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진정으로 새로운 세기가, 즉 지식인들과 지식 계급들이 유토피아를 회피하면서 비유토피아적이며 조금이라도 완전하지 않은,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사회로 되돌아가려 온갖 수단방법을 꿈꾸게 되는 세기가 되었다.

-니콜라스 베르자예프.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무려 1932년에 쓰여진 이 소설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그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견 이 소설에 나오는 멋진 신세계이자 미래사회는 유토피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계급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행복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자유로운 성적 유희를 즐기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야말로 완벽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에 대해서 막연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왜일까? 이는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는 1984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984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였던 정치적 권리에 대한 탄압의 은유로 읽혀질 수 있다. 즉, 1984가 보여주는 암울한 미래세계란 전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하였고(주로 나치즘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통한 대중 선동, 언어와 지식의 말살/재교육, 타집단을 향한 증오와 제거를 통한 내부결속 등등),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경험을 거부해야한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4의 세계에 대한 명백하고 교육된 거부감과 다르게, 멋진 신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거부감이란 상당히 기묘하다:즉,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를 막연하게나마 이상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머릿속의 어떤 개념들(세비지로 대변되는)과 동시에 상충되고 있기에 분명하게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감정이나 논리를 확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이 멋진 신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는, 이 디스토피아 세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문제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한 부분은 모든 육체는 과학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 계급에 의해서 분류되고 재생산된다. 섹스는 즉각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자유롭게 행해지지만, 동시에 아이를 낳는 행위는 극단적으로 경멸되는 무언가로 전락한다. 인간은 우울하면 소마를 복용함으로서 우울을 통제하며, 심지어 이들의 대중문화 말초적인 촉각과 후각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현된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어떤 이성이나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체로 인간개개인의 감각기관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즉각적으로 차단한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육체를 통제하는 멋진 신세계의 방식이란 일찍이 푸코가 국가가 국민, 사회 구성원의 육체를 통제하는 것, 영토에 기초한 주권을 대체하는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주권과 정치/통치의 형태를 강조한 부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논지를 확장 발전시켜서, 무엇이 국민이고 무엇이 국민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근대적 주권 국가의 주권 및 국민 개념과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법이 멈추는 수용소라는 시공간에 주목하여 호모 사케르(신성한 인간)란 저서를 썼다.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2.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근원적인 문법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것,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무엇이 예외상황임을 선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권력이자, 동시에 아감벤의 문제의식인 ‘생명정치’인 것이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수용소는 모든 법이 ‘멈추는 시공간’이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서, 무엇이 국민이고 비국민인지를 구별하는 생명-죽음 정치의 장을 연다고 보았다:나치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비국민’을 만들어내어 무엇이 ‘국민’인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보다 좀더 독특하며 명확한 지점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을 소개하려고 한 행위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왜 전쟁에서 패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치독일은 장애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많은 자원과 관심을 쏟은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국민인가’라는 테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권권력의 생명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다섯번째 자유와 게임에서 발췌, 편집 및 재인용)


아감벤의 생명정치, 생정치에 대한 이론은 많은 지점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와 부합한다:인간은 재생산하는 과정은 개개인의 결합이 아닌 국가라는 집단이 독점하고 있으며(초반부에서 보여지는 인간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 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엇이 어떤 인간이 될지를 결정하는가에 있어서 인간의 유전자와 육체를 통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이 왕에게 있어서 주권이란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하여 예 또는 아니요 라 말함으로서 무엇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보았으며, 실제로도 여기서도 그러한 긍정과 부정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일견 긍정적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 있어서,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세 인물은 너무 잘만들어져서 문제거나(헬름홀츠), 너무 못만들어져서 문제거나(버나드), 아예 외부에서 온(세비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헬름홀츠와 버나드는 특이개체들만 사는 섬으로 강제 추방되며, 세비지는 사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즉,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은 다들 사회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제거당함으로서, 사회는 스스로의 정상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신세계의 주권은 아감벤이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논리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정치적 과학, 과학적 정치'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과학의 논리에 따라 엄정하게 정치적인 사안을 구분하는 것, 예를 들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 학살에 있어서 무엇이 유대인인가 혹은 무엇이 정상적인 아리아인이고 죽여야하는 열등 국민인가를 결정하는 지점을 혈통과 우생학이라는 '과학적' 