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extmovie.com/xe/mreview/68030 를 참조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게임 디자이너 엘레그라 겔러(Allegra Geller: 제니퍼 제이슨 리 분)는 개발사인 안테나 리서치사에서 몇 명의 고객들과 함께 신제품 테스트를 하게 된다. 엘레그라의 신개발 게임은 생체 컴퓨터 게임 '엑시스텐즈'. 인간의 신경계와 직접 연결되어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만드는 차원 다른 시뮬레이션 게임의 일종이다. 이 게임을 시작하면 테스트 참가자 12명은 현실을 떠나 아직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게임 속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막 테스트를 시작하려는 순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인간성을 잃어 가는 것을 반대하는 현실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한 엘레그라는 상처를 입고 몸을 피한다. 이때부터 그녀를 보호하게 된 견습사원 테드(Ted Pikul: 쥬드 로 분)와 엘레그라는 필사의 도주를 시작한다. 도피 도중 엘레그라는 엑시스텐즈가 무사한지(엑시스텐즈의 게임기는 생체이다) 확인하기 위해 테드에게 같이 '엑시스텐즈'에 접속할 것을 부탁하지만 테드는 게임 접속에 필요한 바이오 포트(게임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장치로서 척추에 구멍을 뚫어 사용하는 연결장치)를 뚫지 않는 상태였다. 한적한 주유소에 도착한 엘레그라와 테드는 게스(윌리엄 데포)의 도움으로 테드의 척추에 바이오포트를 뚫지만 게스의 목적은 엘레그라에게 걸려있는 5백만불의 현상금. 둘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나 게스가 뚫어준 바이오포트가 감염된 것을 모르고 엑시스텐즈에 접속하다 게임기까지 감염되고 만다. 진퇴양란에 빠진 엘레그라와 테드. 이들은 마지막 피난처인 게임 전문가 카이리 비노코(이안 홀름)의 연구소를 찾아 그의 도움으로 게임기를 수술한 뒤 엑시스텐즈의 세계로 들어간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 엑시스텐즈는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있는 SF영화이다:현실인줄 알았던 세계가 사실은 게임이었다는 진부한 내용의 엑시스탠즈는, 영화의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크래쉬나 비디오드롬 등을 통해서 이미 위대한 SF 걸작들을 만들어내었던 그에게 있어서 다소 '평범한' 지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듀나는 그의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엑시스텐즈는 가상현실이라는 모티브를 띄고 있으며 상당히 '뚝뚝 끊기는' 네러티브와 함께 크로넨버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맞물린 범작이라고 결론내린적이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듀나의 견해에서부터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고자 한다:엑시스탠즈의 서사들이 뚝뚝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네러티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크로넨버그가 이러한 뚝뚝 끊기는 서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지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들어가기 앞서서 우리가 지적해야하는 점은 엑시스탠즈가 '게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소위 게임이라는 매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과 엑시스탠즈는 다르다:기본적으로 그런 영화들이 게임의 감각적이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테마들(알록달록하게 채색된 폭력들, 점수화 등의 요소들)을 다루는데 치중했다면, 엑시스탠즈에서의 게임의 문법은 전적으로 '네러티브'의 문제이다.(사실 엑시스탠즈의 룰은 점수화에 기초한 일반적인 게임의 룰이라기 보다는 TRPG적인 무언가에 가깝다.) 적당한 대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게임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게임 시스템 루프의 존재라던가, 게임 속 케릭터와 인간의 결합을 통해서 케릭터가 인간을 통해 행동하는지 인간이 케릭터를 통해 하는건지 불분명하게 하는 등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JG발라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크로넨버그 특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다:이질적인 두 존재의 융합과 경계의 허뭄, 그리고 그 융합이 가져오는 파국적인 결과. 그 융합의 과정들은 '섹스'나 섹스의 비유로서 표현되며, 크로넨버그가 섹스에 관해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네러티브가 뚝뚝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게임의 문법으로 보자면 레벨이나 스테이지로 규정되는 분절적인 시공간의 맞닿음을 영화는 각각의 케릭터(=플레이어들)를 만나기 위한 역전된 인과의 형태로 재구성한다:즉, 영화는 그것이 사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것이 일어나야 하기에 거기로 도달하는' 형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주유소 주인 아저씨 이름을 개스Gas 지으며, 테드가 포트 설치를 끊임없이 거부하는데도 결국은 별다른 설명없이 포트를 설치하게 되고 엑시스탠즈를 플래이하게 되는 등, 노골적으로 영화전반에 이러한 문법(루프의 암시, 너는 특정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을 깔아둔다. 심지어는 이 영화의 초반 교회시퀸스 마저도 눈썰미가 좋은 관객에게는 '처음부터 게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엑시스텐즈라는 게임을 소개한 뒤에(배경 설명), 일레그라 겔러라는 케릭터를 소개한다(목표의 등장). 그러고는 겔러를 죽이기 위한 현실주의자 암살범이 등장(적대세력, 알레그라 겔러에게 죽음을!)하고, 테드는 사명을 받은 뒤에(겔러를 지켜라) 여정을 떠난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반적인 영화의 인트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겔러를 암살하려는 암살범을 처치하는 경호원들의 '이질적'인 모습이다:마치 자연스러운 일을 하듯이 당연하게 암살범을 총으로 쏴죽이는 폭력을 통해서, 영화는 이 세계가 마치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겔러가 테드와의 대화에서 왜 총을 갖고 다니지 않느냐? 라는 질문을 당연하다듯이 하는 지점 등, 영화는 폭력이라는 테마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깔려있음을 드러낸다:마치 게임에서의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폭력처럼 말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겔러, 이건 게임 같아요'라고 테드가 속삭이는 지점은 순진무구한척 하는 뻔뻔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만천하에 뻔뻔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이질적인 세계를 말초적인 형태이자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한 '결합'으로 드러낸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양서류의 내장을 이어붙여서 만든 살아있는 엑시스텐즈라는 게임기를 척추에 연결함으로서, 게이머는 게임을 한다, 아니 게임과 동화된다. 