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게이머들이 기억하는 고전 RPG들은 인플래이나 블랙 아일의 발더스 게이트나 플래인스케이프 토먼트, 뉴 월드 컴퓨팅의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 오리진의 울티마 시리즈, 크론도의 배신자, 폴아웃, 시스템 쇼크 같은 게임일 것이다. 고전적인 PC RPG들은 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PC 게임을 주름 잡았었다. 그러나 PC RPG가 흥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완벽하게 다르다:고성능 콘솔의 보급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는 트리플 A급 게임들의 등장, 헐리웃 영화의 연출문법 도입 등등 게임 업계는 매년 환골탈태하고 있으며 RPG 역시 그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 '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RPG들은 과거의 경험들에서 얻은 교훈과 현재의 트렌드의 반영, 그리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갖고 있는, 그야말로 과거-현재-미래가 집약되어 있는 결정체라 볼 수 있는 것이다:마치 기나긴 RPG의 역사라는 바늘 끝 위에서 춤추는 천사처럼 말이다.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노정은 RPG를 둘러싼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전적인 PC RPG를 재현하고자 하였던 드래곤 에이지:오리진은 RPG에 목말랐던 RPG 팬들에게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고전적 PC RPG와 콘솔 RPG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바이오웨어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최신 트랜드인 TPS와 SF 슈터를 잘 배합한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장점과 세계적인 흥행을 이끌고 있는 콜옵의 매력을 드래곤 에이지에 접목시켜 드래곤 에이지 2편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짧은 개발 기간과 그에 걸맞는 짧은 게임 분량, 오리진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듯한 과격한 변화로 인해서 드래곤 에이지 2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바이오웨어의 매스이펙트 3가 작렬하면서, 바이오웨어라는 브랜드 가치는 수직하락을 경험하게 된다.
이 와중에 나온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은 그야말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인퀴지션이 거둔 성공은 단순하게 대중의 낮은 기대치 덕분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고 그 너머를 지향하고자 했던 바이오웨어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다.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은 그렇기에 재밌는 작품이고, RPG에 목마른 누구에게든 간에 추천해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퀴지션은 근원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퀴지션이 오리진이나 2편과 다른 자기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대한 세계일 것이다. 게이머는 다양하고 거대한 장소를 탐험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며, 그 규모는 오리진이나 2편의 몇배에 달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인퀴지션은 여타 오픈월드 RPG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거대한 세계를 탐험한다'라는 감각을 같이 보유하고 있는 스카이림과 비교하였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스카이림이 게이머와 함께 호흡하고 움직이는, 게이머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는 세계라면, 인퀴지션은 그러한 스카이림의 역동성은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퀴지션의 세계는 전적으로 정적이다:게이머가 퀘스트 이외에 게임 내의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금 저차원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스카이림처럼 NPC를 죽이거나 강도질 하는 것이 인퀴지션에서는 전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게이머는 오로지 '세계를 구원할 영웅 인퀴지터'의 입장에서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정적인 세계(엄밀하게는 변화와 상호작용 방식이 '정형화'된)를 만들어서 인퀴지션은 어떤 매력을 가질 수 있을까?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인퀴지션은 오리진이나 2편이 그랬었던 것처럼 깊이있는 세계묘사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방대한 양의 코덱스와 독특한 화풍의 일러스트(타로카드를 연상케 하는)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색체를 공고하게 한다. 이렇게 매력적인 세계는 상호작용 자체가 줄이고, 대신에 게임의 양적인 부분을 늘림으로서 게이머에게 압도적인 스케일이라는 감각을 심어준다. 스카이림의 역동적인 세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인퀴지션의 세계는 정적이긴 하지만 경쟁작의 역동성에 대항할만한 스케일을 갖추었다.
재밌는 점은 이미 이러한 컨셉을 기반으로 킹덤 오브 아말러:레코닝이라는 게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실제 MMORPG 개발을 목표로 만들어진 프랜차이즈인 킹덤 오브 아말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벤치마킹하며 매력적인 세계와 거대한 스케일 등을 끌어들였다. MMORPG를 플래이하는 경험을 재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말러와 인퀴지션은 많은 부분 유사점을 보여주지만, 재밌는 점은 아말러는 흥행 참패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에 비해 인퀴지션은 2014년 GOTY를 휩쓰는 등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두 게임의 상반된 결말이다. 이는 드래곤 에이지라는 프랜차이즈 전반을 통해 형성된 경험이 인퀴지션에 응축되었기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인퀴지션은 게임의 세계관에서부터 전투, 퀘스트 구성, 이야기 등등까지 드래곤 에이지의 모든 것을 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여진다.
퀘스트 측면에서 인퀴지션은 전투-대화-전투 같은 원패턴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특히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가 갖고 있는 최대 장점은 세계관과 설정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데, 이는 일찍이 와우나 다른 MMORPG가 선취했었던 다양한 형태의 이벤트 기반의 퀘스트 시스템을 도입한다. 게이머는 공성병기를 조작하거나 간단한 형태의 퍼즐을 풀거나 등의 다양한 퀘스트와 할 거리를 접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겨울 궁정에서 벌어지는 올레이 제국의 궁정 암투를 게임의 메커니즘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게이머는 여제의 암살을 막기 위해서 분투하는 동시에, 올레이 궁정의 복잡한 규칙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 물론 스크립트에 의해 짜여졌으며, 답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만 이 경험 자체는 대단히 흥미롭고 신선하다. 물론 전투 중심의 퀘스트들도 많지만, 게임의 퀘스트는 다채로운 경험을 보장한다.
