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들어가면서

 뱀파이어:레퀴엠은 91년에 나온 유명한 TRPG 룰인 뱀파이어:마스커레이드의 공식적인 후속작입니다. 한때 D&D와 함께 TRPG 룰 자체를 양분하기도 하였으나, D&D가 CRPG, 컴퓨터 게임으로 홍보가 이루어지면서 인기를 끌었던 것에 반하여 뱀파이어나 월드 오브 다크니스는 콘솔이나 PC 게임으로 변변한 게임 하나 나오지 않았죠. 마스커레이드-레퀴엠이라던가, 블러드라인이라던가, 헌터-더 레커닝이라던가 하나같이 참으로 오묘하고도 미묘한(....) 게임들만 나왔으니까요. 뭐 하여간 그로인해서 WOD나 뱀파이어:마스커레이드의 인지도는 D&D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원인을 찾으라면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역시 뭐니 뭐니해도 마스커레이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복잡한 설정과 정형적인 구조, 그리고 룰의 변형이 힘들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겠죠. 물론 설정 자체의 깊이를 따졌을 때, 뱀파이어:마스커레이드가 후에 나오는 여러 유명 대중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만, 룰의 완성도나 대중성에 의해서 인기를 끌었다기 보다는 설정의 간지 하나만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WOD가 타임 오브 저지먼트로 완결되고, 마스커레이드는 게헤나로 완결이 났죠.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거대한 스토리의 완결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애매하다는 게 지배적이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마스커레이드의 후속작 레퀴엠은 전작의 부족한 부분을 커버하고 게임의 변형성과 스토리텔러의 재량의 강화, 다양한 커스터마이징 요소를 강화시켰습니다. 각항목을 통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죠.

1.룰의 완성도

 마스커레이드를 하던 사람이 레퀴엠을 접하게 되면 가장 놀랄 부분은 바로 설정의 간소화일 것입니다. 기존의 마스커레이드가 세세하고 꼼꼼하게 짜여진 설정을 통해서,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려고 했다면 레퀴엠은 헐렁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부분들을 남겨둠으로서 보다 스토리텔러가 설정을 짤때 수월하도록 변화하였습니다.(이 차이를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은 나중에 한번 번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룰이 너무 루즈한 나머지 스토리텔러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수도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다루도록 하죠.

룰북의 구성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본 설정, 케릭터 만들기, 특수 룰, 스토리텔링 시에 유의할 사항들. 먼저 기본설정은, 뱀파이어의 탄생, 삶, 뱀파이어 사이의 관계, 뱀파이어만의 문화, 정치 집단에 대한 간략한 설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마스커레이드가 추구한 방대한 양의 설정과 내용을 단 40~50페이지 안에 압축한 것에 대해서 마스커레이드 팬들을 충격과 공포를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레퀴엠은 과거 마스커레이드와 달리 지역 단위의 소규모의 스토리텔링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 마스커레이드에서의 카마릴라와 사바트와 같은 거대 규모의 전쟁과 스토리 텔링이 아닌 도시 단위에서 일어나는 뱀파이어 사이의 관계, 정치, 갈등, 초자연적 존재와의 싸움 등을 스토리의 주요한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설정은 기본적인 큰 틀만을 잡고, 나머지는 지역 단위에서 스토리텔러가 만들 수 있는 틀을 제공한 것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점에 대해서 저는 좋게 생각합니다. 일단, TRPG에 있어서 설정이나 스토리텔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게임 플래이와 스토리텔러, 플레이어의 창의력을 방해해서는 안되니까요. 물론, 구버전의 설정이나 컨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마스커레이드를 레퀴엠의 룰을 적용, 컨버팅 시키는 툴도 존재합니다. 이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때 다루도록 하죠.

컨셉과 설정을 다룬 다음은 곧바로 케릭터의 창조 부분과 특수룰입니다. 케릭터 창조 부분은 전반적으로 대부분 예시와 컨셉, 추상적인 개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간단한 개념 설명을 거친 뒤에, 실제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예제 및 적용되어서 참고할 수 있는 예시 사례를 제공합니다. 이 부분은 레퀴엠 룰북에서 대단히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인데, 룰북 자체에서 여러번의 요약, 예제 제시, 부연 설명 등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을 함으로서 플레이어가 케릭터를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실제 개념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부분의 분량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실제 이 부분은 거의 대부분은 뱀파이어의 특수 능력인 디시플린에 대한 설명이 거의 대부분이죠. 특수룰 부분 역시 간단한 개념과 다양한 예제 사례를 통해서 게이머나 스토리텔러가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스토리텔링 부분은 화이트 울프가 생각하는 뱀파이어:레퀴엠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공포 분위기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죠. 재밌는 점은 화이트울프가 설정이나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레퀴엠 게임 플래이의 핵심은 구체적인 뱀파이어 vs 뱀파이어의 정치 갈등, 구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작도 마스커레이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카마릴라와 사바트의 싸움, 그리고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숙명이 이야기의 주요 골자였지만, 레퀴엠과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성격을 띕니다.

