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존재합니다.
1.
2001년 코드네임 47을 시작으로, 히트맨 시리즈는 게임 역사에 있어서 독특한 족적을 남겼다. 씨프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잠입 액션 혹은 암살 게임들이 있었지만 히트맨 시리즈는 변장을 이용한 잠입과 암살이라는 기믹을 통해서 다른 시리즈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을 구축하였다. 히트맨 시리즈의 본질은, 변장이라는 요소를 통해 타겟에게 접근해서 타겟의 움직임을 관찰 한 뒤, 타겟을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작사인 IO마저 이 창의력 경쟁에 뛰어들어서,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상상도 못한 창의적인 방법을 미션 곳곳에 심어놓기 시작했고 4편인 블러드 머니에서는 사고사 라는 개념을 추가하였다.
하지만 2006년 블러드 머니 이후로, 히트맨 시리즈의 후속작 소식은 없었다. 물론 중간에 IO는 케인 앤 린치 시리즈를 내면서 거하게 프랜차이즈와 제작비를 말아먹어버리는 대사고를 터뜨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트맨 신작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2011년 히트맨 시리즈 10주년을 맞이하여 공개된 히트맨:앱솔루션이 등장한다.
2.
히트맨 시리즈가 만들어내는 스테이지 구조는 여타 게임들과 다르다. 놀 거리는 가득 넣어두는 오픈 월드 게임이나, 콜옵식의 일직선 구조와 다르게, 히트맨 시리즈의 스테이지 구조는 전통적으로 '연극 무대'를 간략하게 다듬고 거기에 게이머가 개입해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구조라 할 수 있다. 게임 내의 NPC들은 각기 고유의 대본(스크립트)과 동선을 갖는다. 물론 잠입 액션 게임들의 대부분이 적의 순찰 패턴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히트맨의 NPC들 역시 스크립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게임들의 NPC들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히트맨의 가장 큰 특징은 이 NPC들의 동선과 패턴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이동 패턴 뿐만 아니라)가 게임 플래이의 핵심이라는 점, 그리고 NPC들 각자에게 조그마한 이야기를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다른 게임들과 차별된다. 게임 프로모션 영상에서는 'NPC의 삶에 끼어든다'라는 표현 그대로이다.
이런 히트맨 시리즈의 특징상, 변장이라는 개념을 이용한 '사회적 잠입'은 시리즈의 정체성, 그 자체이며 히트맨:앱솔루션도 이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앱솔루션은 여기에 인스팅트 게이지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전작들과 엄청난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이제 같은 소속(경비원, 법원 서기, 깡패, 경호원 등등...)의 제복을 입고 있을 경우, 상대방의 의심 게이지가 올라가게 되며, 인스팅트 게이지를 소모해서 이 의심 게이지를 지우지 않으면 적에게 곧바로 발각당하게 된다. 물론 전작에서도 너무 NPC와 근접하게 되는 경우, 적들이 47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시야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이제 게이머는 제복을 구하는 과정 뿐만 아니라 그 제복을 이용해서 어떤 루트로 효율적으로 인스팅트 게이지를 소모하며 타겟에게 접근, 암살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의심과 인스팅트 게이지 요소(인스팅트 게이지를 어떻게 수급하고, 얼마만큼 소모해서 적들을 지나칠 것인가? 등등)를 도입해서 게임을 재밌게 만들려는 시도였으나, 그 단점도 명백한 시스템이다. 사실, 후술할 스테이지 구성의 문제에서도 다루겠지만, 게임 반수의 스테이지에는 '하나의 NPC 부류'만이 존재하며 자신들 이외의 복장이나 계층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공격한다. 문제는 이들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스팅트 게이지 수급-소모 계산이 자칫 삐끗해서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예 클리어가 불가능하지는 않아서 기존의 전통적인 엄폐-잠입의 플래이 스타일 대로 진행을 하면 무난하게 돌파가 가능하다.(혹은 그냥 쏴 죽여버리거나....) 이럴 경우, 변장이 의미 없지 않느냐 라는 불만이 제기 될 수 있으나, 실제 잠입을 할 때 변장을 하고 엄폐 잠입을 할 경우, 의심 게이지가 올라가는 속도가 줄어들기에 변장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다.
