마초적인 색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지만, 시리즈 전체와 더 나아가 조지 밀러라는 감독이 하고 싶었던 바를 생각하자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오히려 비마초적인 영화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특히 1편과 2편의 맥스의 모습과 도로라는 공간을 그려내는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해야 한다. 먼저 1979년에 호주 B급 영화로 만들어진 매드맥스 1편은 대충 망해가는 세상을 배경으로(그야말로 완전히 망한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것도 아닌 '대충 망한') 고속도로 경관인 맥스 로카탄스키가 무법 폭주족인 토커터에게 아내와 자식을 잃고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편은 이러한 과정을 예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상깊은 형태로 구현한다:2차선의 도로는 지극히 좁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고속도로 경관인 맥스)이 다른 한쪽(바이커들)을 배제할 수 밖에 없는 충돌의 공간이다.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고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찍은 영화의 많은 시퀸스들은 달리는 것 자체의 아슬아슬함과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동시에 매드맥스 1편에서 도로는 도달하는 곳이 정해져있는 광기의 공간이기도 하다: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바로 토커터 일당이 맥스의 아내와 자식을 바이크로 쳐버린 뒤, 맥스가 맨발로 도로를 달리면서 아내와 자식의 유체를 바라보며 오열하는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으며, 카메라는 멀치감치서 달려가는 맥스를 잡아낸다. 그리고 도로의 끝에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비극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맥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의에 가까운 복수를 집행하는 분노의 사자가 된다.


하지만 2편에서는 이러한 미학들이 180도 바뀌게 된다:우선, 도로라는 공간과 자동차라는 미학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뀐 것은 도로라는 공간의 속성과 맥스라는 케릭터의 특징일 것이다. 1편에서 가족을 잃은 맥스는 이제 지켜야 할 가족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유능하고 빠르지만(8기통의 블랙 인터셉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겁탈당하는 여인을 두고도 기회를 엿본다던가) 멜 깁슨 특유의 어딘가 휙하면 돌아버릴거 같은 분위기와 함께, 맥스는 무미건조한 태도 속에 느글거리는 광기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런 그가 여타 도로의 무법자 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기본적인 원칙들, 계약의 이행이나 신뢰 같은 가치를 여전히 믿고 따른다는 점에 있다. 즉, 1편에서 분노한 남자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2편에서는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이미지를 맥스는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도로라는 공간도 그에 맞춰서 변화하게 된다:후술하겠지만 2편에서 도로는 단순한 마초들의 광기와 물리적 충돌의 공간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더이상 자동차의 속도감만에 집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공중에서 자동차들의 추격씬을 다루거나, 와이드캠으로 파노라마를 구축하는 주력한다. 2편은 마초들의 광기어린 충돌, 어느 한쪽이 살아남는다라는 감각이 아닌 '방향성'의 문제,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문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두 영화의 차이는 기본적인 공식(맥스와 도로, 자동차)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매드맥스 1편은 '그렇게 성공할줄 몰랐었던' 작품이다. 그렇기에 적은 예산을 토대로 만들었어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장르 영화의 공식(마초적인 색체)을 따르면서도 최대한 예산을 아껴야 했을 것이다(공중 촬영으로 와이드 캠으로 찍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하지만 1편의 예상외의 성공은 2편을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감독이나 제작진의 재량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여지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즉, 2편은 시리즈 전체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들이 모여있는 작품이며, 1편은 감독이 제한된 환경과 타겟 관객층을 정해놓고 만들었어야 했었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감독은 지속적으로 1편의 설정(고속도로 경관이었던 맥스, 1편 마지막 다쳤던 부상의 여파인 다리 보철)을 시리즈 전반에 삽입함으로서 1편을 원류이자 출발점으로써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2편이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 가정하고 매드맥스 시리즈의 구심점이라 결론내렸을 때, 이 영화 프랜차이즈를 마초적이라 부를만한 여지는 줄어들게 된다. 마초란 '남자다움'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2편의 맥스에게 있어서 그런 지향해야 하는 가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가솔린으로 표상되는 '생존'에의 의지다. 그런 생존에의 의지와 함께 매마른 감정과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가족의 상실이라는 상흔이 지배하는 맥스를 우리는 생존자 또는 망령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맥스의 모습을 2015년 9월 발매 예정인 아발란체 스튜디오의 매드맥스 게임 트레일러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끝낼 영웅이 오리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가 있다. 맥스라 불리는 남자가. 



