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ff0df30103f3 의 글을 블로그에 맞게 옮긴 글입니다.


콜 오브 듀티:모던 워페어의 성공 이후로, 소위 현대적 군대를 소재와 배경으로 하는 게임들이 많이 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함께, ‘고증의 문제’라는 사실주의적인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 대한 고증 문제를 들 수 있겠는데, 이하 링크로 걸어둔 엔하위키 항목을 봐도 충분할 것이다. 엔하위키의 항목이 저만큼 자세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게임에 대한 관심과 지명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란이 많다는 것과 게임의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고증’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역으로 ‘치열한 고증’을 마케팅 포인트로 제시하는 게임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보헤미안 인터렉티브의 ARMA 시리즈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액션’이라기 보다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으며(기존의 밀리터리 FPS에서 무시되었던 군장의 무게나 영점 조준의 중요성 등등) 매니악한 인기를 끌었으며,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대적자이길 자처한 배틀필드 시리즈의 경우에는 대규모 전장과 엄폐물 파괴효과, 다양한 장비와 탄도학 개념까지 들고오면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정면으로 공격하며, 그러한 ‘리얼리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지점(물론 그것이 ARMA 같은 시뮬레이션적 리얼리즘은 아니지만)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엔하위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고증 오류에 대하여.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BD%9C%20%EC%98%A4%EB%B8%8C%20%EB%93%80%ED%8B%B0%20%EC%8B%9C%EB%A6%AC%EC%A6%88/%EA%B3%A0%EC%A6%9D%EC%98%A4%EB%A5%98)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이 있다:게임에서의 리얼리즘 논쟁은 그야말로 대표적인 ‘의미없는’ 논쟁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배틀필드 4의 탄도학의 경우 거리에 따른 낙차와 조준경을 이용한 조준 수정의 경우, 그것이 탄도학의 ‘이론’을 반영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어째서 배틀필드 4에서는 바람(풍향, 풍속 같은)을 고려하지 않는가? 또한 군인 개개인마다 엄격하고 기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개개인마다 생길 수 밖에 없는 차이라는 것은 실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배틀필드 시리즈나 다른 밀리터리 슈터류의 멀티플래이의 경우, 그러한 격차는 사라진다:모든 병사의 신체적인 차이는 사라지고 균질화되며, 신체가 아닌 텍스처 덩어리로 구성된 기계에 기능적인 악세사리를 달듯이 무기를, 그리고 퍼크Perk라는 능력을 통해서 자신의 기능적 분신을 꾸민다. 그리고 개개인의 부상은 각자의 고유의 고통이나 경험이 아닌 마치 기계가 스스로 치유하듯이 일정 시간동안 피해를 받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회복하며, 그 피해 입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묻은 스크린과 헉헉 거리는 효과음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묘사들이 소위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살짝만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쉽게 논파될 수 있다.


이러한 묘사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게임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게임 제작이란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을 조밀하게 흟는 다큐멘터리나 개개인이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별다른 편집없이 유튜브에 올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영화나 카메라에 근거하고 있는 영상매체와 다르게, 게임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서부터 처음부터 ‘만들어져야’(그래픽적인 텍스쳐뿐만이 아니라 더 깊숙한 기저의식, 기획단계 등등에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제작자들은 현실을 게임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취사선택’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현실 그대로의 매카니즘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 ‘게임의 매카니즘’으로 재구축된다. 무엇이 이 게임에 어울리고, 무엇은 어울리지 않을까? 그것은 제작자의 생각을 따라(혹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현실을 끌어들이며 동시에 현실을 거세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며, 게임의 리얼리즘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뭐 그래서?’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그렇기에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은 이제 의미없는 논쟁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얼마나(혹은 본질적으로) 현실에 근접하냐? 의 문제가 아니다. 왜 게임 회사들은 지속적으로 ‘현실’의 기제들-위에서 예를 들었던 배틀필드 4의 취사선택당한 현실로서의 탄도학 같이-을 집어넣는가? 의 문제이며, 그리고 이는 결국 왜 수용자(=게이머)들은 ‘리얼리즘’에 매료되는가? 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을 하였듯이, 게이머들이 ‘게임=현실’이라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최소한 어렴풋하게나마) 왜 거기에 매료되는가?


