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순간, 그에게 두 여자가 다가왔다. 사랑하던 약혼녀와 이별한 뒤 자살까지 시도한 '레너드(호아킨 피닉스)' 앞에 그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다정한 성격의 '산드라(비네사 쇼)'와 이웃인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 '미쉘(기네스 펠트로)'이 나타난다. 그리고 '미쉘'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레너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리틀 오데사와 위 오운 더 나이트 등등을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투 러버스는 정말로 '전형적'인 영화이다:영화는 부유한 유부남과 아슬아슬한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레너드에게 서슴없이 기대는 자유분방한 미쉘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을 가족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안정적인 산드라 사이에서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러한 전형성을 비틀어버리며, 그 비틈은 상당히 기묘한 형태로 완성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는 마치 엇박자와도 같은 영화다:영화가 서사나 컷의 배치, 영상의 편집을 극적인 결말을 위해서 통일되게 구성하였다면, 투 러버스는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하나의' 결말을 향해서 영화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 러버스는 극적인 통일성, 하나의 선택이라는 결말을 짓부수고 그 밖으로 탈출함으로서 전작인 리틀 오데사의 독특한 미학(슬픔의 확산과 폭력의 중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 들어가기 앞서서 먼저 분명하게 지적해야하는 점이 있다. 투 러버스는 어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 개인사가 녹아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기묘한 시공간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적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다루고 있는 백야는 그 신비로움 체험과 그 사랑의 경험이 주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지점에서 투 러버스 역시 백야의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두 여인을 한번에 사랑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어떤 양측 모두를 소유하고 싶은 기만이나 진실된 사랑을 선택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레너드라는 인간의 삶에서 두 여인을 만남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다루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 여인(산드라/미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두 여인에 대해서 동등하게, 그리고 그들과의 사랑이 어떤식으로 레너드의 인생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먼저 영화의 도입부를 보자:느릿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레너드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고요히 물속에서 잠겨가던 그는 전 약혼녀의 환영을 본 뒤에 살려달라고 발버둥친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점은 구조를 받은 뒤, 그가 '나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진거에요'라고 주장하는 지점이다. 어째서 그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졌다'라는 수동태를 쓰는가? 이는 그의 현재 상태(우울증도 있겠지만)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케릭터, 사진을 통해서 구체화된다:그는 흑백 풍경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째서 흑백 풍경사진만을 찍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있어서 제목이란 사진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파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사진에 있어서 제목짓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현장의 사진처럼 모든 요소와 맥락들이 그 사진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레너드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한 인물이다(주변인들에게 위트있게 대하는 그를 보라) 하지만, 그의 겉으로의 멀쩡함 속에는 약혼녀와의 비극적 이별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내적 결함(유전자의 문제)이 존재한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숨김'이다. 그것을 그가 찍은 흑백의 풍경사진처럼, 자신의 프레임 내부로 인물을 들이지 않으면서(재밌는 점은 과거의 그가 남긴 유일한 인물 사진이 그의 약혼녀 사진 뿐이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그가 그의 세계 내부로, 그리고 증거를 남긴 인물) 빛바랬으며 비밀스럽기까지 한 풍경사진을 찍음으로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레너드와 다른 인물들의 관계는 레너드가 사는 아파트로 구체화된다. 모든 주요한 만남들은 아파트의 공간들에서 이루어진다:부모와 함께사는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그리고 레너드의 이웃이자 창문으로 훔쳐볼 수 있는 가까운, 하지만 떨어져있는 공간으로서 미쉘의 아파트, 미쉘과 만나는 공간으로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옥상 등등.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쉘의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사이의 관계이다. 초기에 레너드는 미쉘의 아파트를 훔쳐보며, 그녀의 삶을 엿본다. 하지만 이는 관음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를 향한 관심에 가까우며, 클라이맥스 직전 미쉘이 레너드의 방을 바라봄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구분과 함께, 레너드가 경험하는 사랑 역시 두가지로 구분이 된다. 첫번째로 미쉘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자(그녀가 아파트를 떠난 뒤에 눈 구멍으로 훔쳐보는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처받은 인간형이다:그녀는 약을 하고, 불안정하며, 레너드의 감정을 알면서도 레너드에게 감정적으로 기댄다. 하지만 미쉘의 대척점에 있는 산드라는 가족을 중시하며, 안정적이며, 레너드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준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산드라의 사랑, 혹은 그 배경에 깔려있는 조건의 문제다. 분명 산드라와 레너드의 교제는 가족간의 의도된(경제적인 문제) 것이긴 하지만 진실되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산드라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사랑은 가족의 사랑처럼 따스한 것이지만 동시에 중력과도 같이 레너드를 옭아멘다. 산드라의 가족, 레너드의 가족 역시 그를 모두 사랑하지만, 가업을 잇고 그 어디에 갈 수 없는 구속감이 레너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레너드가 미쉘을 사랑하는 것은 영화의 서사상 당연한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레너드의 방이라는 레너드의 내밀한 공간에서 레너드와 사랑을 나눈 것은 미쉘이 아니라 산드라이다:미쉘은, 그야말로 방문자처럼 레너드의 아파트를 스쳐지나가듯이 갈 뿐이다. 미쉘이 자신과 사귀는 유부남이 과연 좋은 사람인지 봐달라고 레너드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때, 레너드는 미쉘의 빰을 부드럽게 스치는 미쉘의 연인의 손길을 본다. 미쉘을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거기에는 레너드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미쉘이 연인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갔을 때, 오페라를 틀고는 가족들의 사진 앞에서 산드라와 키스를 한다:여기서 오페라는, 미쉘을 향한 감정의 잔향 같은 존재이다. 여전히 미쉘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산드라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미쉘에 대한 복수심 같은 문제가 아니다:그것은 미쉘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그 다음날 미쉘을 만났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거절 받기에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산드라와 사랑을 함으로서, 그의 흑백사진 속으로 '사람'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다(산드라 동생의 성인식) 이는 그의 인생이 산드라에 의해서 점차 변화함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와 미쉘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픈 미쉘의 전화를 받고 레너드가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거기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미쉘은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유산했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부터 레너드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의 아파트에 미쉘이 들어갔듯이 레너드 역시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가며, 그녀의 팔에 글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는다. 이는 레너드의 상처받았던 경험에 기반한다:정상적인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에게 결함이 있다는걸 알고 떠났던 약혼녀처럼, 만약 그녀가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것을 알면 그 남자는 어쩔 것인가? 그에게는 이미 가족과 자신의 인생이 있다. 레너드가 보기에는 그녀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오로지 상처받은 자가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기에 레너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레너드의 열렬한 구애에 미쉘은 이렇게 묻는다:당신, 나를 정말 사랑하는건가요? 사실 레너드의 사랑은 자기 경험이자, 자신의 거울적인 존재로서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구원받지 못했던 과거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르시즘적인 사랑이 아니다:이는 서로의 상처를 햟아주는 짐승들의 피로하면서도 편안한 안식에 가깝다. 그리고 이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 백야의 비극적 엔딩(연인이 떠난줄 알고 나스첸카와 이어지려는 찰나에, 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과연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만이 구원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레너드가 사랑을 고백하고 미쉘과 섹스하는 장면은 서로를 열렬하게 갈구하지만 극에서의 온도(겨울, 야외의 옥상)는 쉽게 사그라질듯이 꺼지며, 어디까지나 상처받은 두명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레너드 역시 그것을 안다:그녀의 방에서 그녀에게 키스할듯이 몸을 숙이다가 멈춰서 돌아선다.