맥스는 마초는 아니며, 더더욱이나 영웅은 아니다. 그는 공동체에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나 영웅이 아니며, 자신이 조우한 공동체와 함께 투닥거리면서 갈등하고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2편과 3편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동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은 그에게서 신비함을 느끼는 동시에 어딘가 믿을 수 없는 긴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항상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그것은 자신의 생존의 확률을 높여주기에(2편의 클라이맥스인 유조차 시퀸스),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3편에서 사반나를 구하러 가는 시퀸스), 혹은 자신의 트라우마가 되풀이 되는걸 막고자 하는(4편의 클라이맥스) 형태로 다양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맥스라는 케릭터가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그는 생존의지가 강하고 그로 인해 때로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때도 있지만 그 속에는 한줄기 희망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그러한 일련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함께, 맥스 스스로도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2편에서부터 4편까지, 그는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곁에 남지 않고 다시 도로로, 황무지로 떠난다. 혹자는 여기서 서부극의 영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서부극의 영웅들은 모든 상황이 종결된 이후,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맥스는 그러한 서부극의 엔딩의 좀 더 어두운 형태다:맥스는 자신이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공동체가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믿지만, 그 속에 과거의 상흔에 사로잡힌 자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다시 광기의 공간인 도로에 남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맥스는 철저하게 '망령'이라 할 수 있다: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마음 한편으로 믿지만, 과거의 상흔이 그를 새로운 출발선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가련한 존재. 맥스는 그렇기에 독특한 케릭터이며 동시에 마초적이거나 영웅적인 색체가 옅은, 그러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케릭터가 된다.




3.


두번째는 매드맥스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로서 갖는 독특함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매드맥스 2편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폴아웃 시리즈나 북두의 권 같은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매드맥스 2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30년 이상된 이 프랜차이즈가 30년 동안의 공백기 동안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다면, 여기에는 더이상 '새로운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게임 레이지나 보더랜드 같은 작품에서는 매드맥스에서의 '탈 것'의 개념을 충실하게 구현하기도 했었다.


매드맥스만의 독특한 미학을 다루려면 먼저 속도와 속력의 개념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속력은 한 물체가 지니고 있는 운동량을 의미하며, 속도는 속력에 백터량 즉 방향성이 합쳐진 개념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1편이나 2편, 3편, 그리고 4편까지 이 속력과 속도의 구분과 도로에서의 방향성을 통해서 케릭터들의 특성이 분명하게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1편의 경우에는 방향성이 있는 속도 보다는 속력이 더 강조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도로를 달리면서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토커터의 동선은 방향성이 있다기 보다는 방향성이 없는 광기의 속력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맥스는 도로 경관일을 계속하면 자신 역시 언젠가 그런 미치광이 같은 작자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그것은 일방통행이자 양보의 여지없는 2차선 도로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위험한 가능성 때문이기도 한다.(어떻게 보면 그가 단순한 마초가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그러한 광기와 위험성으로부터 도망가고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다. 이러한 그의 움직임에는 가족이라는 지켜야하는 가치와 믿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는 속도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커터에 의해서 가족이라는 집단이 파괴되자, 그의 방향성은 무자비하게 토커터를 향하고 그리고 그들을 박살냄으로써 그는 속도의 방향성은 상실한다: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그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2편에서는 이러한 속도와 속력의 방향성이 아주 극명하게 대비된다. 방향성을 상실한 맥스는 뛰어난 속력(V8 블랙 인터셉터)과 그에 걸맞는 운전실력과 반사신경(맨손으로 뱀을 잡는), 생존의지를 보유한 능력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인물이기도 하다:휴몽거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정유시설 생존자 집단의 석유를 원한다. 또한 정유시설의 생존자들 역시 휴몽거스의 깡패들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들은 아니다:클라이맥스의 반전이나, 내분이 일어나는 모습, 석유를 독점하는 모습 등을 통해서 이들이 이상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맥스나 휴몽거스나 정유시설 공동체들을 서로 구분짓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방향성'의 문제일 것이다:정유집단의 생존자들은 정유시설을 떠나서 저 멀리에 있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길 꿈꾸며, 안(정유시설)에서부터 밖(저 멀리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석유는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정유시설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뒷받침하는 동력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로는 그러한 방향성을 위한 거쳐가는 공간이자 수단이다. 하지만 휴몽거스 집단에게 있어서 도로는 세계가 멸망한 이후 그들의 광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들은 더 나은 미래나 인간적인 삶 따위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석유는 광기의 추동력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바깥에서 안(정유시설)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 두 백터가 팽팽하게 충돌함으로서 영화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여기에 맥스가 끼어든게 된다.