이와 관련해서 참조해야하는 지점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부류를 두가지로 분류하였다. 하나는 영화를 자신의 내부로 들고와서 소비하는 집단, 또하나는 영화의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의 구조를 음미하는 집단. 하지만 이러한 영화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분석은 ‘어떤 전제’를 깔고 있다:그것은 바로 영화-‘스크린’-관객이라는 시공간적인 ‘분절’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외부적’인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영화는 관객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게임은 어떤가? 게임은 본질적으로 ‘행위’의 매체이며, 게이머는 그것이 ‘형식적’인 차원에서나마 게임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게임-컨트롤러-게이머에서 컨트롤러라는 중간 매게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문법 내에서는 게임과 ‘결합’ 되어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게임과 인간이 결합되어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게임을 ‘현실’로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게임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필터링되고 재구성된 현실 또는 현실에 근거하여 구축된 가상으로서 게이머에게 ‘경험’과 ‘쾌감’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몇몇 참전 용사들이나 군인들, 게임 혐오론자들의 비난(게임은 살인자 시뮬레이터다)는 그렇기에 게임에 대한 완벽하게 엇나간 비판이다: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게임은 완벽하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이야말로 게임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자 매력포인트며, 동시에 최악의 문제점이자 난점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한 결합이라는 특징은 전적으로 다른 매체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이기에 게임을 비평하거나 분석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게임이 문법적으로는 게이머와 결합되어있는 것은 맞으나, 위에서 지적한대로 그것이 게임-현실을 혼동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결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지점은 게임은 어느 지점에서는 ‘이미 현실인척 하길 포기한 매체’로도 볼 수 있으며 게임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현실로부터 점점 더 유리된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게임의 그래픽과 표현은 과도한 광원과 특수효과, 그리고 극단적인 형태로 재구성되고 조합된 아트 스타일로 향해가고 있다. 이는 과거, CD-ROM 게임의 출현과 함께 고용량에 바탕을 둔 FMV-Full Motion Video, 실제 영상을 촬영하여 사용한 어드벤처가 어떤 대세가 되지 못하고 사장된 것과 연관이 있는듯 하다:게임의 문법과 FMV 사이의 어떤 괴리가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재밌는 점은 FMV와 별개로,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션을 캡처해서 그 위에 ‘텍스처’를 덧씌우는 형태의 게임 개발이 어떤 자연스러운 대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게임의 문법(행위와 결합으로서 게이머와 결합된 게임)과 ‘리얼리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의 섹스와 포르노 속의 섹스는 완벽하게 다르다. 포르노는 ‘삽입’이라는 과정의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삽입-사정까지의 무한한 연장 등등 시공간의 ‘외설적’ 확대/연장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이 ‘섹스가 아니면서 그것을 섹스인 것처럼 인지하고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은 그것이 섹스가 아님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대중이 포르노를 소비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포르노가 섹스가 아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포르노로 유희하기 위한 ‘대전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포르노는 보들리야르가 이야기한 시뮬라시옹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띈다:더이상의 원본(섹스)은 사라져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포르노)의 무한한 복제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대중은 방조와 의도적(혹은 무의식적인?) 망각을 통해 이 무한한 시뮬라시옹을 완성한다.


게임에서 리얼리즘(최소한도로 축약하자면 밀리터리 슈터 게임에서 리얼리즘)을 찾는다는 것/혹은 그걸 토대로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포르노적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다:그것은 실제로 그것을 재현하는데 목표를 둔게 아니라, 대중이 2차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유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척’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르노적 리얼리즘을 영상 매체의 수용과 다른 방식, 게임이라는 매체의 문법적인 결합으로서 게이머는 즐긴다:이런 지점에서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은 여타 다른 매체에서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게이머와 소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게이머들이 ‘그것이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가?’를 두고 리얼리즘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또하나의 방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게임의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이 포르노의 리얼리즘이라는 측면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게임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재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포르노의 리얼리즘이란, 전적으로 ‘섹스라는 이미지의 극단적인 반복/재생산’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포르노는 어떤 ‘비평’자체가 대단히 힘들다:수많은 작품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 유념해야 하는 점은, 이제 ‘게임의 리얼리즘 논쟁’이란 많은 부분 사그라든 논쟁이라는 것이다:게이머들이 콜옵의 고증과 리얼리즘을 두고 싸우기를 포기하고, 마치 ‘피파 처럼 매년 나오는 정형화된 스포츠 게임’의 형태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이상 게임에서-최소한도 밀리터리 게임에서-리얼리즘을 찾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인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지나간 논쟁이 내포하고 있는 기저에는 이 글에서 지적한 이야기들이 깔려 있는게 아닌가? 라고 의심해보는 작업이다.)


(릿군님 코멘트:포르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게임과 비교하기 보다는 포르노와 게임의 유사성, 글에서 이미 언급한 “취사선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두 가지 매체는 “어떤 기준으로 현실을 모방하는가?”하는 문제가 게임의 현실성을 이해하는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양쪽 모두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현실에서 빌려오는 것이니까요. 그런 쪽으로 풀어가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굳이 포르노와 비교하자면 현실에서 원하는 성적 이상형이, 게임으로 치면 (현실에 영향을 받은 상상속)경험의 유사성과 비슷하지 않나… 대충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