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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에

새로운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의 저서 중 가장 마지막이다:왜냐면 이 글을 끝으로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주하던 중, 프랑스 - 스페인 국경에서 월경에 실패 후 모르핀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게 쓰여진 메모와 착상들은 후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저서인 동시에 그 모호성과 은유 등으로 인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서이기도 하다. 미카엘 뢰비는 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모호성을 철학자가 아닌 '문필가'로써의 벤야민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그의 글은 철저한 논리의 개연성이나 근거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는다:사진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 사진가의 엉망인 솜씨를 '범죄사실을 포착해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잡아낸다던가, 파울 클레가 히틀러를 보고 영감을 받은 천사 그림을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는 천사에 이미지에 비유하는 등 그의 저서에는 종종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벤야민이 지금까지도 인용되는 것은 벤야민의 저서들이 후대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등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틀리지만,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전에 누구도 보지 못했었던 것을 보았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보라. 그 누가 감히 '사진이 예술이냐고 묻기 전에, 사진으로 인해서 예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하라' 라고 선언하겠는가. 벤야민이 사랑받고 인용되는 이유는 잘 정돈된 저서를 보는 것이 아닌, 문필가가 독자를 뒤흔들고 영감을 불어넣는 강렬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렬함은 파시즘이 세계를 파괴하던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벤야민의 치열한 사유와 맞물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벤야민을 읽고 인용해왔다. 그 일말의 희망이 언젠가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 속에서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분석하기 위해서 먼저 미카엘 뢰비는 후기 발터 벤야민의 사유가 마르크스의 정치철학과 함께 유대교 신학적인 전통이 서로 결합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는 모순되었다: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와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다루는 신학적인 측면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섞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후기 벤야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과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나뉘어졌었다. 하지만 유물론적인 해석과 신학적인 해석이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작이 흔들리게 된다고 미카엘 뢰비는 주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모순된 것 같은 이야기는 정치철학에 핵심에 근거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저서 무지한 스승을 예로 들어보자:여기서 랑시에르는 인간과 지성이 어떻게 모든 인간 사이에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랑시에르는 역설적이게도 근거에 기반하여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서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랑시에르의 증명과정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믿음과 결과를 전제하여 증명을 하는 것은 결과를 편향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명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랑시에르의 믿음은 신학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철학의 근저에는 다소간의 '신학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결국 마지막에 정치철학은 믿음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벤야민은 어째서 신학을 마르크스 정치철학과 결합시키는가? 마르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유물론에 근거하여 자본가가 어떻게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주목하고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부분은 바로 역사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툴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역사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즉 역사는 자본가라는 승자의 것이며, 패배자들은 역사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원시 공산제에서 노예제로, 노예제에서 장원과 농노, 공장과 노동자, 그리고 마지막엔 인류의 궁극적 상태인 공산주의까지 모든 역사는 일사분란하게 공산주의라는 마지막 단계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벤야민은 역사에 진보가 없다고 보았다. 패배자들은 언제나 모든 역사 속에서 패배하였으며, 승자는 언제나 승리하며 역사를 써내려간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관을 통해서, 진보에 의한 역사의 낙관이 아닌 비관론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라고 이야기했다:과거 역사의 비극과 프롤레타리아의 수난은 언제나 다시끔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장소에서 무한히 패배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는 모든것이 진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역사의 변증법에서 보여주었듯이(이 역시도 벤야민의 테제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진보는 낙관론을 낳고, 진보의 낙관론은 또다시 새로운 역사의 비극을 불러온다. 비관론을 조직하라는 벤야민의 명제는 역사의 비극이 진보에 의해서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 언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것과 싸우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여기서 결합이 된다:역사 속에서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라면, 역사가 빠져나올 수 없이 영원히 끔찍한 순환나선을 그리는 폐곡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벤야민이 유대교 신학자 숄렘과 했던 대화 중 이런 내용이 있다: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지금 현재 있는 것의 위치들을 약간만 옮기기만 해도 가능하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반복된 패배속에서 드러난 패배자들의 역사적 전통이다:해방구, 코뮌, 봉기 등등 패배자들은 승리하지 못할지언정, 역사의 순간 순간마다 여지껏 역사의 비극 나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시간은 무정하게 흐르지만,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0이 형용사나 명사가 아닌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동사'이듯이, 인간은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 희박한 가능성을 다시금 떠올리고 역사의 패배자들을 불러내어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바로 이 기억이야말로 저항의 가능성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무정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가능성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 무한한 패배의 흐름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패배자들을 기억하는 것, 더 나아가서 반복되는 순환 나선을 끊는다는 벤야민의 발상은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개념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패배자에 대한 감수성은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이 캔 스피크 같이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고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영화가 극장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벤야민이 이야기하였던 역사의 패배자를 기억하고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억은 선별적이다:우리는 국가가 주도하였던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비극을 잊었다. 우리는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에서 130만 헥타르를 무상 조차하여 그때문에 시민 혁명을 일으켰던 역사를 잊었다. 우리는 배트남에서의 국군 학살을, 철거민들의 고통을, 그 모든 것들을 잊었다. 우리는 역사의 피해자인 동시에 새로운 가해자가 되었다.