맥스는 이 두 집단과 벡터의 충돌 속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이 팽팽한 두 방향성의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의 재능을 팔아 석유를 얻고, 그리고 다시 생존자 집단을 떠나려 한다. 애시당초에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상흔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기가 그를 찾아온다:그는 놀라운 재능과 속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자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휴몽거스의 행동대장은 니트로 차저를 이용해서 맥스의 블랙 인터셉터를 따라잡는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의 속력이 따라잡히게 되면서 그의 차는 부서지고 동료인 개는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조차도 너덜너덜하게 된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맥스를 공동체로 이송한 후, 맥스는 공동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자신이 유조차를 몰고 미끼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맥스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부로도 볼 수 있다. 가장 유능한 사람이 트럭을 몰고 미끼로 활동하여 최대한 시간을 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맥스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상과 방향성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음을 전제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속력에 벡터를 추가해서 속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2편 클라이맥스의 유조차 추격씬이 갖고 있는 긴장감은 바로 그런데 근거하고 있다. 한쪽은 쫒아오고 다른 한쪽은 추격한다. 거대한 유조차는 단순하게 거대한 것을 뛰어넘어 맥스가 부담하는 심리적 물적 부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휴몽거스가 니트로 차저를 키고 전속력으로 맥스의 유조차와 정면에서 부딪히면서 이 추격씬은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충돌 이후, 맥스는 살아남는데 성공하지만 공동체가 도로를 따라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맥스는 그들의 뒤에, 도로의 위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한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는 공동체와 인간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믿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갖고 있는 상흔이 그를 어딘가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다. 4편에서의 맥스의 독백처럼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서 쫒기는 자'라는 표현처럼, 죄책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 그를 어디로도 향할 수 없는 도로 위에서 서서히 망가뜨리고 궁지로 몰아가게 한다. 


3편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망한 작품이기도 하다:기본적으로 가식(교역 도시)과 순수(어린이들의 마을) 사이를 맥스가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여기에는 '도로'라는 공간과 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향성은 뜬금없는 방향으로 꺾여지며(왜 사반나를 구한 뒤에 마스터를 구하러 가는가? 영화는 그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다), 매드맥스 1편이나 2편이 가졌던 메마르고 잔인했던 정서는 잘려나간 3편은 마치 만들다 만 가족 영화의 슬랩스틱 코미디 정서마저 느껴질 정도로 유치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각 요소들은 괜찮은 부분들이 있지만, 점과 점으로써만 존재하고 선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산만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 3는 케빈 코스트너의 희대의 괴작 워터월드를 떠오르게 만들고, 워터월드를 잘만들면 매드맥스 3라는 결과물이 나오게 될거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엄밀하게 보자면 워터월드가 시기상으로 앞선 매드맥스 3를 벤치마킹한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3편에도 건질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추격대가 맥스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맥스 일행의 비행기는 이륙하기 위해서는 추격대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리고 맥스는 자원하여 트럭을 몰고 사반나 일행이 이륙할 수 있는 활로를 뚫는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의 긴장감과 비행기 이륙까지의 스릴은 이 영화가 매드맥스 프랜차이즈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동시에 맥스라는 케릭터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도로와 방향성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1,2,3편 모두를 통털어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탈 것이 그 케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맥스의 8기통 블랙 인터셉터는 그가 빠르고 고독하며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자이로콥터를 타고 다니는 남자는 변칙적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가 맥스와 같이 빠르고 강한 것은 아니지만 약삭빠르고 영리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휴몽거스의 경우에는 그의 논리적이고 달콤한 감언이설과 별개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차 범퍼에 달고 다니는 모습과 어딘가 야만적인 인상을 주는 자동차의 디자인을 통해서 그의 말과 다르게 그의 본질이 잔인하고 야만적임을 알게 만든다. 이와 같이 '자동차'라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채롭게 개조하여 광기의 표현물인 동시에 케릭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썼다는 점에서 매드맥스는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


