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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에

새로운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의 저서 중 가장 마지막이다:왜냐면 이 글을 끝으로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주하던 중, 프랑스 - 스페인 국경에서 월경에 실패 후 모르핀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게 쓰여진 메모와 착상들은 후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저서인 동시에 그 모호성과 은유 등으로 인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서이기도 하다. 미카엘 뢰비는 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모호성을 철학자가 아닌 '문필가'로써의 벤야민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그의 글은 철저한 논리의 개연성이나 근거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는다:사진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 사진가의 엉망인 솜씨를 '범죄사실을 포착해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잡아낸다던가, 파울 클레가 히틀러를 보고 영감을 받은 천사 그림을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는 천사에 이미지에 비유하는 등 그의 저서에는 종종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벤야민이 지금까지도 인용되는 것은 벤야민의 저서들이 후대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등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틀리지만,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전에 누구도 보지 못했었던 것을 보았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보라. 그 누가 감히 '사진이 예술이냐고 묻기 전에, 사진으로 인해서 예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하라' 라고 선언하겠는가. 벤야민이 사랑받고 인용되는 이유는 잘 정돈된 저서를 보는 것이 아닌, 문필가가 독자를 뒤흔들고 영감을 불어넣는 강렬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렬함은 파시즘이 세계를 파괴하던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벤야민의 치열한 사유와 맞물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벤야민을 읽고 인용해왔다. 그 일말의 희망이 언젠가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 속에서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분석하기 위해서 먼저 미카엘 뢰비는 후기 발터 벤야민의 사유가 마르크스의 정치철학과 함께 유대교 신학적인 전통이 서로 결합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는 모순되었다: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와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다루는 신학적인 측면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섞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후기 벤야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과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나뉘어졌었다. 하지만 유물론적인 해석과 신학적인 해석이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작이 흔들리게 된다고 미카엘 뢰비는 주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모순된 것 같은 이야기는 정치철학에 핵심에 근거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저서 무지한 스승을 예로 들어보자:여기서 랑시에르는 인간과 지성이 어떻게 모든 인간 사이에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랑시에르는 역설적이게도 근거에 기반하여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서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랑시에르의 증명과정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믿음과 결과를 전제하여 증명을 하는 것은 결과를 편향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명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랑시에르의 믿음은 신학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철학의 근저에는 다소간의 '신학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결국 마지막에 정치철학은 믿음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벤야민은 어째서 신학을 마르크스 정치철학과 결합시키는가? 마르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유물론에 근거하여 자본가가 어떻게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주목하고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부분은 바로 역사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툴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역사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즉 역사는 자본가라는 승자의 것이며, 패배자들은 역사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원시 공산제에서 노예제로, 노예제에서 장원과 농노, 공장과 노동자, 그리고 마지막엔 인류의 궁극적 상태인 공산주의까지 모든 역사는 일사분란하게 공산주의라는 마지막 단계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벤야민은 역사에 진보가 없다고 보았다. 패배자들은 언제나 모든 역사 속에서 패배하였으며, 승자는 언제나 승리하며 역사를 써내려간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관을 통해서, 진보에 의한 역사의 낙관이 아닌 비관론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라고 이야기했다:과거 역사의 비극과 프롤레타리아의 수난은 언제나 다시끔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장소에서 무한히 패배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는 모든것이 진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역사의 변증법에서 보여주었듯이(이 역시도 벤야민의 테제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진보는 낙관론을 낳고, 진보의 낙관론은 또다시 새로운 역사의 비극을 불러온다. 비관론을 조직하라는 벤야민의 명제는 역사의 비극이 진보에 의해서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 언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것과 싸우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여기서 결합이 된다:역사 속에서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라면, 역사가 빠져나올 수 없이 영원히 끔찍한 순환나선을 그리는 폐곡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벤야민이 유대교 신학자 숄렘과 했던 대화 중 이런 내용이 있다: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지금 현재 있는 것의 위치들을 약간만 옮기기만 해도 가능하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반복된 패배속에서 드러난 패배자들의 역사적 전통이다:해방구, 코뮌, 봉기 등등 패배자들은 승리하지 못할지언정, 역사의 순간 순간마다 여지껏 역사의 비극 나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시간은 무정하게 흐르지만,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0이 형용사나 명사가 아닌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동사'이듯이, 인간은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 희박한 가능성을 다시금 떠올리고 역사의 패배자들을 불러내어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바로 이 기억이야말로 저항의 가능성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무정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가능성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 무한한 패배의 흐름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패배자들을 기억하는 것, 더 나아가서 반복되는 순환 나선을 끊는다는 벤야민의 발상은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개념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패배자에 대한 감수성은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이 캔 스피크 같이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고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영화가 극장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벤야민이 이야기하였던 역사의 패배자를 기억하고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억은 선별적이다:우리는 국가가 주도하였던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비극을 잊었다. 우리는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에서 130만 헥타르를 무상 조차하여 그때문에 시민 혁명을 일으켰던 역사를 잊었다. 우리는 배트남에서의 국군 학살을, 철거민들의 고통을, 그 모든 것들을 잊었다. 우리는 역사의 피해자인 동시에 새로운 가해자가 되었다.


한 국가, 사회, 집단, 개인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패배자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평등하게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짧게나마 가능했었던 패배자들의 해방구를,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멈출수만 있다면. 파리의 시민들이 시계를 쏴서 시간을 멈추려했듯이, 아마존 원주민들의 후예들이 브라질 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시계를 화살로 쏘았듯이, 그 모든 망각의 흐름과 무정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거기에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아니라면 언제일지 모를 우리의 후손들은 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우리를 생각해 다오.

관용하는 마음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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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어떤 것이든 새롭고 다른 것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끝이 아니다"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이사를 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하였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의 벽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간결한 선과 생생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기법들은 뉴욕 지하철의 분필 그림으로서 처음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1981년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활동 중 마돈나(Madonna)와 앤디 워홀(Andy Warhol)과도 친분을 쌓았다

1985년에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86년 해링은 소호(SoHo)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 팝 가게의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 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으며,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다.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다. 1990년 2월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위키피디아, 키스해링 항목에서 발췌)


어떤 특정한 시기와 인물의 예술작품을 두고 예술 전체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예술이란 단순하게 현재 여기 존재하는 이미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유파와 사조나 당대의 분위기 상황 등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복잡다단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좀더 단순하게 접근하여 예술이 미를 다루는 개념이라고도 보고 각기의 예술가들은 이를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하지만 미학이 지금까지 미를 정의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그 어떤 단순한 개념으로도 미를 정의하고 요약하지 못했었다. 예술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개별 집합의 요소들은 존재하지만(이 사람은 예술가야, 혹은 이것은 예술작품이야) 그 전체를 아우르는 '본질적'인 핵심은 관통하는 개념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키스 해링의 접근 방법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색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의 예술 작품에 대해서 논하기에 앞서서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팝아트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팝 아트는 통속적인 이미지를 예술에 끌어들인 사조를 칭한다. 보통은 앤디 워홀의 캠밸 수프 깡통이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등이 이 팝아트의 사조에 들어가며, 싸구려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소위 '고급예술'에 편입되면서 '이딴 것도 예술로 취급받다니'라고 하며 비분강개하는 사람들이 많았었고 현재에도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팝 아트는 시대의 핵심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흐름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고 그 기저에 보유하고 있다.


팝 아트는 '대중문화'의 출현과 맥을 함께한다. 2차세계 대전 이후 안정된 사회와 소비 문화의 범람(1950년대 미국의 풍요롭지만 공허한 이미지 같은)은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문화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문화의 핵심은 바로 '대량생산'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의 부유한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가 아닌, 수백 수천만의 대중을 상대로 소비되고 수익을 내는 문화이기 때문에 복잡한 감상 전통(박물관, 살롱 같은)을 벗어던지고 언제 어디서나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정향진화한 것이 바로 대중문화인 것이다: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한때 글자는 (책과 노트 같은 곳에) 누웠었지만, 미래의 글자는 (간판이나 광고, 스크린 같은 곳에) 서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적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의 변화, 사회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팝 아트는 당시 변화하는 세계,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등장과 그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사조였다.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 판화를 이용해서 유명인과 유명한 이미지들을 똑같은 형식으로 복제-재생산하였다. 그가 그의 화실을 공장Factory라 부른 것은 현대의 이미지들이 쉽게 재생산되고 복제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이용한 것은 만화가 갖고 있는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미지의 간략화와 특징을 잡아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데포르메) 등의 특징들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복잡한 전통으로 이미지를 이해해야 하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들(예를 들자면, 아테네 학당 같은 작품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각자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포즈를 취하고 누가 어떤 철학을 설파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과 다르게 직관적이며 단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된 공허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즉, 팝 아트는 단순하게 시류에 영합해서 작품을 만들어낸 사조가 아닌 그 시대와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특징을 짚어낸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키스 해링 역시도 이러한 팝 아트의 사조에 부응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물론 키스 해링 본인은 스스로 어떤 사조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1960년대 말, 미국의 찬란했지만 텅비었던 황금기가 끝나가며 TV와 애니메이션, 만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순간에 키스 해링은 태어났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 작품들이 많은 부분 만화와 같은 부분에 기반을 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예술 작품들이 특별했었던 것은 그가 지향하고자 했었던 예술 작품들의 지향점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스 해링은 생전 자신의 예술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았으나, 이에 대해서 어떠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자신의 작품을 어떤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감상자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작품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예술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키스 해링의 주장은 여지껏 대중이 생각해왔었던 예술에 대한 일반 관념을 완벽하게 뒤흔드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대중은 예술에 의미라는 정답이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 도달함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해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키스 해링은 자신의 예술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가장 높은 권위자인 창작자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다. 


물론 키스 해링이 최초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키스 해링의 소소한 저항(?)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예술에 의미가 없다면 예술에 어떤 존재의의가 있단 말인가?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주창한 순수성의 개념과 이야기를 끌어오고자 한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캄비세스는 그 포로를 능욕하기 위해서 페르시아 병사들의 승리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고서 그는 그 포로가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항아리를 갖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게 했다. 모든 이집트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고 비탄에 잠겨있을 때, 사메니투스만은 아무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않았으며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처형당하러 가는 행렬 속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뒤 그가 자신의 시종, 한 늙고 초라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는 온갖 표현을 해 보였다.”


