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도쿄의 고급스러운 바에서 돈을 받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아키코(타카나시 린)는 그녀의 비밀스런 일상을 모른 채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친구 노리아키(카세 료)로 인해 쫓기듯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히로시로부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아키코는 그곳에서 노교수 타카시(오쿠노 타다시)를 만난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아는 듯 대하는 타카시와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낀 아키코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며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키코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길에 타카시는 우연히 노리아키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노리아키의 집요한 시선이 주변을 맴도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기묘한 영화다.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 때문에 영화 내용이 마치 누군가 사랑에 빠지고 그것이 성공/실패를 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처럼 기대되지만, 정작 영화는 24시간도 채 되지않는 짧은 시간동안의 이야기를 다루며, 러닝타임 동안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결과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국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과 별개로, 영화는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이 파국적인 결말에 도달한 이후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삽입하면서 이 제목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게 된다:곡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영화 전반에 깔린 감독의 냉소와 악의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보여주는 시공간은 전적으로 도시문명의 그것과 일치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시작되는 도회적이고 깔끔한 바의 이미지와 그 후에 이어지는 노교수의 집으로 가는 길까지. 하지만, 영화는 도시문명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내밀한 형태의 공간-자동차나 집이나 방 같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아키코가 자동차에 앉아 피곤한 몸을 기대고 바깥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보는 장면들이나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지점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자동차라는 공간 내부에서 자동차 바깥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동차 바깥에서 오로지 자동차 내부만을 보여주는 식의 영상 연출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에서 거대한 도시문명은 사라지고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만 남게 된다. 또한 타카시가 '전화'라는 수단으로만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지점도 그런 분절적이며 내밀한 시공간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영화는 이 개인들의 내밀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서,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인물들이 만나서 화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 동어반복적인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처음 타카시와 만난 아키코가 그와 벌이는 대화의 형식에 주목해보자. 타카시는 끝없이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서서 저녁을 먹자고 주장하며, 아키코는 침실로 들어가서 졸리니 자자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결국 소통에 대한 포기(타카시가 저녁을 포기하는 걸로)로 이어지게 된다. 이 장면에 있어서 '타카시의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아키코-타카시마저도, 거실과 침실이라는 공간에 따로 존재할 뿐이며, 심지어 같은 침실에 있을 때조차 타카시는 의자에, 그리고 아키코는 침대에(또한 그녀는 TV에 비쳐진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이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키코의 남친인 노리아키가 타카시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여기서도 노리아키와 타카시는 타카시의 차라는 공간을 같이 점유하면서도 조수석과 운전석이라는 별개의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영화는 지속적으로 이들을 다룰때 '분절적인' 컷으로 각자의 이야기에 침잠하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노리아키는 거의 정신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자친구인 아키코에 대한 집착과 망상(결혼 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라는)에 사로잡혀 있는데, 노리아키-타카시의 대화에 있어서 서로가 만나거나 합의할 수 없는 평행선을 끊임없이 그릴뿐이다. 심지어 타카시와 노리아키가 타고 있는 승용차에 아키코까지 가세하는 장면에서, 각자 운전석-조수석-뒷좌석이라는 각자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서로 맞닿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도시문명에서의 내밀한 공간과 그 속에서조차 소통이 되지 않은체 분절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을 다루면서 영화는 도시문명의 소통되지 않음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멜빌 식의 자신의 의지에 의한 실존주의적인 고독, 혹은 앞서 다루었던 문라이팅의 중간자적 고독과는 다르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고독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내부로 파고든다. 아키코가 자신의 친구가 해준 농담을 듣고는 그게 왜 재밌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타카시의 집에가서 그 농담을 재밌다는 듯이 들려주는 아키코의 모습에서 드러난다:그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 언어가 갖고 있는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언어인양' 떠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극 내에서 자기 이야기만을 반복한다:하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다. 마치 후반부에 노리아키에게 맞은 아키코를 보면서 그로테스크한 친절함을 보여주는 옆집 아줌마처럼 말이다:집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가 작은 창문에 머리만 내밀고 타인의 불행에 아랑곳 없이 혼자 떠들고 혼자 미소짓는 이 감당하기 힘든 미친 광경이야말로 극을 지배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어반복적이며 무의미한 소통은 노리아키가 아키코를 향해서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나 타카시가 생판 남인 아키코에게 부모 같은 친절함을 보여주는 지점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키코라는 타인을 향한 강렬한 감정이지만(동시에 성적이지 않다. 영화는 성적인 이야기를 거세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한다고 볼 수 있는데, 타카시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지점이 섹스에 대한 암시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런 지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소통의 부재만을 남겨놓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에 대한'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에 의거한' 감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엔딩에서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흘러나오면서 분명해진다.



Lately, I find myself gazing at stars

hearing guitars like someone in love

Sometimes the things I do astound me,

mostly whenever you're around me.


최근에 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누군가 사랑에 빠진 것을 연주하는 기타 연주를 들으면서요.

때때로 주변의 사건들이 날 놀라게 만들어요.

대부분은 당신이 근처에 있을 때구요.



Lately I seem to walk as though I had wings,

bump into things like someone in love.

Each time I look at you,I'm limp as a glove,

and feeling like someone in love.


나는 날개가 있지만 최근에는 걸어다니는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여기저기 부딪히죠.

매번 그때마다 전 당신을 바라보고, 마치 졸도할 것만 같아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요.


-엘라 피츠제럴드, Like someone in Love



이 노래의 가사에서, 모든 것은 '나'에 맞춰져 있다:나는 당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과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여기서 '타인'은 사랑의 유의미한 형태소가 아니다. '타인'은 단순하게 대상으로서, 일종의 자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타인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 자신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나르시즘'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타인을 향해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빙자한 자위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이들의 기묘한 하루를 보여줌으로서,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적인 언어를 통해서 최악의 조소를 문명을 향해 보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사기를 치고 있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마지막 삽입곡을 통해서 자신의 악의와 조소를 완성시킨다:그것은 소통조차 안되는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숨겨진, 하지만 강렬한 악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