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노예 12년은 훌륭한 영화다:굳이 아카데미 수상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담백하지만 묵직한 묘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노예제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하지만, 노예제가 구시대의 유산이 되고, 인종차별 및 인종에 대한 증오가 주요한 ‘범죄’가 되어버린 현대에서 과거의 노예제를 굳이 현 시점에서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시드니 포이티어의 초대받지 못한 손님(1967) 처럼, 어떤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계몽적인 영화는 그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하였기에 대중문화에 있어서 효력을 상실한 것 처럼 보인다. 또한 과거에 비해서 인종차별은, 그것이 아주 주요한 문제임에 분명하지만(그리고 충분하게 우리가 대처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숙지하여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문제가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이 뚜렷한 노예 12년가 그런 ‘과거에 이랬다더라’ 식의 계몽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화였다면, 이정도로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리라 본다.


노예 12년이 갖고 있는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아야한다. 노예제를 다룬 아예 다른 영화지만, 노예 12년과 장고: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 2012)를 서로 비교해보면, 이 두 영화가 노예제를 다루는 시선에 있어서 어떤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육체와 그에 가해지는 어마무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장고와 노예 12년은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고는 그것을 선정적인 내용(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긴 하지만)과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궤변과 역겨움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향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파괴와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집중하였다면, 노예 12년은 그런 폭력과 폭력을 향한 분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빗겨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고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을 직설적으로 드러냄으로서 불편함(물론 그것이 마지막에는 파괴와 살육으로 해방감을 심어주지만)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면, 노예 12년의 카메라는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빗겨나있음으로서 심지어 관객을 어느정도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기묘한 편안함, 혹은 빗겨나있음이야말로 노예 12년의 핵심된 미학이며 그리고 다른 인종차별-노예제를 다룬 영화들에 비해서 더 높게 비상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노예 12년이 기초하고 있는 독특한 묘사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육신이라는 매게를 통해 겹쳐지는 지점을 통해서 하나의 공간에 화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영화의 초반 시퀸스,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역을 하고 피로한 육신을 누인 솔로몬(플렛)이 옆자리에 누은 여인에게서 성적인 유혹을 받는다. 솔로몬이 보이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여인은 돌아서며, 솔로몬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회상한다. 이 두 시공간은 전적으로 만날 수 없는 평행함(노예로서의 삶-자유민으로서의 삶)을 드러내며, 이 두 시공간의 평행함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구체화 되며 영화 내내 이러한 평행함이 드러난다. 이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세계가 솔로몬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만나는 점에서, 영화 장고에서 무고한 피해자이면서 정당한 가해자로 등장하는 장고의 존재와는 차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행함은 솔로몬 뿐만 아니라 노예제가 노예라는 인간의 육체에 가하는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주된 표현방법으로 작용한다. 노예제가 인간의 육체를 두고 가혹한 행위를 벌이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노동, 체벌, 고문, 원치 않은 섹스 등등. 노예 12년도 그런 지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해자의 가학성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지점에서 선정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펫시와 앱스가 갖는 성관계를 보자. 어떠한 교감도 이루어지지 않은체로 혼자 몸을 움직이는 앱스와 그것을 묵묵히 받아내는 펫시의 관계는, 인간들이 서로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형태의 교류인 성관계를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돔보다도 더 두꺼운 ‘막’으로 가로막혀 있다. 심지어, 앱스가 피스톤 운동을 끝마친 뒤 펫시의 목석같은 반응을 보고 뺨을 후려갈길 때도, 그러한 갑작스러운 폭력마저도 펫시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임’의 대상이 되며 거기에는 ‘되받아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해자의 가학성이나 피해자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노예 12년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라기 보다는 인간-사물의 관계에 더 알맞다고 보여진다. 실제로도 앱스의 이웃농장에 사는 노예 정부는 펫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주인(앱스)이 너를 사물처럼 대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여라. 그리고, 너와 주인 사이의 애정을 공개적으로 과시함으로서 나처럼 노예 생활을 탈출해라. 노예는 하나의 사물이다:인간이 아닌 완벽한 객체이며, 앱스가 광기에 사로잡혀 한밤중에 노예들을 깨워서 춤을 추라고 강요하는 것에 어떠한 되받아침 없이 수용하면서 무기력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노예들이다. 그런 사물로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이원화된 세계, 사물로서의 노예의 세계와 인간으로서의 주인들의 세계에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짐(애정의 공개화를 통한 탈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객체화의 구도를 선정적이진 않지만 이후 밑에서 다룰 노예제를 직간접적으로 반대하는 코드들을 삽입함으로서, 노예제를 비판한다.


