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스펙 옵스:더 라인의 이야기 모티브는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룩(Appocalypse Now)에 기초한다. 자기 집을 찾아서 머나먼 여행을 떠나는 오딧세우스의 이야기 오딧세이와 정반대로, 조셉 콘라드의 소설이나 지옥의 묵시록은 편안한 집을 떠나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광기 속으로 떠난다. 아도르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오딧세이가 영웅이 광기와 신화적 괴물과 싸워서 이기고 질서를 구축하는 이야기였다면, 이들(암흑의 핵심과 지옥의 묵시록, 그리고 스펙 옵스)은 질서로부터 떠나서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괴물 그 자체가 되버린 몰락한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1 그들이 여정 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광기와 폭력의 소용돌이이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소용돌이의 근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들은 무너지며 박살나며 미쳐간다. 2
스펙 옵스:더 라인 역시 그 연장선상이다. 자신의 원형을 여기저기 오마주의 방식으로 인용하고 있는 스펙 옵스:더 라인은 투입된 주인공들이 결국은 광기가 만연한 두바이의 폐허와 함께 다같이 미쳐버린다는 수라장의 결론을 취하고 있으며 게임의 이야기는 '선배'들이 쌓아놓은 왕도의 정석을 따라서 게이머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 3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지만, 스펙 옵스는 지옥의 묵시록이나 암흑의 핵심을 게임에 그대로 옮겨놓지 않는다:오히려 '게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서사 구조를 이용해서 게이머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이야기를 하자면, 스펙 옵스가 이루어낸 성과는 현세대(Xbox 360, PS3) 게임들 중에서는 특출난 무언가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4
현세대 게임들의 특징들을 한 두문장으로 축약할 수는 없겠지만, 콜 오브 듀티:모던 워페어로 대표되는 '밀리터리 슈팅'이 게임이라는 대중문화 내에서 거대한 '조류'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콜옵 덕분에, 밀리터리 FPS 게임은 하나의 표준서사를 갖기 시작한다:상대할 적이 있고, 그리고 이들은 엄청난 무기 5를 이용해서 세계평화를 위협하거나 세계질서를 흔드는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특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온갖 특수장비와 고가의 장비들을 동원해서 문자의미 그대로 쑥대밭을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이것들을 이용해서 건물 몇개 날려먹고, 비행기, 배 기타 등등을 때려부수고, 이 임무에서 저 임무로 건너뛰다가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세계를(하지만 대부분은 '미국'을) 구한다. 영웅들이 세계를 위협하는 적을 쓰러뜨리고, 질서를 보호하며 재구축한다. 6
이러한 과정에서 게임이 게이머들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 또는 이입'이다. 게이머들이 조작하는 인물들은 영웅이며, 세계를 구하는 강력한 행위자이다. 그리고 이야기들과 스크립트들은 이 영웅이자 게이머의 '행위와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재구축된다. 왜 모던 워페어 2에서 프레데터 미사일로 러시아 군인들을 쓸어야 했는가? 그게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꼭 필요했나? 배틀필드 3에서 항모에서 전투기 몰고 비행장을 폭격하는 초반 미션은? 대부분의 밀리터리 FPS에서 이런 대량 살상 병기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 상에서 '그게 꼭 필요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걸 넣으면 재밌겠지'라는 명제를 정당화 하기 위한 인과관계가 역전된 형태를 취한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게임들에 있어서 이야기란 행위자인 게이머를 위해서 만들어진 동기인 것이다. 7
스펙 옵스:더 라인이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스펙 옵스의 이야기는 게이머가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주인공(=게이머)을 점점 끔찍한 광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분명 게임이 시작할 때는 콘라드 대령의 무전을 확인하고 두바이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임무였는데, 게임 종반쯤 가면 그런 임무는 게이머들의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임무에서 점점 엇나가고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는 게이머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끔 달콤하고 악랄한 변명을 계속 제공한다. 