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와 FPS 장르가 등장한 이후로, 근 10년 동안 수많은 게임들이 FPS와 RPG의 혼합을 시도해왔습니다. 데이어스 엑스, 헬게이트, 헉슬리, 타뷸라 라사 등등...하지만 지금까지 데이어스 엑스를 제외하고는 이 두 장르의 결합이 성공적인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디아블로 의 개발자였던 빌 로퍼가 야심차게 준비한 헬게이트는 문자 의미 그대로의 '헬게이트' 였으며, 리차드 게리엇이 NC 소프트의 자본 수십억을 들여 만든 타뷸라 라사는 우주 먹튀 작품이었죠.
'브라더 인 암즈' 시리즈로 유명한 기어박스 소프트의 '보더렌드'는 지금까지 나왔던 FPS와 RPG 장르적인 결합을 시도한 게임입니다. 그리고 보더렌드는 지금까지 등장했던 RPG+FPS의 결합 중 가장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데이어스 엑스를 제외하고)
보더렌드의 시스템은 단순합니다. 죽이고, 쓸고, 강해지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디아블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장르로서의 공식을 갖추기 시작한 헥 엔 슬레쉬(Hack & Slash) RPG에서 완성되었죠. 하지만 보더렌드는 기존 탑뷰 형식의 헥 엔 슬레쉬 RPG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는 보더렌드가 기본적으로 SF적인 분위기의 슈팅 게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더렌드가 처음으로 RPG+FPS 장르에서 슈팅을 중시한 게임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왔던 대부분의 RPG+FPS 장르의 게임들이 건 슈팅을 지향했습니다. FPS로는 기본적으로 근접전의 박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아블로 이후로 나온 RPG+FPS 게임들도 대부분 디아블로 식의 죽이고, 쓸고, 강해지는 게임 스타일을 지향했고, 보더렌드 또한 그런 스타일의 게임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본질적으로 보더랜드는 전에 나왔던 게임들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더랜드가 다른 RPG+FPS 장르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기존의 디아블로 형식의 게임들 중에서 가장 그러한 죽이고, 쓸고, 강해지는 공식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Guns! Guns! Guns!
보더랜드를 홍보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문구중 하나는 '50만 개의 무기!'입니다. 물론, 게임 상에서 고유한 50만 개의 무기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더렌드는 과거 디아블로가 채택했던 접두어+접미사+무기 종류 조합으로 무기의 종류를 만들어내는 무기 생성 시스템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접두사와 수식어의 조합, 무기 각 파트 별 능력치의 조합, 그리고 무기의 전반적인 성향을 결정하는 무기 제작사 등의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서로다른 능력치를 지닌 무기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이는 보통 디아블로 류의 RPG를 표방하는 게임들은 거의 대부분 취하고 있는 시스템이죠. 그러나 보더렌드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각각의 총기 스펙에 따른 총기의 차별화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즉, 옵션에 따라서 같은 무기군에 속해있는 무기들끼리도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5X 줌, 2발 장전, 높은 정확도, 속성을 갖춘 리볼버는 스나이핑 용도로 사용하지만, 산탄 옵션 X7, 6발 장전, 낮은 정확도의 리볼버는 근거리 샷건 대용으로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무기의 옵션 및 성능 차에 따라서 무기의 운용방법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상항에 따른 무기 사용의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무기의 생성은 게이머의 수집욕을 자극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기의 타격감은 훌륭합니다. 각 총기류의 발사 효과음와 이펙트는 여태까지 나왔던 FPS 게임들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각 무기에 붙어 있는 속성이 이펙트로 나타날 때, 그 시원함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Wild Wide Planet
보더렌드의 배경이 되는 행성은 '판도라'라고 하는 은하계 변방의 행성입니다. 한때, 대기업이 이 행성을 사들여서 외계인 기술을 발굴하려 했지만, 호전적인 기후와 토착 생물 등에 의해 발굴을 포기하고 두손 들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사막과 황무지, 쓰레기들이 잔뜩 쌓인 환경에 호전적인 토착 생물들과 완전히 맛이 가버린 무법자들의 본거지입니다.