4편 분노의 도로는 이러한 기반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노의 도로 리뷰는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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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슈퍼히어로의 진짜 모습! 그 동안 당신이 궁금해했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무대 이면이 낱낱이 공개된다!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 스타에 올랐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그는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한다. 대중과 멀어지고, 작품으로 인정받은 적 없는 배우에게 현실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재기에 대한 강박과 심각한 자금 압박 속에, 평단이 사랑하는 주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들, 무명배우의 불안감(나오미 왓츠), SNS 계정하나 없는 아빠의 도전에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연극계를 좌지우지 하는 평론가의 악평 예고까지.. 과연 ‘버드맨’ 리건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버드맨은 한 퇴물 배우가 자기 중심을 되찾아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연극에 도전하는 퇴물 배우와 이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대중과 평단, 그리고 동료 배우들, 그리고 한때 잘나갔던 자신의 분신 버드맨이 위압적이고도 달콤하게 속삭이며 연극을 포기하게 하고자 유혹하는 등 주인공인 리건 톰슨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러한 쉽지 않은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약 두시간에 걸쳐서 풀어나가는 버드맨의 이야기는 어떻게 본다면 그저그런 감동 스토리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드맨이 보여주는 영상과 이야기는 마치 꿈틀거리는 것 같이 생동감 있으며 매력적이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버드맨의 이야기의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어째서 리건 톰슨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하는가?'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극배우가 영화 배우로, 영화배우가 연극배우로 넘어오는 것은 일상다반사 까지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리건 톰슨처럼 퇴물 배우가 어째서 '연극'이라는 장르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그 자신이 레이먼드 카버에게서 호평을 들은 것을 연기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물론 마이크의 지적처럼 그것은 술김에 쓰여진 촌평이긴 하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영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그의 연극에 대한 광기어린 헌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리건 톰슨이 연극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교회에 가거나 법정에 가거나 혹은 학교에 가는 식으로 극장에 간다면 그건 틀렸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장에 가듯 극장에 가야한다. 여기서는 이두박근을 이용해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좀더 섬세한 싸움이 일어난다. 그 싸움의 무기는 언어이다. 무대에는 항상 최소한 두명 이상의 사람이 있고, 또 대부분은 갈등을 겪는다. 우리는 누가 이기는지 분명히 지켜봐야 한다.


...(중략)...격투기에서 처럼 사람들 속을 꿰뚫어 봐야하고 예리하게 주시해야 한다. 무대에서는 사소한 기술이 가장 흥미롭다. 영화는 이런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는 내면적인 것과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좀 더 영리하고 섬세한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야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연극을 스포츠를 보듯 관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P143






브레히트의 영화 매체 비평은 차치하더라도, 이 브레히트의 발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다:연극이란 영화와 다르게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매체며 그렇기에 연극은 스포츠와 비슷한 극적 긴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매체를 여러번의 촬영을 통해 선별된 결과물을 바탕으로 편집되는 매체라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컷으로 시공간이 분절되어 있으며, 각각의 컷은 가장 뛰어난 연기의 결과물로 구성이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에는 어떤 독특한 긴장(혹은 아우라)을 담아낼 수 없다:벤야민의 예시처럼, 총격전이 일어나고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에서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을 찍은 뒤에 총격전 씬을 찍어 영화의 시간대와는 전혀 다른 역순의 구성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극은 그 연기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연기자들의 몸상태, 관객의 분위기 등등 각각의 연극들은 고유한 특징들과 환경, 제약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때에만 존재하는 생동감과 긴장감, 아우라를 갖게 된다.


