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디아블로 2의 전례없는 성공 이래로 많은 게임들이 디아블로 2를 벤치마킹 또는 모방하여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나온 수많은 게임들 중에서 제대로 된 게임은 얼마 없었고, 자신만의 발자취를 남긴 게임의 수는 그보다 더 적었다. 심지어 정식 후속작인 디아블로 3가 나온 지금 이 시점에서도 디아블로 3는 디아블로 2만 못하다, 제대로 된 후속작이 아니다 라는 평가를 간간이 들을 정도로 액션 RPG 계에 있어서 디아블로 2의 위치는 확고 부동하며 여타 다른 게임 장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게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대체 디아블로 2는 어떤 게임이었으며, 디아블로 2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들을 즐기는 게이머의 입장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그림 돈은 타이탄 퀘스트를 만들었던 아이언 로어의 개발진들(11명 정도 뿐이지만)이 뭉쳐서 만든 크레이트 엔터테인먼트가 3년여간의 얼리 억세스 과정을 거쳐 올해 2월 말에 정식으로 출시한 액션 RPG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그림 던은 많은 부분 타이탄 퀘스트(듀얼 클래스 같은 기본적인 시스템)과 타이탄 퀘스트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디아블로 2에 근거하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세계관과 크툴루적인 분위기를 합쳐놓은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영웅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완전히 맛이 가버린 적들의 머리통을 호쾌하게 두쪽으로 쪼개버리고, 레벨업 하고, 폐지를 주워모아 더 나은 폐품을 만들어내서 강해진다는 점에서 충분히 디아블로 2를 연상케하는 작품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림 던은 디아블로 3보다 더욱 디아블로 2에 게임 시스템이나 분위기 자체로 근접한 작품이며 대단히 재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림 던이라는 게임의 기본기가 탄탄하기에 가능한 부분이며, 3년에 걸쳐서 커뮤니티의 피드백을 게임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완성한 얼리 억세스의 모범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이 단어만으로 그림 던의 리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디아블로 2의 정식 후계자.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디아블로 2의 정식 후계자라는 평가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 우리가 디아블로 2를 지금에 와서 플레이를 한다면 게임은 과거에 느꼈던 재미를 똑같이 주지 못한다고 평할 수 있다:UI의 문제, 게임 시스템에 의해서 손해를 보는 직업군들이 있는 점, 레벨링과 보상, 파밍의 속도 등등 디아블로 2는 그 당시로써는 혁신적이었지만 개선되어야 할 여지도 많았던 게임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디아블로 2의 파생작들은 이들의 문제를 자신의 나름대로 풀어내려고 하였고, 이들의 실험과 개선은 디아블로 2 이후로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기까지 이르렀다. 즉, 시간은 디아블로 2의 후계자라는 칭호에 대해서 기대치를 많이 올려놓았고, 단순하게 디아블로 2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넘어서 디아블로 2의 핵심을 이어받으면서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것을 요구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 던에 대한 리뷰는 디아블로 2의 계보에 있어서, 그 계보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작품이 과연 어떤 게임인가에 대해서 평가를 해야한다.


디아블로 시리즈의 핵심은 케릭터의 개성을 극대화시키는 시스템에 있다:그리고 이것은 크게 아이템을 통한 차별화와 스킬 및 직업을 통한 차별화로 지탱이 된다. 먼저 스킬 및 직업 시스템의 경우, 디아블로 3와 토치라이트 2가(흥미롭게도 토치라이트 2는 디아블로 3에 근접한 묘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케릭터별로 관리해야 하는 자원을 분화시키는 등의 흐름으로 나아갔기에 이전의 디아블로 2와 다른 기믹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 던은 여전히 스킬 포인트와 공통된 자원의 분배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디아블로 2의 스킬 시스템에 근접하였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 던의 자유로운 듀얼 클래스 시스템(하나의 케릭터가 두 직업을 선택하는 시스템)보다 엑티브 스킬-패시브 스킬의 구성이다. 그림 던에는 수많은 스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메인 엑티브 스킬에 엑티브 스킬의 속성을 보정하는 패시브 스킬이 달려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엑티브 스킬만 놓고 본다면 그림 던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게임은 패시브 스킬로 엑티브 스킬에 다양한 속성을 부여하면서 게이머가 어떤 스킬을 메인으로 삼고 어떤 스킬을 보조로 삼을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케릭터를 만들고자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샤먼의 스킬들은 대부분 전격과 약간의 빙결 속성의 엑티브 스킬로 구성되어 있지만, 파생되는 몇몇 패시브 스킬을 찍을 경우 전격과 빙결 속성에 출혈 등의 순수 체력 기반 데미지가 들어가기도 한다. 이것이 그림 던 특유의 별자리 시스템과 결합함으로써 게임은 기존의 디아블로 2의 파생작들과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라운 깊이를 지닌 육성 시스템을 보여준다:별자리 시스템은 성소를 정화해서 얻는 헌신 자원을 사용하여, 직업 외의 패시브 스킬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이 별자리 시스템은 심지어 엑티브 스킬에 확률 기반의 보조 속성을 부여하기도 하는데, 이 보조속성에 따라서 엑티브 스킬이 사실상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기 때문에 게임의 운영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을 부여하게 만든다. 디아블로 2나 여타 게임들이 스킬 포인트의 효율적인 배치라는 정석적 스킬 트리를 강요하고 운영이나 아이템 세팅이 고정적인 모습이 되었다면, 그림 던의 경우에는 핵심 운영 스킬에 어떤 패시브와 별자리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운영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림 던은 디아블로 2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새롭게 해석한다:디아블로 2가 케릭터 스킬 트리를 통해서 더욱 강해지고 차별화되는 케릭터라는 감각을 게이머에게 심어주었고, 이러한 디아블로 2의 핵심을 수많은 게임들이 계승하려 노력하였다면, 그림 던은 패시브 스킬을 통해서 액티브 스킬을 차별화하고 별자리 시스템을 통해 하늘의 별자리 수만큼 케릭터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는 측면에서 디아블로 2의 케릭터 육성을 뛰어넘었다고 평할 수 있다.


파밍의 경우, 여타 게임들과 크게 다를바 없다:다만 흥미로운 점은 그림 던의 경우, 많은 아이템에 아이템을 착용하였을 시에 쓸 수 있는 고유 스킬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앞서 별자리 시스템에서 언급하였듯이, 별자리 시스템을 통해서 엑티브 스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림 던은 아이템 스킬의 존재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갖고 있다. 다만 레벨업을 하는 도중에 수시로 아이템이 바뀌는 파밍 게임의 특성상, 이러한 아이템의 고유한 스킬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 알아보려면 만랩까지 도달한 뒤에 판별을 할 수 있을 것인데, 현재로써는 1회차 엔딩만 본 상태라서 뭐라고 평하기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외에도 그림 던은 게임의 페이스나 연출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적들은 끊임없이 몰려오고 게이머도 적들을 끝없이 쓸어내야 하며, 적들은 잔인하고 강력하며 도전적이며, 이런 점에서 그림 던은 디아블로 2가 게이머에게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림 던은 훌륭한 액션 RPG이며, 디아블로 2 이후로 쌓아온 계보에 케릭터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디아블로 2가 갖고 있었던 핵심을 잘 재해석하고 있으며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림 던이 1회차를 클리어한 본인이 느끼기에도 아직 더 발전할만 여지들(엔드 컨텐츠의 추가와 모딩, 확장팩, 생존 모드 등등)이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지며 지금 보다 더 나은 게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디아블로 2를 즐겁게 플레이했던 사람이라면 그림 던은 후회가 없을 최고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