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서사는 보여주기에 기초하고 있다:스크린으로 출력되는 영상과 영상매체 및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이다. 그렇기에 많은 게임들은 기존의 영상매체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영화’로부터 많은 것을 인용하고 차용한다. 그리고 헐리웃 블록버스터식 보여주기 라는 지점에서 게임의 서사를 집중하고 있는 사례로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콜옵 시리즈의 경우, 이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극에 달해서 역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인과관계가 재정립되는’ 역전된 인과관계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콜옵 시리즈가 게임 내부의 이야기와 서사를 구성하고, 그리고 이벤트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내재하는 원칙은 한 장면에서 많은 양의 정보를 표출하는 것, 즉 정보의 과잉에 기초한 스펙타클이다.
콜옵 고스트의 예를 들어보자:무너지는 빌딩에서 탈출하는 시퀸스에서, 게이머는 도망가지도 않고 게이머를 향해서 달려드는 수많은 적병과 대치하게 된다. 건물은 무너지며, 적들은 총을 쏘고 달려들며, 게이머는 정신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정보량을 게이머에게 주입하고 정신없게 만들고 거기서 살아남게 스테이지 구성하고 영상을 연출함으로서, 게이머는 그런 복잡한 정보들에서 비롯된 화려함과 거기서 살아남는다는 아슬아슬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구조의 경우, 넘쳐나는 화면상의 정보를 게이머가 모두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에 있어서 게임들은 시공간을 느리게 함으로서(슬로 모션) 게이머들이 이를 인지할 수 있게 만든다:하지만 이러한 시공간의 느려짐은 일종의 예외상황으로서,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게이머들은 이것에 쉽게 지루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외가 상시로 지속되게 된다면, 게이머들은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되며 쉬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스토리는 대단히 무난하다:이야기는 무한히 반복되는 평행세계와 세계의 부조리, 그리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SF적인 ‘평행세계’를 드러내고 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이야기 역시 일본 서브컬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동료애 찬양쪽에 가깝다. 하지만,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서사가 인상적이며 효과적으로 게이머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게임이 사용하고 있는 ‘서사의 방식’ 덕분이다.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서사는 영상이라는 매체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게임의 서사는 인물의 독백이자 일기의 형태로 게이머에게 전달된다.
게임의 시작은 세상이 대충 멸망하고 게이머는 감옥 안에 갇혀서 죽을 날만은 기다리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주인공은 리브롬이라는 신비한 책을 만나며, 이 책을 매게체로 하여 이 일기의 저자가 과거에 경험했었던 일을 ‘추체험’하게 되며, 이 추체험의 내용이 게임 플래이가 된다. 즉, 게임은 게이머가 곧바로 케릭터를 통제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가 통제하는 케릭터가 일기속의 과거의 마법사를 통제하는 것으로서 이어진다. 이러한 복잡한 형태의 서사-게임 층위구조는 게임의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한다:어새신 크리드 시리즈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어크의 이야기를 보자. 어크에는 주인공이 총 두명이 있으며, 게이머는 데스몬드를 플래이하면서 동시에 데스몬드는 역사속의 인물을 추체험한다. 어크에서 역시도 소울 새크라파이스에서처럼 세명의 인물이, 동시에 하나의 게임 시공간을 점유한다. 그것은 다른 게임에서처럼 단순하게 게이머=케릭터의 이야기 서사가 아니라, 매게자가 끼게 되면서 게이머는 누구에 자신을 이입을 해야할지 혼란을 느끼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명의 케릭터가 발산하는 정보가 많아지거나 세명의 케릭터가 서로 조율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케릭터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어그러져서 결국은 리벨레이션 이전의 데스몬드에 대해서 많은 게임 플래이어들이 비판했던 지점들, 즉 케릭터 자체의 비중이 공기화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즉, 게이머들은 보통 자신을 데스몬드를 거쳐서 역사속 인물의 추체험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곧바로 역사속 인물에게로 추체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데스몬드의 비중은 제작진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공기처럼 취급받게 된다)그렇기에 여기에서 달성하고자 한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복잡한 기제의 서사 방식은 게임의 이야기를 흐트러뜨리는 독이 되는 것이 자명해보인다.
