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59b1da5a4aa7 의 글을 블로그에 맞게 재편집한 글입니다.


(이 글은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에서 Temporal Film: The Pixel라는 챕터에서 The Cinematic Event 부분의 번역에 모티브를 두고 있습니다. http://giantroot.tumblr.com/post/73471411009/the-cinematic-event-the-cinema-effect)





슈퍼 버니홉의 이 동영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느긋한 시간Quiet Time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성공적인 대부분의 게임들은, 높은 텐션의 액션과 액션 사이에 이를 느슨하게 풀고 이야기나 경치를 감상하거나 퍼즐을 푸는 낮은 텐션의 구조를 집어넣는 레벨 구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통념(게임에서 화려한 액션의 중요성)과 다르게 버니홉은 액션과 액션사이에 배치된 조용한 시간은 실질적으로 액션 파트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조용한 시간의 부제로서 게임이 실패했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예시가 바로 콜 오브 듀티:고스츠이다. 버니홉은 콜 오브 듀티:고스츠에서는 유의미한 조용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게임은계속해서 게이머에게 선정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연출 또는 액션을 주입하며, 혹은 그러한 연출이나 액션이 없을 때는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케릭터가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콜옵 싱글의 열화카피판인 배틀필드 3과 4 싱글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게이머는 콜옵 싱글보다 더 넓은, 그러나 더 공허한 일직선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게임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배틀필드는 액션과 액션 사이의 간극의 문제가 액션 자체를 한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려서 심지어 게임 자체를 역설적이게도 지루하게 만들어버리는 지점이 있다:3편의 항공모함-전투기 출격 미션이 대표적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라는 단순한 선언에 불과하다.


버니홉이 지적한 조용한 시간은 션 큐빗의 [Cinema Effect]에서 언급한 영화에 있어서 ‘0의 시간’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원문은 위의 발췌본을 참조하면 되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뤼미에르가 영화를 발명하면서 그의 이미지스트로서의 성향이 영화라는 발명과 매체적인 특징에 녹아들기 시작하였다. 놀이공원의 유흥으로서의 키네틱스코프와 다른, 예술로서 이미지를 제현하기 위한 극장이자 재생되는 영상으로서의 시공간인 시네마토스코프는 필름의 한 컷 한 컷들을 연속으로 재생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컷들을 필름에다 모아두되 동시에 이들을 필름 내에서 구분하여 분절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초당 24프레임, 즉 1초를 구성하는 24컷의 필름들을 구분하는 지점을 가리켜 보통은 프레임 라인Frame Line이라 일컫는다.






컷과 컷 사이의 빨갛게 칠해진 공간이 프레임 라인이다.


이 프레임 라인은, 영화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이다. 왜냐하면 프레임 라인은 오로지 필름의 컷과 컷을 구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이나 그것이 ‘상영되지는 않는 무의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은 필름의 문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만약 컷들이 프레임 라인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는다면, 영화가 상영될 수 있을까? 그렇기에 프레임 라인은 역설적이게도 무의미 하며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션 큐빗은 이러한 프레임 라인의 공간을 가리켜 ‘0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션 큐빗은 0이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일반적인 정수와 0은 다르다. 정수가 하나의 개념으로서 표지될 수 있다:예를 들어서 2라는 개념은 사과 두개의 형식으로 인지될 수 있다. 하지만 0은 오로지 어떤 사물들에 의한 표지가 아닌 하나의 형용사이자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0이란 개념이 존재하는걸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0은 단순히 비어있음의 영역이 아니다. 0은 부정과 긍정의 총합으로서 원점이다:0은 단순히 멈춰있다 라는 개념이 아닌, 모든 개념이 출발하기 위한 원점으로서 기능한다. 컴퓨터 스크린에 있어서 래스터 그래픽Raster graphics이 성립하기 위한 픽셀들의 기준인 원점(0,0)의 존재처럼, 프레임 라인의 시공간은 그렇기에 0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다:그것은 분절된 컷들이 연결되어서 흘러가기 위한 비어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전 컷이자,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시공의 흐름에 있어서 그 시공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 유의미하게 분절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인 것이다.