이러한 동화과정을 통해 보았을 때, 겔러가 지속적으로 테드에게 엑시스텐즈를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은 게임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상대방이 나에게 우호적인가 여부를 확인하는 섹스의 은유로도 볼 수 있다. 동시에 겔러가 어떤 소통을 거부하고 게임하기만을 주장하는 지점은 언어나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파국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재밌는 점은 엑시스텐즈라는 게임기의 접속 포트의 위치다:일반적인 사이버 펑크물(매트릭스 같은)들이 접속하는 목과 후두부 사이의 애매한 경계, 뇌의 끄트머리(의식)와 연수(무의식)가 닿아있는 모호한 경계에 존재한다면, 엑시스텐즈의 접속은 둔부와 등줄기가 맞닿아있는 은밀하게 내밀한 공간에 위치한다. 생명체인지 기계인지 모르는 물건과 태아의 탯줄 같은 접속포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게임에 동화되는 모습은 인간과 게임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것이 게임이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은 조금 색다르다. 엑시스텐즈는 게임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내부에서 게임의 문법을 발견하고, 그것이 외부에도 확장되어 있음을 발견함을 통해서 그것이 게임임을 인지하는 방식이다. 네러티브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정답을 이야기하지 않는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루프라는 기제, 그리고 케릭터와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서로 구분이 없어지는 융합의 지점 등등에서 테드는 엑시스텐즈의 외부가 게임임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의 특유의 폭력과 그로테스크함에 주목해보자:테드가 게임속의 세계(엑시스텐즈 생산 공장)가 너무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이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하다니!) 점을 지적하거나 게임이 진행되기 위해서 사람을 쏴죽여야하는 지점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폭력과 그로테스크함은 인물이 케릭터와 동화되어 가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쉽게 받아들여진다:역겹게 생긴 변종 양서류 요리를 맛있게 먹으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비현실적이고 자극위해서 선정적으로 구축된 세계를 압도적인 리얼리즘(감각의 구현)을 통해서 재현한다. 테드가 몸서리 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압도적인 리얼리즘에 의해서 현실-가상의 경계와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테드의 그런 폭발(이 게임에도 정지가 있나요? - 당연히 있죠. -엑시스텐즈를 중지한다!!!!)과 게임과의 동화(난 뭐가 뭔지 확신이 안서, 심지어 당신마저도 케릭터로 보여)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완전히 동화된 알레그라는 그런 테드의 동요를 키스로 얼버무린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맞닿아있음을 확인한다 라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나르시즘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애시당초에 겔러라는 인물도 그렇지만(방안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는 천재 디자이너-케릭터,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플레이어), 다른 인물들 역시 이 게임(그러니까 엑시스텐즈의 바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타인을 사용한다:그들은 게임에서 만나서 소통하는 것이 아닌, 한명의 승자만 남을 때까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신경으로 직접 감각을 전달받음) 동시에 지극히 비현실적인 경쟁과 살인을 반복한다:겔러가 마지막에 자신의 편인척 속이고 있었던 테드를 죽이고는 이겼다! 내가 이긴거 맞죠? 라고 외치는 지점을 보라. 거기에는 타인이란 '케릭터'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존재로써만.
겔러의 승리로 게임이 끝나자, 게이머들은 모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잠에서 깨듯이 불현듯 일어나는 각성의 형태가 아니다:풀밭위의 현실의 사물이 불현듯 침범하면서 들어오고, 점점 주변의 풍경과 사물들이 점차적으로 섞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통해서 드러난다. 엑시스텐즈의 생물적인 모습과 대비되게, 현실의 게임기는 금속재질의 차가운 느낌의 물건이며 모든 혼돈(현실-가상의 경계)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테드와 겔러의 플레이어들(둘은 현실에서는 커플이다)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게임 디자이너이고, 현실을 왜곡시키는 가장 악독한 범죄자라고. 이는 게임속에서 엑시스탠즈에 반대하는 현실주의자 케릭터들이 내뱉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게임속의 이야기는 더이상 게임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확장된다. 게임 디자이너를 총으로 쏴죽인 다음, 같이 게임을 즐긴 플레이어를 향해서 총을 겨누는 주인공 커플. 그리고 플레이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아, 이런. 이것도 게임이라고 이야기해줘. 게임은 더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과 융합하여 현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합에 의한 종말적인 파국인 것이다.
영화 엑시스텐즈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대단한 걸작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듀나의 표현대로 딱딱하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더 잘만들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듀나의 표현대로, 이 작품은 크로넨버그 라이트의 느낌이 강하다:크래쉬 같은 작품과 비교해서는 지극히 소품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게임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역전된 인과, 게이머와 케릭터의 결합 등등)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크로넨버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함과 게임-인간-현실의 융합을 통한 종말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크로넨버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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