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은 역사적으로 대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루이 16세 때, 프랑스 혁명을 시발점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변혁의 바람이 불고, 오랜 기간 지속해 되었던 절대왕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완전하게 붕괴되었으니까요.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과정은 많은 작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수많은 문학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춥니다. 슈발리에 또한 이러한 문학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발리에는 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프랑스 혁명 직전의 시기인 루이 15세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애니의 내용 자체는 프랑스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충성심 깊은 4명의 기사들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의 왕과 국가에 대한 충정을 시험받고, 결과적으로 '변혁기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의 누나인 리아 드 보몽이 시체가 되어서 파리 센느강변에서 발견되고, 그 동생인 데온 드 보몽은 충직한 왕의 신하였던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데온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누이를 영접(흔히 이야기하는 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데온은 그 동료들과 함께 누이의 원수를 찾기 위해, 그리고 프랑스 왕조를 위협하는 적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재밌는 점은 슈발리에는 많은 부분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등극, 루이 15세 때의 오를레앙 공의 반역과 진압, 귀족에 의해서 변두리로 밀려난 영국의 왕조들 등의 유럽 역사에 있어서 절대왕정의 막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절대 왕정의 막바지에서는 다양한 계층(농민, 부르주아, 시민 등)의 계층 의식이 성장하고, 이러한 계층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고 기존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왕이나 귀족 세력에 대해서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떄문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서 왕들이 기존의 귀족 세대를 대체하고 새로운 사회 체제를 새우려하고 이에 귀족 체제가 반역하는 과정이 있기도 하거나(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에피소드), 이미 귀족에 의해서 내몰린 왕이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흥하여 다시 절대 왕정을 확립하려는(영국의 왕조의 에피소드) 모습 또한 보여줍니다.
이러한 절대 왕정의 말기에 있어서 기사(혹은 귀족) 계급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대변해서 일해야 하는가? 자신이 섬기던 국가? 혹은 국가를 대변하는왕? 국가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민중 계급인가, 혹은 자기 귀족계급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가? 데온 일행은 이러한 혼란기에 처하게 됩니다. 충실한 기사 계급인 그들은 가장 정석적인 답, 바로 '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일반적인 답을 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여행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신념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왕이 자신에게 충성했던 충실한 귀족계층을 희생하려는 모습, 혹은 힘없는 왕이 잘 운영되는 국가 체계를 뒤엎고 다시 절대적인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편하려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왕정을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하려는 왕조와 대면하게 되죠.
작품의 구조는 데온 일행의 기나긴 여정ㅡ오딧세이아ㅡ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데온 일행은 진실(누나를 죽인 원수, 혹은 왕정을 위협하는 적들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속해있던 안정적인 프랑스(루이 15세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전의 폭풍전야로서 조용한 시기였습니다.)에서 벗어나서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를 들여다 보고, 자신들의 역사적인 위치를 자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정은 대단히 가혹하기 때문에, 그들의 왕조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고, 혹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슈발리에에서 핵심되는 키워드는 '왕가의 시'입니다. 프랑스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이 신비한 힘을 가진 시집은 왕의 미래를 예언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하며, 심지어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절대 왕정 시기의 왕권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절대적이면서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시대 정신 같은 개념이지요. 하지만, 이는 역으로 개개인의 자유와 인간성을 옭아매는 폭압적인 존재기도 합니다. 데온의 누이 리아 같은 경우에는 왕가의 시와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부터 배격당했으며, 루이 15세는 스스로의 의지로 죽을 수도 없는 가련한 상황으로 이끕니다.
데온 일행의 여정은 이러한 가혹한 시대 정신과 흐름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혹한 시대 정신과 조우한 기사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다른 충성의 대상을 찾거나, 충성보다 기사 사이의 신의를 지키거나, 혹은 이 모든 걸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을 꾀합니다. 슈발리에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여정의 과정에서 변혁기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가의 시편을 찾으려 했던 기사들의 여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초라하게 늙은 데온이 '프랑스여, 영원하라!'라는 글을 바닥에 쓰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는 제가 여태까지 본 애니메이션의 엔딩 중에서 가장 씁쓸한 느낌을 주는 엔딩인데, 더 이상 지켜야할 가치도 신념도 국가도 없는 상태에서 과거 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힌 가련한 노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발리에는 06년도에 했던 애니메이션의 숨은 걸작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구조, 미려한 작화, 독특한 소재 등 근래 찾아보기 힘든 걸작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극이라는 마이너한 분야와 탄탄한 드라마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코드 등은 이 작품을 묻히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프로덕션 IG 20주년 기념 작품(맞나?)으로 나온 거 치고는 대단히 조용하게 막을 내린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발리에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며, 기회가 된다면 한번 꼭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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