하지만, 소울 새크리파이스는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리벨레이션에서 보여주었던 미학을 통해서 이를 극복한다:세 명(게이머-케릭터-게임속의 게임의 케릭터)의 서로다른 시공간을 점유하는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나란히 겹쳐진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하나의 케릭터의 유지가 다른 케릭터에게로 이어지고, 또다시 그 케릭터의 유지가 게이머 또는 다른 케릭터에게로 이어지는 모습을 통해서 이런 복잡한 형태의 서사를 정당화시킨다. 리벨레이션에서 보여준 삼중 동기화, 에지오-알테어-데스몬드로 이어지는 유지의 이어짐, 서로 분절된 시공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아닌 찰나의 순간이나마 서로가 연결되고 유지가 이어졌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통해서 말이다. 이를 통해서 어크 특유의 복잡한 서사 방식은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얻으며 이 시리즈를 오래한 게이머들에게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제작진은 이후 게임 시리즈의 복잡한 이야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예를 들어, 어크 4의 경우 게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찌보면 현재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그렇기에 마지막 아이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때, 많은 게이머들은 충격을 느꼈으리라.
소울 새크리파이스 역시 어크 리벨레이션과 유사하다:리브롬은 무한한 멀린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를 잃어가면서도, 누군가 멀린을 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매게체인 책의 형태로 변화해버린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읽은 뒤, 리브롬을 희생함으로서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의 리브롬의 모습으로 화한다(물론 능력도 그대로이다) 리브롬의 유지는 게임 속의 케릭터가 이어받으며, 그렇기에 리브롬의 모습을 한 게임 속의 케릭터가 멀린을 쓰러뜨리고 다시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킨다. 케릭터에서 케릭터로 유지가 이어진다는 지점에서, 게임은 리벨레이션의 삼중 동기화가 보여주었던 미학을 실현시키고 게임의 독특한 구조를 정당화시킨다. 다만 리벨레이션과 소새크가 다른 지점이 있다면, 소새크는 가상현실이라는 기믹이 아닌 책의 기록과 경험을 게이머(=게임 속의 케릭터)가 읽어나가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독특한 것은, 게임의 서사진행이 전적으로 독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독백에 있어서 게임은 철저하게 게이머에게 주는 정보를 압축적으로 통제한다. 하지만 이는 게임의 대사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는 아니다:소새크의 이야기는 일기의 주인 리브롬의 직설적이고 거친 독백에 의존하고 있으며, 케릭터를 제시하는 방식도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 리브롬이 직접적으로 해설이나 주석을 다는 방식쪽에 가깝다는 것이다.(그리고 대부분 이 독백의 정보들은 옳다) 자칫 잘못하면 게임은 전지적 리브롬 시점(실제로 게이머는 일기 바깥의 세계를 볼수 없으니, 리브롬의 시점이 전지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에서 모든것을 다 가르쳐주는 밋밋한 독백을 읽는 형태가 되기 십상이겠지만, 게임이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은 어떤 복잡한 플롯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단순하고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서사로 다루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상황에서 리브롬의 독백을 다뤄내는 성우의 연기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이런 지점에서 서양에서의 영문 더빙이 엉망이었다, 라는 게임 웹진들의 평가는 치명적이다:소새크의 스토리의 대부분은 리브롬의 튀지 않고 절제되어있는 성우 연기로 완성된다.)
