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트위치 포켓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http://rigvedawiki.net/r1/wiki.php/Twitch%20Plays%20Pok%C3%A9mon 를 참조해주시라)


게임은 이제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더이상 그것을 플래이하기 위한 상품으로서 소비되는 존재가 아닌 상품을 뛰어넘어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문화의 속성을 게임은 지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 있어서도 게이머들 사이의 공유 양식인 문화는 존재하였다. 하지만, 게임의 경험을 공유하고 같이 향유하는 형태로서의 게임 문화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첨단성(가장 기술적인 지점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측면에서)으로 인해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기술과 매체가 빠르게 발달하면 거기에 발맞춰서 게임과 그 주변을 포함하는 문화권역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셜 네트워킹과 공유의 문화양식이 등장한 이래로, 플래이스테이션 4 같이 ‘Share’라는 버튼을 직접적으로 도입하여 공유하는 것을 하나의 ‘양식화’시켰다. 물론, 다른 문화들 역시 기술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기도 하나, 게임과 같이 ‘기술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매체일수록 기술의 변화에 대한 민감도는 타매체에 비교하면 더 극심할 것이라 볼 수 있다. 트위치 포켓몬스터의 경우, 그러한 실험적인 지점이 가장 극대화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게임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채팅으로 명령어를 내린다. 그러면 그 채팅 명령어에 따라서 케릭터가 움직인다. 아주 단순한 개념이며 살짝 특이한 개념의 게임방송이지만, 이것이 수천명, 수만명 단위에서 명령어가 입력된다는 점에서 트위치 포켓몬은 기존의 게임방송과는 달라지게 된다. 과연 트위치 포켓몬은, 플래이되는, 또는 하는 것일까? 하지만, 트위치 포켓몬은 하는 것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언저리에 놓여있다. 기존의 방송이라는 개념이 스크린이라는 막을 통해서 시청자와 방송자 사이의 시공간적 분절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면, 트위치 포켓몬은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어서 시청자가 방송에 끝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개입이 수천, 수만명의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단순한 게임 방송을 넘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으로 변하게 된다. 재밌는 점은 이미 플4의 트위치 방송 기능에 있어서 시청자가 방송에 참여하는 기능들을 시험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진삼국무쌍의 경우, 시청자가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방송자의 방송에 일정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미 채팅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상호작용함’은 게임 방송 또는 인터넷 방송에 있어서 주요한 성질이 되었지만, 그것이 스크린 안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지껏 매체가 경험하지 못했던 참여라는 새로운 지점이며 트위치 포켓몬스터는 그런 지점이 극대화되며 동시에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지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의 TV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ARS로 참여할 수 있다던가 등의 ‘참여’의 개념은 존재해왔었다:하지만 그것이 갖는 한계도 분명했다. 방송이란 기본적으로 ‘녹화’되어 방송되는 형태가 기본이다. 생방송이란 방송 기술이나 대본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ARS로 참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영되기 까지는 시공간적인 거리감이 상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트위치 포켓몬 같이, 물론 그것이 몇초간의 딜레이가 있어서 게임에 심각한 지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즉각적이며 대규모의 참여가 일어나며 동시에 그 참여로 인해서 생기는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한 케이스는 지극히 드물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어도 무난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게임이 하나의 목적(클리어, 엔딩 등등)을 향해서 나아가는 움직임이라고 본다면, 트위치 포켓몬의 움직임이란 일정한 방향성을 얻지 못하고 정신병자처럼 발광하는 무언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혹자는 무한 원숭이 정리를 비꼬아서. ‘무한한 시간을 주고 하나의 게임을 플래이시키는데 반 정도는 게임을 정상적으로 플래이하려고 애쓰고 반 정도는 게임을 망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라고 촌평하기도 했으며, 이는 대단히 정확한 평가이다. 게임에는 정상적으로 시간을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게임을 망치려는 사람들 반으로 나뉘어져있다.


(무한 원숭이 정리: http://ko.wikipedia.org/wiki/%EB%AC%B4%ED%95%9C_%EC%9B%90%EC%88%AD%EC%9D%B4_%EC%A0%95%EB%A6%AC)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에 따르면, 근대적인 역사적 시공간에는 하나의 방향을 위해서 나아가는 시공간의 상정이자 그 지점으로 빨리나아가기 위한 ‘가속화’의 지점이 있었으며, 현대에서는 시간에 있어서 시공간을 구성하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가속하든 감속하든 어떤 방향성 없이 나아간다고 보았다. 또한, 그러한 방향성 없는 시공간이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처럼,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다음 자극으로 뛰어넘는(하이퍼링크) 끝없는 자극의 공간, 머무름이 존재하지 않는 무중력의 공간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한병철의 견해에 따르면, 트위치 포켓몬 역시 그러한 무중력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언가이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메뉴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벽에 부딪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는 방향성 없는 광기의 산물, 그것이 바로 트위치 포켓몬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실제로, 트위치 포켓몬스터는 ‘클리어’되었다. 트위치 포켓몬은 첫번째 관장인 웅을 9시간 12분 만에 격파하였으며, 라이벌 그린을 16일 7시간 45분만에 격파하여 클리어 했다(물론 일=24시간이다) 어떤 무작위의 광기,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어떻게 이들이 엔딩이라는 결과에 도착하였는가? 유념해야하는 점은 트위치 포켓몬의 시공간은, 분명하게도 ‘방향성이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지배되었다:한쪽은 정답을 향해서 나아가며, 다른 한쪽은 정답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팽팽한 두 힘의 충돌과 긴장관계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광기에 가득찬 발광의 형태로 채워넣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두 힘의 팽팽한 대립속에서도 트위치 포켓몬의 시공간은 하나의 방향으로 발광하듯이, 하지만 꾸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란, 그 과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가능’에 가까운 하나의 기적으로 보였으며, 트위치 포켓몬스터와 관련된 밈들이 ‘신화’의 형태로서 드러나는 점은 이를 명확하게 지적한다:즉, 트위치 포켓몬은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신화가 성립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아나키즘-민주주의 시스템의 기여도 상당하였다(자세한 내용은 맨위의 링크를 참조하시라) 그리고 이러한 아나키즘과 민주주의 시스템의 대립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묘한 메타포로서 작용하게 되었다:다양한 견해의 대립과 어디에도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 못하는 발작적인 움직임들, 그리고 그들을 방해하려는 세력들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자들은 꾸준하게 목표를 향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만약 아나키스트들, 반대자들이나 방해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움직임을, 과대 포장해서 보자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재밌는 점은 포켓몬스터 레드 클리어에 있어서 최단 루트로 클리어하는 영상은 예전부터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대략 한시간 이내로 걸렸다: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스피드런이야말로 테크노크라시의 정점이 아닐까? 아나키스트들은 어떠한가?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의 흐름을 초치는데 있어서 그들의 재미를 충족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자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들의 재미와 존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시스템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가 서로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공생은 기묘하다.


시즌 2의 경우에는 전설적인 동시접속자수를 자랑했던 시즌 1에 비해서는 다소 주춤해진 경향이 있다:전 시즌에 비해서 동접자 수가 줄어든 점은, 1시간 단위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방송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더욱 부드러워진 진행을 보여주는 시즌 2가 시즌 1의 재미보다 떨어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트위치 포켓몬스터의 재미란, 그런 서로 극단적인 두 힘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상황의 연출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러한 긴장관계가 다소 완화된 지점에서는 결국은 아쉬운 지점이 될 수 밖에 없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