-역사 제 3권 14장




벤야민이 주목한 순수함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순수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벤야민은 '목적에 종사하지 않는 수단 그 자체'를 순수라고 규정하였다:순수한 법은 정의라는 목적에 의해 구성되지 않으며, 분노는 어떤 이유나 의도없이 순수하게 분노 그 자체로써 현현한다. 이러한 개념은 어찌보면 현실감 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벤야민이 주목한 좋은 이야기들의 사례, 위에서 인용한 사메니투스의 사례를 예로 들어본다면 좀더 명확해진다. 헤오도토스는 이 이야기에서 어떠한 자신의 해석과 감상을 붙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메니투스의 느닷없는 슬픔과 절규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야만 한다. 근대적 소설이 화자의 존재와 소설가의 존재를 통해서 은연중에 숨겨진 주제를, 도달해야 하는 지향점과 목표를 설정했었다면,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주제나 화자의 존재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을 체화하는 뼈대만 남은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이 벤야민을 읽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중요한 점은 그의 작품에 대한 의도적인 설명의 거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술은 관객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벤야민이 주목한 이야기와 예술에 많은 유사점이 있다. 또한 재밌는 점은 키스 해링이 끊임없이 그림과 언어 사이의 연관관계를 찾고자 자신의 일기에 노트를 남겼다는 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의 작품들은 그려지는 화풍이나 존재양식(어디에 그려졌는가 같은)에서 낙서와 만화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많은 점에서 이야기와 언어에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그의 작품은 캔버스나 화폭 같은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그 어느 공간에나 존재할 수 있으며 메세지를 발신할 수 있다. 책 구석의 낙서처럼 끄적여 놓은 낙서에서부터 지하철 벽이나 건물 벽에 그린 거대한 그림까지, 키스 해링의 그림들은 그 어느 장소에 놓여도 알맞은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완벽하게 시대에서 유리되었다고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키스 해링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모티브는 대부분 그가 마주했던 당시 시대에 문제가 된 이슈들이었다. 섹스, 어린 아이, 외계인, UFO, 에이즈, 핵, 동성애, 인종차별 등등...이러한 요소들을 키스 해링은 능수능란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하지만 작가가 왜 그러한 소재들을 선택했는가와 별개로, 키스 해링의 그림들의 대부분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그의 그림들 속의 인물과 사물들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모든 것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정말로 필요한 위치에 존재하여 전체와 균형을 이룬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에는 주제나 찾아야 하는 의도가 존재하지 않기에, 감상자는 이를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그리고 자신만의 교훈을 즐겁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키스 해링의 작품의 특징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양식'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뱃지나 티셔츠 등의 다양한 상품에 넣고자 노력하였고, 이는 '팝샵'이라는 아틀리에 겸 상점의 형태로 드러난다. 키스 해링은 자신의 일기에서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길, 순수한 예술과 대중 예술 사이의 좁은 문을 걸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한 고초를 자주 토로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화랑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과 함께 살아 숨쉬기를 원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과 언어의 관계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구축하고자 한 이야기들이 대량생산의 혜택을 받아 대중에게 전파되는, 그야말로 과거의 예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현대적 예술을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팝아트 사조가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한 동시에, 팝아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키스 해링만의 고유한 특질이라 할 수 있다.


키스 해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예술이란 자기 완성적인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 같은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가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맥락을 벗어나서 후대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교훈과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훌륭한 예술들, 고전들이라 불리는 작품들도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의 맥락을 벗어나서 새로운 맥락과 교훈,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키스 해링의 작품들 역시 그러하다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의 시도를 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혼에 안식이 깃들길.




"나는 그림을 지독히 사랑한다. 색을 지독히 사랑한다. 보는 걸 지독히 사랑하고, 느끼는 걸 지독히 사랑한다. 예술을 지독히 사랑한다...."


-키스 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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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과 노트는 https://medium.com/@Leviathan1104/14b0cb5c2a2f 를 참조하시길. 


앨런 소칼과 그 동료들의 저서인 지적사기는 한 논문으로부터 시작한다:앨런 소칼은 한 편의 논문인 "경계침범: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이라는 논문을 소셜 텍스트 지에 게재하고, 수많은 펄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그의 논문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소칼은 이 논문에 적혀있는 어떠한 내용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이며, 자신이 쓴 논문은 여태까지 과학을 인문학적 글쓰기에 남용하고 있었던 포스트모던 학자들을 겨냥한 도발적 텍스트라고 밝힘으로 인해서 학계와 지식인 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에 둔 앨런 소칼의 지적사기는 자신이 게제한 논문과도 같은 문제, 과학과 철학-사회과학 사이의 무의미하며 현학적인 결합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이 둘의 결합에 대한 기초적인 전제를 제시하고 있는 저서라 할 수 있다.


엘런 소칼이 지적하고 싶은 글쓰기의 흐름, 특히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흐름이 갖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고 아닌 막연하게 아는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글에 접목시킨다. 2)그리고 그러한 인용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전(과학)의 인용을 넘어서는 변용이 일어난다. 3)동떨어진 맥락에서의 인용과 분야에 대한 어설픈 학식. 이를 인용한 독자에 대한 겁주기. 4)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이용한 말장난. 등등이 있다. 요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란 엄밀한 논증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 자기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지적 허세의 글쓰기라는 것이 엘런 소칼의 분석이며, 그의 다양한 분석사례들(들뢰즈, 라캉, 보들리야르 등등)에 대한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하여야할 점은 바로 예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이 책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의 예문에 적혀있는 부정확한 과학의 인용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큰 그림(포스트모던 사조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글이기에, 예시에 초점을 맞춰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읽어내려는 것은 글의 초점을 벗어난 독해이며 특히 소칼과 그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과 논증이 제대로 안되어있는 지점들만을 끌어모아서 예시로 들었기에 이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내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예시들과 논증 사이의 구체적인 반박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고자 한다.


물론, 소칼이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포스트모던 학자들이 쓴 글들과 그 내부에 들어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묘사가 글 내부의 논리와의 결합이 대단히 허술하며, 그렇게 전개가 이루어지는 글들이 현학적인 지식 자랑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적사기를 높게 평가할만한 지점은, 자신들의 포스트모던을 향한 불만을 최대한으로 억누르면서 자신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전적으로 '그러한 표현'에 대한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인문학-사회과학 전반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서 제기하는 문제제기는 전적으로 '구좌파'적인 특징에 기초하고 있다. 소칼은 현실의 학문을 해결하지 못하는 학문에 대한 공격, 계몽과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유아론에 입각하여 '과학이란 믿음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가 노엄 촘스키가 이집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느꼈던 생각들을 인용하는 지점은 인상이 깊은데,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한 이집트 사회가 서구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 현학적인 말장난에 빠져들었다'라고 탄식하는 지점은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하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지적인 우울'에 대한 단초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본인의 노트는 위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된다)


지적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미있는 지점은 과학과 인문사회학이 만날 수 있는 일종의 경계지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사기는 두 문화 같이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결합을 다루고 있는 저서가 아니며, 소칼과 그 친구들 역시 그 결합 또는 인문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가 아님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문제상황, 포스트모던이 과학을 남용하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 남용이고 무엇이 허용되서는 안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아주 상식적이긴 하지만 '과학을 인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러한 단서조항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최소한도의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교류 가능성과 최소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사기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소칼은 분명하게도, 각각의 학문이 다루고 있는 '세계'들은 대단히 복잡한 형태이며, 그 내부의 이론들과 관점들이 각각의 세계와 연관이 되어있을 가능성, 혹은 한 학문적 세계에서 다른 학문적 세계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하나(물리학-화학의 경우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이 화학의 체계에 영향을 주었던것처럼) 그것이 서로의 학문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야 하며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라는 것이 소칼의 입장이다. 소칼은 인문사회학-과학의 융합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취한 방식(인문학이 과학을 오독하여 남용하는)은 그대로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학문이 다른 학문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양 학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여기서 좀 엇나간 질문을 하자면, 그렇다면 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두 문화의 융합에 대하여, 왜 포스트모던은 과학을 그렇게 쉽게 오남용했을까?


여기서 살짝 다른 논의를 진행해보고자 한다: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 포스트모던 인문학의 과학의 오남용의 사례는 인문학이 과학을 남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 인문학을 '남용'한 케이스는 존재하지 않을까? 유명한 사례들은 많다:나치즘이 지금은 금기시되는 과학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들에 대하여, 현대의 과학은 그러한 우생학적인 믿음과 과학이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넌센스'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나치즘의 산물인 우생학에 근거한 불임수술의 경우, 독일의 지성들의 모임인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조차 '과학적'이라는 판단하에 제도 자체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적 판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정확하게 과학 역시 인문학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소칼 역시 그러한 지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다른 사례를 보자:독서토론 도중 아버지가 제시한 사례로서, 한때 경제경영에 있어서 컴퓨터를 이용한 계량경제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사례이다. 컴퓨터라는 개념과 컴퓨터를 이용한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생소한 시점에서 롯데월드 및 롯데호텔의 공사에 시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한 공정관리를 도입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뒷이야기들도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는 '컴퓨터라는 기계보다 인간이 더 믿을만하다'라는 어떤 믿음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의 손으로 공정관리를 했을 때보다 비용이 수배 더 들어가버리게 되었다. 물론, 요즘 컴퓨터를 이용한 공정관리는 대단히 신뢰할만하며 동시에 일반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기계와 정밀한 이론이 투입된 이런 사례들, 우리가 과학적이라 '믿는' 이런 사례들에 있어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엇나감'이 발생하는가? 이렇게도 볼 수 있다:우리가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과학이란 실제 과학이 아닌,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다. 실제로 코지마 히데오가 메탈기어 솔리드를 만들면서 했었던 실수, 우성-열성의 구분에 있어서 우월함과 열등함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케릭터와 이야기를 구성했던 실수를 했던것처럼(우성과 열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같은 유전자 내에서 무엇이 먼저 발현될 것인가? 의 문제이다. 무엇이 더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적인 믿음의 '혼선'이 발생하고 그것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과학에 있어서 서로에게 그나마 '쉽게' 환원 가능한 지점도 존재하며, 그것이 금융공학이나 과학적인 이해가 인문학적인 이해에 결합해서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지점(혹은 실제로는 우리가 그것이 움직인다고 '믿는 것'일 뿐인가?)을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문제는 인문학적 이해-과학적 이해의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이 둘이 섞여서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의 문제이다. 나치즘이 보여줬던 정치적 과학(우생학, 열등 민족을 가려내는 기준으로서의 과학)-과학적 정치(우생학에 근거하여 대량학살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의 양측의 경계침범을 일으켜서 끔찍한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들, 인문학적 믿음이 과학적인 사실로 포장되고 동시에 과학적인 사실이 인문학적인 믿음으로 깎여내려지는, 두 문화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예외적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점에서 소칼이 제시하는 '기준'은 많은 점에서 이 아슬아슬한 경계의 예외상황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소칼의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소칼에 대해서 느낀 아쉬움도 어느정도 존재한다. 물론 이는 그와 그의 저서에 대한 살짝 비겁한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소칼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저서 내에서 범죄현장의 비유를 반복해서 인용한다. 그의 비유는 이러한데, 가령 살인사건이 있다면 그 현장에는 증거가 남아있으며, 증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수사에 따라서 우리는 단 하나의 사실, 범인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 소칼의 비유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예외적인 상황'이다.