노예 12년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죽어도 되는 인간,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모 사케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이미 호모 사케르가 출발하고 있는 전제가 의미있는 삶과 없는 삶으로서의 조에-비오스의 구분, 아테네 폴리스 내부의 시민과 ‘노예’-외국인을 구분하기 위한 명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야말로 노예 12년이 다루고자한 문제 의식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역시 그러한 지점들을 드러내는데, 단순히 남부의 노동집약적인 플랜테이션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제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노예,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반명제로서의 육체이자 인간이 아닌 노예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앱스를 예로 들어보자:인간쓰래기임이 자명하며 부인에게까지 멸시받는 앱스가 자신의 인간다움, 남자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지점은 자신을 괴롭히는 아내에게 맞서는 것이 아닌 노예를 학대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전적으로 그럴 자격이 없어보이는 앱스가 주일에 노예를 모아두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지점은(너희는 두드려 맞을 것이다) 인간이 되지 못한 노예들에게 노예들은 가질 수 없는 인간의 문화를 보여주고 인간이 비인간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설파하는 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재밌는 점은 솔로몬은 글을 읽을 줄 알며, 그것이 그러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후술할 내용과 맞물리는 부분이다)하지만 과연 노예에게, 인간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문화나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영화는 노예들의 노동요와 가스펠을 극전반 은연중에 깔아둠으로서, 노예주들이 갖고 있는 문화와 대비되는, 억압받는 인간이자 절대 객체화 될 수 없는 인간들을 그려낸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솔로몬(이자 플랫)은 극의 서사를 구축하는 중심이자 두 세계의 경계, 그리고 서로 만날 수 없는 ‘막’으로 등장한다: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유인이지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예가 된 그는 노예도, 자유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또한 글자를 알고, 지식을 안다는 점, 그리고 특출난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바이올린 연주 같은)에서 처음부터 교육받을 권리도 없었던 노예들과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앱스가 노예를 밤에 춤추게 시킬 때, 솔로몬의 위치는 춤추는 노예가 아닌 연주하는 노예로서 그 위치가 집단으로부터 빗겨나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노예들과 다르게,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노예인척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자세는 결과적으로는 일반 대중이라 할 수 있는 ‘노예’에 섞여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를 겉도는 하나의 관찰자로 만든다. 이런 그의 시선을 보여주듯이 카메라는 폭력으로부터 ‘살짝 비켜나간’ 지점을 만들어냄으로서, 그가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닌 하나의 관찰자인 것처럼 묘사한다:탈주 노예를 목메달때 그 장면에서 솔로몬의 시선을 따라 노예의 죽음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지점 등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관찰자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해자가 될 거 같은 아슬아슬한 감각은 호모 사케르, 처분 당해도 상관없는 인간이라는 지점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아슬아슬한’ 감각을 통해서 영화는 이야기를 단순한 노예 유람이 아닌 극적 긴장이 살아있는 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따라 진행되는 노예 12년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오딧세이아의 형식을 따른다. 솔로몬이 살았던 세계는, 물론 그것이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노예제-인종차별이나 그로 인한 비극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백인과 흑인이 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술을 먹고 음식을 먹는 그당시 세계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공정하며 ‘현대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남부라는 야만과 폭력의 세계가 존재한다:중요한 것은,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안락하며 공정한 집과 북부의 세계로부터 쫒겨나서 어두운 세계인 남부로 쫒겨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실제로도 귀환에 성공했으니) 그 여정을 견뎌내는 지점은 전 세계를 ‘돌아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은 오딧세우스가 신화적인 공포와 야만에 대면한 것과 유사하게 세계의 공포와 야만에 대면하고 거기서 살아남고자 한다. 


하지만, 오딧세우스가 영웅으로서 신화적 폭력에 맞서고 집으로 계몽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다면, 솔로몬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소시민적’인 존재이며 카메라 역시 그런 소시민이자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솔로몬의 존재를 따라간다. 그는 심지어 노예와  자신을 분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하는데, 확장해서 본다면 이는 ‘관객’의 입장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과연 노예 12년의 시대가 우리의 시대에 그대로 부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린 그저 지나가는 관객에 불과하다:물론,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는 분명 과거의 역사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 호모 사케르나 죽어도 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안락한 세계(북부)로부터 내쫒겨져서 지옥같은 세계(남부)를 바라보는 관객(솔로몬)이라는 지점에서 영화의 문법을 확대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그런 그가 점점 그런 노예 대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노예가 죽자, 그 죽은 노예를 위해서 노예 대중이 가스펠을 부르는 것에 솔로몬이 참여하는 지점, 노예가 가질 수 있는 몇안되는 원시적인 문화에 자신의 육체를 리듬에 맞춰서 거기 동조하는 지점에서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대중’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맞닿아있으며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로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솔로몬은 돌아간다:역사에 따르면 그는 영원히 노예제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으며, 돌아와서 그의 저서 ‘노예 12년’을 저술해야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실화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고 있기에, 결말에 있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노예 12년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영화의 마지막, 노예의 이름인 플랫이 아닌 12년 만에 되찾은 이름인 솔로몬으로, 노예라는 물건에서 다시 인간으로 들어올려지는 지점에서 솔로몬의 여정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앱스에게 학대받고 동시에 앱스의 아내에게 까지 학대받는 펫시가 솔로몬을 붙잡을 때, 솔로몬은 어떠한 것도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 솔로몬은 북부와 남부, 인간이 사는 세계와 노예가 고통받는 세계의 이원화된 세계의 경계에 선 것이 아닌 완전히 북부-인간이 사는 세계의 주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냉정하게 그를 따라가며, 여전히 앱스에게 고통받을 노예들과 뒤에 남겨질 수 밖에 없기에 희망조차 잃어버린체 무너져버리는 펫시를 ‘배경’으로 다룰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로몬의 여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것도 끝맺음을 맞이하지 못한’ 끔찍한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오딧세우스는 오딧세이아의 끝에서, 세계의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세계가 여전히 끔찍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렇기에 12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가족’을 향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모든 것을 향한 ‘사죄’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솔로몬이 노예 12년을 써야 했었던 문제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안락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이면에는 부조리에 의해서 고통받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이 있다. 솔로몬이 무기력하게 돌아와서 그 광경을 잊지 못해 자신의 남은 생을 노예제 철폐에 헌신하였듯이, 우리 역시도 그런 되돌아봄과 우리의 세계가 아닌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예 12년은 단순하게 인종차별과 노예제에 대한 역사적인 계몽과 고발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서,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