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블랙 아일의 안습 일로는 여기서 시작한다. 우선 눈물좀 닦고)


CRPG를 오랫동안 즐겨오신 분들이라면 블랙 아일 스튜디오라는 제작사를 아실 겁니다. 하지만 근래 서양식 RPG를 시작하신 분들은 블랙 아일이란 이름에 생소할 것입니다. 이는 인터플래이의 몰락 이후, 블랙 아일 스튜디오는 해체되었고, 현재는 그 잔존 맴버들이 옵시디언 스튜디오를 만들어서 활동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터플레이로부터 분리된 뒤에 EA에 합병되어 거대 자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바이오웨어나 스스로 게임을 유통할 정도로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는 베데즈다와 달리, 옵시디언 스튜디오는 '유명 프랜차이즈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원 제작사 대신 고용된 총잡이' 나 '패색이 짙은 게임의 마무리 투수' 같은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밑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죠.

폴아웃, 폴아웃 2, 플래인스케이프 토먼트 등의 쟁쟁한 RPG를 만든 블랙 아일 스튜디오는 과거 게이머들에게는 발더스 게이트의 제작사로 더 유명합니다. 하지만, 바이오웨어 편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당시 신생이었던 바이오웨어를 지원하기 위해서 블랙 아일 스튜디오가 자신들의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실상, 블랙 아일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게임들은 폴아웃, 폴아웃 2, 그리고 플래인스케이브 토먼트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게임들은 게임 역사에 있어서 하나 같이 중요한 작품들이죠.

1부에서도 설명드렸던 폴아웃 3의 원 시리즈를 만든 것은 블랙 아일 스튜디오였습니다. 베데즈다가 폴아웃 3를 면적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서 황무지를 해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수많은 게이머들은 이에 환호하였죠. 하지만 기존의 폴아웃 팬들은 폴아웃 3에 어느정도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3편이 1, 2편에 비해서 상당히 부드러운 노선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폴아웃 시리즈는 진정한 의미의 'Post Nuclear War Rpg'이었습니다. 핵이 떨어진 뒤의 멸망한 세계, 노예상인이나 산적, 깡패들이 판치는 세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끔찍하게 변한 구울, 암울하면서 정신나간 듯한 세계관과 분위기는 지금 관점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폴아웃 시리즈는 마약, 섹스, 폭력의 수위가 이전의 게임들과 차원을 달리한 게임이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폴아웃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 큰 이유는 바로 게임 역사상 보기 드문 비선형 방식의 RPG라는 점입니다. 일례로 극단적인 플래이 방법에 따라, 폴아웃 1은 전투 없이 대화로만 게임을 진행하는 것으로 40분만에 초고속 게임 클리어가 가능합니다. 폴아웃 2도 폴아웃 1 못지 않은 게임 진행이 가능하죠.

사실, 폴아웃 시리즈는 엄밀한 의미의 비선형 RPG는 아닙니다. 엄밀하게 게임의 시작과 끝이 있고, 게임 진행에 정석적이고 모범적인 선지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아웃 시리즈가 마치 비선형 RPG처럼 보이는 이유는 게이머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퀘스트, 장소, 인물들을 연결하여 게임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많은 점을 던져놓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선을 이으라고 하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 게이머의 케릭터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세계도 게임 플래이를 다변화하는데 한 몫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게임 내에서 케릭터의 지능 수치는 게임 내에서 대화 선지의 선택 폭을 늘립니다. 만약 케릭터의 지능이 10이면 게이머는 상대방의 숨은 의중을 파악하고 핵심을 짚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릭터의 지능이 0이면 케릭터는 '어...', '음....', '아....'와 같은 아주 단순한 단어 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또한 게임 내에서 NPC들이 케릭터를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게임의 엔딩에 도달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케릭터의 지능이 0인 경우에도 엔딩을 볼 수 있죠. 물론 그가 걸어야 할 길은 수라의 길보다도 더 험하겠지만요(.....) 폴아웃 시리즈가 보여준 이러한 비선형적인 진행은 상당히 많은 RPG 코어 게이머에게 찬사를 받았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플래이 되는 클래식 RPG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죠.

하지만, 분명히 해야할 점은 폴아웃 시리즈가 보여준 비선형적 진행은 현대의 게임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는 폴아웃의 시리즈가 보여준 불친절함 때문입니다. 폴아웃 시리즈는 훌륭한 완성도와 스토리를 보여주었지만, 게임이 보여준 불친절함도 심오하기 그지없습니다(.....) 비선형적 RPG의 전형적인 문제점이죠. 게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적으면, 중학교 때 겪었던 자아 정체성 고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딘가. 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철학적 고민을 하다가 게임 접는게 다반사입니다.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면 쉬워지겠지만, 폴아웃 시리즈의 저널은 썰렁한 것을 넘어서 황당함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걸 보면서 게임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죠. 그렇기에 블랙 아일의 폴아웃 시리즈는 현대에는 히트할 수 없는 추억의 게임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리고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커리어 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게임이 바로 플래인스케이프먼트:토먼트입니다. 항상 역대 CRPG 순위를 매기면 3위 안에는 늘 들어가는 작품이며, 심지어는 역사상 최고의 게임의 순위를 매길 때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또한 '게임이 심오한 철학을 다룰 수 있는가?'라는 논제에 대해, 다룰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드는 주요한 사례가 바로 이 게임이죠.