본인의 희미한 기억에 남아있는 형법총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판례는 다음과 같다: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낫과 흉기로 폭행을 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 현장에서 죽지 않았지만, 그 폭행에 의해서 심장에 이상이 생겼으며 이후 소풍을 가서 김밥과 콜라를 먹다가 채하여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경우에 있어서 '범인'은 누구인가? 아니, 이것은 과연 '살인사건'인가? 이런식으로 법학도들은 법에 있어서 이런식의 다양한 특이사례들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사례들이, 일반적인 '상례'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아니다. 특이사례를 통해서 드러나는 법의 시스템과 그 적용,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예외상황을 통해서 주권자는 체제의 본질을 열렬하게 사유하게 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법학도들이 특이한 케이스들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것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사유가 예외상황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을 지우는 과정에 있어서 '과학'의 도움은 결정적이다:과학과 법의학이 아니었다면 위의 케이스에 있어서 어떻게 폭행과 심장 이상과 급성 심부전을 한꺼번에 연결지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인과관계를 추적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사유하게 하는 것도 과학적인 사유와 논리학적인 접근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수사와 범인의 특정지음과 별개로,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문제가 달라지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지점이란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미와 해석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 한명의 범인과 살인을 쫒아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법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몇백 몇천건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건을 통해서 얼핏 드러나는 시스템 전체의 본질,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작동한다고 판단할 건지에 대한 예외상황에 대한 사유와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본인은 소칼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다만, 소칼이 사회나 철학을 다루는 지점에서 상당히 '일직선'적인, 하나의 진실이라는 소실점을 향한 운동에 자신의 사유를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선이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소칼은 이미 자신의 저서에서 충분하게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냈으며, 하나의 계에 대한 학문들이 서로 맞닿기에는 각자가 다루고 있는 계의 복잡성이 상당하기에, 다른쪽이 다른쪽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피력할 때는 겸손함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자들의 공격적인 인용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담론 자체를 싸잡아서 비판하려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의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부당'하다고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소칼이 보여주는 일반상황, 그리고 과학이 일반상황을 분석하는 강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인문사회학도로서는 중요한 '한계'로도 느껴진다. 재밌는 점은, 소칼이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갖는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콰인의 경험주의 도그마의 문제이다:실험과 이론이 모순을 빚을 때마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모순된 이론을 폐기하거나 혹은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 실험을 두고 그것이 이론에 적용될 수 있는것인지, 아니면 부수적인 전제가 필요하거나 이론에 수정이 필요한지, 혹은 실험에 있어서 고려되지 않은 전제가 있는 것인지 등의 다양한 사유를 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 역시도 '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 그 자체가 인문학에 있어서 예외상횡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물론 과학 자체를 학문으로서 배우지 못한 본인이 제시하는 오만한 이론일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소칼이 과학의 일반상황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세우는 지점을 넘어서, 과학과 인문학적인 사유가 서로 맞닿을 수 있는 지점(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을 다루기 위한 책은 아니며, 어느 한쪽의 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하지만 문제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방식을 넘어서 우리 일상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환원불가능한 것들의 환원가능함에 대한 믿음들, 과학적 사실이 믿음이 되고 정치적 믿음이 과학적 사실이 되는 혼란스러운 경계상황과 예외상황들이 점점 '상례'의 형태로 굳어져가고 있으며 동시에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좀더 넓게 보자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를 넘어서 문제의식을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지점을 갖고 있는것처럼 보이며, 지적사기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점과 함께 포스트모던 비판론을 뛰어넘어서 인문사회학 전반에 깔려있는 과학적 사유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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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근현대의 시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란, 시간의 '가속화'이다:기술 문명의 발달을 바탕에 두고 있는 대중의 등장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이를 더욱 빠르게 가속함으로서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기차를 예로 들어보자. 목표를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기차는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마다 기차역을 설치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기능했었다. 제각기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이, 기차와 기차역을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시간축을 갖게되었다는 분석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시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인간에게 기계의 시간에 맞춰서 더 빠르게 움직일 것을 강요하고, 그 결과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뒤떨어짐으로서 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를 통해서 주장하는 바는 다르다: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이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시간에 대해서 느끼는 감각은 단순하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불면의 밤: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새벽이 찾아와 끝날 가망도 없이 공허한 지속을 잊으려는 허망한 노력 속에서 늘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하지만 경악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이 수축되어 아무런 결실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런 불면의 밤이다...그런데 그런 시간의 수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이다. 충만한 시간 속에서 경험의 힘이 공허한 지속의 저주를 깨뜨리고 지나간 것과 미래의 것을 현재로 끌어모은다면, 조급한 불면의 밤 속에서 지속은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한병철에 따르면 이렇다: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은, 더 빠르게 목표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2배로 더 빠르게 돌린다면 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압축적이기는 하나 우리의 삶은 이전이나 이후나 큰 변화 없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 특히 불안이란 아도르노가 저술한 것, '불면의 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에도 도달할 수 없기에 느끼는 불안감, 24시간 깨어서 24시간 움직이지 못하기에 느끼는 절망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다;그럼에도 인간은 이에 대해서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세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각들은 일사분란하게 목표로 나가는 시간, 가속된 시간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왜냐하면, 가속된 시간에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이 '막연한 불안감'이란 목표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뒤떨어짐'과도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인간이 아무리 기계를 빠르게 돌려서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려 해도, 결국 기계는 기계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게 예속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단순히 기계가 빨라졌기에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명제라 볼 수 있다:기계가 여전히 인간에게 매여있다면, 기계가 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인간의 영향력과 한계에 얽메여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가 인간에게 얽메여있듯이, 기계는 역으로 인간을 옭아매기도 한다:유사 이래, 인간은 가장 싸면서 가장 복잡한 '기계' 또는 '기계 부품'으로서 작동하였다. 한때는 그것은 노예제였으며, 장원의 농노였고, 혹은 산업혁명기의 여성 노동자와 아동 노동자 였었다. 인간에게 기계의 삶을 요구하는 것, 인간에게 모든것을 박탈하고 착취하여 극한의 기계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병철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 일반이라는, 즉 근현대사회-모더니티라는 '정상 사회'라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는 단순하게 인간이 가장 싸면서 복잡하고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착취의 대상이 된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세계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이면에 이렇게 착취당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도록 하겠다)


한병철은 현대 시간 인식에 대한 문제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바뀌어왔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대의 시간은 신화적인 시간으로서, 신의 이야기들, 그리고 끝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존재하였다:여기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풍경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신의 죽음과 함께 근대의 시간관념이 도래하면서 이야기는 바뀌게 된다:한때, 풍경에 불과했던 인간은 이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중심축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절대이성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헤겔이 미학에 있어서 절대 이성의 순간에 도달하면, 이라는 전제를 깔은 지점이나, 마르크스가 한때나마 역사발전에 있어서 단계를 설정하며, 밀의 자신의 자유론 저서에서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간간히 드러내는 지점 등등) 인간은 '시간'을 가속해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런 지점에서, 시간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에는 인간이라는 주역이 있으며, 이야기의 끝을 향해서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 중요한 점은, 근대의 시간에서 신이 죽음으로서 시간은 인간에게 귀속되었으며, 동시에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화의 시간에서 근대의 계몽의 시간으로 바뀌면서, 스스로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인간들이 등장하며 시간을 조작한다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답을 향한 조급성이 인간과 시간 사이의 내적부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을 한병철은 현대의 시간 문제의 단초로 본다.


하지만, 20세기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2차세계대전 전후를 위시한 다양한 사건들), 인간에게 도달해야하는 '절대적 이상'은 사라지게 되었다(혹은 그것이 갖는 폭력성과 위험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은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중심축, 중력을 잃게 된다. 한병철이 주장하는 현대 시간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이 지점이다:현대의 시간에는 '중력'이 없다. 시간에 중력이 없기 때문에, 시간은 부유하며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가속화란, 어찌보면 시간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편린'에 불과하다. 부유하는 시간속에서 시간은 가속하기도 하며 감속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어떤 규칙성을 갖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무의미하게 흩날린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서 무기력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병철이 주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시공간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이다. 재핑Zapping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 시공간은 수용자에게 오로지 '자극'을 주느냐 안주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머무름이 결정되는 세계이다. 만약 그 페이지가 재밌으면, 사람은 그 페이지를 보며 그 페이지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 페이지가 재미가 없으면, 수용자는 자연스럽게 그 페이지에서 이탈에서 다른 재밌는 페이지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다. '재미'라는 자극만 남아있는 이 공간에서, 인터넷 상의 시공간은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더 큰 자극을 줘서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그렇기에 인터넷 미디어는 점점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이 부재하다는 것은 인간이 시간을 무기력하게 또는 자극적인 방향으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주요한 문제라는 것이 한병철의 견해다.


한병철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시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시간의 향기라는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금방 사라지는 시각과 청각적인 자극이 아닌,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뇌에 깊숙한 여운을 남기는 향기, 즉 '후각'의 개념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르고 거기서 머무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향수, 추억에 대해서 수많은 유럽 철학자들이 인용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이 역시 한병철도 인용한 부분이다.)



"(마들렌의 향과 맛에 대해서)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내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시간에 있어서 서사를 다시 되찾자는 의견은 아니다:한병철은 장 프랑수와 료타르의 순간에 대한 미학, 수평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미학이 아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수직적 미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지점에서(물론 그것이 시간의 부유함을 막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 근대의 목표가 있는 시간축의 설정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한병철의 주장은 '사색적 삶'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머무르는 시간이란, 단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든, 아니면 목표없이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시간이 아닌, 그 순간에 지나치며 느끼는 정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후기 저서에서 '들길이라는 시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 것을 한병철은 중요한 지점으로 파악한다(여담이지만 한병철은 독일 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각과 청각과 다르게 향기가 뇌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서(냄새는 후각 수용기로 빨려들어온다), 거기에 강렬한 자극을 주며 머무르는 것처럼, 현대인들도 시간이라는 그 순간에 머무르는 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한병철은 이 지점에서 니체를 인용하는데,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중 하나이다")


한병철의 현대의 시간에 대한 분석은 날카로우며, 핵심을 찌르고 있다. 물론 이 지점에 있어서 본인의 독서력이 얕은 관계로, 한병철이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점을 발견해내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한병철을 높게 평가하고, 독서토론에 있어서도 평가가 좋은 지점은, 근래의 소위 '철학자'라 불리는 자들의 말장난에 비견하면 한병철의 저서들은 '논리적인'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문제의식은 과거 본인이 리뷰했었던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문제와 맞닿아있다:인간이 시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그의 삶은 '불현듯' 끝장나게 된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불시Un-zeit(독일어로, 부정과 시간의 결합어다) 개념은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신세계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인데, 죽음이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그들은 문자의미 그대로 불현듯 '끝장'나버린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을 준비하고 현재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다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역시 경험하는 문제이며 '적절히 머무르다, 적절하게 떠난다'는 적절함의 개념의 부재한다는 지점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움과 별개로, 본인이 그의 저서에 대해서 느끼는 찝찝함이란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회현상의 '한정됨'이라는 지점일 것이다:물론 그는 이미 충분히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철학적/미학적인 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추상적이지만 큰틀에 있어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세계'와 '역사'와도 같은 어떤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경험과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세계와 역사의 문제를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하게도, 우리가 마주하지 않고 눈돌림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에 대처하여야 하는가?