근거로부터 구했다는 점에서 과학과 정치의 결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건강 관리Health Care라는 지점에서, 현대의 건강관리 및 보험과 맥이 닿아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제거하는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나치가 열등한 인종을 쓸어내기 위해서 장애인들을 불임시술을 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종전 후에도 '나치 인종주의적인 법안'으로 인지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했다는 점, 심지어 폐지 이야기가 제기되던 1961년에는 독일의 지성이 모였다 할 수 있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현대의 핵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우생학은 필요하다'라며 이 법안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동시에, 과학은 정치가 된다:죽음의 경계를 나누어서, 무엇이 살아있고 무엇이 죽은 상태이냐를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논제들이 얽혀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칼로 자르듯이 '과학적'인 잣대로 깔끔하게 나누는 것, 명백하지 않은 문제를 마치 과학인양 포장해서 과학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지점에서 과학 바깥의 정치적 의도와 결합된 정치적 과학이 등장한다.(나치즘의 우생학의 개념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정치와 정치적 과학의 개념은 멋진 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저 논리가 된다:인간의 육신을 통제해서 '행복'을 퍼뜨리는 것이 지상목표인 '과학적'인 사회에서, 과학은 행복이라는 사회의 지상가치를 어떠한 논의나 이야기도 없이 절대적으로 도파민으로, 아드레날린으로, 엔돌핀으로 치환한다. 그렇기에, 이 둘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순환논증적으로 완벽한 구조를 구축한다:무엇이 사회가 지향해야하는 가치인가? 그것은 바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물질화된 행복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물질화된 행복은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은밀하게 정치적으로 재조정된다:과연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학적인 육체가 통제의 대상이 되면서, 모든 인류는 주권에 의해서 마음대로 처분당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가 된다:이를 두고 아감벤은, 의미있는 삶을 향유하던 귀족들만의 세계가 민주주의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의미없는 삶을 사는 평민들이 의미있는 존재로 승격되었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의미없는 삶'을 사는 무언가가 되었다 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평등한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평등하게 학살당할 수 있는 존재로 격하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멋진 신세계와는 다른 지점이 생긴다. 멋진 신세계의 본질은, 의미없는 것을 제거함으로서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이는 1984에서처럼, 정치적으로 다름이라는 것을 배격하고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탄압하는 형태에 가깝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1984적 디스토피아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마지막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누구나 제거당할 수 있기에 자신의 내부를 끝없이 자기검열해야하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서 완성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세계란, 그런 자기검열이라는 고상한 언어를 쓰기에는 너무나 저차원적이며 즉물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즉물적인 세계의 기저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모든것을 무한한 행복이라는 찬란함으로 만들려는 어떤 '내부적 기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적인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옥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내부의 구성원이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과학적인 행복과 인류 문명에 대한 왜곡된 믿음, 그것을 사회구성원들이 '내면화'하였으며 무한하게 이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니체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듯이, 세계가 절대적인 기준과 근거, 신과 악마, 선과 악 등등의 서사를 잃어버리게 됨으로서, 멈춤 없는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맞이하게 됨으로서,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반론조차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게다가 그럼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현대사회의 우울의 문제를 소설은 소마라는 마약으로 극복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공리주의적인 세계관과 철학이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을 경계하였듯이, 계측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사라짐에 따라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이다:자극만이 존재하는 사회, 마약, 촉각과 후각에 기반한 대중문화, 인간의 육체로 가장 강하게 얻을 수 있는 쾌감인 성을 자유화시킨 것 등등은 이미 공리주의적 세계가 현현한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리다. 그리고 이것은 아감벤의 생명정치적 개념에 의해서 실체화되며,사회구성원들은 이를 내재화하고 스스로 그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한하게 나아감으로서, 이 사회는 논리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니나를 보자:그녀야말로 이 멋진 신세계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잘만들어졌거나, 너무 못만들어졌거나, 아예 외부에서 온 인물과는 다르게 레니나의 분석할 가치조차 없는 유치하고 허접한 심리상태야말로 이 사회 일반 구성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호모 사케르이다:한병철은 아감벤의 무한히 제거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뒤집어서, 무한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주창한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인물들은 무한히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 사회에는 노화가 없다:그들은 60세까지 젊음을 유지하다가 불현듯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죽음은, 개개인의 상실이나 슬픔이 아닌 '훈련으로 인해서 극복되는 불쾌함'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 죽음이 거세된 사회에서, '생명'은 영원하게 그리고 무한하게 팽창한다. 