게이머가 33연대와 첫 조우를 하고 전투를 했을 때를 보자. 흔히 다른 게임에서는 정의의 편이자 아군으로 나오는 미군의 머리통을 총으로 따버린 이후에 케릭터들은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이것은 정당방위이며 33연대는 국가와 임무를 포기한 집단이다'라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게임 종반부쯤 '정당방위'라는 핑계로 33연대 거의 전부를 몰살시킨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단 말인가? 게임은 이런식으로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게이머에게 어떤 끔찍한 짓을 하더라도 이를 회피하고 무시할 수 있는 달콤한 변명거리를 던져준다. 아니, 게임 속에서 끔찍한 짓을 하면서 점점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게이머들에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동앗줄('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등등)을 내려준다. 하지만, 이 변명이란 썩은 동앗줄이라서 게이머가 잠시나마 게임을 멈추고 이에 대해 생각을 하면 이 변명들이 얼마나 위태위태한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스펙 옵스에서 주인공들은 가장 강력한 행위자들이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두바이를 둘러싼 CIA와 33연대 사이의 세력 판도가 바뀌기 시작하며, 두바이의 피난민들의 생존 역시 주인공들의 손에 달려있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강력한 행위자의 행위를 변명에 의존하며 광기에 빠져가는 인간의 행위로 묘사함으로서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게임 마지막 콘라드 대령의 환상이 이야기를 하듯이, 주인공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통신 내용을 확인하고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임무를 무시하고 두바이에 남아서 진실을 찾고 33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했으며, 하는 행위마다 족족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켜서 두바이에 있는 모두가 주인공의 행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정점은 백린탄 이벤트이다.
스펙 옵스:더 라인을 대표하는 '백린탄' 이벤트는 바로 주인공의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참담한 결과의 가능성과 밀리터리 게임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게이머의 행위로 인한 폭력의 잔악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게이트를 지키는 33연대를 제거하기 위해서 백린 박격포를 쓰는 이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민간인을 지키는 33연대 죄다 태워죽였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학살해버리는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짓을 저지르며, 심지어 이 모든 과정을 게이머가 직접 하게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은 항변한다: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벤트 시작 부분에서 동료가 '언제나 다른 선택지는 존재합니다.'라고 항변하는 부분이나, 이벤트가 끝난 뒤에 '살인마들!'이라고 적들이 울부짖는 부분에서 제작자들은 게이머를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항변하려한들, 그건 다 변명에 불과해' 조롱한다. 백린탄 이벤트는 게이머의 선택과 행위가 불러온 끔찍한 폭력을 새하얀 섬광과 빛나는 연기 속에서 만천하에 드러내며, 게이머가 더이상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들어낸다. 8
그리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주인공과 게이머는 점점 더 절박해지며, 결국은 이미 망가진 무전기와 죽어있는 콘라드 대령을 작동하고 살아있는것처럼 만들어내서 책임을 전가시키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점점 절박해지고 미쳐가는 부분 있어서 스펙 옵스:더 라인은 왠만한 호러 게임의 장면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종종 연출해낸다. 그리고 주인공은 폭력으로 상황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폭력 그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라디오 타워에서 헬기를 탈취한 후에, 라디오 타워를 개틀링으로 박살내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헬기를 타워쪽에 붙여서 선회하라고 명령을 내린리며, 타워가 박살나는 장면을 보면서 환호한다. 또한 쓰러진 적들을 처형하는 처형 액션 역시 점점 과격해지면서, 이들의 정신상태가 점점 미쳐가고 있음을 묘사한다. 9