물론, 이는 비겁한 '반칙'이다:하나의 포커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시야를 넓혀서 다양한 포커스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하는 점은 논쟁이나 반박을 하는데 있어서 비겁한 형식의 이야기 확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병철이 다루고 있는 '일반 정상 사회'라는 개념은 어찌보면 먼 거리에서 흝어보는 대단히 추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주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마주치고 있는 문제에 들어오면 한병철의 담론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하며 구체적인 담론들이 얽이고 섥였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머무름'에 대해서 이야기한 지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싶어진다:그는 사람은 현재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미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들이 개입한다. 수많은 역사적/사회적인 얽이고 섥힘의 관계, 나무에 메달린 보트를 보며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도달하였을까?'라는 신비함, 그리고 이 시공간에 함께함이라는 지점이 우리에게 시간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시공간의 엮임,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이 현재라는 지점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함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시간의 향기의 미학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단순하게 그 장소에 머무를 줄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 시간의 엮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같은 시공간에 있음에 대한 소명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본인으로서도 정리가 안된 혼란스러운 지점이지만, 분명한 점은 그런 머무름과 함께있음의 어떤 맥이 닿아있음을 본인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현대의 시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갖고 있는 저서이며, 현대인들이 느끼는 시간 감각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파고 들어가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몇몇 의문점에 대한 대답과 함께 더 큰 의문점을 갖게된 책이기도 하지만, 이런 지점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하는 책이라고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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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진정으로 새로운 세기가, 즉 지식인들과 지식 계급들이 유토피아를 회피하면서 비유토피아적이며 조금이라도 완전하지 않은,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사회로 되돌아가려 온갖 수단방법을 꿈꾸게 되는 세기가 되었다.

-니콜라스 베르자예프.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무려 1932년에 쓰여진 이 소설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그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견 이 소설에 나오는 멋진 신세계이자 미래사회는 유토피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계급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행복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자유로운 성적 유희를 즐기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야말로 완벽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에 대해서 막연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왜일까? 이는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는 1984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984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였던 정치적 권리에 대한 탄압의 은유로 읽혀질 수 있다. 즉, 1984가 보여주는 암울한 미래세계란 전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하였고(주로 나치즘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통한 대중 선동, 언어와 지식의 말살/재교육, 타집단을 향한 증오와 제거를 통한 내부결속 등등),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경험을 거부해야한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4의 세계에 대한 명백하고 교육된 거부감과 다르게, 멋진 신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거부감이란 상당히 기묘하다:즉,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를 막연하게나마 이상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머릿속의 어떤 개념들(세비지로 대변되는)과 동시에 상충되고 있기에 분명하게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감정이나 논리를 확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이 멋진 신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는, 이 디스토피아 세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문제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한 부분은 모든 육체는 과학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 계급에 의해서 분류되고 재생산된다. 섹스는 즉각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자유롭게 행해지지만, 동시에 아이를 낳는 행위는 극단적으로 경멸되는 무언가로 전락한다. 인간은 우울하면 소마를 복용함으로서 우울을 통제하며, 심지어 이들의 대중문화 말초적인 촉각과 후각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현된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어떤 이성이나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체로 인간개개인의 감각기관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즉각적으로 차단한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육체를 통제하는 멋진 신세계의 방식이란 일찍이 푸코가 국가가 국민, 사회 구성원의 육체를 통제하는 것, 영토에 기초한 주권을 대체하는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주권과 정치/통치의 형태를 강조한 부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논지를 확장 발전시켜서, 무엇이 국민이고 무엇이 국민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근대적 주권 국가의 주권 및 국민 개념과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법이 멈추는 수용소라는 시공간에 주목하여 호모 사케르(신성한 인간)란 저서를 썼다.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2.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근원적인 문법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것,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무엇이 예외상황임을 선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권력이자, 동시에 아감벤의 문제의식인 ‘생명정치’인 것이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수용소는 모든 법이 ‘멈추는 시공간’이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서, 무엇이 국민이고 비국민인지를 구별하는 생명-죽음 정치의 장을 연다고 보았다:나치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비국민’을 만들어내어 무엇이 ‘국민’인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보다 좀더 독특하며 명확한 지점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을 소개하려고 한 행위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왜 전쟁에서 패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치독일은 장애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많은 자원과 관심을 쏟은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국민인가’라는 테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권권력의 생명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다섯번째 자유와 게임에서 발췌, 편집 및 재인용)


아감벤의 생명정치, 생정치에 대한 이론은 많은 지점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와 부합한다:인간은 재생산하는 과정은 개개인의 결합이 아닌 국가라는 집단이 독점하고 있으며(초반부에서 보여지는 인간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 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엇이 어떤 인간이 될지를 결정하는가에 있어서 인간의 유전자와 육체를 통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이 왕에게 있어서 주권이란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하여 예 또는 아니요 라 말함으로서 무엇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보았으며, 실제로도 여기서도 그러한 긍정과 부정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일견 긍정적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 있어서,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세 인물은 너무 잘만들어져서 문제거나(헬름홀츠), 너무 못만들어져서 문제거나(버나드), 아예 외부에서 온(세비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헬름홀츠와 버나드는 특이개체들만 사는 섬으로 강제 추방되며, 세비지는 사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즉,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은 다들 사회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제거당함으로서, 사회는 스스로의 정상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신세계의 주권은 아감벤이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논리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정치적 과학, 과학적 정치'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과학의 논리에 따라 엄정하게 정치적인 사안을 구분하는 것, 예를 들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 학살에 있어서 무엇이 유대인인가 혹은 무엇이 정상적인 아리아인이고 죽여야하는 열등 국민인가를 결정하는 지점을 혈통과 우생학이라는 '과학적' 근거로부터 구했다는 점에서 과학과 정치의 결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건강 관리Health Care라는 지점에서, 현대의 건강관리 및 보험과 맥이 닿아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제거하는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나치가 열등한 인종을 쓸어내기 위해서 장애인들을 불임시술을 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종전 후에도 '나치 인종주의적인 법안'으로 인지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했다는 점, 심지어 폐지 이야기가 제기되던 1961년에는 독일의 지성이 모였다 할 수 있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현대의 핵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우생학은 필요하다'라며 이 법안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동시에, 과학은 정치가 된다:죽음의 경계를 나누어서, 무엇이 살아있고 무엇이 죽은 상태이냐를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논제들이 얽혀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칼로 자르듯이 '과학적'인 잣대로 깔끔하게 나누는 것, 명백하지 않은 문제를 마치 과학인양 포장해서 과학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지점에서 과학 바깥의 정치적 의도와 결합된 정치적 과학이 등장한다.(나치즘의 우생학의 개념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정치와 정치적 과학의 개념은 멋진 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저 논리가 된다:인간의 육신을 통제해서 '행복'을 퍼뜨리는 것이 지상목표인 '과학적'인 사회에서, 과학은 행복이라는 사회의 지상가치를 어떠한 논의나 이야기도 없이 절대적으로 도파민으로, 아드레날린으로, 엔돌핀으로 치환한다. 그렇기에, 이 둘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순환논증적으로 완벽한 구조를 구축한다:무엇이 사회가 지향해야하는 가치인가? 그것은 바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물질화된 행복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물질화된 행복은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은밀하게 정치적으로 재조정된다:과연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학적인 육체가 통제의 대상이 되면서, 모든 인류는 주권에 의해서 마음대로 처분당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가 된다:이를 두고 아감벤은, 의미있는 삶을 향유하던 귀족들만의 세계가 민주주의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의미없는 삶을 사는 평민들이 의미있는 존재로 승격되었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의미없는 삶'을 사는 무언가가 되었다 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평등한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평등하게 학살당할 수 있는 존재로 격하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멋진 신세계와는 다른 지점이 생긴다. 멋진 신세계의 본질은, 의미없는 것을 제거함으로서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이는 1984에서처럼, 정치적으로 다름이라는 것을 배격하고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탄압하는 형태에 가깝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1984적 디스토피아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마지막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누구나 제거당할 수 있기에 자신의 내부를 끝없이 자기검열해야하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서 완성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세계란, 그런 자기검열이라는 고상한 언어를 쓰기에는 너무나 저차원적이며 즉물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즉물적인 세계의 기저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모든것을 무한한 행복이라는 찬란함으로 만들려는 어떤 '내부적 기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적인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옥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내부의 구성원이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과학적인 행복과 인류 문명에 대한 왜곡된 믿음, 그것을 사회구성원들이 '내면화'하였으며 무한하게 이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니체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듯이, 세계가 절대적인 기준과 근거, 신과 악마, 선과 악 등등의 서사를 잃어버리게 됨으로서, 멈춤 없는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맞이하게 됨으로서,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반론조차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게다가 그럼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현대사회의 우울의 문제를 소설은 소마라는 마약으로 극복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공리주의적인 세계관과 철학이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을 경계하였듯이, 계측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사라짐에 따라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이다:자극만이 존재하는 사회, 마약, 촉각과 후각에 기반한 대중문화, 인간의 육체로 가장 강하게 얻을 수 있는 쾌감인 성을 자유화시킨 것 등등은 이미 공리주의적 세계가 현현한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리다. 그리고 이것은 아감벤의 생명정치적 개념에 의해서 실체화되며,사회구성원들은 이를 내재화하고 스스로 그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한하게 나아감으로서, 이 사회는 논리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니나를 보자:그녀야말로 이 멋진 신세계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잘만들어졌거나, 너무 못만들어졌거나, 아예 외부에서 온 인물과는 다르게 레니나의 분석할 가치조차 없는 유치하고 허접한 심리상태야말로 이 사회 일반 구성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호모 사케르이다:한병철은 아감벤의 무한히 제거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뒤집어서, 무한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주창한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인물들은 무한히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 사회에는 노화가 없다:그들은 60세까지 젊음을 유지하다가 불현듯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죽음은, 개개인의 상실이나 슬픔이 아닌 '훈련으로 인해서 극복되는 불쾌함'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 죽음이 거세된 사회에서, '생명'은 영원하게 그리고 무한하게 팽창한다. 하지만, 죽음으로서 완결되는 삶이 없다면, 어떤 것에 끝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삶이고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받아들여야할 죽음도 없고 짊어져야할 탄생도 없기에,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의미있는 삶이 아닌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 구성원은 그저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 언제라도 사라져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자신에게 소여되며 사회가 정해준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영원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이자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고 내면화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의 통찰이 내부를 향해 날카로운 지점을 드러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계 역시 갖고 있다:한병철과 후기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철학사조는 정교하고 복잡한 분석을 통해 사회 내부의 문제를 정확하게 고찰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외부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병철의 분석은 날카롭지만, 사회 외부에서 볼 수 있는 문제들, 사회 내부의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통제'가 가해지는 지점을 놓치고 있다:멋진 신세계에서도, 그런 완전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통제가 일어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내부(미래 사회)와 외부(원시사회) 사이의 과학작 관리자이자 주권자(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지점에서)의 상징이지 대표로서 무스타파 몬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스타파 몬드와 같은 경계인(그는 과거의 세계를 경험했으며, 동시에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다. 그는 세비지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며 이해하고 동시에 즐기기까지 한다)인 존 세비지 뿐이다. 그 역시도, 신세계로부터 온 여인의 아들로서 원시의 사회로부터도 신세계의 불길한 존재로써 배척당하고 동시에 신세계에 있어서도 그저 흥미거리이자 구경거리에 불과한 경계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들은 내부(헬름홀츠나 버나드)와 외부(원시사회와 과거의 사회)의 경계에 서서 현재의 문제를 인지한다:그것은 인류가 여지껏 쌓아왔던 문화와 문명을 신세계라는 사회가 완전히 부정하고 망가뜨리고 있으며, 동시에 이 사회가 병들어있고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다. 그것이 단순하게 내부의 인간들이 사고하지 않음을, 내부의 문제를 떠나서 이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서 행해지는 무수히 많은 모순들(과학의 정의, 노동을 창출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지점들 등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한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과거의 위험을 보고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기를 선언하며, 세비지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다.(1950년대 작자 서문에는 이러한 결말이, 세비지에게 너무나 크나큰 비극과 짐을 지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멋진 신세계가 갖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었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이러한 생명정치-무한 긍정의 디스토피아를 부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남아있다. 무스타파와 세비지의 마지막 대화에서, 세비지는 이렇게 답을 한다:"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합니다:늙어서 추해지고 무능하게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를, 굶주림의 권리를, 더러워질 권리를,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조바심할 권리를,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를, 말할 수 없는 온갖 고통에 시달릴 권리를"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 이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해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난 인류의 역사 기간동안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그러한 불행을 극복함으로서 인류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과학을 이용한 통제와 관리는, 현대사회의 핵심이며, 축복이자 저주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의 혜택과 불행할 권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봐야할 것이다:세비지가 제시하는 극론의 '불행할 권리'는 어떤 '멈춤'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시간의 향기에서, '시공간에 머무르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시공간은, 중력을 잃어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방향성 없이 부유하는 시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의 시공간에 머문다는 것, 부유하는 시공간의 흐름을 '스스로' 멈추고 거스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주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흐름의 거부, 우리가 멈추는 것, 그것은 '부정의 미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0이란 단지 비어있음을 드러내는 형용사가 아닌 음의 흐름과 양의 흐름을 멈춘 '동사'라고 이야기한 션 큐빗의 말처럼, 우리는 무제한적인 관리의 긍정과 멈추지 않는 세계를 멈출 수 있는 사유와 철학, 미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극단적으로 매독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모든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런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지켜야하는 것, 과연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단순하지만 중요한 명제에 대한 사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사유와 함께, 관리와 기술,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작동하는가 역시도 알아야 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0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사회와 과학 사이의 문제를 정밀하게 짚고 있는 작품이며, 고전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1940년대에 다시 쓰여진 작가 서문은 그의 경고가 그의 시대를 넘어서 우리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며,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예견한 다음과 같은 종말을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유토피아는 15년 전에 어떤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듯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을 앞으로 600년 뒤의 세계속에 투영시켰던 것이다. 현재 1세기 이내에 우리에게 이러한 공포가 닥치리라는 것이 아주 확실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간 내에 우리 자신을 산산조각 내지 않은 체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렇게 보인다. 실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된 과학을 인간이 만든 수단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체 종족을 생산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분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선택안 가운데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원자탄 위협을 자신들의 자신들의 기본전략으로 삼고 결과적으로 도시 파괴나 전쟁을 제한할 경우, 영원한 군사화를 보유하게 되는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의 형태의 전체주의와, 일반적으로 급속한 기술진보와 특별히 원자개발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 효율과 안정성을 원하는 욕구 안에서 유토피아의 복지전체정치로의 발전으로 생기는 무질서가 불러올 수 있는 초국가적 전체정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돈을 지불하고 나서 선택을 하십시오.


