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단순하게 ‘근대문학사’라는 지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저서가 아니다:고진은 일본에 문학이라는 개념이 수입되면서 생겼던 여러 잡음들, 그리고 그 잡음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소위 근대성이라 불리는 개념이 근대성이 발전하는 유럽이라는 중심부가 아닌 일본이라는 주변부에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서 과연 근대성이 무엇인가? 라는 지점을 탐구하는 저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진은 이러한 ‘문학’의 개념을 아주 기초적인 지점에서 해체한다. 풍경과 내면의 발견, 어떻게 아동이라는 개념이 문학의 일부가 되는지,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해서 다루고자 하는 ‘구성’의 문제 또한 그러하다.


구성이란,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된 시선(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이나 흐름을 통칭하는 것이다: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나의 시점, 그리고 하나의 흐름을 따라서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진은 이를 ‘원근법’의 발전사에 따라서 구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보통 원근법은 근대적인 화풍의 발달에 따라 ‘최초’로 발명된 것으로 해석되며, 세계를 바라보는 유일한, 그리고 정확한 시선으로 인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서양의 원근법 이전에도 서양에는 ‘원근법’의 개념이 존재하였으며 서양의 바깥에는 원근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존재하였다.  원근법이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를 예로 들어보자:동양의 산수화는 일반적으로 깊이감의 부재, 원근법에 맞지않는 묘사 등으로 인해서 현대의 우리가 느끼기에는 ‘부정확한’ 그림으로 인지되기 쉽다. 그러나, 산수화를 잘 살펴본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산을 묘사한 부분부분의 디테일들이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양의 풍경화가 소실점에 의해서 그림을 ‘사람이 보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집중하였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화가가 ‘전체를 돌아보며’ 그 풍경을 하나의 세계로 압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의 내용을 인용해서 풀이하자면, 문화는 주변의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 및 그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에 영향을 미치며, 오감이 민감한 인디언이 가상의 괴물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나 미국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 느끼는 감상이 변화하는 지점까지, 현대 원근법과 미학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낮설고 생소한 인지 방식들은 여전히 외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짧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문학에서의 시선과 구성, 그리고 영화에서의 연관성과 그것을 페드로 코스타의 뼈에 연결시켜서 보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시선과 구성은 영화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의 영화에 있어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의 내용을 꿰뚫어보는 보편부당한 움직임을 전제하고 있다. 설령, 카메라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 없다 하더라도, 감독은 컷 내부에 인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집어넣고 그것을 미장센의 형태로 구현함으로서 통일된 미학과 아름다움을 심고자 한다.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의 뼈는 그런 지점이 거의 없다:물론 기가 막히는 인물의 분절과 컷의 분절(절묘한 지점에서 계단을 이용해서 인물 사이의 막을 형성하는)들은 가끔식 존재하나, 감상자에게 있어서 뼈라는 영화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이다. 서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아이의 탄생과 아이를 맡아주려고 떠돌아다니는 젊은 아버지, 자살을 시도하는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친구),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재미’나 감동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또한 서사의 완결 역시, 별다른 설명이나 동기 없이 급작스럽게 마무리 되는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서 느껴지는 껄끄러움은, 뼈라는 영화가 영화의 기본적인 공식을 거의 대부분 깨부수고 있거나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가상선을 넘으면서 컷을 급작스럽게 바꾸거나,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컷을 나누거나 다양한 기법들을 썼을 부분(클로즈업 같은)에서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하나의 시점에서 관조하듯이 영화를 촬영함으로서 관객에게 낮섬을 유도한다. 또한 인물이 피로를 느끼며 멍하게 앉아있는 오프닝 시퀸스로부터 시작되는 영화의 도입부의 장면 연출이 어떤 정합성 없이 극 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이야기는 어떤 순서나 설명, 하나의 ‘결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무질서하게 전개되다 끝을 맞이하기에 관객들은 혼란스럽게 느껴질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설명해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뼈라는 영화의 장르는 ‘다큐 픽션’으로 구분된다. 이 장르 구분 역시 대단히 혼란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도대체 사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와 허구 그 자체인 ‘픽션’이 하나의 단어에서 결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큐 픽션이야말로 페드로 코스타의 뼈라는 영화를 정의 내릴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단어라 할 수 있다. 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의 빈민촌 출신의 사람들로서, 뼈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배경과 이야기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배우들이 아닌(물론 뼈에서는 그런 배우가 한명 존재하긴 한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을 그대로 연기, 아니 재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순수한 ‘허구’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어찌보면, 사실과 허구란 서로 상반되는 모순어의 관계가 아니라 ‘상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


다큐픽션의 관점에서 본다면, 페드로 코스타의 뼈가 노리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위에서도 다루었듯이, 하나의 결론이 존재하며 그 결론을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나아가는 근대 문학의 ‘구성’과 다르게, 인간의 삶과 이야기란 그런 구성에서 ‘벗어나있는’ 지점도 충분히 많다. 그렇기에 뼈는 그러한 구성과 그 구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탈피한다. 카메라는 각각의 인물의 심리를 잡아낼 뿐,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인위적인 설명을 배제하고 거기에 인물들의 심리를 주변의 소리에 짓눌리며 피로감을 느끼는 인물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영상에 무게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 장면들은 ‘형상화’라고 보기에는 미묘하기도 하다: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혀 연기 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지 없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도 볼 수 있다: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이 영화에서 포르투갈 빈민들의 삶 그 자체를 그려내려고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가 뼈를 통해서 빈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란 따스한 부성애적인 시선이나 사회비판적인 시선이 아닌 그 사람들의 삶 그 자체에 침투하고 삶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드로 코스타는 다큐멘터리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의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한 결과물인 뼈는 근대적인 카메라와 이야기의 구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채워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