이렇게 게임 내부의 케릭터들과 게이머들까지 점점 미쳐가게 만드는 스펙 옵스:더 라인의 화룡점정은 바로 '이 모든 것이 네녀석의 영웅이 되고 싶어해서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비난하는 콘라드 대령의 환상(=주인공의 내면)과 함께 모든 변명과 정당화를 무너뜨려버리며, 게이머는 이로 인해서 자신이 했던 모든 행위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 주인공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행위자로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강력함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는 모두를 구하긴 커녕 모두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집어넣어버렸다. 그리고 게임은 게임의 말미에 모든 가식을 집어던져버리고 게이머를 정면으로 조롱한다:아직 영웅이 된 기분이 안 드셨습니까? 이게 다 당신 잘못입니다 등등. 10
기존의 게임들이 게이머가 영웅이 되기 위한 과정과 게이머가 폭력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를 구원하게 하는 이야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프레데터 미사일이나 무인 드론 조종이나)로 가득찼다면, 스펙 옵스:더 라인는 이를 뒤집어서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게이머)으로 인해서 모두가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폭력과 광기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드러냄으로서 기존의 게임들을 비꼬고 전쟁의 광기를 비판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런식으로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오만한 행위자를 조롱하는 이야기들은 존재했지만, 스펙 옵스처럼 게임의 형식을 훌륭하게 이용하면서 게이머를 변명으로 유혹하고, 끔찍한 행위를 저질러서 절박하게 만들며, 동시에 마지막 진실에 절망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스펙 옵스:더 라인은 마지막 진엔딩에서 과거 콘라드 대령이 주인공에게 언급하듯이 "우리는 집에 갈 수 없어. 우리같은 남자들의 인생에서는 반드시 넘는 선이 하나 있거든. 11"라는 선언으로 축약할 수 있다. 스펙 옵스:더 라인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이야기며, 집(=질서)에서 벗어나서 점점 광기에 타락하는 몰락한 영웅들이자 전쟁과 폭력에 대해서 훌륭하게 다룬 이야기이다. 하지만 스펙 옵스:더 라인이 대단한 것은 게임이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게임의 형식으로 훌륭하게 풀어냈고 기존의 게임들의 구조와 이야기를 훌륭하게 비꼬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게이머라면 스펙 옵스:더 라인은 꼭 해보시길.
덧.그래픽적으로 훌륭하지는 않지만, 인공적 아름다움의 극치인 두바이를
모래와 광기가 넘쳐나는 도시로 묘사한 부분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덧2.게임적으로 스펙 옵스:더 라인은 정말 할말이 없는 평범한 TPS의 극치이다. 게임적인 측면에서 기대하지 말기를.
덧3.덜 알려져있는 이야기지만, 더 라인은 과거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에 나온 스펙 옵스라는 FPS 프랜차이즈에 속해있다.
- 그리고 신화가 질서와 계몽이 되며, 동시에 질서와 계몽이 신화가 될 여지를 남겨놓는. [본문으로]
- 질서와 계몽이 신화에 의해서 해체되는. [본문으로]
- 암흑의 핵심의 작가 조셉 콘라드=콘라드 대령,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를 광신했던 미친 종군기자=라디오맨 등등... [본문으로]
- 물론 세상이 멸망한 것은 아니나, 두바이의 멸망한 풍경은 그야말로 끔찍한 대재앙 이후의 악몽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 굳이 FPS라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장르에서 콜옵의 서사는 변주 인용되고 있다. 에이스 컴뱃:어썰트 호라이즌을 보라. [본문으로]
- 보통은 ABC 무기(Atomic, Bio, Chemical, 핵-생물-화학무기)가 대부분이며, 혹은 핵무기 처럼 보이지만 핵무기는 아닌 이상한 물건을 들고 오기도 한다(에컴:어썰트 호라이즌) [본문으로]
- 모던 워페어 2의 이야기해서 말인데, 모던 워페어 2의 이야기란 플레이어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제 정도로만 작용한다. [본문으로]
- 백린탄이 어떤 무기인가는 이쪽을 참조하시길. http://mirror.enha.kr/wiki/%EC%88%98%EB%A5%98%ED%83%84#s-3.6.1 [본문으로]
- 천장의 불이 깜빡거리면서 다가오는 적이나, 죽은 동료의 얼굴을 하고 다 네녀석 때문이야! 를 외치면서 공격하는 적의 등장. 환영 등등... [본문으로]
- 게임 로딩 창에서 나오는 멘트들이다. [본문으로]
- 게임은 멀티 엔딩이다. 물론 멀티 엔딩이라고 해서 해피 엔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http://mirror.enha.kr/wiki/%EC%8A%A4%ED%8E%99%20%EC%98%B5%EC%8A%A4:%20%EB%8D%94%20%EB%9D%BC%EC%9D%B8#s-5.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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