-올더스 헉슬리, 1947년판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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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공리주의utilitarianism은 현대철학 사조에 있어서 중요한 흐름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공리주의는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대행복의 원리Greatest Happiness Principl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최대행복의 원리에 근거한 공리주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사회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실제로도 공리주의의 등장에는 자본론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설명하는 기저가 등장하면서 드러나기도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에는 역사에 있어서 유의미한 귀족, 왕족에 의한 사회가 아닌 최대다수라는 '대중'이라는 균질화된 집단이 유의미하게 등장한 부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리주의 이론들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근대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고, 정책을 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기준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동시에 현대철학 사조에 잇어서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과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야말로 도덕 그 자체인가? 라는 전제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현실에 적용하기에 모호한 부분들(밑에서 다루겠지만) 등등으로 인해서 많은 철학자들은 공리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대중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다루는데 있어서 최초로 등장한 '공리주의'라는 도구의 유용성 때문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숫자만큼의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를 옹호하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JS 밀이라는 이 철학자는 위에서 언급하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인지되기는 하지만, 정작 밀의 자유론은 벤담식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쪽에 가깝다는 것(다수는 소수에게 침묵하라 억압할 수 없다)이다. 10대 부터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스승인 벤담으로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밀은 20대가 되기전에 이미 벤담과 공리주의이론에 통달하였으나, 20대 이후 스승과 노선을 달리하면서 전통적인 '공리주의자'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오랜 저술활동과 말년의 의원활동을 통해서,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자의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밀의 주장은, 훗날 노동당의 계보를 잇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밀의 대표저작으로 분류되는 자유론은 그 내용 자체는 의외로 '평범'하다:자유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야하며, 사회(혹은 행위자 이외의 사회 구성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 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으로써는 대단히 '평이한' 의견이라 볼 수 있으나, 이게 150년전의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을 가정하고 볼 때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의견개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50년 전의 의견이 지금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점은, 이 글이 근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요약은 자유론 요약 노트(https://medium.com/p/26a9cd442a40)를 참조하시길 바라며, 이 글에서는 자유론에 대한 몇몇 반박의견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공리주의 전반에 대한 개인적인 몇몇 의문을 표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몇몇 사소한 문제들(오리엔탈리즘 및 자유를 제한하는 케이스의 왜곡사용:일제의 경우) 자유론이 가장 크게 공격받는 지점은 '과연 사회에 영향을 주는지 안주는지는 어떻게 판단을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개인의 행동이 엄청나게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치는 현대 사회의 경우에는 그러한 뚜렷한 구분을 하기 쉽지않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밀의 이론에 대한 '피상적'인 공격에 불과하다:밀의 선언하는 '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란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고정된 원칙으로서 기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민법의 가장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민법 신의성실의 원칙의 경우, 모든 민법의 조항들이 그 신의칙이라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의칙이 민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정지'시킬 수 있는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권한이기는 하나, 동시에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라고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항에 맞춰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신의칙은 그것에 근거를 마련하지만 모든 판단을 그것에 의거해서 하는 등 자신은 뒤로 사라진다:즉 신의칙은 가장 강력하며 모든 민법의 근원이며 전제이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논의에 입각한 법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최고이며 동시에 (적용에 있어서)최종적인 법조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선언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밀은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서 거대한 기반이자 대전제(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인지는, 시대와 상황, 공간별로 각기 다른 이해를 상정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밀의 선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할 것이다. 밀의 선언은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의 선언이 아닌 '진리'(사실 진리의 불가변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생각해볼때, 진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나 여기서는, 그리고 후술할 문제에 의해 어쩔 수 없기에 진리라는 단어를 선택한다)를 향한 일종의 안내이자 지침으로서의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밀의 자유론이 갖는 문제들은 자유론이라는 저서의 주장이 아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근대적 한계성과 그가 기초하고 있는 '언어적/인식적인' 문제 때문에 생겨난다. 예문을 들어보겠다.



"적어도 인류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여러가지 상이한 의견이 존재하여야 하고,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상이한 생활의 실험이 있는 것이 '유익'하다. 또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생활의 다양한 양식의 가치를 시도해보는 것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면, 그가 그것을 시도하도록 하여 실제로 증명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컨데 근본적으로 타인과 관련되지 않는 사항에 대해 개성이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개인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전통이나 관습이 행동의 규범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간 행복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자 '개인적/사회적 진보'의 주된 요소를 이루는 것이 결여되게 된다." 


-3장, 복지의 요소인 개성 중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 '유익', 성격의 '다양함', '개인적/사회적 진보' 등등 밀의 언어 사용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살짝 기묘하다고 볼 수 있다:밀의 이론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인식의 한계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사회는 어떠한 방향성을 띄고 운동하며, 그러한 '시대정신'에 의해서 인류는 완벽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믿음이자, 사회에 대한 '순수 논리적인' 접근이라 볼 수 있다:이는 헤겔은 예술에 있어서 '예술은 인간의 불완전한 지성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이성이 완벽에 도달하게 되면 예술은 그 역할을 상길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도대체 완벽한 이성의 상태는 어디이며, 그리고 그것은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이론들은 전적으로, 어떤 실증적인(실제로 보여지는 현상) 것이 아닌,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논리 실험이자 가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상 상황의 경우에 한해서 헤겔은 완벽한 철학자라는 한병철의 평가와도 같이(권력이란 무엇인가) 완벽한 정상상황의 경우를 상정하면 그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이 비상상황이 아니다:역사는 언제나 비상 상황이었다' 라는 벤야민의 지적을 생각해보면 이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겔 이후의 철학의 흐름이 유물론(포이어바흐-마르크스), 언어라는 도구에 대한 고찰(비트겐슈타인), 실존의 문제(하이데거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니체 등등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런 철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자유론으로 돌아와보자:밀이 자유론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성의 존재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유능하며 건강한 사회는 개성이 발현된 사회(밀에 따르면 중국과는 정반대로!)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개인의 개성은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존재되어야 하는 어떤 전제적인 존재인가?'라는 지점은 재껴두도록 하자. 밀이 이러한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대한 대중이라는 절대 다수가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으로도 볼 수 있다(심지어 그는 3장 소단원 중에서 '집단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챕터를 쓰기까지 하였다) 재밌는 점은, 대략 100년 뒤의 한나 아렌트 역시 활동적인 삶Vita Activa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개개인의 삶이 거대한 흐름에 매몰될것이라고 보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활동적인 삶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현대에 있어서 개성은, 대중이라는 익명성에 매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과잉 개성'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대중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되라는 이야기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자기계발 교육에서부터 성형, 다이어트의 문제 등등으로 우리에게 있어 구체적이고 세밀한 지점으로 드러나게 된다:강신주가 노숙자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버린' 존재라고 역설한 것처럼, 개인의 스스로의 개성을 포기하면,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무한한 자기계발은 인간을 우울증이라는 영혼의 소진상태로 밀어넣는다:인간은 '그 자신'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 자신과의 셰도우복싱에서 밀려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개성을 위해서 사회가 장려해야 한다는 밀은 이러한 문제를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무한한 자기계발에 근거한 영혼의 소진. 그것이 한병철 식의 영원히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든, 아니면 보들리야르 식의 시스템을 숨기기 위한 외부의 끝없는 주입이든 말이다.


