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PS2를 갖고 계신 분들이었다면 령 제로 시리즈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한다:한글화 되었으며, 독특한 게임시스템과 호러 게임으로서의 감수성을 지닌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령 제로 시리즈는 그렇게 항상 재미를 보는 게임은 아니었다. 령 제로 누레가라스의 무녀가 나오기 전인 현 시점에서 시리즈 전체 누적 판매량이 130만장이라는 것은(http://www.cinematoday.jp/page/N0062343) 한 작품당 대략 30만장 전후를 팔았다는 계산으로 나오기 때문이다.(전세계 통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외 시장에서 령 제로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본인으로서는 금시초문이다.) 심지어는 월식의 가면의 경우에는 닌텐도 자본이 들어간 작품이었으며, 누레가라스의 무녀가 나오기 전까지는 팬덤 사이에서 시리즈 전체가 이미 고사했다고 잠정적인 결론까지 난 상태였다. 하지만 령 제로에 본인이 주목하는 것은 메인스트림 호러 게임들과는 다른 감성으로 호러라는 테마에 접근하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게임 프랜차이즈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메인스트림 호러 게임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미싱링크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령 제로가 다른 호러 게임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가 필요하다: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게임의 베이스가 서구권의 B급 호러 SF영화이다. 뒤틀린 신체와 피칠갑, 죽일듯이 달려드는 괴생명체들과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주인공 등등의 요소로 구성된 데드 스페이스가 취하고 있는 공포의 전략은 지극히 '육체적'이다. 게이머는 죽음의 이미지를 한 괴물들이 증식하고 감염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나 또한 저렇게 될 수 있다 라든가 어떻게 저렇게 뒤틀린 육체를 가질 수 있는가 등의 시각적인 충격 혹은 고통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호러 게임에서 게이머는 주인공에 이입하며 절박함을 느낀다:데드 스페이스의 경우에는 디바이더에게 사로잡힌 아이작의 데드신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디바이더의 부속지가 아이작의 목을 뜯어내고는 아이작의 몸을 차지하고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름 끼치는 감정을 경험했으리라 본다. 나의 분신이 감염되어 그들이 된다, 그렇기에 이를 피해야 한다, 라는 단순한 논리가 게이머의 원초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데드 스페이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호러 게임에서는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 괴물들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변이라는 측면에서 게이머를 공포로 몰아넣고 공감하게 만드는 전법을 취한다.


하지만, 령 제로는 조금 다르다:령 제로의 공포는 통칭 J호러의 그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육체를 갖지 못한 원령들은 산 자를 아무 이유 없이 습격한다. 죽음은 감염되나,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무언가(원령)이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감염이 확산되는 과정은 육체적인 서양의 호러와는 다르게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을 파고듬으로서 성립된다. 주온이나 링처럼, J호러의 공포의 공간은 이질적인 공간들(거대한 고딕 호러풍의 우주선, 양옥 등등)이 아닌 TV가 있는 마루나 뒤집어 쓴 이불 속의 어둠, 심지어는 자신의 옷속 안의 어둠까지로 확대된다. 령 제로 역시 들여다 본 침대 밑에서 튀어나오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어깨에 올라탄 원혼이나 아이템을 잡으려고 뻗은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원혼 등등의 형태로 이를 차용한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통칭 J호러는 일정 시기 이후로 쇠퇴하였다는 것이다:J호러는 정신적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바이러스 처럼 상대를 파괴하고 자신을 복제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감염이란 테마를 서양 호러와 공유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원인이 되어서 한때의 반짝 유행으로 지나가버리고 말았다.(특히 구로사와 기요시가 절규로 취하고 있는 J호러의 안티테제를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J호러의 공포는 자극만 올라갈 뿐 본질적으로 왜 무서운가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였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령 제로는 J호러로부터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거기로부터 빗겨나가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많은 팬들이 언급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령 제로는 공포와 함께 어딘가 병적인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테마이자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은 다른 령 제로 시리즈를 해보지 않았기에, 