왜 리건 톰슨은 연극이라는 수단을 자신 삶의 돌파구로 지목한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 내내 드러나는 그의 과거 삶들의 편린들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리건은 끊임없이 사랑을 받기를 원하며 이를 갈구하지만 아내와 이혼하고 마약 중독 재활원에서 막 나온 딸과의 관계는 소원한 등 인간관계에서 전적으로 실패를 경험한다. 또한 그의 커리어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무비로 흥행적 측면에서 성공했지만, 역으로 이는 그의 커리어를 얽메어버린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코스튬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 리건 톰슨이 아니라 버드맨일 뿐이다:그렇기에 케릭터로써 버드맨은 리건 톰슨이 아니다. 버드맨의 인격이 리건과 별개로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은 전적으로 리건에게 있어 케릭터 버드맨은 그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타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부분은 리건이 홀로 있을 때 그가 '초능력'을 쓰는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홀로 있을 때 리건은 물건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조작한다. 물론, 그가 진짜로 초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에 불과하다: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에 택시비도 안 내고 택시를 타는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리건이 초능력을 쓰는 장면 기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왜 초능력을 쓰는 환상을 경험하는가 이다. 물론, 그가 어느정도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것으로 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타인이 없을 때 그는 그의 세계의 중심이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주변에 그런 전지전능함을 내비치는 환상을 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퇴물 배우임에도 그는 그 자신이 코스튬이나 부, 명성이 아닌 자신만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런 환상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리건은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한치의 거짓도, 덮여씌워질 이미지도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연극은 그러한 점에서 아우라와 생명감 약동하는 힘의 공간이며, 동시에 그의 연기의 근원(레이먼드 카버의 촌평)으로 돌아가는 작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를 매우 호흡이 긴 롱테이크의 형태로 풀어낸다:컷이 분절되지 않는 롱테이크의 특징 덕분에 영화는 끊기지 않는 흐름과 몰입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여기에 드럼의 강렬한 박자와 함께, 리건의 광기, 마이크의 기벽, 연극판의 희로애락들이 더해지면서 버드맨은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재밌는 점은 초중반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연극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가 중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불륜을 들키는 장면에서 연인인 여배우와 실제로 하자고 덮치거나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직접 술을 마시는 마이크의 기벽은 연극이 갖는 에너지와 생명력, 그리고 광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 무대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긴장감과 생명력이 마이크라는 인물을 움직이는 광기이자 동인이며, 이런 점에서 초중반의 리건은 마이크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갈수록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를 광기로 몰아가며 그 역시도 마이크를 능가하는 광기를 갖게된다. 그리고 그 광기가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리건이 펼치는 혼신의 연기로 승화되게 된다.


클라이맥스 직전에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전적으로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타비사로 대변되는 평론가들은 필사적인 리건을 일탈하는 헐리웃 대배우로 규정하고 맹목적으로 적대한다. 대중들은 버드맨인 리건 톰슨을 기억할 뿐이며, 그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보고 조롱하거나 관심을 보이고, 뛰어난 연극배우인 마이크 마저도 리건을 기회삼고 리건의 등을 처먹는 기인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한술 더떠서 그의 내면 자아인 버드맨조차 헐리웃으로 돌아가 부와 명예를 얻자고 리건에게 속삭인다. 전적으로 자신을 연극에 투신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리건의 노력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이렇게 리건을 둘러싸고 환경을 다루는 방식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뭐든지 딱지를 붙이는 평론가에게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비평가가 되는거야?'라고 조소하고, 연극판은 기벽이 판을 치며, 버드맨으로 대변되는 헐리웃의 히어로 영화를 멍청한 대중들에게 편승하는 상업물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되는 점은 버드맨이 '예술가의 예술 인정 투쟁 vs 멍청한 대중 및 평론가, 세상'의 구도를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리건은 스스로 자신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자아찾기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 대한 인정과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라는 중심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외부적인 압박(어떤 연극이 나오더라도 사상 최악의 악평을 주겠다는 타비사)와 내부적인 갈등(다시 헐리웃으로 돌아가 히어로 영화를 만들자는 버드맨)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정은 그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것, 관객과 세상을 향해 온몸을 부딪히는 행위(혼신의 열연을 펼친 뒤, 머리에 공포탄이 장전된 권총을 쏘는 것)로 귀결된다.


그러한 도박은 결국 성공을 거두게 된다. 리건은 비평가들과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찬사를 받게 되며, 그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영화를 떠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세상에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더이상 버드맨이라는 존재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공포탄이 남긴 화약의 흔적은 그의 눈가에 버드맨과 같은 화장을 남겼으며, 그의 얼굴을 감싼 붕대는 영락없는 새 부리 같은 모습이다:더이상 리건은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에 속박되어 있는 버드맨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이자 버드맨의 힘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버드맨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의 환상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도약을 한다.


도약 이후 병실에 들어온 딸 샘이 아버지를 찾는 모습은 이 영화를 함축하는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샘은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지 않음을 보고, 화장실을 본 뒤에 열려있는 창문을 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창문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던 샘의 시선은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리건의 하늘을 나는 환상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 그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샘의 시선이 아래를 거쳐 위로 향하는 것, 그리고 투신자살한 아버지가 아닌 하늘을 날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 영화는 리건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 리건의 환상만이 아닌 타인도 이를 인지할 수 있음을, 그리고 리건이 버드맨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버드맨은 광기어리고 생동감 넘치며 동시에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기회가 있으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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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돔놀 글리슨)은 치열한 경쟁 끝에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외부엔 알려지지 않은 그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은 ‘칼렙’은 그 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 지를 밝히는 테스트를 진행하지만. 점점 에이바도 그녀의 창조자 네이든도 그리고 자신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여섯번째 날에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거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모티브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창세기에는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모두 각자 자기의 모습대로 만들었지만 오로지 인간만은 신의 모습을 본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피조물은 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신은 이들을 이끌고 벌하며, 인간은 신에게 이끌림을 받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왜 창세기나 여타 신화에서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이 피조물들에 대해서 어떤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 그리고 왜 이러한 모티브들이 여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경전들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가?