또한 자유론과 별개로 공리주의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론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여기서 비켜서있다:최대다수라는 대중의 존재와 별개로(물론 이것도 문제삼으라면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과연 '최대행복'이라는 지점은 어떻게 인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 것이다. 밀이 중요하게 근거하고 기반하고 있는 토크빌의 경우는 민주적인 사회들은 사회적 불운의 해소와 모든 인간운명의 평등화로서 보다 많은 복리를 항상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보들리야르는 '(이 경우에 있어서)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 물질적 안락이어야 한다'라고 지적(소비의 사회)하였다:균질화된 행복, 부의 추구. 그것은 공리주의가 기본적으로 그러한 부가 가시적인 형태(숫자나 화폐 등)로 드러나는 '자본주의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행복은 '측정될 수 있다':공리주의의 등장이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지점이 여기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으며, 밀 역시도 리카르도의 차익지대론에서 큰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공리주의의 믿음과 별개로 개개인의 각기 다른 행복의 지표는 돈이라는 사용가치 하에서 재구성되고 균질화되며 고유의 가치를 잃어간다(보들리야르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은 균질하게 소화된 똥이 된다'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 


모든 행복은 지표화되서 인지될 수 있는가? 그것이 균질화 계량화 되어서 똑같이 인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이에 대해서 쉽게 부정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은 쉽게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허나 분명한 점은, 그러한 계량화와 균질화가 '편리한 도구'라는 점과 계량화와 균질화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보들리야르가 간과하고 있는 점은, 물질문명의 혜택이 단순하게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아닌, 긍정적/부정적인 의미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점이다. 보들리야르는 '세탁기는 그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위세와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로써도 기능한다'라고 선언하였다:보들리야르의 위대성은 세탁기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이미지의 소비라는 지점도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데 있지만, 동시에 그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여성들을 하루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는 '빨래'(빨랫감을 들고 우물이나 개울까지 가서, 빨래를 하고 다시 그걸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지점에서 눈돌려버리면서 길을 잃고 해매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화된 시스템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그 자체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쉬이 간과한다:냉장고를 부엌에서 내쫒아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적'인 것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강신주의 발언은 냉장고라는 음식 보존의 도구적 속성을 무시한 단순한 러다이트적인 발언에 불과하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단순한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의 지표가 아닌, 기능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찬성/반대 한쪽을 주장하기에는, 공리주의 혹은 '균질한 행복'이라는 지점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론을 제기하기 보다는, 전체를 보고 숙고하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밀의 자유론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근저에 깔린 사상의 다양성 존중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저서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만 치열하기에 읽는 재미는 덜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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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철학은 세계를 보는 관점을 규정하는 학문이다. 고대에서부터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세계를 어떤식으로 인식할 것인지, 그리고 그 인식에서 어떻게 세계를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특히 근대-모더니즘의 사회의 문제들, 2차세계대전의 상흔이나 인간 소외의 문제 등등을 철학자들은 다양한 문제의식과 분석으로 접근했으며 각기 다른 결론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법을 구축한다.


한병철은 사회문제는 이제 기존의 '면역학적인 문제'가 아닌 '신경증의 문제'로 넘어갔다고 해석한다. 면역학적인 문제의식은 '타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그 외부의 타자와 내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의 경우, 하이데거의 언어이론을 근거로 하여서 '존재'란 '타자'를 흡수하여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윤리의식을 만들어내는데, 윤리와 도덕이 현존재가 타자의 현존재에 복속되어 봉사하는 기존의 윤리 개념과는 다른 독특한 무언가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은 철저하게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근대 철학자들 역시 이분법적인 개념에 근거하여서 사회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근대/노동사회와 후기 근대(맥락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던이라 할 수 있는)/성과사회를 서로 구분하며, 근대철학자들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인식론을 비판한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Vita Activa)에서 인간의 삶이 거대한 익명성의 담론 속에 묻혀서 사라질 것을 경고하고, '행동하는 삶'을 강조한다. 하지만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과 다르게, 인간의 삶은 익명성의 흐름에 묻히지 않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후기 근대는 '자아의 실현'이나 '인간의 발현'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과 반대로, 오히려 후기 근대는 '행동'이 넘쳐나기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근대는 종교,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탈서사화의 과정을 거친다. 니체가 '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건강의 여신이 들어설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듯이, 절대적인 구분의 기준이자 질서의 붕괴하면 거기에는 한계없는 '긍정'이 가득차게 된다. 한병철은 이를 성과사회라 부른다. 과거의 규율사회에서처럼, 개개인은 통제와 규율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육체를 운영하여 성과를 내는 '작은 기업'이다. 그리고 개개인은 성과사회의 규율을 자신의 육체에 내재화한다. 현재 불고 있는 자기계발의 광풍이나 다이어트 등에 대한 현대인들의 접근, 그리고 그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체계화되고 산업화 되는 모습들에서 한병철의 분석은 예리한 통찰력을 보인다.


그렇기에 세계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규율이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긍정'의 사회로 재구축된다. 하지만 한병철은 니체를 또다시 인용한다:인류에게서 관조가 사라진다면, 인류의 모든 행위들은 과잉행동으로 치달을 것이다. 세계가 긍정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더이상의 '되돌아봄'의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들은 이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세계의 규율을 내재화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긍정의 메카니즘의 극치에 있는 것이 바로 컴퓨터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컴퓨터가 계산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정의 메카니즘(돌아봄, 관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무한한 긍정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소모될 수 밖에 없다. 이 긍정의 과잉, 자아의 팽창 상태에 의해서 생겨나는 피로와 우울은 기존의 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들과 다른 양상이다. 기존의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인간 외부의 존재하는 '문제'들, 또는 인간 내부의 존재하는 어떤 '요소'들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었다면(면역학적인 접근), 성과사회의 인간 영혼의 소진은 신경적이며 정신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페터 한트케의 '치유하는 피로'를 제시한다. 모든 공동체와 언어를 파괴하는 분열적인 피로(성과사회에서의 피로)와는 다른 '치유하는 피로'란, “접근을 허락하고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이다. 한트케는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다. 이 세상에”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한병철이 피로사회 전역에서 인용하는 니체의 관조, 벤야민의 심심함, 그리고 참선과 무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 자가 재생산을 하는 긍정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 멈추는 힘을 의식적인 멈춤, 조건이나 수동적인 멈춤이 아닌 부정할 수 있는 힘이라 정의한다. 현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인 '짜증'이 아닌 상황 전체에 대한 숙고와 관조에 기초하고 있는 분노처럼 말이다. 


이러한 대안적 '피로'를 대중문화 내에 적용하여 본다면, 끝없이 카타르시스와 대속을 통해 화해를 강요하는 대중문화의 서사흐름에 대한 공격이다. 보들리야르가 '대중문화에서 학살을 다룸을 통해서 대중은 학살의 경험과 화해하고 그를 극복한다. 이로 인해서 학살은 망각된다'라는 문제의식처럼, 끝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화해하고 또한 잊혀질 것을 강요하는 대중문화의 서사는 한병철이 저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상황의 '끝없는 긍정'을 통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밑에서 예시로 다룰 리틀 오데사와 악마의 등뼈에서는 이러한 환상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으며, 한병철이 대안으로 제시한 '치유하는 피로'에 대한 이미지의 단초이자 영감을 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 리틀 오데사는 전적으로 축축한 슬픔과 우울로 가득찬 세계다. 폭력은 세계를 지배한다. 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대한 우울과 피로는 등장인물 사이에 만연하다. 바람을 피는 아버지, 살인자 형, 그리고 무고한 동생,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까지, 이들 모두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케릭터들은 서로 상처주고 갈등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축축한 우울함과 처지는 피로 안에서 ‘평등하다.’ 오히려 영화는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그런 우울함과 피로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들이 하나의 커뮤니티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군상들이 도달하는 비극적 결말(형의 연인은 총을 맞아 죽고, 그 현장에서 총을 들고 있던 동생은 오해를 받아 총격을 받아 죽는다.)에 대해서 어떠한 카타르시스를 던져주지 않는다. 화해하지 않음,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서 관객들은 일종의 숙연함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던져주는 대속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의 슬픔에 사로잡혀서 침잠하는 것, 폭력의 중지를 역설하는 그런 독특한 우울함에 사로잡힌다.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악마의 등뼈는 엔딩이 상당히 인상깊다. 카사레스의 유령이 상처입은 아이들이 고아원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것을 묵묵하게 관조하는 듯이 바라보는 엔딩에는 어떠한 화해도, 카타르시스도 존재하지 않는다.(유령이란 무엇일까?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 어쩌면 순간의 고통...죽은 것도 어떤건 산 것처럼 보인다. 조만간 감정이 정지된다. 빛바랜 사진처럼. 호박 안의 벌레처럼. 유령, 그게 바로 나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떠나고, 죽은 자들은 유령이 되어 남아 뒤에 남는다. 하지만 극이 만들어내는 지점은 독특하다. 극히 인간적인 인간들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전쟁을 배경으로,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작은 사건들이 전쟁에 의해서 어떻게 파괴되고 상흔이 남는지(전쟁이 직접적 모티브는 아니지만, 고아원의 불발탄과도 같은 상징으로서 남아있다)를 보여준다. 그 누구도 절대적인 적이 아니며(하킨토가 완벽한 악이라고 규정짓기에는 그의 이미지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망자에게 정당한 것을 돌려주고 남은 뒤에 상처입은 산 자들이 떠나는 것. 결코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인해서 생기는 독특한 피로감, 우울, 악마의 등뼈는 그러한 것들이 극을 지배한다. 극 내에서의 정열과 사랑은 어딘가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며, 고아원이라는 세계역시 그러하다. 아련한 추억 속에서 느끼는 오래된 상처의 쑤심, 피로함. 악마의 등뼈가 되살리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지점들이다.


물론 피로사회가 근대 모더니즘 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이것이 모든 사회와 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서 적용하기에는 '성과 사회'에만 적용할 수 있는 다소 제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후기 근대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해석 틀이자 대안의 일부를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어느 날 사탄을 추종하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사탄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는 미국 대사 부부에게 입양되어 훗날 지상에서 아마게돈을 일으킬 운명. 그런데 재수없게도 이 아이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각성시킬 임무를 띄고 지상에 파견되었던 악마 크롤리는 실수로 아이를 엉뚱한 사람에게 입양시켜 버린다. 어쨌든 임무는 받았으니 지상을 파멸로 이끌기는 해야겠는데 인간계에서 6천년정도 구르는 사이 락 음악 cd와 무도회와 초밥따위를 꽤 좋아하게 된 크롤리는 직장 옆 사무실 동료쯤 되는 천사 아지라파엘(이 분도 독서광이며 은제 코담배갑과 골동품 가게와 흥미로운 고서들을 좋아한다.)과 리츠에서 술을 마시며 궁리를 하다, 11년동안 미국 대사 부부에게 입양된 아이(사탄의 아이로 알고있는 아이)에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최소한 아마겟돈을 늦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아이의 곁에 파견된 정원사와 보모는 각자 모든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잔인함을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는데 11년 후 그 소년은 정작 멀쩡한 인간으로(...) 자라고, 그제야 악마와 천사는 아이가 엉뚱한 곳으로 입양된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은 아마겟돈이 5일 남은 시점에서 사탄의 아들을 찾으려고 하는데...(앤하위키 멋진 징조들 줄거리 요약에서 발췌)


