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락스테디 게임즈가 만든 배트맨 아캄 시리즈가 게임 업계 및 서브컬처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이전까지 나왔던 많은 케릭터 게임들은 영화나 만화의 마이너 타이업 게임으로써 프랜차이즈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아캄 시리즈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었다:아캄 어사일럼은 처음 등장하였을 시, 오롯이 '배트맨이란 케릭터는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춰놓고 게임을 구성하였다. 전투와 잠입, 수사 등의 다양한 요소들은 새롭지는 않았지만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와 맞물리면서 유기적인 시너지를 냈었고 아캄 시티에서 아캄 나이트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3부작을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캄 시리즈의 성공은 수많은 미국 만화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였다:과연 아캄 시리즈의 성공이 다른 만화 케릭터로 옮겨갈 수 있을까? 배트맨이 그러했었던 것처럼 다른 만화 케릭터를 플레이어가 조작하고 경험해볼 수 있을까?


마블의 스파이더맨(2018)은 아캄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전에도 스파이더맨은 게임들이 있었다:소니에서 나왔던 영화 삼부작에 맞춰서 게임이 나오거나, 쉐터드 디멘션즈, 레고 마블 히어로즈 시리즈나, 이런 게임들은 항상 있어왔다. 하지만 영화나 만화의 타이인 작품이 아닌,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트리플 A의 규모에 맞춰서 게임을 만든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스파이더맨을 개발한 인섬니악 게임즈는 이미 라쳇 앤 클랭크나 인퍼머스 같은 프랜차이즈로 검증된 커리어를 갖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소니의 퍼스트 파티라는 타이틀과 이점을 갖고 있는 회사였다. 락스테디가 아캄 시리즈 이전까지 크게 유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배트맨과 아캄 시리즈로 선두를 빼앗긴 마블이 절치부심하고 소니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의 완성도 역시 들어간 노력과 자본에 아깝지 않다고 평할 수 있다.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기본적으로 오픈월드의 장르를 취하고 있다. 게임은 뉴욕이라는 도회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여기저기 할 거리를 흩뿌리고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할 거리를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지만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에 비해서는 다소 간소화된 부분들이 있다:예를 들어 GTA5의 경우, 플레이어는 군중 속의 일원으로 거리를 함께 누비며 사고를 치거나 운전을 하거나 등의 활동을 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군중의 일원이 아닌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거리를 내려다 보는 영웅 스파이더맨으로써 활동한다. 콘텐츠의 많고 적음을 떠나, 군중과 상호작용 요소가 대부분 삭제되었기에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과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보다는 아캄 시리즈, 특히 아캄 나이트의 고담 시와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아캄 나이트에서 고담 시에는 군중이 존재하지 않으며, 도시는 거대하고 할 것들은 많지만 개발자들이 기획 해놓은 방식으로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정형적인 부분들이 있다. 스파이더맨 역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는 오픈월드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콘텐츠의 배분이나 소비 구조는 기획자가 설정해놓은대로만 즐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아캄 나이트를 연상케하는 구석들이 많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은 아캄 나이트, 아니 여타 오픈월드 게임이나 케릭터 게임 등을 넘어서는 매력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스파이더맨의 전매 특허인 거미줄을 활용한 파쿠르 요소다. 원작 만화에서 스파이더맨은 마천루 사이로 거미줄을 쏘면서 자유롭게 이동한다:스파이더맨은 때로는 투석하듯이 웹슬링을 하거나, 짧게 거미줄을 쏴서 자신을 끌어당기거나, 양 손과 거미줄을 이용해서 자신의 몸을 급격하게 끌어당기는 등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은 마천루라는 도회적인 풍경과 맞물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지만, 게임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다는 문제가 있었다. 인섬니악은 바로 이 부분에서 트리플 A 급 게임 다운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마블의 스파이더맨 2018은 모든 도시의 빌딩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난간 등의 디테일을 집어넣고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인썸니악 게임즈는 스파이더맨을 통해 단순히 난잡하게 디테일으로만 채워넣은 것이 아닌, 직관적인 조작으로도 다양한 동작을 수행할 수 있게끔 만들어서 단순히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운 게임을 만들어내었다.