여기서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나온 비슷한 구절을 가져와서 비교분석해보겠다:로마 가족법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가장의 권위는 법적인 권리가 아닌 아버지라는 지위에서 오는 '사실적인 지위'가 법적인 권리의 형태로 굳혀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창조한 자의 '권위'란 창조당한 피조물과 어떠한 형식으로든 권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가족애든 가장의 권위이든 가정폭력이든 간에 기저에 깔려있다(나는 너를 창조했으니, 너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 사실과 법의 혼재)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그것이 폭압적인 강요든, 무조건적인 사랑이든 간에 말이다.


엑스 마키나는 어찌보면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SF 영화다: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창조물을 창조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인지 아니면 피조물과 창조주 모두의 파국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SF 장르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논지를 발전시켜나갔다. 일례로 이 블로그에서 다룬 스플라이스를 보자(리뷰는 여기):스플라이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야기를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이야기로 다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근친상간과 비뚤어진 가족의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뒤틀린 막장드라마와도 같은 관계를 통해 영화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갖고 있는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관계와 파국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성정치'적인 관계로 발현된다:왜 극중의 에이바는 '여성'이라는 뚜렷한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칼렙의 표현처럼, 굳이 인공지능이라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릴 필요 없이 어떤 형태라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든은 창조주를 닮은 인간 여성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야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수준에 올랐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일 수 있다:인간이 그것이 하나의 어엿한 지성을 가졌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 모습을 하고 개의 사고 방식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에이바의 탄생에는 전적으로 네이든의 뒤틀린 욕망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에이바에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한 점,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들었고 쿄코라는 메이드 겸 창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 참고로 안드로이드는 남성형을 지칭한다)를 만들고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는 폭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 네이든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형 가이노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실험하고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오히려 영화는 이들을 배경으로 옮기고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도록 만들고 네이든의 의도에 대해서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자극적이진 않지만 담담하게, 그리고 무기질적인 톤으로 구축한다. 영화는 하나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인공적이고 강박적이며 무균적인 환경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실제 에이바의 CG 이외에는 돈이 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저예산의 영화는 깔끔하고 강박적으로 컷을 배치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컷 구성들은 쿄코와 에이바라는 존재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탈색시킨다. 네이든이 쿄코와 에이바를 향해서 갖는 뒤틀린 성적 욕망은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인공지능을 정의내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두꺼운 껍질 아래로 숨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기질적이고도 두꺼운 껍질 아래에 깔려있는 음험한 욕망을 언뜻 언뜻 내비침으로서 관객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영화는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 탈출하고자 하는 클리셰를 풀어낸다:칼렙은 에이바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심지어는 성적인 이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에 칼렙은 에이바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며 에이바를 네이든이라는 폭압적인 마초로부터 구해내고자 노력한다:하지만 여기에 거대한 반전이 숨어있다. 사실 네이든이 에이바를 디자인 할 때, 칼렙이 성적인 이끌림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칼렙의 야동 취향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을 한 것이었다. 네이든의 테스트는 엄밀하게 튜링 테스트 그 자체가 아닌 에이바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여성성을 자각하여 인공지능을 넘어서 개인으로서 자유를 추구할 것인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즉, 칼렙이 에이바를 향해서 느끼는 애정 역시도 조작되고 통제되어있는 실험의 변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 영화는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제 3의 대안으로 나아간다:칼렙 역시도 네이든과 마찬가지로 에이바와의 성정치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이상형인 에이바를 사랑하고 구한다는 기존의 성역할과 판타지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이바가 네이든을 살해하고 자유가 된 순간, 에이바는 칼렙을 네이든의 저택에 가두어버리고 홀로 저택을 떠난다. 마치 모든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재결합이 아닌 떠남을 택함으로서 인간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입센의 인형의 집처럼, 에이바 역시도 갇혀있는 여성과 구출된 여성이라는 클리셰 및 성적 대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립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를 증오한 피조물이라는 클리셰도, 자신의 관념이 투영된 피조물을 사랑한 창조주라는 클리셰 모두를 벗어난 제 3의 대안이며 훌륭한 반칙이다.