한 국가, 사회, 집단, 개인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패배자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평등하게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짧게나마 가능했었던 패배자들의 해방구를,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멈출수만 있다면. 파리의 시민들이 시계를 쏴서 시간을 멈추려했듯이, 아마존 원주민들의 후예들이 브라질 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시계를 화살로 쏘았듯이, 그 모든 망각의 흐름과 무정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거기에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아니라면 언제일지 모를 우리의 후손들은 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우리를 생각해 다오.

관용하는 마음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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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림자 군단 및 사무라이에 대한 감상 링크를 첨부합니다.(그림자 군단 / 사무라이)


2차대전 중, 독일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나치에 의해 점령된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 주둔한다.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 노인과 조카딸은 그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저항과 경멸을 표시한다.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딸이 있는 서재를 찾아간 폰 에브레낙은 자신의 삶과 고향에 대한 이상적인 이야기들로 침묵을 깨뜨리려 시도한다. 하지만 집주인들의 깨어지지 않는 침묵은 결국 그에게 경외스러운 효과를 미치게 된다.(네이버 영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고 한다.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와 거대 스튜디오랑 작업하던 시기. 바다의 침묵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에서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 대표작들인 그림자 군단이나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에 비교하면 기교적인 부분에서는 투박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바다의 침묵은 멜빌 영화의 정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며, 무엇보다도 나치 점령 중의 프랑스 레지스탕스라는 소재를 '레지스탕스' 없이 표현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바다의 침묵은 침묵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캐치하여 나치즘의 본질에 대한 통찰, 더 나아가서 그에 대한 저항을 폭력이 아닌 굳게 닫힌 부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바로 침묵이다:자신의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나치 불청객에 대해 프랑스인 노인과 조카딸은 침묵으로 저항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들이 베르너를 무시하는 방법은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하는 식의 '능동적'인 무시가 아니다. 바다의 침묵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노인과 조카딸이 거실의 의자에 앉아있고 베르너가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으로 채워져있다. 하지만 앉아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베르너를 향한 적극적인 경멸이나 괄시가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이자 저항이다. 그것은 프랑스를 독일이 점령했을지라도 인정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정신이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는 이 둘의 모습을 마치 단단한 바위처럼 묘사하였다. 베르너가 자신의 독백속에서도 매번 거북하게 느끼는 것도 거실에 박혀있는 이 바위같은 노인과 조카딸의 존재감 때문이다.


바다의 침묵은 나치즘을 단순한 거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는 나치 장교의 베르너를 로멘티스트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나치라는 색안경을 끼고 판단하지 않는다. 베르너가 노인과 조카딸의 침묵의 저항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그렇기에 반응없는 독백에도 그는 절제된 예의와 양식미를 보여준다. 그 양식미란 프랑스인들의 침묵과 저항을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베르너는 그 침묵과 저항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문학과 사상, 예술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술가의 섬세함을 지닌 그에게 전쟁은 독일과 프랑스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비극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며, 독일과 프랑스의 병합을 통해 그 결합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병합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인 개념이 아닌 사상의 결합이라고 베르너는 생각한다. 노인과 조카딸이 흔들리는 것도 그의 독백이 진심이기 때문이며, 그가 점령자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됨을 원하는 예술가 독일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섬세한 미장센으로 드러낸다. 노인이 내뿜는 규칙적인 담배 연기, 조카딸의 뜨개질, 내리 깐 눈길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움직임들. 영화는 거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연극적으로 풀어낸다. 


연극적인 베르너의 독백은 그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결합을 끌어내기 위한 시도다. 그의 독백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인 동시에, 결합에 대한 열정이다. 영화는 베르너의 이러한 모습을 진심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 이야기가 독일과 프랑스 간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고 시작에 못박는다. 오히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나치즘과 그에 대한 저항이다. 베르너의 로맨틱한 이야기에는 나치즘에 있었던 이상향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순진하다:나치즘이 처음으로 유럽에 새로운 태양을, 하나의 국가를 새워서 진정으로 통합된 이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르너의 믿음은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 도달하고 그의 동료들을 만날 때 무너진다:나치즘과 파시즘의 핵심은 단순한 점령이 아닌 하나의 사상을 남겨놓기 위해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베르너가 파리에서 본 것은 저항하는 프랑스인들을 죽이고, 경제적으로 비굴하게 만들고, 문화적으로 절멸시키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치 동료들이었다. 거기서 베르너는 자신이 했었던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자신의 독백은 너무 순진했었던 이상론자의 이야기에 불과했으며, 나치즘은 새로운 이상향을 만드는 것이 아닌 절멸과 재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불행한 예술가는 자신이 해왔던 행위에 대해서 노인과 조카딸에게 사과한다. 자신은 결합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파괴자였단 것을, 그리고 자신이 이야기했었던 것은 정복자의 역겨운 변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순간에, 노인과 조카딸 역시도 그에게 마음을 열기 직전이었다.(노인은 처음으로 이 때 베르너에게 말을 건다) 서로 이해하려는 순간, 그들은 이 결합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섬세한 예술가가 스스로 한 행위를 속죄하는 방법은 격전지로 나아가는 수동적인 자살이었다:프랑스라는 안락한 점령지를 떠나 국가와 나치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 군인으로써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렇게 떠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메세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 메세지는 침묵 속에서 프랑스 서적의 인용으로 전달된다(국가의 범죄에 군인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가장 긍지 높은 행위다) 그 침묵속에서 베르너와 노인은 서로를 이어짐을 경험한다. 