재밌는 점은 미쉘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여전히 산드라의 사랑의 사정권에 잡혀있다. 미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전 시퀸스에서 레너드는 산드라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 곁에 있어주고 싶고 당신의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산드라의 이야기가 레너드의 미쉘을 향한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사랑의 디아스포라(확산)이다:레너드는 산드라를 통해서, 상처받은 자신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산드라가 이야기했던 말들과 사랑이, 레너드가 미쉘을 향한 사랑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양쪽을 향한 기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넘어서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기(미쉘) 위한 단단한 대지로서 가족애와 안정적인, 발돋움하기 위한 중력과도 같은 사랑(산드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출발을 모색한다. 그리고 가족간의 관계와 비지니스가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양측 가족은 산드라와 레너드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머니는 그들의 떠남을 축복한다:위에서 이야기했지만, 가족은 단순히 속박하는 공간이 아니다. 좀더 복잡하게, 그들은 구성원인 레너드를 속박하지만(세탁소 문제 및 산드라와의 연애를 장려하는 것)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가 떠나는 순간에,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복을 빌며 그를 떠나보낸다.  


하지만 백야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려보자:나스첸카와 주인공 사이의 사랑이 성립되려는 찰나, 나스첸카의 연인이 그녀에게로 돌아옴으로서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만다. 모든 것은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레너드의 착각,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미쉘의 연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쉘에게로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무너지게 된다. 넓고 자유로운 옥상과 겨울날의 애잔한 풍경과 대비되게, 한밤의 지상 1층에서 만나는 그들은 백야에서 이야기한 신비한 시공간인 백야와 대비되는 아침과도 같은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제 그들의 사랑도 꿈에서 깰 시간이 온 것이다. 미쉘은 떠나고, 레너드만이 남아서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 이는 또다시 첫 시퀸스의 반복이다:심연의 어둠과도 같은 밤바다를 마주하면서 그는 마치 빠질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드라에게 선물받은 장갑이 떨어져서 파도에 떠밀려서 돌아오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돌아온다. 미쉘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던 반지를 들고 그것을 산드라에게 선물한다.


산드라에게 선물하는 그는 조용히 눈물 짓는다:과연 그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걸까? 떠나간 사랑?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랑? 그래서 그는 행복한걸까, 슬픈걸까? 우리는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백야의 마지막 글귀처럼, 그는 평생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마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극에서 스쳐가는 연인의 손길, 살갗에 대고 쓰는 이야기들, 키스할듯이 굽히다가 물러서는 모습, 가족들 사진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 등등 그런 장면들이 다른 장면들과 차이나는 템포를 보여주면서 엇박자처럼, 마치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것처럼 느껴지게 감독이 장면들을 연출했던 것처럼, 그 장면들이 그 순간과 맞닿아있음에 머무르고 설명을 하지 않음으로서, 제임스 그레이 특유의 유보의 미학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의 내면에서 넘쳐흐르는 무언가, 그리고 그 감정적 충만함과 미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지점을 만들어내면서도 영화 투 러버스는 자신의 미학을 완성시킨다:그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없는 그 지점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오, 하느님. 한순간이나마 경험했었던 신비로운 사랑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런 사랑이면 족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