일단, 토먼트가 상당히 고평가 받는 게임이긴 하지만, 제가 직접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객관적으로 이 게임의 완성도는 대단히 높다는 것이며, 국내에는 문자 의미 그대로 '완벽하게'(번역가가 이를 번역하기 위해서 게임을 직접 하고, 1년 동안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글화되어서 출시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트로이카는 더 안습하다. 여기서 한번더 눈물을 닦고)


블랙 아일 해체 이후, 옵시디언 스튜디오로 넘어가기 전에 블랙 아일 스튜디오가 남긴 잔재가 있습니다. 폴아웃 1편의 주요 제작진들이 빠져나가서 결성한 트로이카 게임즈입니다. 이들이 내놓은 게임들은 하나 같이 괴작들로서, 복잡다단한 의미에서 '어떻게 이런 마인드로 게임을 만들고 성공하기를 기도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게임을 3개만 내고 망했죠. 하지만 각 게임들은 블랙 아일 스튜디오 게임들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작품들이었죠.

먼저 아케넘은 폴아웃의 스팀 펑크 버전 RPG입니다. 폴아웃과 같은 자유도, 완성도 있는 세계관, 복잡다단한 스킬과 과학-마법 사이의 균형관계를 통한 케릭터 육성은 지금 봐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죠. 하지만 트로이카 게임즈 특유의 '개적화'(맵에 오브젝트가 조금이라도 많아지면 지옥을 맛볼 것이야-!), 심각한 것을 넘어서 예술적인 경지를 자랑하는 불친절함, 시대착오적인 그래픽과 인터페이스(그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등은 이 게임을 근 10년 가까이 완성도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는 수모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은 템플 오브 엘레멘탈 이블입니다. 사실, 이 게임은 트로이카 게임즈의 다른 게임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경향이 있습니다. 게임 자체가 D&D룰 기반의 전투 위주였고, 전통 RPG라고 분류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색한 부분이 있었죠. 하지만, 과거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D&D 기반 전투 위주의 RPG 아이스윈드 데일과 같은 지향점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당시 CRPG 최초로 D&D 세계관인 그레이호크 및 3.5룰을 차용했다는 점은 TOEE를 CRPG 역사에서 '그나마' 가치있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그래봤자 게임이 워낙 평이해서 그런 특이점들이 많이 묻히지만요.

마지막으로 트로이카 최후의 작품인 벰파이어 마스커레이드:블러드라인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은근히 많은 분들이 아실거라 생각이 되는데, CRPG 사상 두 번째로 oWOD(old World of Darkness, D&D 및 GURPS 와 함께 영미권에서 유명한 TRPG 룰)를 베이스로 한 RPG였죠. 사상 최초는 아쉽게도 벰파이어 마스커레이드:리뎀션이 차지하였죠.

흔히 요즘 들어서 다크 판타지, 다크 SF 등 어두운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RPG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다크'한 작품은 이 블러드라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도시이자 고딕풍의 LA와 뒤틀린 케릭터, 음산한 사운드, 어두운 스토리 등은 이미 다크 판타지의 정점을 보여주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WOD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린 RPG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블러드라인 역시 트로이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8년된 똥컴에서부터 모니터 빼고 본체값만 200만원 가까이 하는 신컴까지, 블러드라인은 차별하지 않고(?) 그 특유의 개적화를 자랑합니다. 산타모니카에서 GeForce 6600, 7600, 8600 GT가 모두 똑같이 '20 프레임' 뽑아냈다는 것은 이미 레전드가 아닌 전설. 하지만 권장사양은 '비디오 램 128mb인 3D 가속 지원 그래픽 카드'라는 겁니다.(대충 GeForce 4 시리즈?) 게다가 악성적인 보트 미션 버그 등의 버그 역시 이미 정상적 게임 플래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죠.(정식 패치로도 버그가 안 잡히는 덕분에, 게임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나오는 개인 패치가 아니면 게임이 불가능한 정도) 당연히 트로이카 게임즈는 블러드라인 개발 이후 해체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마지막 유산은 옵시디언 스튜디오입니다. 하지만 EA에 합병되어 거대 자본의 혜택을 누리는 바이오웨어와 달리 옵시디언은 지금까지 유명 프렌차이즈의 뒤치다꺼리를 전문으로 하였습니다. 스타워즈:구 공화국의 기사단 2편과 네버 윈터 나이츠 2편이 그 주요한 예죠. 이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본적으로 용두사미, 혹은 어딘가 크게 아쉽거나 결여되어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맴버들이 상당한 능력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능력을 발휘하게 뒷받침하는 배급사나 지원자가 없었기에 개발작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현재 옵시디언 스튜디오는 폴아웃:베가스 와 알파 프로토콜을 만들고 있습니다. 폴아웃 베가스는 현재 드래곤 에이지:오리진의 영향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파 프로토콜은 그들 최초의 오리지널 작품입니다. 앞으로 두 작품에서 그들만의 특유의 개성, 혹은 블랙 아일 스튜디오 시절의 개성을 현대적으로 발전 승화시킨 모습을 보았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