멋진 징조들은 디스크 월드로 유명한 테리 프래쳇과 샌드맨으로 대중문화에 있어서 독자적인 입지를 다진 닐 게이먼의 합작 소설이다. 사실, 반쯤 농담으로 낄낄 거리면서 쓰여진 소설 멋진 징조들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출판되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와 그와 관련된 신화와 성경에 대한 이야기, 문화 등등을 비틀어 만든 패러디 소설이다(심지어 이 소설의 기본 모티브는 유명한 영화 '오멘'-사탄의 아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초점을 맞춘 호러영화-에서 따왔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패러디가 넘처나기에, 이 소설의 최대 단점이자 아쉬운 부분인 '이야기는 재밌는데 패러디가 너무 길어서 분량이 부담된다'라는 문제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소설의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하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패러디 소설이라고 하지만, '멋진 징조들'의 세계관은 기존의 패러디 소설들이 보여주는 맹렬한 공격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멋진 징조들이 보여주는 시선은 대단히 따스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데, 흔히 기독교를 모티브로 한 패러디 소설들이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의 딱딱한 교리에 대한 격렬한 공격성을 드러내고 비꼬는 쪽이었다면 멋진 징조들은 그러한 공격성에 기초하기 보다는 천사와 악마에서부터 거대한 신의 섭리까지 인간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아주 상식적이고 평범한 토대에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은 테리 프래쳇의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디스크 월드를 통해서 기존의 판타지 세계관을 비트는 작업을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선과 악, 아마겟돈)으로 변용하여 적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 '바깥'의 섭리가 인간 내부로 적용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멋진 징조들의 세계는 인간의 섭리가 인간 '바깥'으로 스며든다. 선과 악은 더이상 절대적인 선이나 악의 지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선이나 악이라는 가치를 지탱하기 위한 관료주의적인 '구조'이자 '시스템'이다. 아마겟돈이 도래하자, 아지라파엘에게 아마겟돈에 대한 형식적인 문답을 벌이는 대천사 메타트론(신의 목소리)이나 혹은 조직에 있어서 서열을 중시하는 악마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범우주적인 신의 섭리를 관리하는 관료제 사회의 모습이며, 이들 사이에 끼인 아지라파엘이나 크롤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중간관리자들의 고뇌, 그 자체다. 또한 이 종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들 역시 종말에 어울리는 독특한 케릭터(적그리스도, 마녀 사냥꾼, 심령술사, 마녀 등등...)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설정'이나 '케릭터'에 얽메이기 보다는 인간적인 부분에 뿌리를 내린다. 즉, 이들은 대단히 독특하고 장황하며 종말에 어울리는 뒷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 군상들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들의 케릭터 조형은 지나가는 다른 엑스트라들까지 확장되며, 이 종말의 이야기는 평범한 인간들의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인간군상의 전형들이 판을 치는 이야기(심지어 악마와 천사까지!)에서 유일하게 비인간적인 존재들은 바로 묵시록의 4기수(전쟁, 기아, 질병 대신에 오염, 죽음)들이다. 인간적인 느낌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이들 4명의 케릭터들은 그야말로 '자연재해' 그 자체와도 같은 느낌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적그리스도인 아담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모조리 없어졌다는 것, 아담이 죽음만은 없애지 못했고 죽음이 나의 존재는 인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소설은 세계와 이야기를 지극히 인간 중심적으로 재구성한다.


닐 게이먼의 특징은 소설 전반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혹자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대중문화의 (고전적 의미에서)이야기꾼이라 칭송했던 닐 게이먼은 이미 샌드맨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십분발휘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야기에 있어서 적재적소에 대중문화의 광범위한 인용과 신화의 재해석과 분해, 재결합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샌드맨의 경우 동양과 서양의 신화들을 꿈이라는 모티브를 이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멋진 징조들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기독교와 기독교 관련 전설과 신화들을 통해서 드러낸다. 특히 이는 크롤리의 욕망에 탐닉하는 모습에 역사적인 맥락을 부여하는 서술들에서 두드러진다.(벤틀리나 시대에 따라 적응하지만 동시에 일관적인 욕망에 기초하여 시대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는 그의 탐닉 대상이라던가)


물론 패러디가 아니라 이야기로만 따지면 좀 늘어지는 아쉬움이 있는 책이긴 하지만, 훌륭한 패러디만으로 의미가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 이야기가 너무 긴걸 빼면 이야기는 훌륭한 편이기도 하다) 문제는 부모님과 같이 읽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느꼈던 그 무한한 지루함이다. 이에 대해서 일종의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대중문화와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대중문화의 기반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이런 '해외'의 대중문화를 쉽게 접하고 소비하며 동시에 재생산하지만, 부모님 세대에서는 이러한 해외의 문화'만'이 재생산되는 대중문화의 세태에 대해서 여러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문제제기가 제기되었었다.


이에 대해서 몇마디 첨언이자 사족을 덧붙이자면, 기본적으로 한국이 겪어왔던 지난 중세~근현대사의 굴곡들과 그리고 한국 문화 저변에 깔려있는 '괴력난신에 대한 혐오'가 뿌리깊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본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되었는데, 그 조선이라는 사회 내부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내부에서 다양한 신화와 전설, 이야기들이 살아남아서 후대로 '문자의 형태'로 전승되지 못했었다. 물론 문화라는 것이 문자의 형태가 아닌 구전이나 생활양식, 다양한 풍습 등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생활양식과 풍습, 구전문화들이 소멸될 수 밖에 없었던 상태를 맞이한다.(그렇다면 반대로 문자와 기록으로 많이 남은 양반 문화는 어떠한가? 라는 문제가 남아있는데 친구는 이는 너무 복잡한 토대위에 세워진 문화이기 때문에 현대 대중문화가 인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또한 현대를 거치면서 밥먹고 사는데 있어서 쓸모없는 신화나 전설 등등의 괴력난신에 대한 증오가 한국 문화 전반에 뿌리깊게 내려박는다. 물론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흔히들 이야기하는 쓸모없는' 이야기나 문화의 소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특히 한국의 경우 대중문화 그 자체에 대한 몰이해가 체감상 더 심하다는 느낌이다(물론 다른 나라 살지도 않았는데 '체감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뭣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회에서는 그러한 대중문화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그에 대한 옹호가 같이 이루어져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오로지 혐오 한 측면만 남아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그 코드를 받아들여서, 이러한 패러디를 익히기 보다는 이러한 패러디 자체에 시작부터 거부감이 드는, 뭐 그런게 아닐까 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결부되어서 상태를 복잡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결론을 내리자면, 멋진 징조들은 그 내부의 패러디와 코드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읽기 힘들고 지루한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전지식이 충분하다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그런것들을 감안하더라도 이야기가 심각하게 길어서 살짝 느슨한 감이 없지않아 있다는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샌프란시스코의 '스페이드 & 아처' 탐정 사무실에 원덜리라는 미모의 아가씨가 나타나 사건을 의뢰한다. 그녀는 새스비라는 사내와 사랑에 빠진 여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샘 스페이드는 동료 탐정 아처를 보내 사건을 풀어보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커녕 아처의 죽음이 그에게 전해지고, 곧이어 새스비가 살해된다.  한편, 경찰은 아처의 처를 사랑했던 스페이드를 의심한다. 스페이드는 우선 원덜리를 방문, 자초지종을 다시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그제서야 본명을 브리지드 오쇼네시라고 밝히면서 여동생 운운한 건 가짜였고, 새스비와 아처를 죽인 건 누군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시작된다. 어느날 여비서 에피가 퇴근한 후 스페이드는 마치 여자같은 조엘 카이로의 방문을 받는다. 그의 등장은 사건에 접근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는데 그는 샘에게 검은 새의 조각상을 찾아달라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거액의 사례비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조각상의 가치에 의문이 생긴 샘 앞에 이번에는 거트맨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는데.(네이버 영화, 말타의 매 시놉시스 인용)


대실 해밋의 대표작인 몰타의 매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을 대표하는 소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같이 대표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로와 다르게, 대실 해밋의 소설들의 지향점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들이 도시인들이 느끼는 고독과 소외,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각자의 이익 추구를 위해서 과거 구세대적인 가치관들을 버리는 행태에 대한 염증을 기반으로 써진 소설이라면, 대실 해밋의 소설들은 전적으로 그 진흙탕 속에서 한몫 잡아보고자 하는 속물적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주인공인 샘 스패이드라는 인물과 그가 처하는 상황, 그리고 그가 그 상황을 풀어나가는 과정이다. 샘 스페이드는 일련의 사건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진 인물이며 동시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술 더떠서 그는 이 지저분한 게임을 더욱 지저분하게 만드는 인물인데, 극후반에 가서는 경찰에게 넘겨줄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서 인물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누군가는 당시 나왔던 탐정 또는 주인공 중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인물의 전형으로 샘 스패이드를 꼽기도 한다는 것인데,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이렇게 비열한 인간이 주인공이면서도 절대로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거나 더러운 짓을 직접하는 등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실 해밋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시궁창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 벌이는 이전투구의 현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데 있다. 기본적으로 순문학을 꿈꾸었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달리, 대실 해밋의 글은 기본적으로 그의 탐정업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실 해밋의 소설은 챈들러의 시적인 표현과 다소 비현실적인 케릭터 조형과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다. 그의 글은 투박하기 그지 없지만(대부분의 서술은 단순한 묘사나 선언의 연속이다), 소설이 만들어내는 상황이나 인물상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물론 이는 챈들러와 필립 말로의 시니컬하지만 고귀한 탐정과 반대되는 대척점이다.


붉은 수확에서 드러나는 시궁창 속에서 자멸하는 더러운 인간형과 다르게 몰타의 매의 샘 스패이드는 아주 능동적이고 교활하고 치밀한 모습을 보여준다. 같이 시궁창에 빠져있긴 하지만 자기 손은 직접 더럽히지 않으면서 같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옆사람에게 깔데기 꽂고 시원한 시궁창 물이나 드쇼! 라고 외치는 샘 스패이드의 기묘하고도 매력적인 케릭터는 순진한척하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브리짓 오쇼네시라는 팜므 파탈과 갱단들 모두를 엿먹이고 자기만 살아남는데 성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는 도덕이나 고귀함 등의 기존의 가치관의 갖는 위선에 대한 도시인들의 염증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챈들러가 만든 필립 말로의 케릭터를 어떤 의미에서는 위선적인 나르시스트라고 비꼬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시궁창 속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대실 해밋의 샘 스패이드는 현대인이 꿈꾸는 가장 현실적인 이상향, 현대인들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롤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토론 중에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이러한 탐정소설들은 전형적인 유행따라 만들어지는 통속소설이자 그 당시의 대중들에게만 영향을 줬을 뿐이지 과연 고전으로 두고 오랫동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느냐 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런 탐정소설의 가치와 장르문학의 등장이 갖는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보들레르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도회적 감수성과 신문과 펄프픽션 등의 대량생산에 근거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등장 등의 여러가지 요인을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파리와 보들레르의 감수성(혹자-시집 악의 꽃 번역자-에 의하면 보들레르의 군중에 대한 감수성은 빅터 위고르의 레미제라블에서 보여준 부성애적 감수성이 아닌 군중 속의 일원으로서의 감수성에 가깝다고 하였다)들은 전적으로 '산업화에 의한 도시공간'의 탄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도시는 과거와 다르게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인간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는 군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한 군중을 감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관음의 대상이자 하나의 유희가 되었다.(바네사 R 슈와르츠의 저서 '구경꾼의 탄생'에 따르면 만인에 의한 '평등한' 판옵티콘 개념의 출현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인 보들레르가 보여준 감수성처럼 도시의 퇴폐적인 분위기와 함께 군중을 관음하면서 동시에 군중속에 끼지 못하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감수성의 출현은 이전까지 갖지 못했었던 도시 문화의 가장 독특한 부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이 '고전'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독특한 도시문화적 감수성에 기반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깊은 관계나 진정한 이해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진정한 사랑이나 구시대적인 가치관이나 미덕들, 그리고 진실은 도시의 퇴폐적인 도시의 야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탐정'이 등장한다. 기존의 추리소설(아가사 크리스티 같은)의 탐정들이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하는 한정된 장소에서 진실을 추구했다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탐정'들은 도시적 퇴폐이자 시궁창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서 진실을 목격하고 독자들과 함께 공유한다. 탐정소설의 도시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여자도 있고, 음모도 있으며, 일확천금의 기회와 깡패와 갱단이 공존하는 위협과 기회의 땅이다. 여기서 챈들러와 대실 해밋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챈들러의 필립 말로는 구시대적인 가치관과 도시적 퇴폐 또는 기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기사의 이미지를,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는 시궁창속으로 들어가서 진실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도시적 야수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의 광경이자 장소, '도시'라는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두개의 그림자이다.


