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1982년)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http://leviathan.tistory.com/1681)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는 진짜와 가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안드로이드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을 무엇이 인간인지를 구분하는 주요한 능력으로 설정한 점, 가짜 양이 아닌 진짜 양을 사고 싶은 데커드의 고뇌와 피로, 마지막으로 일련의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희망 섞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등을 통해 소설은 철저한 논리적인 흐름과 과학적 가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소설의 핵심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감정의 이입'과도 같은 모호한 영역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필립 K 딕은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진짜와 거짓이 구분이 점점 힘들어지는 산업 문명과 도회적인 고독과 우울감 등을 한 데 어우러놓았으며, 수많은 SF 소설 팬들을 매료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년작)은 리들리 스콧이 위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원작을 각색하여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점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가 자신의 창작물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피로에 찌든 배나온 중년 데커드가 헐리웃 액션 배우인 해리슨 포드로 변하는 등 블레이드 러너는 원작을 모두 뜯어고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의 핵심은 여전히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의 모호성,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서는 그것이 점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피로감을 독특한 문체로 풀어냈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철저하게 상징의 시각화와 모호한 상징 네트워크에 구성하여 기반하여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흥행 대참패로 이끌었지만, 영화사에 길이 남는 SF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여전히 구작과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강렬한 이미지들과 상징의 느슨한 네트워크, 그리고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전개와는 다른 비정형적인 전개들까지. 좋게 이야기하면 개성이 넘치지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대중들에게 먹힐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을 만드는 데에 가장 적격은 바로 드니 빌뇌브이다:드니 빌뇌브는 일반적인 영화 시놉시스들을 미장센과 프레임, 비주얼을 이용해 한바퀴 꼬아놓는데 재능이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그 재능은 어느정도 발휘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드니 빌뇌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십분 발휘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독창적인 재해석들과 이미지들이 원작에 사로잡혀 희석되었다는 느낌이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처음 나왔을 때, 영화가 우리에게 약속한 미래는 추적거리는 중금속 산성비와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퇴폐적인 네온사인들, 그러한 암울한 세계에 바벨탑처럼 위압적으로 서있는 마천루였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드니 빌뇌브는 우리에게 자연물이 모두 죽어버린 인공물의 미래를 약속한다. 오프닝 시퀸스의 광활하게 펼처진 합성농장들의 유리 온실들,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들과 퇴폐적인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도시, 도시 너머의 쓰레기장들 등등 영화는 자연물의 존재를 완벽하게 배제한다. 그리고 이 인공물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연은 죽었거나(사퍼의 집 앞에 놓여있는 하얗게 고사한 나무, 닳고 닳아버린 목마 인형) 허구(스텔린의 기억 제작소 시퀸스 같이)에 불과하다.


이런 철저한 인공물의 세계는 원작 소설과 전작의 테마인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진짜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전작이 시각적 상징을 통해서 데커드가 인간인지 자체에 의문을 갖게끔 만드는 등 서사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2049는 영화 내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며 서사의 모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2049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압도적인 인공의 풍경이다:영화는 거대한 인공의 풍광 속에서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기하학적이고 압도적인 도시 건물들에서부터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폐허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라져버린 호텔까지,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피로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2049의 등장인물들 모두 어딘가 피로함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이미 자신을 둘러싼 풍광에 압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49는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보는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전작이 오프닝 시퀸스에서 눈이 등장하거나 타이렐의 안경(나중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을 엄지로 터뜨린다), 데커드가 레이첼을 테스트할 때 스크린을 통해서 바라본다던가, 인간과 합성인간을 구분하는 보이그트 캄프 시험이 동공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 등등에서 무언가를 본다라는 시각적 인지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산업 문명과 매스 미디어의 등장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다채롭고 화려한 시각 자극을 대중에게 선사해왔기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닌 '스크린'이나 '안경'을 통해서 거쳐서 보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인공성에 전작은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2049의 보는 행위에 대한 이미지는 전작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부분도 있지만(월레스 비서인 합성인간 러브가 드론을 조종하는 안경으로 K를 보는 점, 월레스의 드론 의안, 거실에 놓여있는 K의 책상 위치-창문을 바라보는 등등) 전작에 비해서 더 나아간 부분도 있다:K의 가상 연인은 조이의 경우, 홀로그램으로써 반투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반투명함이 그녀를 인지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게(실제의 것의 아니라는) 만든다. K는 조이를 사랑하나, 동시에 홀로그램이라는 이 '반투명함'(실제하되, 실제하지 아니한다)이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모호'의 영역으로 이끈다. 또다른 모호의 이미지는 물을 통해 반사되는 빛과 어둠의 일렁거림이다:월레스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빛의 반사가 아닌 빛과 어둠의 교차하는 모호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바로 여기서부터 2049는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다:전작의 레이첼은 데커드와 관계하여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경찰국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불경이며,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면 진짜와 거짓은 분명하게도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돌하게도 2049는 바로 이 진짜와 거짓을 섞어버리고, 그 혼합에서 무언가 새로운 진짜와 희망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본다. K는 프로그래밍 된 대로 행동할 뿐인 가상 연인 조이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짜라 할 수 있을까, K가 가진 주입된 기억을 통해서 느꼈던 감정들은 과연 거짓이었을까, 합성인간과 인간이 사랑하여 낳은 자식은 과연 거짓일까. 진짜와 거짓의 이분법이 아닌 진짜와 거짓이 섞여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2049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기억이 존재한다:영화는 본다는 행위와 함께 기억과 기록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스텔린 박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억의 핵심은 불분명하며 흐릿하고 뒤섞여있다는 점이다. 대정전으로 모든 데이터들이 유실되었을 때, 구세대적이고 불분명한 아카이브는 남아서 후세에 기록을 전파한다. 기억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인지 그 이상을 넘어서 시간에 의한 필연적인 소멸에 저항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기억이 설령 K에게 주입된 것이라 하더라도, K는 그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진짜 데커드의 딸이 누구인지를 추론해내게 된다. 그것이 설령 거짓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K는 거기서 감정을 이입하여 무언가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에 자신만의 야심을 섞어서 만든 훌륭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전작이 그랬듯이 2049 역시도 이미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있는 작품이며, 감상자의 능동적인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49는 전작을 너무 충실하게 따른 나머지 방대하고 느슨한 서사를 만들어버렸다. 장르 영화적인 몰입이 전혀 없고 도시의 살인적이고도 위압적인 풍광 아래서 관객마저도 같이 신음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또한 전작에 많은 부분을 답습한 나머지, 이미지들이 너무 방대하게 퍼져있다는 것도 문제다. 만약 기억과 진실-거짓의 관계에 대해서 조명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전작에서의 이미지들(특히 쓸데가 하나도 없었던 리들리 스콧 특유의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대거 처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훨씬 괜찮았으리라 본다.


결론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좋은 의미, 나쁜 의미 모두에서 블레이드 러너 전작의 완벽한 재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싫어할 것이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좋아할 것이다.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가 세기말과 디스토피아적 세계, 모호함에 대한 이미지로 재평가 받을 여지가 있었다면 2049에게는 그런 재평가 기회가 존재하지 않을 거란 점이다. 거기에 건질 것이 충분히 많이 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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