결론적으로 엑스 마키나는 훌륭한 SF 영화이다:영화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어낼 때의 욕망과 에고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관계를 통해 풀어내었고, 그것을 부숴버리는 엔딩을 제시함으로서 관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엑스 마키나가 소설가였던 감독의 첫 데뷔작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엑스 마키나 이후의 영화 역시도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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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일행의 찬란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이었고 또 별똥별이 떨어진 날이었던 1990년 6월 22일. 멋쟁이 게리 킹은 각양각색의 친구들 네명을 데리고 동네에 있는 열두개의 술집을 하룻밤안에 모두 순례하는 계획을 세운다. 게리와 친구들은 "골든 마일" 을 따라가지만 단 세개의 술집을 남겨둔채 모두들 약을 빨고 술에 취해서 나가 떨어지고 만다. 게리는 그 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기억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현재 게리는 지금 생활에 넌더리가 나서 그 옛날 미처 다 하지 못한 술집 순례를 하자며 친구들을 다시 불러오기 시작한다. 티격태격하면서 술집에 가기 시작한 친구들과 게리는 마을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1990년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었고 이상하게 하나도 안 늙은 술집주인들은 주인공들을 전혀 못 알아본다. 주인공들은 곧 마을 사람들이 파란 잉크로 찬 로봇들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위험에 처하지만 게리는 술집 순례를 계속해야된다고 우기는데...(엔하위키 시놉시스)


월즈 엔드는 에드가 라이트가 감독하고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두 배우가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일찍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서 과거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훌륭한 재구성을, 션 오브 더 데드(국내판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통해서는 좀비 영화와 코미디를 능숙하게 합쳤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전의 두 작품이 과거 영화들을 향한 오마주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월즈 엔드의 테마는 어떤 영화들의 오마주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도 묘하게 앞선 작품들과는 빗나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묘하게 엇나가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월즈 엔드는 이 3부작들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인상깊고 뜻깊다. 물론 엔딩의 과격함과 아쉬움이 약간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즈 엔드는 3부작의 마무리로써는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월즈 엔드가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 내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션 오브 더 데드의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술집 윈체스터로 도망친 션은 자신의 어머니가 좀비에게 물려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좀비에게 물린 그녀가 결국은 '좀비'로 변할 것이기에 머리를 으깨서 죽이자는 친구한테, 션은 제발 그런 이름(=좀비)으로 부르지말라고 항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션이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적당한 이름이 없으니 그것the Thing이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션 스스로가 좀비를 좀비라 칭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션은 좀비를 좀비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은 일전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http://leviathan.tistory.com/1819) 내용은 다음과 같다:션 오브 더 데드에서 션은 좀비가 일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친구, 가족, 직장 동료 같은 구체적인 '개개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 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가 좀비이기 때문에 머리를 짓이겨서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손쉽게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영화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션 오브 더 데드는 똑똑한 영화이다: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가 갖는 행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거부하며 마지막에는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즈 엔드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정 반대의 장면이 등장한다:게리와 그 친구들은 파란 잉크가 가득한 대체된 사람들을 '로봇'이라 칭한다. 그러자 로봇인 그들이 반박한다:로봇은 체코어의 '노예'라는 단어에서 등장한 단어인데, 우리를 보라. 우리가 어딜봐서 로봇, 즉 노예란 말인가? 이러한 그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게리와 그 친구들은 그들을 '로봇'이라 칭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첫번째 작품에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극도로 꺼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서, 왜 여기서는 아주 쉽게 무언가를 '노예'라고 칭해버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하게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영화가 이 대체된 인간들을 일방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나름 충격적인 종말 이후, 이 대체된 인간들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다. 심지어 게리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데, 이 새로운 친구들 모두가 '대체된 인간'이다. 영화는 대체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영화는 어떠한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롱 가득한 '로봇'과 종말 이후의 대체된 인간들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가장 중요하며 유일한 차이는 바로 '네트워크'의 유무이다:네트워크는 인류를 계몽하여 은하계 사회의 일원에 걸맞는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최첨단 기술을 전파하고, 긍정적인 캐치프래이즈와 더욱 완벽하고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을 한다. 


