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517 를 참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기억은 흔적을 남긴다...아마드는 4년 째 별거 중인 마리와 이혼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오랜만에 찾아 간 그녀의 집에는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딸과, 곧 마리와 결혼하는 사미르, 그리고 사미르의 불만투성이 아들이 있다. 한편, 아마드는 자꾸만 엇나가는 큰 딸 루시에게 사미르의 전 부인이 현재 혼수 상태이며, 그것이 엄마 마리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상당히 기묘한 영화다:어떤 진실(왜 루시는 엄마인 마리에게 화를 내며, 그 뒤에 숨겨져있는 진실이란 무엇인가)을 쫒아가는듯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진실은 어떠한 '해결'로 귀결되지 아니한다. 어떤 반전이나 진실이 명백한 변화와 결과를 불러오는 보통의 영화들과 다르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인 구성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일상을 재현하는 듯 하면서도 그 아래에 아주 세심한 서사구조를 깔아두고 있다. 재밌는 점은 원제인 le passe(=The Past)라는 '과거'라는 단순한 명사와 다르게 한국에서 개봉한 제목은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이다:왜 단순하게 '과거'라는 제목을 쓰지 않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선언으로 제목을 구성한 것일까? 영화는 전적으로 다루는 지점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이다. 하지만 한국어 제목이 선언하는 지점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과거'라는 소재를 쓰는 것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관계로서의 선언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과거를 다루는데 있어서 영화는 이야기를 낯설게 만드는데 주력한다:아메드는 전처와 별거이후 4년만에 테헤란에서 파리로 전처를 만나러 온 '이방인'이다. 그는 사미르와 마리의 관계에 끼어든 낯선 자이며, 동시에 그가 없는 동안 진행된 그들만의 인생(마리와 자신의 가족들)에 있어서도 이방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살았던 그의 집을 사미르가 자신의 '색'으로 꾸미는 등의 모습을 통해서 그에게 한때 친숙했던 공간은 낯섬의 형태로 다가오며, 이후의 서사에서는 그조차도 그 가족에 있어서 '자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그는 루시와 그녀의 동생의 생부가 아니다;아메드 역시도 마리가 재혼한 남자중 하나였을 뿐이었다)이 드러나면서 극대화된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두 곳에 걸터앉아있는데(현재 살고 있는 테헤란-과거에 살았던 공간인 파리), 현재 영화가 일어나는 시공간(파리)은 그가 어떤 유의미한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서 머무는 공간이 아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돌아온 공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파리라는 시공간은 머무는 곳이 아닌 '거쳐가는 공간'이자 '떠나야 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의 문제(가족-사미르 사이의 오해와 진실)가 해결되는 순간, 모든 것을 뒤로한체 다시 테헤란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아메드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오프닝 시퀸스에서 관객은 일종의 낯섬을 느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리와 공항에 도착한 아메드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친구? 연인? 아니면 부부? 영화는 이들이 이혼 소송중이며, 4년전부터 이미 별거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떤 충격적인 전개나 복선, 암시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언어 속에서 조금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는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는 이런점에서 관객을 이야기에 대해서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오히려 관객은 극에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아닌, 기묘한 상황에 내던져진 낯선 이방인이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독특한 진행을 보여주는데, 몇몇 장면에서는 관객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내부의 공간에서 외부의 공간에서 대화를 하는 인물들을 보고 있기만 하는 형태를 드러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과거의 잔향이자 여파Aftermath이다: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었거나(과거완료), 혹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여파를 미치는(현재완료)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관객에게 영화는 마치 괴멸적인 핵전쟁 이후 수천년이 지난 지구를 돌아보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장르처럼 다가온다. 물론 어떠한 의도에 따라 사건 이후에 오밀조밀하게 재구성되며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종말 이후의 세계와 다르게, 영화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숨기면서 일상을 따라서 덤덤하게 진행될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인물들이 과거를 찾아서 진실을 재확인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적으로 '현재'를 변화시키지 않는것처럼 묘사한다:오히려 그렇기에, 영화는 삶에 있어서 현재-과거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영화는 이러한 현재-과거의 관계를 작은 구조로 쪼개서 영화 내에 반복적으로 삽입한다. 가장 뚜렷한 지점은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이다:비단 아메드 뿐만 아니라, 극 내에서 모든 인물들은 어떤 행위를 한 뒤에 그 장소를 떠났다가 다시 불현듯 다시 돌아온다. 예를 들어서 루시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사미르와 아메드, 그리고 마리가 루시를 찾겠다고 대화를 장면을 보자:마리와 아메드는 중요한 정보가 담긴 대화(루시는 사미르의 아내 셀린이 자살한 이유가 사미르와 마리의 불륜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를 진행한다. 이 동안 사미르는 이 대화의 낯선 이방인으로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차 키를 찾으러 움직임)하면서 전혀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이 둘의 대화를 방해한다. 영화는 이런식으로 갔다가-다시 돌아옴이라는 행동 구조를 많은 곳에 깔아놓는다.