'탐정 소설'의 의미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도시적 감수성의 출현과 도시를 파해치고 그 장소로부터 승리하고자 하고 싶었던 대중의 욕망이 반영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파리에서 대중매체로서의 신문 탄생 경위(100만부 단위로 팔리는 신문들은 기본적으로 '연재소설'이라는 최첨단 유흥을 탑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와 살인사건 등의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잡보기사의 유행, 온가족이 시체를 관람했었던 파리 시체공시소, 밀랍인형 전시로 유명한 그레벵 박물관의 범죄의 현장 연작 등등 미스터리와 범죄, 그리고 진실에 대한 관심은 대중의 가장 보편적인 '유흥'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진행적인 여흥이기도 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 흥행 이후,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전말을 찾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그 자취를 따라간 사실들을 보면, 미스터리와 진실찾기란 아직도 흥행하는 유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탐정소설, 특히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은 그러한 대중의 미스터리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서로 상반된 형태로 표현한 대가들이었으며,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한 계속해서 읽힐 것이며 하나의 '고전'으로 추앙받을 것이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는 이제는 하나의 클리셰라고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며, 시대적인 한계(특히 여성에 대한 마초적인 시선)도 뚜렷한 소설이기도 하다.(하지만 이점에서는 챈들러의 소설도 똑같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아니 그 시대 소설중에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몇있단 말인가?) 하지만, 몰타의 매는 그런 단점들을 제외하더라도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소설이며, 비열하고 냉혹한 탐정인 샘 스패이드를 통해 현대인이 무의식 중에 꿈꾸는 하나의 롤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및 책 이야기




발터 벤야민(1892-1940)은 근대 대중문화 미학에 있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살아서는 크게 유명하지는 못했지만, 전후 대중매체를 통한 새로운 미학의 정립, 특히 기존의 파시즘이 '정치의 심미화'를 통해서 대중매체를 파시즘의 선전선동 도구로 활용된 파시즘의 미학을 깨부수기 위해서 발터 벤야민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후 조르주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등등이 발터 벤야민의 저서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유물론적 모더니즘 미학과 사회철학적 시각에서 많이 분석 되었다면, 이제는 언어철학, 번역이론(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번역을 일컬어 아도르노는 독일어로 이룩된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 칭송했다), 미메시스론, 특유의 산문양식 등등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미학자이다.


벤야민 저서의 특징들은 기본적으로 완성된 이론과 사유가 아닌, 끝없이 현세대에 질문을 던지고 영감을 주는 '명제'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벤야민 스스로 자신의 완전한 이론을 만들기 전에 비극적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심지어 그의 최대의 역작이자 미완성 저서인 파사주 프로젝트, 흔히 아케이드 프로젝트라 불리는 저서 아닌 저서는 수천쪽의 '메모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저서들은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알기 쉽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할 것을 요구해서 머릿속에서 그의 이론을 재조립해야 하는 그런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벤야민은 어려운 철학자이나, 벤야민이 유대교 신비주의(그의 친구인 숄렘은 유대교 신비주의와 카발라 전문가였다)의 영향을 받았으며 안그래도 어려운 저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 저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아우라'의 개념은 유물론적 미학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발상이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주력하고 있는 논의는, 이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다:기존의 학자들은 사진과 영화가 예술에 포함될 수 있느냐를 두고 논의는 틀렸으며, 우리는 사진과 영화가 '어떻게' 기존의 예술을 바꾸었는가라는 명제에 주력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쓸 당시의 미학적 논쟁이란 '(공산주의적)리얼리즘이 문제다'라는 루카치와 그에 대한 반론들(아도르노, 브레히트, 블로흐 등등)이었지만, 벤야민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예술은 영원히 바뀌었다'라고 선언하고 그 바뀐 예술들의 특징을 짚어내면서 '대중문화'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비평의 장을 열었다.


벤야민은 예술의 가치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었다. 첫번째는 그 예술을 삶에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전시가치', 두번째는 예술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아우라'를 숭상하기 위한 '제의가치'이다. 대중예술과 대량생산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예술에 있어서 후자의 가치(제의가치)만 존재했었는데, 이로 인해서 예술은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소수에 의해서 감춰지고 숨겨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이는 '아우라'라는 벤야민 특유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현상이다. '아우라'란 그 예술작품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대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로서, 벤야민은 한여름의 햇빛이 나무사이로 지나가는 그 스러질듯한 상황에서 드러난다고 묘사했다.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를 가리켜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그 예술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내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우라가 예술작품 감상에 있어서 핵심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맴도는 현상을 일컫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을 통한 복제는 오리지널리티 그 자체를 거세함으로서, 아우라가 생길 가능성을 막아버린다. 무엇이 진품이고, 무엇이 복제품인지 구별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과거에도 복제품이 존재했었지만, 진품만이 갖는 아우라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진품의 복제가 힘들었고, 복제 자체가 진품을 100% 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있어서 예술작품은 발터 벤야민의 리히트바르크의 인용처럼 '우리 시대에 자기 자신과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 연인의 사진만큼 주의깊게 관찰되는 예술작품은 드물다'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대중이 예술은 더욱 가까이 두고 소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술의 소비 방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의 소비방식에 두가지 방식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작품의 안으로 들어가서 작품의 내부 구조를 관찰하는 방식이며, 두번째는 작품을 내 자신에게로 끌고 들어와서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분리됨으로서 '비평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예술비평과 수용의 틀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은 성숙되지 않은 분노와 대중들의 집단 감정들을 '풀어주는' 일종의 예방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이상적으로만 보지는 않았으며, 이 시대 예술이 두가지 문제점을 갖는다고 보았다. 첫번째는 거짓 아우라를 이용한 스타시스템의 등장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예술이란 '아우라'가 존재할 수 없다. 아우라란 기본적으로 감상자와 대상의 장소와 시간이 서로 겹쳐질때 감상자가 관측할 수 있는 독특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 시스템은 마치 '스타'라는 존재를 포장하고 미화함으로서 그것이 '특별해 보이는' 무언가를 갖는 '척'한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의 관점에서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 앞에서 연기의 반복(스포츠의 기록처럼)을 통해서 가장 좋은 연기를 뽑아내고, 기계에 기록된 연기를 통해서 대중에게 감명을 주는, 기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승리이자 극복의 존재였다. 하지만, 배우라는 존재가 이룩하는 '연기'가 아닌, '배우 그 자체'에 집중하는 거짓 아우라를 소비하는 행위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만 드러나는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성공이 영화의 '객관적인' 완성도(비평)나 아니면 본 관객들의 감상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흥행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관객들이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닌 '스타' 그 자체를 소비하고 있음이 뚜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예술의 정치화로 요약할 수 있는 파시즘의 대중예술이다. 벤야민이 목도한 1930년대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대륙 전역을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대중매체를 이용한 대중선동이었다.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는 라디오의 보급을 통한 대중선동의 개념(히틀러의 연설 등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대중매체라는 개념을 대중을 하나의 생각으로 몰아넣는 개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이 시기 파시즘의 미학을 상징하는 작품이 바로 레니 레펜슈탈의 작품들이다. 레니 레펜슈탈은 영화를 통해서 나치즘을 신화적이고 거대한 무언가로 묘사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올림픽 기록 영화였던 올렝피아나 나치 선전 영화였던 의지의 승리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벤야민은 이런 것들을 실제로 보고 그 위협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논문의 말미에 '공산주의는 정치의 예술화라는 개념으로 맞서고 있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은 벤야민은 소비에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의 개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상적 공산주의자인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벤야민은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소비에트(러시아)'적인 예술의 정치화에 찬동하는 쪽은 아니었다. 소비에트적 예술론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리얼리즘 논쟁만 보더라도 벤야민의 지향점과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루카치는 모든 문학은 리얼리즘에 복속되어야 하며,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서 혁명이 필요한 지점을 밝혀내는 고발문학만이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브레히트는 이에 대해서 리얼리즘의 정의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하였다(루카치는 주로 표현주의로 일컬어지는 모더니즘 전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벤야민의 발언은 이러한 공산주의의 정치의 예술화의 개념을 객관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오히려 역사 비평과 관련된 에세이에서는 스탈린-히틀러의 밀월과 소비에트에 대해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식의 정치의 예술화 라는 개념에 대안으로 생각했을리는 만무하다.


그가 지향했던 바는 오히려 '카메라는 모든 대중을 평등하게 담아낼 수 있다'라는 그의 서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앤디 워홀의 발언인 '코카콜라(공산품)가 위대한 이유는, 당신이 마시는 그 코카콜라랑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랑 100% 동일하기 때문이다'라는 명제처럼, 기술복제 시대에는 회화에서 다루어졌던 그리스 신화 시대와 다르게 이제 대중이 '소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벤야민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나 '정치적 중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독일 신문 편집자 카를 크라우스 평론을 통해 보았을 때, 그의 지향점은 대중의 생활을 토대로 대중의 이야기, 대중의 삶이 조명되는 그러한 형태의 대중예술을 지향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대중예술이야말로 아도르노가 경고한 주입식이자 기계적인 기만이 아닌, 대중에 의해서 만들어진 진정한 예술 해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발터 벤야민의 이론적 도구가 공산주의의 유물론과 계급사상이 기반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낙관론으로 가득찼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1930년대 지식인이 막시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으며(아니면 사이비 어용 지식인이었다던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보여주는 견해를 참조하면 된다. 사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서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지며, 아도르노 역시 자신의 대중매체 비판에 있어서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인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기존의 예술 및 미학의 관점에서 대중매체를 비판한데 반해서, 벤야민은 기술복제가 어떻게 예술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둘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반박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상반된 시각과 상반된 결론으로 맺는데, 벤야민이 지적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대중매체 비판을 인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발터 벤야민은 비록 완성된 이론과 사상체계를 지닌 사상가는 아니며,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하다. 심지어 이 글을 치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그를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은 읽는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1930년대 사람이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대중매체의 기본 중의 기본을 해체하고 분석한 개념인 것이며,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현대 사회의 문화와 대중예술, 그 미학을 분석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첨언:

지금 벤야민의 다른 저서들을 읽고 있습니다만, 곳곳에서 오류가 보이는군요...일차적으로 이 글은 그대로 냅두고 다른 저서를 읽고 이해를 하는데로 다시 글을 수정하던가 하겠습니다만...일단 오류가 있다는 점은 숙지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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