여러 NPC 종류가 혼재되어 있는 몇몇 스테이지의 경우, 이 인스팅트 게이지를 이용한 잠입이 벨런스가 맞는다는 느낌을 받는데 실제 두가지 부류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 서로 다른 부류의 변장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예를 들어 경비-경비 변장은 의심해도, 경비-요리사 변장은 의심하지 않는다) 할 만하다. 하지만 스테이지 구조상 '암살'이 아닌 '잠입'의 경우, 한 종류의 NPC로 도배를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극소수의 스테이지의 경우, '고유의 변장'이 있어서 모든 장소에 의심없이 드나드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제작자들은 그런 변장이 많이 있으면 재미가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그런 변장은 미션 내내 찾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렵다.
3.
앱솔루션은 시리즈 전통의 게임 시스템 변화와 함께, 게임 플래이 스타일에 엄청난 변화점을 부여한다. 기존의 히트맨 시리즈들은 게이머에게 47의 장비를 뭘 들고 갈 것인지, 이를 어떻게 반입할 것인가, 혹은 어떤 식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게이머를 시작부터 고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게임 플래이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게 바로 '스나이퍼 라이플 가방'이라는 기믹이었다. 47은 다른 여타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호주머니에서 스나이퍼 라이플을 꺼내지 못하는데 이를 위해서 스나이퍼 라이플을 분해해서 넣어둔 가방을 47이 처음에 들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보안 검색대들을 제치고 어떻게 저격 포인트까지 가서 스나이퍼 라이플을 조립한 이후에 타겟을 처리하고, 탈출하는가? 이것이 스나이퍼 라이플 가방이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앱솔루션에서는 아쉽게도(?) 여타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도라에몽 주머니를 차용하고, '에이전시를 배신한 47'이라는 설정을 집어넣음으로서 장비 선택이 부자유스러워지는 기믹을 추가했다. 덕분에 47은 모든 장비와 변장을 현지 조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앱솔루션은 주변에 떨어져있는 일상의 도구들을 닥치는대로 주워서(벽돌, 병, 다리미, 훌라걸 조각상, 영수증 꽂이대 등등) 주의를 돌리는 등의 즉석에서 머리를 굴려서 넘어가는 임기응변을 요구하는 부분이 많다. 여기에 인스팅트 라는 요소를 도입해서 한 눈에 모든 요소를 파악할 수 있는 X레이 시야를 도입함으로서 플래이어게 직관적으로 어디에 도달하면 무엇이 있는지를(사고사 나 특이 포인트들) 표시한다. 전작들에 비해서 너무 직관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이건 또 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기존의 히트맨 시리즈들이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머리굴리기의 연속이었다면, 앱솔루션은 끝없는 잔머리와 시선 돌리기의 연속이며 X레이 시야로 도달해야할 곳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긴장감 넘치며 설령 그곳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겟의 움직임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관찰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47이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절한 벨런스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앱솔루션은 전반적으로 게임 컨셉의 변화와 그에 맞는 시스템적인 벨런스 조절을 거친 느낌이 있으나, 게임의 완성도를 갉아먹는 문제는 게임의 시스템이나 컨셉에서 오는게 아닌 '스테이지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일단 전작의 거대한 하나의 맵과 스테이지와 다르게, 본작은 타겟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수많은 작은 스테이지를 거치는 구조를 보여준다. 즉, '잠입'과 '암살'이 분절된 형태로 스테이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잠입이나 암살이나 하나, 하나의 스테이지들의 완성도는 괜찮다고 할 수 있으나, 상대적으로 암살 파트에 비해 잠입 파트는 상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도 적고 변장+잠입이 기묘한 배율로 배합되어있다. 재미 없다고는 말은 못하지만, 히트맨이라는 게임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암살 파트의 미션의 경우, 잘짜여진 스테이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잠입 파트와 별반 다를바 없이 목표한 지점까지로 '도달'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스테이지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터미너스 호텔의 경우, 목표지점까지 도달하면 플래이어가 암살을 하는 것이 아닌 스토리상의 강제 컷씬 연결로 이어져서 스토리에 따라서 암살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문제는 게임 내에 이러한 스테이지가 몇개 있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인 '다른건 다 좋은데, 왜 내가 암살하는 것이 아니고 스토리가 암살함???' 여기서 비롯된다.