하지만, 죽음으로서 완결되는 삶이 없다면, 어떤 것에 끝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삶이고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받아들여야할 죽음도 없고 짊어져야할 탄생도 없기에,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의미있는 삶이 아닌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 구성원은 그저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 언제라도 사라져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자신에게 소여되며 사회가 정해준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영원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이자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고 내면화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의 통찰이 내부를 향해 날카로운 지점을 드러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계 역시 갖고 있다:한병철과 후기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철학사조는 정교하고 복잡한 분석을 통해 사회 내부의 문제를 정확하게 고찰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외부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병철의 분석은 날카롭지만, 사회 외부에서 볼 수 있는 문제들, 사회 내부의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통제'가 가해지는 지점을 놓치고 있다:멋진 신세계에서도, 그런 완전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통제가 일어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내부(미래 사회)와 외부(원시사회) 사이의 과학작 관리자이자 주권자(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지점에서)의 상징이지 대표로서 무스타파 몬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스타파 몬드와 같은 경계인(그는 과거의 세계를 경험했으며, 동시에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다. 그는 세비지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며 이해하고 동시에 즐기기까지 한다)인 존 세비지 뿐이다. 그 역시도, 신세계로부터 온 여인의 아들로서 원시의 사회로부터도 신세계의 불길한 존재로써 배척당하고 동시에 신세계에 있어서도 그저 흥미거리이자 구경거리에 불과한 경계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들은 내부(헬름홀츠나 버나드)와 외부(원시사회와 과거의 사회)의 경계에 서서 현재의 문제를 인지한다:그것은 인류가 여지껏 쌓아왔던 문화와 문명을 신세계라는 사회가 완전히 부정하고 망가뜨리고 있으며, 동시에 이 사회가 병들어있고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다. 그것이 단순하게 내부의 인간들이 사고하지 않음을, 내부의 문제를 떠나서 이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서 행해지는 무수히 많은 모순들(과학의 정의, 노동을 창출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지점들 등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한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과거의 위험을 보고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기를 선언하며, 세비지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다.(1950년대 작자 서문에는 이러한 결말이, 세비지에게 너무나 크나큰 비극과 짐을 지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멋진 신세계가 갖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었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이러한 생명정치-무한 긍정의 디스토피아를 부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남아있다. 무스타파와 세비지의 마지막 대화에서, 세비지는 이렇게 답을 한다:"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합니다:늙어서 추해지고 무능하게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를, 굶주림의 권리를, 더러워질 권리를,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조바심할 권리를,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를, 말할 수 없는 온갖 고통에 시달릴 권리를"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 이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해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난 인류의 역사 기간동안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그러한 불행을 극복함으로서 인류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과학을 이용한 통제와 관리는, 현대사회의 핵심이며, 축복이자 저주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의 혜택과 불행할 권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봐야할 것이다:세비지가 제시하는 극론의 '불행할 권리'는 어떤 '멈춤'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시간의 향기에서, '시공간에 머무르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시공간은, 중력을 잃어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방향성 없이 부유하는 시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의 시공간에 머문다는 것, 부유하는 시공간의 흐름을 '스스로' 멈추고 거스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주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흐름의 거부, 우리가 멈추는 것, 그것은 '부정의 미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0이란 단지 비어있음을 드러내는 형용사가 아닌 음의 흐름과 양의 흐름을 멈춘 '동사'라고 이야기한 션 큐빗의 말처럼, 우리는 무제한적인 관리의 긍정과 멈추지 않는 세계를 멈출 수 있는 사유와 철학, 미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극단적으로 매독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모든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런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지켜야하는 것, 과연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단순하지만 중요한 명제에 대한 사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사유와 함께, 관리와 기술,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작동하는가 역시도 알아야 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0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사회와 과학 사이의 문제를 정밀하게 짚고 있는 작품이며, 고전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1940년대에 다시 쓰여진 작가 서문은 그의 경고가 그의 시대를 넘어서 우리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며,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예견한 다음과 같은 종말을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유토피아는 15년 전에 어떤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듯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을 앞으로 600년 뒤의 세계속에 투영시켰던 것이다. 현재 1세기 이내에 우리에게 이러한 공포가 닥치리라는 것이 아주 확실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간 내에 우리 자신을 산산조각 내지 않은 체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렇게 보인다. 실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된 과학을 인간이 만든 수단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체 종족을 생산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분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선택안 가운데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원자탄 위협을 자신들의 자신들의 기본전략으로 삼고 결과적으로 도시 파괴나 전쟁을 제한할 경우, 영원한 군사화를 보유하게 되는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의 형태의 전체주의와, 일반적으로 급속한 기술진보와 특별히 원자개발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 효율과 안정성을 원하는 욕구 안에서 유토피아의 복지전체정치로의 발전으로 생기는 무질서가 불러올 수 있는 초국가적 전체정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돈을 지불하고 나서 선택을 하십시오.


-올더스 헉슬리, 1947년판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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