전작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 수는 없다:하지만, 현재 플래이중인 누레가라스의 무녀를 통해서 과거 시리즈들을 어느정도 유추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작의 제목인 '누레가라스'란 '여성의 흑발이 물에 젖어 여러가지 색으로 빛나는 색'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게임이 지향하는 공포란 물과 어둠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목은 서장에서 미우가 웅덩이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통해 단순하게 소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 미학적인 구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젖어있는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게임 내의 그래픽 묘사와 아름다운 흑발을 늘어뜨린체 흐느적 거리는 여성 유령의 묘사 등등에서 령 제로는 기술적인 묘사를 넘어서서 장인의 혼이 느껴질정도로 세밀한 묘사에 집중한다. 즉, 령 제로 누레가라스의 무녀는 자신이 공포로 다루고 있는 테마들을 '아름다움'의 형태로 구현화하고 있으며, 단순하게 자극의 강도를 올리는데 집중했던 J호러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공포가 갖는 아름다움에 대해 사람들이 난색이나 의문을 표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병적인 매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항시 존재했었던 것이었다:현대 중학생들이 죽음과 병적인 이미지를 탐미하는 것을 소재로 다룬 오즈이치의 연작 소설 'GOTH'뿐만 아니라, 바타유나 사드의 저작들, 고야의 자식을 먹는 사르티누스, 맥시코의 죽음의 무도회, 죽음의 성인,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근대문학의 폐결핵 걸린 미소녀/미소년 등등의 다양한 문화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재밌는 점은 령 제로가 죽음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형태는 마지막 근대문학의 '폐병 걸린 소녀'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아름다운 소녀는 아름다움과 함께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월식의 가면에서는 그것이 질병의 형태였으며, 령 제로와 붉은 나비에서는 형제와 자매를 향한 근친상간 또는 비뚤어진 애정의 형태였다. 또한 문신의 소리에서는 죄의식의 형태로 드러났다. 누레가라스의 무녀는 아직 독단을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자살-살아남음의 형태로 구현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범접할 수 없음이라는 거리감과 죽음이 갖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은 게이머로 하여금 령 제로라는 호러 게임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령 제로는 특별한 호러 게임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특별한 호러 게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이 수많은 호러 게임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호러 게임의 장르를 개척하였고, 사라져갔다. 콜 오브 크툴루와 이터널 다크니스는 코스믹 호러와 광기를 게임에 이식시키려 노력하였다. 프롬 소프트의 알려지지 않은 괴작 구원은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탐미적이며 그로테스크한 호러를 만들고자 노력 하였다. 령 제로 이전에도 분명 령 제로에 영향을 끼친 작품들과 게임들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은 먼저 온 자들에 의해서 선취되었으며, 현재의 것은 선취된 것으로부터 변화하여 후대로 나아간다. 령 제로도 호러 게임의 큰 흐름에서 본다면 그저 거처지나가는 하나의 작품과 코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령 제로 누레가라스의 무녀는 어떤 의미의 작품인가? 그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참신함과 새로움의 가능성이 고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월식의 가면 이후, 새로운 신작에 대한 기대는 0에 수렴하였다. 하지만, 닌텐도의 서드파티 정책으로 령 제로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부활하였으며 Wii U라는 새로운 하드와 새로운 인터페이스에 적응한 모습으로 새로운 게임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물론, 클리어를 하기 전까지 성급한 단정을 내리는 것은 무리겠지만, 초반의 인터페이스와 전투 시스템은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령 제로 누레가라스의 무녀가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도, 서양 게임의 메인스트림을 탈 가능성도 나는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랜차이즈의 명맥이 이어질 정도로 성공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이는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꿈의 디아스포라, 꿈은 덧없이 흩날리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갖고 파종된다. 그리고 이 씨앗들은 언젠간 과거의 유지를 잇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령 제로 누레가라스의 무녀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게임의 가능성을 향한 빠진 고리, 즉 미싱링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