즉, 게임은 1/3의 잠입과 1/3의 암살, 그리고 1/3의 뻘짓(....)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제작사들이 게임에 있어서 스토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런 기묘한 구조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5.
스토리는...그냥 재앙이다. 47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쓰여진듯한 아저씨 파쿠리 시나리오는 각종 병신력 쩌는 악역 케릭터들로 넘처나며, 움직이는 살인 병기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47은 시나리오상 허무하게 털리는 등 안습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문제는 47의 새로운 인간적인 끈질김과 악에 받친 모습보다는 47 특유의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주다 보니, 케릭터는 밋밋하고 스토리도 밋밋해지고, 병신같은 악역 때문에 스토리는 개그로 흘러가버린다. 하지만 더욱 열받는 것은 스토리 상 강제로 암살 실패/성공이 결정되고, 게임 플래이의 1/3을 이러한 병신력 쩌는 이야기를 감상하거나 그로 인해 강제 진행된다는 점은 앱솔루션에 있어서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6.
이런저런 아쉬운 부분들을 제쳐두더라도, 앱솔루션의 컨트랙트 모드는 이 모든 단점을 죄다 날려버리는 신개념의 멀티플래이라고 할 수 있다. 컨트랙트 모드는 미션에서 나온 스테이지에 스크립트와 NPC들이 고정으로 나오고, 그 속에서 플래이어는 계약의 내용대로(어떤 변장으로, 어떤 무기를 사용해서, 어떻게 암살한 뒤에, 지정된 장소로 탈출하라) 암살을 수행한다. 언뜻 보기에는 기존의 컨텐츠의 우려먹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암살의 초점이 기존의 타겟이 아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조연들에게로 옮겨졌을 때, 게임의 진행은 180도 달라진다. 여기에 기존 히트맨 시리즈의 장비 선택이 제한적으로나마(무기+변장 선택) 가능해짐으로써, 게이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폭도 넓어진다.
또한 '이게 어떻게 가능함?'이라고 경악할 수 밖에 없는 창의력 넘치는 컨트랙트들(조건과 스크립트를 따져보았을 때, 저것이 가능한가? 싶은)도 많으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컨트랙트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본작의 이러저러한 단점들을 상쇄하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7.
히트맨 앱솔루션의 그래픽 퀄리티는 현세대 콘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차이나타운 레벨의 인파를 프레임 드롭 없이 고정 30프레임으로 훌륭하게 구현한 점, 도시의 무미건조한 네온 사인의 광원 등을 구현하는 부분에 있어서 앱솔루션의 그래픽 발전은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즉석에서 주워드는 무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은 덕분에 근접전이나 모션 자체가 전작들에 비해서 훨씬 부드러워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광원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변장을 한 47의 대머리가 4방향으로 빛을 발하는 모습은 어이없다 못해 실소가 나오는 부분이다. 총기 발사음이나 타격음도 대단히 좋아서, 총을 쏘는 것이 상당히 즐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게임 플래이 자체는 잠입 위주이기에 총을 쓸 일이 없다는게 슬플 뿐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게임의 그래픽 완성도에 비해서 게임 자체의 버그는 많은 편이다. 특히 세이브 파일의 경우 상당히 심각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적인 결함과 버그가 많다. 현재 본인도 80% 정도 클리어한 게임 세이브 파일이 날려버려서 다시 처음부터 다시 했었고, 체크포인트 시스템의 경우 어떤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할 수 있다. 체크포인트에 저장했을 때, 체크포인트를 불러오면 47의 변장과 장비만 그대로이고 암살 여부만 제외한 모든 스테이지상의 적들 상태 등등이 죄다 리셋 되버린다. 세이브-로드 방식이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8.
히트맨:앱솔루션은 6년 동안 제작진이 생각한 시리즈의 방향성과 고민, 그리고 기술력이 집약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히트맨은 엄청나게 많은 결점을 보유하고 있다. 비슷하게도 '게임 플래이가 완벽하지만, 시나리오 등등에서 게임을 말아먹은' 케이스인 디스아너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결점이라 한숨 나올 정도이다. 하지만, 앱솔루션은 히트맨 시리즈 부활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오는 시리즈에서 이 작품을 베이스로 좀더 가다듬기를 한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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