전반적으로 살펴보자면, 이번 레퀴엠 룰의 특징은 개인적이며 지역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큽니다. 또한 역사와 전설, 이야기의 대부분을 다 역사의 안개속으로 흩어버림으로서 스토리텔러가 이야기를 구성할때의 재량권을 크게 높여주었죠. 또한 전작과 다르게 '구체적'인 이야기-케릭터이든, 지역단위의 이야기이든-에 집중함으로서 자칫 설정의 모호함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게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무너질수 있는 미묘한 벨런스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는 셈이죠.

룰 자체로만 본다면 멋진 룰이긴 합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코버넌트 부분에 있어서는 레퀴엠의 설명은 상당히 짧고 너무나 추상적입니다. 사실상 이부분은 코버넌트 서플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더군요.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하면 코버넌트의 설정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건 다른 코버넌트 서플을 다룰 때 이야기 하도록 하죠.

2.룰의 설정, 분위기

위에서도 다루었지만 레퀴엠의 기본적인 설정은 '개인적인 공포'입니다. 큰 규모의 음모, 위협 등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케릭터가 느낄 수 있는 단위의 공포로 축소되었죠. 그 덕분에, 레퀴엠은 전작과 다르게 오히려 일반적인 대중문화나 혹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갈등, 인간관계, 이야기들의 뒤틀리고 변형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작과 비교하였을 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레퀴엠 자체에서는 구체적인 룰은 없고, 거의 대부분이 추상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어떻게 뱀파이어 사회가 형성되었고, 유지되었는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갖는 포인트와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추상적인 이야기들이죠. 물론, 스토리텔러에게는 이야기를 짜는데 상당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게이머가 룰북을 보고 플레이 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텔러의 입장에서 본다면, 레퀴엠 룰북은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구체적으로 어떤가에 대해서), 열받아서 서플을 지를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는 합니다.

레퀴엠의 전반적인 일러스트 분위기, 책의 분위기는 WOD 코어 룰북에 비하면 훨씬 뛰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컨셉이 통일되었기 때문인듯 합니다. 그리고 커버나 분위기에 있어서 다른 WOD 코어, 서플 북을 통틀어서 뛰어난 축에 속합니다. 책의 디자인이나 분위기는 룰북 중에서도 제일을 달리지만, 문제는 제가 갖고 있는 실물 코어 룰북은 뜯어지기 일보직전이라서 짜증난다는 점입니다. 몇십페이지에 걸쳐서 스카치 테이프로 보강을 하기는 했는데, 그랬더니 책 모습이 말이 아니더군요-_-;

3.룰의 확장가능성  

레퀴엠의 가장 큰 특징은 룰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도구와 재료가 룰북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별첨항목 1은 클랜의 하위 혈통 및 특수능력 디시플린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주로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인데, 이 가이드라인이 대단히 강력합니다. 기본적으로 블러드라인과 추가적인 디시플린은 뱀파이어의 뒤틀린 분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를 구체적으로 주사위 행동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세세하게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있죠.

별첨항목 2는 예시 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즈라는 구체적인 도시의 역사와 뱀파이어들의 당파들, 코버넌트 들을 구체적으로 구성함으로서 실제 도시를 어떻게 변형하는지에 대한 표준을 제시하고 있죠. 실제 뒤의 담겨있는 뉴올리언즈 도시 예제는 뉴올리언즈, 시티 오브 뎀드의 데모 버전입니다. 이건 다른 코어 룰북들-메이지, 웨어울프-도 똑같다고 볼 수 있죠.

4.결론

결론적으로 레퀴엠은 대단히 멋진 룰입니다. 스토리텔러가 모든 것을 세세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구성이 되어 있지만, 동시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설정을 만드는 사람을 해매지 않게 합니다. 또한 복잡한 개념보다는 예제와 설명에 충실해서 처음 하는 게이머한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 많구요. 물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적어도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관심있는 코버넌트 룰북을 하나정도는 사봐야 한다는 겁니다. 뭐 그정도는 크게 단점이라 할 수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