스파이더맨의 파쿠르 요소의 핵심은 '가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쿠르는 이러한 요소를 감안하여 설계되어 있으며, 사용하는 버튼에 따라서 크게 3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스파이더맨은 오른쪽 트리거 버튼을 이용해서 기본적인 파쿠르와 웹슬링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플레이어가 공중에서 거미줄을 쏘아 진자 운동을 하며, 가속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데 이것이 기본적인 이동의 핵심이다. 또한 이 상태에서 벽을 타고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웹슬링은 주변 지형에 영향을 강하게 받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거나 웹슬링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다. 본 게임에서 가속은 고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최대가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이 점프(X) 버튼을 이용한 웹 집이다. 웹 집은 주변의 높은 지형지물이 없어서 웹슬링 상태로 이행하지 않더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대 고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빌딩을 타고 달릴 때, 맨 끝 난간에서 X버튼을 타이밍 좋게 누르면 달리던 속도를 유지하면서 옥상 층을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 


마지막은 난간이나 돌출부를 오른쪽+왼쪽 트리거를 눌러서 끌어당겨서 수평하게 먼거리를 이동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속도를 빠르게 얻을 수 있지만, 최고 속도를 얻는데 상당한 조작을 필요로 하며(타이밍 좋게 X를 눌러야 한다던가), 고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웹슬링이나 벽타기를 통해 고도를 끌어올리거나 웹집으로 고도를 유지해줄 필요가 있다. 종합하자면 플레이어는 최고 속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파쿠르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게임은 이를 직관적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어크의 원버튼 파쿠르와 비교해보자면 스파이더맨의 파쿠르 시스템은 상당히 흥미롭다 할 수 있다:버튼 하나로 파쿠르 모드로 나뉘어지는 어크는 벽타기 등의 파쿠르가 상당히 단순화되었다. 무언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것처럼 보이더라도, 어크는 플레이어가 잡을 수 있는 난간이나 뛰어넘을 수 있는 플랫폼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은 파쿠르 요소를 3 버튼으로 쪼게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요소를 늘리는 동시에, 직관적으로 접근한 덕분에 조작이 난잡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것을 시도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더이상 정해져있는 난간이나 플랫폼에 얽메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 덕분에 스파이더맨은 그저 빌딩 사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즐겁다. 


스파이더맨의 전투 시스템은 아캄 시리즈의 프리플로우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 플레이어는 주먹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전투 중 물흐르듯이 매우 간단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아캄 시리즈를 그대로 이식하지 않고, 전투에 3차원 공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아캄 시리즈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플레이어는 에어 런치로 적을 공중에 띄워넣고 공격을 가할 수 있는데, 이는 아캄 시리즈보다는 데빌 메이 크라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타일리쉬 액션 개념에 가깝다. 물론 별도의 조작없이 버튼을 길게 누르는 것만으로 적을 띄울 수 있고, 살짝 텀을 두고 공격을 누르는 것만으로 공콤이 이어지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게임의 일부로써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스파이더맨에서 공중전은 단순히 스타일리쉬한 게임 플레이를 넘어서 시스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게임은 아캄 시리즈와 달리 총을 든 적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총의 사선에서 벗어나야하는 순간이 많다. 또한 위협적인 적들을 피하고, 한 명을 집중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CC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처음에 아캄 시리즈를 하듯이 플레이를 하면(회피 위주의 지상전 플레이), 게임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구석이 많다. 피하기 어려운 공격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공중으로 끌어올려서 한 명씩 격파하고, 공중 회피를 자주 사용한다면 난이도가 그럭저럭 할만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스파이더맨은 3차원의 공간에서 전투를 할 것을 요구하며, 그 배경으로 거대한 필드나 입체적인 공간들(빌딩 옥상이나 이런 곳)을 제공하며 자유로운 움직임을 구사하기 때문에 전투는 아캄이나 여타 게임들과 비교하여 자유롭고 상쾌한 느낌이다.