바다의 침묵은 저항이라는 나치에 저항하는 행위가 단순히 점령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저항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멜빌의 전기를 대표하는 영화라 할 수 있으며, 레지스탕스라는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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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씬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기관총에 갈려나가는 신체들, 불타고 비명소리가 메아리 치며,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어간다. 스필버그는 이 장면을 통해서 전쟁의 참혹함과 무정함을 보여주고 동시에 거기서 의미없는 명령(라이언 일병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과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을 다루는 영화 스펙타클의 변화라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전쟁 영화와 대중 문화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게임 프랜차이즈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보여주었던 전쟁의 스펙타클(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현장감 같은)에 매료되었다. 메달 오브 아너의 시작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미션으로 재현하였던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속한 레퍼런스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던 워페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한다:현대전의 화려함과 다양한 도구들, 특수부대의 로망 등이 고색창연한 2차 세계대전의 스펙타클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2차세계대전 특유의 '선악구도'의 한계도 맞물려 있다:나치라는 시대적 거악을 처부수고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구대륙과 신대륙이 연합하여 싸운다는 2차세계대전의 서사는 전장을 확대하고 이야기를 뒤틀어도 그 서사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콜옵 시리즈도 그러했다. 아마도 콜옵 시리즈가 2차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었던 것도 서사적인 부분에서 확장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콜옵의 성공 모티브는 '영화와 같은' 게임이라는 테제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고, 그 '영화 같음'을 정의내리는 것은 바로 현장감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보여주었던 현장감의 연장선에 들어가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씬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점은 전장의 전체를 관조하는 시점의 카메라가 아닌, 철저하게 인물의 입장에서 보여지고 벌어지는 스펙타클을 정해져있는 스크립트를 따라서 진행되고 이는 콜옵 시리즈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콜옵 시리즈는 내용을 넘어서 형식적인 측면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빚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던 워페어는 그런 점에서 처음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계승하면서 서사와 게임 플레이 측면에서 자신만의 독자성을 만들어내고자 시도한 콜옵이라 할 수 있었으며, 모던 워페어를 수많은 게임들이 뒤따르면서 게임 업계는 바야흐로 밀리터리 FPS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트렌드를 주도한 모던 워페어도 결국은 소진되기 시작했다:레일로드 형태의 게임 플레이는 첫 플레이 이후에는 스크립트를 외운 플레이어들에게 그 매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고, 연출은 세련되어지지만 정작 게임 플레이는 구태의연하다는 점에서 플레이어들을 질리게 만드는 문제가 있었다. 어드벤스드 워페어나 블랙옵스 3는 콜옵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한 독특한 작품들이었다:점프와 월런을 통한 기습, 고속 기동 등등은 싱글플레이와 멀티플레이 모두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게이머들은 항상 콜옵 시리즈가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콜옵 시리즈만큼 남들보다 '반발자국' 앞서서 업계 트렌드 세터 역할을 꾸준하게 고수하는 프랜차이즈는 여지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원점인 2차 세계 대전으로 콜옵은 돌아온 것일까. 물론 그 동안 2차세계대전에 대한 새로운 레퍼런스들(퓨리나 퍼시픽 같은)이 생겨났고, 2차 세계대전을 새롭게 재조명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나난 것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배틀필드 1이 1차세계대전을 선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였을 것이다:콜옵 시리즈는 지속적으로 변하고 또 변화해왔다. 하지만 그 변화속에서 프랜차이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게임에 덧붙였고, 게임은 진입장벽이 높아지게 되었다. 배틀필드 1은 그런 점에서 프랜차이즈의 본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가지치기 하였다. WWII도 마찬가지다:이제 더이상 악세사리나 와일드 카드 퍽 시스템 같은 복잡한 시스템은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좋은 시도다:많은 프랜차이즈들이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하면 더 좋아진다(마치 쉐도우 오브 워가 그랬듯이)라는 집착에 사로잡혀 전작만도 못한 작품을 양산했다면, 콜옵 WWII은 '프랜차이즈의 본연으로 돌아가자'라는 트렌드를 주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콜옵 WWII는 11월 3일 발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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