보더렌드는 이러한 환경을 독특한 느낌의 그래픽으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굵직한 테두리 선과 뚜렷한 색감 대비의 사용, 케릭터나 사물에 나있는 세세한 잔선 표현 등을 통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죠. 이러한 그래픽을 토대로 게임은 다양한 환경을 표현합니다. 거대한 쓰레기장, 광산, 굴착기, 황야 등등 독특한 배경을 통해서 게임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독특한 분위기를 살리는데 성공하죠.
적 디자인도 이와 같은 분위기에 잘 들어 맞습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사이코들과 돌연변이들, 무법자, 들개, 거대한 바퀴벌래 등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각 적들에 따라서 적들의 약점을 다르게 하고, 공격이나 움직임들을 차별화하여서 다양한 적들과 싸우는 듯한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더렌드는 독특한 적들과 배경을 통해 게임 전반에 다른 게임이 지니기 힘든 아우라를 지니게 됩니다.
Gunman Live Forever
보더렌드는 RPG+FPS라는 장르를 취하고 있는 만큼, 고유한 특징을 가진 케릭터들의 육성도 게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4명의 케릭터들은 각각 고유한 엑티브 스킬 하나와 각 케릭터당 21가지의 패시브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시대가 시대인데 고작 엑티브 스킬이 하나 밖에 없는게 말이 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다양한 패시브 스킬의 존재로 게이머의 플레이 성향을 완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게임은 주로 싱글이 아닌 멀티플레이에서의 협동 플레이를 중점적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협동 플레이 같은 경우에는 디아블로와 비슷하게 참여하는 게이머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임이 점점 어려워지는 구조를 취합니다. 적들은 더 강해지고, 수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충원되는 속도도 빨라지고, 강화형 적들도 싱글에 비해 더욱 늘어납니다. 하지만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좋은 아이템을 얻을 확률은 더 높아집니다. 그렇기에 협동 플레이의 게임 플레이는 싱글에서 느낄 수 없는 속도감과 박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Anything Wrong?
그렇다고 해서 보더렌드가 완벽한 게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보더렌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에서 언급한 장점들이 게임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게임이 디아블로 류의 헥 엔 슬레쉬 RPG에 기본을 두고 이를 FPS 형식으로 옮긴 점은 훌륭했지만, 그 외에 보더렌드만의 특색이 없다는 점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게임 플레이 자체가 거대한 노가다입니다. 1)퀘스트를 받은 뒤에, 2)어디 가서 적들을 싸그리 죽이고, 3)죽인 뒤에 아이템을 줍고, 4)다시 돌아가서 퀘스트를 완료하고, 5)다시 1번에서 4번을 게임 끝날 때까지 무한 반복....이렇게 단순한 구조의 반복입니다. 중간에 게이머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죠. 기껏 해봤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 밖에 없군요. 또한 퀘스트의 내용도 다 비슷비슷 해서, '~가서 ~를 죽여라', '~가서 ~을 찾아와라' 등의 대부분 다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스토리는....한숨이 나오더군요.
따라서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초반의 놀라움에서 후반부의 단조로움(맵 구조, 적, 퀘스트의 반복)에 질리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물론, 게임 자체가 제공하는 재미가 대단히 훌륭하기 때문에 쉽게 질릴 일은 없습니다만, 게임 내의 즐길거리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은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보더렌드는 기본에 대단히 충실한 훌륭한 게임이기는 합니다만, 기본을 빼면 도저히 남는게 없는 게임입니다. 물론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이 게임이 아닌 그 어떤 것이라도 알파이자 오메가일 정도로 중요하고, 게임 자체의 재미도 상당하기에 어느정도 눈감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만 빼면 남는 게 없다는 점에서 묘한 게임입니다. 하여간, FPS나 RPG를 좋아하시거나, 디아블로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해볼만한 가치는 있는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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