네트워크라는 빌런의 존재는 기존의 외계인 빌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그들은 인류를 침략하거나 그들 중의 일부로 개종하러 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아닌 유대감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숭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 땅에 강림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긍정성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마지막엔 기술문명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게리 일행이 도덕적으로 '더 나쁜' 집단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야말로 악의가 없는 순수하게 선한 세계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악의없는 순수한 선이 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도덕적으로 완벽하기에 반박이 불가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원하기에 반대세력을 쓸어낼 수 있는 추동력을 갖는다. 네트워크가 순수한 인간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만명의 도시 주민들을 대체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과거 나치즘이 우성 아리아 인에 의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리아 인 이외의 인류를 향해 범한 인종청소라는 범죄의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긍정의 세계란 지극히 파시즘적인 세계라고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감'이나 '더 나은 인간' 같은 자기계발서에서 다룰 법한 가치를 기치로 내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체된 인간은 '노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긍정의 세계에 대한 경계가 3부작 중 하나인 뜨거운 녀석들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마을 장로들은 모여서 영국 최고의 마을 상을 받기 위해서 부랑자, 불량 청소년, 범죄자 등등을 죄다 죽이고 암매장한다. 주인공이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하냐고 물어보자 더 좋은 선을 위해서For the greater good이라고 대답을 한다. 일견 이 황당해보이는 상황은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다:영국 최고의 마을상이 공공선Greater good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니, 애시당초에 공공선이라는 것의 이름 아래서 행해지는 배제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감독은 이미 월즈 엔드 이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꼬기만 했었던 뜨거운 녀석들과 다르게, 월즈 엔드는 감독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 포함되어 있다.


네트워크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게리와 그 친구들을 보자. 특히 게리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다:우선 그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며, 유치하며, 그의 좋은 시절 추억을 위해서 모든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자기 술친구를 위해 어머니까지 팔아먹는 등 엉망진창인 인간 쓰래기라 평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좋은 시절 추억에 극도로 집착한다: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뒤 느꼈던 충만감과 자신감의 순간에 집착하여, 게리는 술을 마시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도달한 곳은 친구들을 화나게 만들고 실망시키며, 동시에 그 자신도 알콜중독자일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골든마일 재패에 집착한다. 그것이 그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는 바로 인간의 '병신성'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피터는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Arcade Fire, Windowsill), 인간은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것처럼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로 나아가는 완벽하게 긍정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병신짓을 하던 중에 입은 흉터를 드러내거나, 이혼한 아내의 결혼반지임에도 그것을 찾으려는 앤디의 모습, 가장 훌륭했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며 친구의 만류에도 술을 계속 마시려는 게리의 모습,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친구들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전적으로 과거에 매여있으며 육체적인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들은 무한 긍정을 주창하는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된 인간들과 구분될 수 있다. 어찌보면 이렇게 병신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의내리는 '무언가'라고 영화는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월즈 엔드의 여정은 무한 긍정의 세계 속에서 병신같은 인류의 면모를 고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계몽'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네트워크는 최첨단 기술들을 모두 파괴하며 지구에서 떠난다:아마도 월즈 엔드에 있어서 껄끄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텐데, 우리는 이미 최첨단 기술 사이에 살고 있기에 그러한 기술의 절멸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병신같게 잘 놀다가 전 지구급으로 스케일을 키우는 엔딩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본인 역시도 좀더 부드럽고 납득이 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그 괴리감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종말 이후'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네트워크가 떠난 뒤 기술 문명의 종말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혼란과 광기와는 완전하게 다르다. 그들은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앤디), 원하는 것을 얻거나(아내와 재결합한 앤디, 스티븐은 피터의 동생과 결합한다), 혹은 종말 이전과 다름 없는 삶(대체된 피터와 올리버는 종말 이전의 생활을 하는것처럼 보인다)을 살게 된다. 네트워크는 인류에게 더 좋은 세계와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본질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없더라도 인류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영화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멸망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게리는 술도 끊고 면도도 깔끔하게 한 모습으로 새로운 친구들과 모험을 즐긴다. 게리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자신과 일정 정도는 화해하며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규칙(특히 술을 끊은 모습에서)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영화 월즈 엔드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더 나은 과정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갖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죽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영화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하며 통찰력이 느껴졌던 부분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결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월즈 엔드는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며, 이전 작품들과 같이 사람들과 술한잔 하면서 보기에는 딱 알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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