게임에서의 조용한 시간은 어찌보면 영화 필름 문법으로서의 프레임 라인, 0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물론 필름 문법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은 ‘기계적인’ 문법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서의 0의 시간이란, 어떤 스테이지 구성에 있어서, 기획 단계적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할 것이다. 버니홉의 지적대로, 게임에 있어서 조용한 시간은 액션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서 ‘액션의 시간’과 비교되어 무엇이 액션이고 무엇이 액션이 아닌지를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것은 컷과 컷의 구분으로서, 각각의 컷을 유의미하게 분절시키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의미없는 프레임 라인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버릴리오는 우리가 신의 0의 시간으로부터 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였다:“신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건들의 경관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어떠한 것을 이어받지 아니한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Virilio, 1996, 9) 이 동시성은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통시성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특히 겔러리에서, 하얀 라이트박스에 위치한 영사 슬라이드에 걸려서 전시된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란, 움직이는 이미지란 현존하지 않지만-반면 영사 슬라이드는 실존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영사 중에서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동시에 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희생함으로서 그것이 현존하게 된다. 버릴리오의 신은 필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영사 슬라이드를 인지할 뿐이다. 성스러우면서 변함없는 현실로서, 라이트 박스를 통해서 보여지는 영화 필름의 프레임라인은 오로지 존재할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의 전시는 박물관에 박제된 나비와도 같다;사랑스럽지만, 그것은 죽어 있다. 성스러운 현존에서, 그들의 시간은 정지해있으며 동시에 0은 공허가 된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하지만 션 큐빗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0의 시간이란 단순하게 구분을 만들어내기 위한 데카르트적인 사분면의 원점으로서 기능하지 않고 그 이상의, 힘의 균형으로서의 ‘동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시로 들은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의 사례를 보자:각각의 분절된 컷은 빛에 의해서 쪼여서 전시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프레임 라인은 유의미한 구분이 아닌 공허한 ‘공백’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아방가르드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디서 영화와 이 예술 작품 사이의 구분이 생기는가?여기서 0의 시간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은 기묘한 암시를 던진다:프레임 라인에 의해서 구분되고 상영되는 영상이란, 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0의 개념과 앞서 이야기한 형용사적인 0의 개념과 다르게, 움직이는 동사적 개념으로서의 0의 개념이 여기서 출현한다.



불후하는 삶은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불후하는 삶을 인식하는 표지이다. 불후하는 삶은 기념비도 없고 추억도 없이, 어쩌면 증언도 없이 잊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삶이다. 그 삶은 잊을 수 없다. 이러한 삶은 말하자면 그것이 채워질 그릇이나 형식이 없이도 사멸할 수 없는 삶으로 남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다”라는 것은 그 의미를 두고 볼 때 우리가 그 삶을 잊을 수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의 본질에 들어 있는 어떤 것, 그 삶이 잊을 수 없이 되게끔 하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

-발터 벤야민의 도스토옙스키 평론



동사적 0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발터 벤야민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평론한 것을 인용하도록 하겠다:그는 어떻게 불후해지는가? 므쉬킨은 그 자신은 간질발작에 의해서 ‘(벤야민의 표현에 따르면)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 회상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각 인물들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인물들의 이야기는 므쉬킨 백작의 삶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므쉬킨 백작의 삶의 불후성은 전적으로 주변인물들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그의 이야기는 ‘독자’에 의해서 불후성을 획득한다. 그가 비록 더이상 돌아올 수 없는 과거회상 속으로 사라진 것과 다르게, 그의 삶은 독자에 의해서 기억되고 잊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불후한 삶을 인지하는 지표다, 즉 불후성이란 ‘기억’을 통해서 인지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자면, 불후성이란 특성은 기억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불후하다는 것이 자연적인 영원성(산, 물, 바위와도 같은)이나 위대한 육신, 힘, 정신 과도 같은 미덕이 아닌 ‘기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는 이렇게도 볼 수 있다:모든 물질은 사멸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서 명시했듯이, 엔트로피는 끝없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주는 진행되며 결국 모든 것은 사멸하고 무한한 망각의 흐름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자연적인 영원성, 예를 들어서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식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불후’의 개념에는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불후라는 것은 썩지 아니함, 변하지 아니함이라는 어떤 ‘동적’인 개념이며 수식은 다르다:그것은 하나의 고정되어있는 법칙으로서, 그것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것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자 고정된 지점으로서,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로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불후성은 ‘무한한 과거 회상’에 의해서 획득되지 아니한다:므쉬킨 백작의 마지막처럼,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회상으로 들어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후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라져버리는 망각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라짐에 대한 거부로서 무한한 회상에의 침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기억으로 인해 획득되는 불후성이란, 현재에서 기억함으로서 획득된다:그것은 무한한 과거로의 회귀(음의 무한대)나 무한한 미래로의 나아감(양의 무한대)이 아니다. 이는 현재에 중심을 두고 그런 무한한 흐름의 멈춤을 선언하고 ‘기억’하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정지되어 있는 0의 개념과 다르게, 0은 두가지 상반된 흐름의 긴장관계로서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현재이다. 그리고 버릴리오의 신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있어서 ‘멈춰있는 정적’인 시각을 이야기했다면, 션 큐빗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그런 전 시공에서 모든 정지된 정적인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 아닌 상대적인, 찰나의 시간을 인지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즉 션 큐빗의 0의 시간은 동사로서 이러한 지점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0의 시간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제임스 그레이 감독작 리틀 오데사의 마지막 장면이다.(6분 27초부터)