절제할 줄 아는 성우의 연기와 유지의 이어짐, 그리고 독백과 기억이라는 메소드를 통해서 정보량 자체를 통제하는 서사방식이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내용들은 여전히 지독한 클리셰에 사로잡혀 있다:영원한 파트너의 개념이나 모양이 달라지더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등의 식상한 이야기들이 소새크 이야기의 근저에 흐른다. 또한 매력적이라 보이는 케릭터들 조차도 독특한 형태로 이야기를 뒤틀었을 뿐이지(돈이 모든것이기에 돈으로 인간과 마물을 구원하려는 마법사 라던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마법사 킬러라던가), 그 근저에는 기믹적인 지점 이외에는 케릭터의 깊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인물들은 리브롬의 짧은 독백 속에서 등장하는 이레귤러이며, 인물들은 만난 뒤의 리브롬의 독백이라는 필터링을 거쳐서 게이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서사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이는 게임이 보여주는 과도한 그로테스크적 이미지와 세계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마법사는 사람이었던 마물을 죽여서 세계를 지킨다. 하지만 그런 싸움 중에서 마법사들은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동시에 마물을 죽여서 제물로 삼으면서 제물로 삼은 혼의 원망과 저주를 받으며 자신의 기억마저도 그 싸움 속에서 혼탁해지고 빛마저 바래저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 후대에게 넘겨주고 싶은 의지가 있다. 오늘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괴물이 되어버린 파트너를 위해서 타인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이런식으로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그로테스크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소울 새크리파이스가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함은, 물론 그것이 여전히 시장에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허용범위기는 하지만, 대중이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그로테스크함과는 차이가 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제물로 삼고 그 어머니를 무기로 만든 괴물미노타우르스), 풋페티쉬에 지네와 인간이 결합된 마물(신데렐라), SM(토끼와 거북이, 개구리왕자) 등등. 소새크의 세계관은 단순하게 설정이나 컨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가 부딪히는 세계 그 자체로서 게이머에게 시각적, 정서적 충격을 준다. 그리고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클리셰 투성이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소새크의 서사와 게임 구조에 있어서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플랫폼과의 궁합’이다. 비타라는 휴대용 게임기는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대용의 특성상 거대한 스펙타클을 보여주기에는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크다. 근래의 스펙타클이란 화면에 비례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게임들이 속기 쉬운 지점들, 예를들어 킬존 머서너리 처럼 콘솔 게임의 연출 문법 그대로를 휴대용 게임에 접합하면 그것이 여전히 비타라는 기기에서도 그대로 연출될거라는 미신적이며 잘못된 믿음들을 소새크는 정면으로 회피한다:소새크의 이야기 전달은 전적으로 영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물론, 글씨가 쓰여지는 묘사나, 책에 나오는 일러스트들 등등에서 게임은 여전히 영상적인 전달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상이나 영화적 연출, 콜옵 처럼 영상에서의 정보의 과잉에 기초한 스펙타클이 아닌 비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제한된 스크린에서의 정보의 선택과 집중(독백)에 기초한 서사를 게임은 보여준다. 또한 게임은 이러한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게임의 구조 자체를 하나의 책에 비유하며 플랫폼의 기능역시 여기에 맞춰서 구성한다:가령 게임은 몇몇 분기를 지원하는데(마물을 구원하느냐, 희생하느냐), 만약 다른 분기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그 책의 내용을 ‘고쳐써서’ 다른 분기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게이머는 버튼 조작 이외에도 전면 터치스크린을 이용해서 책의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다’. 이런식으로 게임은 책이라는 구조를 게임 전체에 통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소새크는 비타의 많은 기능들을 십분 활용하는데, 단순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다 라는 과시로서 게임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비타의 후면터치를 이용한 조작 같은) 플랫폼의 한계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그런 한계를 어떻게 장점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책과 독백의 이용)라는 해결책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새크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게임은 아니다:게임이 취하고 있는 과도한 그로테스크함은 게임 내적 완결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게임에 진입하려는 초심자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선사한다.(잔혹한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높은 허들은, 독립된 장르로서 그렇게 풀이 깊다고 할수는 없는 헌팅 액션 장르에 있어서는 치명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쉽게도, 소새크는 나름대로의 철학아래서 이런저런 시도와 몇몇 훌륭한 업적은 거둔 게임이지만, 이것이 팔려서 장기적으로 존속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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