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디엄에 올린 글입니다.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의 피살사건! 범인은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그녀의 연인 구스타브?! 1927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튼)’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앞으로 남긴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구스타브를 졸지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 ‘제로(토리 레볼로리)’와 함께 누명을 벗기기 위한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한다. 한편, 드미트리는 그녀의 유품과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를 고용하기에 이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작은 이렇다:먼저, 한 작가의 묘지 앞에서 여성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을 읽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가는, ‘소설은 끝없이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영감을 받은 실화와 인물을 이야기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거기서 젊은 작가는, 무스타파를 만나고 무스타파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하게 된 경위를 듣게 되고, 다시 영화는 1927년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영화에는 4개의 층위(현재-늙은 소설가가 소설을 집필하는 시점-젊은 소설가가 늙은 제로 무스타파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시점-실제 영화의 내용인 구스타프와 제로의 모험의 시점)가 존재한다. 물론, 영화가 주로 머무르는 층위는 구스타프의 이야기와 늙은 제로의 이야기지만, 어째서 이렇게 복잡한 시공간의 층위를 쌓아올린 것일까?


감독 웨스 엔더슨은 특유의 연출방식을 통해서,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들어내는데 초점을 맞추는 감독이다. 그의 전작인 문 라이즈 킹덤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카메라는 약간 삐딱하게 엇나가있으며, 단순하게 가출하는 고전 명작 동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강박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영화 내의 세계와 미장센들, 어린이를 다루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함의를 갖고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배경에 깔아둠으로서 그것이 단순하게 좋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숨겨놓고(분명하게 거기 존재하는 경찰 서장과 어머니 사이의 불륜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 그것을 보는 어른 관객들이 즐기게 만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강박적으로 짜여져 있는 미장센과 영화의 세계, 그리고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과 표정 등등.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어떤 긴장관계를 부여하지 않는(꼬마애들이 키스를 하다가 발기된 성기를 확인하지만, 그것이 성적인 긴장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은) 문라이즈 킹덤과는 다르다. 여전히 미학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추억’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엔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대칭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양식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미가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웨스 엔더슨이 영화 내에서 영상으로 다루어내는 이 영상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지점’에서 그러하다는 점에서 강박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나 컷 내의 구도들은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컷 내에서 움직이는 동선이나 행위들 자체도 그 강박적인 영상미에 지배당하고 있다. 심지어, 인물들의 행위들마저도 강박적인 대칭에 의해서 지배당한다:이 영화의 주인공인 구스타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구스타프가 마담 D의 살해용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매번 직원들 아침식사 때 하던 연설과 시 읊기를 사환인 제로를 시켜서 하게 하는 지점이라던가, 장면과 분위기에 맞지않게 시를 읊고 향수를 뿌리는 지점 등에서 그의 강박증적인 인물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스타프가 컨시어지 연합을 소환할 때, 다들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하는 행위 자체가 강박증적으로 유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구스타프-제로, 컨시어지-사환의 대칭적인 관계,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컨시어지 연합의 전화가 온 순간에 거기에 화답하는 존재 등등)