영화의 마지막 동생의 시체를 화장한 주인공은 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자신 대신 총에 맞아 죽은 동생, 그리고 자신이 같이 함께 앉아있는 장면을 상상(혹은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현실로 돌아온다:슬픔에 잠긴 그는 운전석에 앉아 있을 뿐이며, 카메라는 그를 천천히 클로즈업한다. 그는 과연 어느 시공에 있는 것일까? 미래? 과거? 그의 이야기는 회상하거나 앞으로 진행되지 않고 멈춰있을 뿐이다. 단순히 좋았던 과거로의 무한한 회귀도 아니며, 더나은 미래에 대한 무한한 긍정도 아닌 우울과 피로 속에서 그 둘을 멈추는 것. 이렇게 영화 리틀 오데사는 0의 시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0의 시간은, 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모든 시대에 동시에 현존하는 듯하지만 하나의 신은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원리이다. 그리고 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의 존재가 불완전하고 타자화된 존재들만이, 오로지 객체가 된 자들만이, 다른 의미로는 비구분적인 것이, 그것이 바로 0이다, 그리고 그 0만이 시간 속에서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수’ 있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그렇다면 게임에 있어서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 액션과 액션 사이의 간극, 버니홉의 표현에 따르면 조용한 시간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게임의 구성 자체로 보았을 때 조용한 시간이 갖는 의미란 액션을 부각하기 위한 비액션적인 지점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조용한 시간이란 일종의 ‘소요’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아오야마 신지가 자신의 영화에 있어서 ‘삶의 노이즈’를 넣고자 한것 처럼, 이 조용한 시간은 네러티브에 의해서 앞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유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이는 즐기기 위한 산책이자 무의미한 돌아다님으로서, 거기에는 목표가 없다. 목표없이 돌아다니는 소요의 시간이란 버니홉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히 등산하듯이 돌아다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소요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0의 시간을 뛰어넘는 동사적인 개념으로서의 멈춤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는 긍정/부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0의 시간으로서, 그리고 비절대적인 우리가 현실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상대적인 개념이자 영화적 0의 시간을 넘어선 역동적인 멈춤이다. 어떤 퀘스트나 스토리를 따라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경치를 바라보며 여행을 하는 소소한 즐거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은 게임에 의해서 계획되고 짜여진 재미와 다른, 아니 그 이상의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지점으로서 게임은 다른 매체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독특한 경험을 게이머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베데즈다 RPG(폴아웃 3, 스카이림 같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베데즈다 RPG의 특징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유의미한 점과 점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공간을 전제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의미가 있다. 이 텅비어있는 공간은 전적으로 '무엇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하나의 가능성의 공간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그래픽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학적'인 공간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 라인에 비하면 이 공간들은 대단히 성긴 구조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공간이야말로 어떤 유의미한 '흐름이 유보된' 공간으로서 플래이어가 채워넣을 수 있는 공백인 것이다. 이는 '스토리'나 '게임의 진행' 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창출해낸다:사람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이 공백을 체워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게임은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전달되는 매체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된다.


하지만 이는 샌드박스형, 혹은 오픈월드 게임의 국한되어 있는 지점이 아니다:버니홉의 지적은 '플래이어의 자유'에 맡겨놓는 지점 이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바이오하자드 4의 스테이지들은 지속적인 액션과 공포를 주는데 주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의미한 BGM이 아닌 무의미한 소음과 배경음들을 통해서 게임은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게이머가 탐색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단순히 액션을 강조하기 위한 비액션의 공간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공간들은 게임 내에서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게이머가 그 긴장감을 즐기고 거기에 동화되어서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액션 시퀸스에 대한 게이머의 경험과는 다른 지점이다:액션 시퀸스는 어떤 의도된 공간이며 이를 풀어내는 방법은 그러한 의도에 부합하거나 그 의도 또는 룰의 헛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결국 어떤 '균질한' 경험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액션 시퀸스 사이에 존재하는 퍼즐과 탐색의 공간이자 무의미한 공간들의 존재란, 게이머가 그러한 의도에서 멈춰서서 긴장을 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오롯이 각각 게이머만의 경험이 된다. 


모든 이질적인 프레임들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는 영사 슬라이드의 보이지 않으며, 인지불가능한 계속됨이란, 그럼으로 역설적인 지점에서, 차이의 계속됨, 0이란 공허가 아닌 모든 다름의 총합임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차원으로서, 0이란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하나의 ‘동사’이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그 경험이란 독특한 형태의 불후성이다:게임은 이러한 0의 시간, 즉 소요의 시간을 통해 게이머의 기억에 독특한 형태의 각인을 세겨넣는다. 영화에서의 0의 시간이 부정/긍정 사이에서 멈추고 움직이기 않는 지점으로서의 힘의 균형, 동사였다면 게임에서의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은 흐름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추억을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게임이 네러티브에 의해서 밀려나가듯이 진행되는 빽빽한 매체였다면, 게임이 게이머에게 제공하는 경험이란 ‘균질’할 것이다. 하지만, 게이머가 액션을 강조하기 위한 비액션의 시공간이자, 동시에 게이머가 직접 채워넣는 빈칸인 공백의 시공간을 통해서 게이머는 게임의 경험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 지점을 갖게 된다. 물론 그러한 경험 역시 게임에 있어서 ‘만들어진’ 지점이다. 하지만, 그 경험이 의도되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갖는 가치는 부정당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