스파이더맨은 또한 웹슈터 이외에도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서 전투를 풀어나갈 수 있으며, 이는 상당히 중요하다:적의 체력과 상관없이 적을 바닥이나 벽에 거미줄로 고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 하나 하나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며, 쓰는 재미가 있지만 다양한 도구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도구 휠을 띄워서 도구를 일일이 지정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고, 웹슈터를 제외하면 도구들은 무작위로 보충되기 때문이다. 자주 쓰는 도구 몇개라도 단축키로 지정해놓고 빠르게 불러낼 수 있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을 건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


스토리 부분에서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아캄을 훌륭하게 벤치마킹하였다. 아캄 시리즈의 근본적인 테마는 배트맨이 누구인가?이다. 이 테마를 위해서 배트맨의 대적자들인 빌런을 배치하고, 배트맨에게 개인적인 재난과 시련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확고한 케릭터를 정립한다. 스파이더맨도 유사하다. 게임은 존경했던 멘토 옥타비아누스가 어떻게 망가지게 되는지, 실제 악이라 할 수 있는 오스본은 처벌받지 않고, 스파이더맨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협받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시민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의 고뇌를 동시에 다뤄내고 있다. 게임이 전반적으로 빌런을 아껴서 아쉽다는 느낌은 있지만, 큰 틀에서의 스토리는 스파이더맨이란 영웅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스파이더맨은 훌륭한 트리플 A 게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에는 게임 외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그것은 바로 아캄 시리즈를 너무 의식하고 벤치마킹한 나머지 몇몇 부분에서는 카피켓이라 할 수 있을 정도고 게임을 배낀 것이다. 트리플 A 게임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기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한 작품의 공식을 이식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다. 하지만 유비소프트의 게임 프랜차이즈들이 서로를 모방하고 배끼더라도, 어느정도는 프랜차이즈의 성격에 맞게 시스템을 개수하는 것처럼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몇몇 미션들이나 장면들은 '그대로 배낀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이 스콜피온의 독에 당해서 해독제를 만들고 도시를 활보하는 미션 같은 경우가 있다:이 장면은 분명히 아캄 시티에서도 비슷한 시퀸스가 있었으며, 심지어 연출도 비슷하다. 그외에도 라디오 타워 개방을 위해 주파수를 맞추는 부분 등의 자잘한 부분에서도 아캄 시리즈의 요소를 그대로 들고온 경우를 볼 수 있다.


또다른 예는 잠입 미션이다:전반적으로 스파이더맨의 잠입 요소는 본편의 파쿠르나 전투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깊이가 얕고 사족에 가깝다. 아캄 시리즈에서 잠입 파트가 배트맨이란 케릭터가 공포로 적을 지배한다는 컨셉을 구현하는 주요한 연출과 게임 플레이였다면, 스파이더맨에서 잠입은 뭔가 그 컨셉이나 당위성이 부족하다. 심지어 몇몇 서브 미션의 경우, 잠입 플레이와 전투 플레이가 상충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예를 들어 창고 제압 미션의 경우, 첫번째 웨이브의 적들을 잠입으로 모두 처리할 시 두번째 웨이브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적들이 스파이더맨의 존재를 인지하고 공격을 가한다. 보통의 잠입 및 제압 플레이의 경우, 웨이브가 가산되더라도 잠입상태를 유지한채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파이더맨의 잠입 플레이는 뭔가 전체 게임 플레이에서 겉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차라리 이런 부분에서 과감하게 잠입을 쳐냈다면 게임은 좀더 깔끔하고 괜찮아졌으리라 본다.


결론을 내리자면, 스파이더맨은 아캄 시리즈의 좋은 점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재밌는 게임을 만들어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오픈월드 게임치고 클리어 후의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간혹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스파이더맨이라는 게임의 분량이 부족하거나 재미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아캄 시리즈를 이전에 플레이했던 사람들에게 스파이더맨은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게임이기도 하다.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추후에도 이런식으로 후속작을 만들면 어떤식으로든 스파이더맨의 개성과 배트맨의 개성 사이에서 충돌하여 완성도가 떨어질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