물론 풍경이나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은 이미 전작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웨스 엔더슨이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쓴 핵심적인 도구이긴 하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문라이즈 킹덤과 대비되는 지점은, 이 강박적인 행동과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양식미를 만들어내는 지점을 넘어서 영화의 구조(4개의 층위로 구성된)의 영향을 받아서 관객들에게 ‘화학적인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본다면 문라이즈 킹덤 역시 그러하긴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에는 그것을 전면에 제시함으로서 전작과 다른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미 전작인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그랬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폭력이나 성에 있어서 대단히 무심한듯 시크하게 이야기를 넘겨버린다:컨시어지 구스타프는 호텔을 찾아오는 노부인들과 바람을 피는 바람둥이였으며, 나이가 84세인 마담 D와는 19년에 걸친 연인 사이였다(구스타프 왈, 나는 그거보다 더 늙은 여자랑도 자봤어)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염문이나 섹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지나가듯이’(마치 페이지를 넘기듯이 슥슥 넘어가는 컷들) 넘어갈 뿐이다. 또한 살인에 있어서도,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장면이나 폭력이 휘둘러지는 지점을 노골적으로 숨겨버림(탈옥중에 간부와 동귀어진 하는 탈옥 동료의 최후 라던가)으로서 마치 그것이 주요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다. 분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있어서 폭력과 섹스는 중요한 모티브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노골적으로’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사과를 든 소년을 챙기는 구스타프와 제로는 그림이 놓인 자리가 텅 비자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저속한 ‘자위하는 레즈비언들’ 그림을 걸어놓고는 자리를 떠난다. 그림을 도둑질하는 장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그림이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넣는 강박증적인 행동에 집착하는데 이들의 행위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어떤 확고한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심지어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군인들의 총격씬 마저도, 그것이 후술할 구스타프의 최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총을 쏘는, 정당한 적을 향한 폭력을 원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구스타프와 같은 시대의 인물임을 드러낸다)그리고 영화 내의 인물들이 강박증적으로 사로잡힌 원칙이란, 일종의 ‘균형감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프 처럼, 영화 내부의 인물들은 앞에서는 세련되고 엄격한 호텔 컨시어지처럼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노부인들과 섹스하며 그녀들을 ‘비계’에 비유하는, 다소 모순된 인물상을 취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스타프는 어느 한 극단으로 가지 않은 체,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일종의 ‘양식미’를 지킨다. 그리고 이 양식에 집착함으로서, 그들은 어느 한 극단(섹스나 폭력 같은)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또한 이 양식미란, 구스타프가 어디에 가더라도 적용된다:심지어 구스타프가 마담 D 살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서도, 그는 그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품위를 지키려는 구스타프에 대해서, 세계는 그를 존중하는 형식으로 화답한다:구스타프에게 옥수수 죽을 받은 뒤에 탈옥을 간수에게 밀고하려는 죄수를 조용하게 제압하는 것으로 보답하는 동료 죄수나, 동료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컨시어지 연합, 과거의 친절을 생각해서 제로의 3등급 비자를 특별히 허가해주는 군장교 등등. 심지어, 이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품위 지키기’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인다:형무소에 있던 구스타프가 자신의 연설과 함께 기나긴 시를 동봉했을 때, 제로는 ‘이거 너무 기니까 그냥 들으면서 먹죠?’라고 이야기하고 호텔 직원들은 식사를 시작한다. 이와 같이, 강요된 품위지키기도 아니며, 허세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역겨움을 유발하는 허세가 아닌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우스꽝스럽지만 사랑스러우며 동시에 어딘가 아련한, 신사다움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로서 구스타프를 제시한다:탱크가 국경을 넘고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자신의 연인의 장례식을 참석하는 모습이라던가(속물적인 동시에  연인에 대한 예의), 탈옥을 하고 뒤에 말도 안되는 요구로 제로를 괴롭히다가도 자신의 예의에 어긋난 말에 대해 사과를 하며, 쫒기는 와중에서도 마담 D에 대한 충정을 지킨 집사에 대해서 잠시나마 묵념의 시간을 갖는 등등의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예의와 양식을 존중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은 마담 D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완결나는듯 하다:늙은 제로 무스타파의 표현대로, 구스타프는 품위가 있고 적당히 공허했던 시대의 최후의 신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불현듯 찾아온다:총천연색과 대칭적인 구조로 폭발할거 같았던 스크린은 갑자기 아련한 흑백으로 전환되며, 다시 열차 검문에서 제로 무스타파는 넝마주이 비자를 제시했다는 이유로 열차바깥으로 끌려나갈 위험에 처한다. 그에 대해 구스타프는 과거 군인이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주었던 특별통행증을 제시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하지만, 군인은 무뚝뚝하게 그 통행증을 찢어버리고 구스타프는 이 무례함에 반발하여 맞서싸우는 시점에서 갑자기 회상은 끝나버리고 만다. 


그 사건 도중, 구스타프는 총을 맞아 숨지게 된다:예의와 양식에 대한 존중이 불현듯 끝나버린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제로도 영화의 시작은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했으며, 영화의 마지막인 구스타프의 죽음도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세계대전의 도중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늙어버리고 구스타프에게 물려받은 재산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제로 무스타파의 아련한 표정과 함께, 시대의 마지막 신사이자 예의가 사라져 버림을 슬퍼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꿔서, 이제는 너무 낡아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는 제로 무스타파의 모습은 그런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슬퍼하는 과거 신사의 마지막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복잡한 다층 구조로 구성한 것은, 193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 관통하는 시간축을 통해, 잃어버렸던 예의와 양식에 대한 미학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우스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웃기다기 보다는 어딘가 애잔하며 슬프다:그것은 서구 문명이 잃어버렸던 예절과 양식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음을 쓸쓸하게 반추하기 때문이다.




"거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신사답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

Play back, 필립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