인퀴지션의 전투에 있어서 제작진들은 오리진과 2편의 좋은 점들을 합치고자 노력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본인이 보았을 때는 본질적으로 오리진이나 2편과는 다른 무언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시점은 오리진 같은 쿼터뷰가 아닌 2편 같은 등뒤에 카메라가 있는 3인칭 시점이다. 하지만 인퀴지션은 오리진이나 2편의 탱딜힐 구분을 탱딜의 형태로 간소화시키고, 전사와 마법사에게 보호막 및 가드 포인트 스킬들을 줘서 체력 소모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체력 회복 수단을 물약으로 제한함으로써 게임은 게이머가 전투중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받도록 운영해야 하는 압박을 느낀다. 낮은 난이도에서는 이러한 압박이 덜하기에 무난하게 액션 게임 하듯이 게임을 진행할 수 있지만, 난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체력 소모와 회복의 압박은 점차 심해진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전투에 전략적으로 대처해야한다:게임은 전작들에도 있었던 일시정지 이외에도 오리진에서 볼 수 있었던 쿼터뷰 방식을 제한적으로 도입한다. 또한 다양한 스킬들을 조합해서 부가효과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퀴지션은 각 직업군마다 다양한 액티브 스킬을 부여하고, 케릭터와 케릭터가 정확하게 두 엑티브 스킬을 동시에 맞춤으로서 부가효과를 낼 수 있다. 데미지를 크게 입히거나, 적을 약하게 만드는 등의 부가효과는 플래이어게 케릭터를 육성할 때 어떻게 육성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며, 다양한 직업 및 기술 조합을 시도하도록 유도한다. 스킬 리셋 목걸이를 상점에서 팔거나 동료가 주인공 케릭터 레벨에 맞춰서 레벨업을 하는 것은 플래이어가 다양한 기술조합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투와 퀘스트 이외에 게임은 전략 테이블에서 돈이나 자원, 명성 등을 얻거나 장소를 해금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마치 스마트폰 게임을 연상케 하듯이 게임은 실제 시간이 흐르면 전략 테이블에서의 자원획득이 이루어지도록 구성해놓았다. 게이머는 레벨 이외에도 명성 수치를 얻어 인퀴지션 레벨을 올릴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서 게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퍼크를 구입할 수 있다. 이렇게 레벨 시스템을 이원화한 것은 게이머가 게임을 하면서 명성을 얻는 것을 시스템의 일부로서 굳힌 것이라 평가할 수 있지만, 전투나 퀘스트로 얻는 경험치에 비해서 명성이 올라가는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느껴진다.
또한 게임은 자원이나 수집 요소를 너무나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일례로 게임에서 대부분의 장비와 소모성 포션류는 채집을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이 장비들의 대부분은 게임 필드 상에서 채집을 통해서 소재를 구해야 한다. 문제는 소재를 모으는 과정 자체가 지루하고 단조롭다는 것이다:맵은 더럽게 넓은데, 게이머는 그 넓은 맵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광물이나 약초를 하나 하나 채집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좀 더 간략하게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퀘스트 이외에도 아이템 수집 퀘스트 같은 것들이 인퀴지션의 플래이 타임을 무의미하게 늘리는데 일조한다. 수집요소들이 이상한데 박혀 있지는 않지만, 게임의 무식하게 넓은 맵이 이러한 수집 과정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인퀴지션의 이야기는 어떻게 본다면 기존의 드래곤 에이지 설정에 대한 '훌륭한 비틀기'라 할 수 있다:자세하게 스포일러가 될 부분은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기존의 오리진과 2편의 상식을 부정함으로서 게임은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전체 프랜차이즈에 여파를 남긴다. 다만 초중반까지 인퀴지션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합집산을 매력적으로 보여줬던 게임이 후반에 들어서는 너무 급하게, 그리고 아쉬운 형태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는 점은 감점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퀴지션의 그래픽은 훌륭하다:이것이 차세대라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인게임 그래픽은 게이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뛰어난 그래픽과 광활한 맵이 결합되면서 다른 게임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게임 내의 음악은 훌륭하게 작곡되었으며, 게임의 테마곡에서 주점에서의 노래까지 모두 세세하게 작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성우들의 연기 역시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작품답게 방대한 분량과 훌륭한 연기를 동시에 잡고 있다.
그러나 인퀴지션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게임의 규모는 거대하지만, 게임에서 플래이어가 경험하는 모험의 내용은 그와 묘하게 겉돈다.(어떻게 보면 매스 이펙트 2와 3에서 느낄 수 있는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왜 인퀴지션의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이 직접 필드에서 굴러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지적한 채집이나 수집 요소 역시도 어떻게 보면 게임의 분위기와 겉도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게임 시스템이나 연출적인 부분을 통해서 보완할 수 있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또한 두번째 문제는 게임 외적인 문제이다:인퀴지션은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게임이나, 이 게임이 만들어지기까지 약 4년의 세월과 그에 걸맞는 수많은 비용과 인력이 들어갔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문학적인 시간과 돈, 그리고 인력이 투입이 되면 그에 걸맞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퀴지션은 재밌고 훌륭한 게임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연하게 그렇게 나왔어야 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술이 담기기를 희망하듯이, 새로운 콘솔에 새로운 철학과 플래이를 가진 게임을 기대하는 본인으로서는 다소간의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결론은 인퀴지션은 추천할만한 작품이다:게임은 돈값 이상은 넉넉하게 해내는 작품이며 재미 역시도 전작들의 장점을 들고 오면서 프랜차이즈의 방향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물론 몇몇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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