또다른 재밌는 지점은 영화의 컷의 편집 방법이다:몇몇 장면에서 컷의 배경음은(영화는 마지막까지 배경음악을 쓰지 않는다)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가 집에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가도 갑자기 낯선 배경음이 들리더니, 영화는 사미르와 그의 아들이 지하철이 타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배경음을 마치 '잔향'처럼 장면-장면 사이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장치로 사용한다. 이는 영화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지점은 전적으로 아오야마 신지가 이야기한 '삶의 노이즈가 낀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다:과거의 사건들의 노이즈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그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망령'의 형태가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건(사미르 아내 셀린의 자살시도)은 이미 과거의 일로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저 그 사건의 머나먼 반향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처럼 시끄럽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인물들을 뒤흔든다.


영화는 이렇게 과거의 잔향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그 과거의 잔향을 따라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여정을 따라간다:루시는 셀린의 자살시도의 원인을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관계라고 고발한다. 하지만, 이후 사미르는 셀린의 자살이 우울증과 불행한 사건(얼룩이 묻은 옷에 대한 클레임) 때문이라고 항변하며, 루시는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연애편지를 자신이 보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셀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루시의 증언과 다르게 셀린은 전화를 받은적이 없었으며 셀린에게 있어서 사미르와 관계를 의심받았던 나이마가 셀린인척하면서 셀린에게 소소한 복수를 꾸몄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영화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서 모든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셀린은 과연 누구에게 화가 나서 자살시도를 한걸까? 나이마? 아니면 사미르와 마리? 이 모든 과거 사건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셀린은 자살시도 이후 코마에 빠져서 병원에 누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뿐이다. 


결국 영화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마치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나며, 책임 소재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에 있어서 뒤돌아보아서 정리하기 위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와 되돌아봄의 시간은, 아메드라는 이방인과 이혼이라는 정리의 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그는 자신의 현재(테헤란)에서 과거(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으로서의 '친절함'을 드러내는데, 한때 가족이었던 그들(마리와 그녀의 딸들, 그리고 심지어는 사미르와 그의 자식에게까지)을 위해서 과거의 진실을 뒤쫒아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은 구원받았을까? 글쌔, 일단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구원'이라는 성스러운(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과거(코마 상태에 빠진 셀린)에 붙잡혀있다:다만, 그것은 이제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의 죄의식(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루시,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던 사미르-마리)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문제로 화했다.


하지만 아메드는 떠나야한다: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는 과거와 현재, 파리와 테헤란, 둘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현재로 돌아간다. 그것은 마리와의 관계는 과거의 것이며, 과거에 자신이 왜 떠나야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아메드에 대해서 마리가 그 이야기를 듣기를 거부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인 테헤란으로 돌아간 아메드와 다르게, 사미르의 현재와 과거는 모두 파리에 존재한다:그렇기에 영화는 기묘한 결말로 도달한다. 과연 코마상태에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과거이자,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안쏟은 생판 남이라 생각했던 셀린에게 사미르는 그녀가 한때 좋아했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한다:하지만 왜 향수인가? 영화는 '(코마상태에 빠져있어도) 후각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니까요'라는 의사의 말로 이를 정당화시키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후각이라는 감각의 특징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청각에 비해서 후각은 그 은은한 잔향이 오래 남는다:냄새란, 오랫동안 그 장소에 머물면 그 장소에 베어들어 그 장소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후각은 금방사라지는 시각의 잔상이나 청각의 잔향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사미르가 셀린이 좋아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과거와 화해하기 위한 그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에 부합하듯이 셀린은 그의 말에 화답해서 손을 부여잡는다. 이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대단히 독특한 영화다:영화는 화려한 드라마나 서사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진실을 끝도 없이 밝히고 누군가를 무한히 고발하고 책임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대신에 묵직하게 남는 여운과도 함께, 영화는 삶의 일부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삶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일부분을 메타포의 형태로서 재현함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