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은 국가가 아니라 언어다. 모국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에밀 시오랑





메탈기어 솔리드 V:팬텀패인 2015년 트레일러는 이전의 복수라는 키워드 이외에 '언어'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엄밀하게 본다면 이러한 팬텀패인의 경향성과 키워드 선정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통해서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메탈기어 솔리드 2), 국가와 충성에 대한 이야기나(메탈기어 솔리드 3), 전쟁 경제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가(메탈기어 솔리드 4), 핵억지력과 평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메탈기어 솔리드:피스워커) 등등을 통해서 코지마 히데오는 자기 자신의 명제인 '게임이 성인지향적인 내용을 다룰 수 있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물론 영화감독을 꿈꾼 자의 자기 만족적인 실험적 성격도 강하지만,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는 모두 게임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팬텀패인의 시도가 뜬금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궁금증이 생기긴 한다:국가와 군대의 이야기를 주요하게 다루는 시리즈에서 어째서 '언어'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니콜라스 에반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주 극소수의 사용자만이 사용하는 언어를 다루는데, 팬텀패인과 연결시켜서 볼 수 있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책은 현생 인류가 처음으로 지구상에 등장하고 농경을 시작하였을 때, 1500만명 가량이 지구상에 존재했었고 1만명 단위의 집단이 하나의 언어를 썼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당시에는 넉넉잡아 1~1.5만개 정도의 언어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재는 60억 인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데도 17개 국가가 사용하는 언어가 전체 언어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50만년 정도 되는 인류의 역사 중에서 기원전 2000년 전이라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겨우 100만명 단위의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가 등장했다는 걸 고려하면 흥미로운 수치다. 


그렇기에 니콜라스 에반스는 다소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우리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언어의 세계는 자연적이지 않은 세계가 아닐까, 라는 것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분화하고 변화하며,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를 접하고 더 많은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일례로 카메룬의 특정 지역에는 8가지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멀티링귀얼이 일반적이다.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3~4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는 분화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현장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 타인과 구별짓기 위해, 환경적 지리적 요인에 의해, 언어는 계속해서 분화된다. 그리고 언어가 자연스럽게 분화되고자한다면, 역으로 그것을 하나의 언어로 '통일' 시키려는 인공적인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용언어를 정하고 이것으로 소통하려는 것은 그것이 국가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를 통제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언어라는 수단과 항상 함께한다. 그렇기에 언어를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는 단어들을 단순화시키고 삭제함으로서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또 멀리갈 필요도 없이 북한이 내부의 정치 권력 관계가 변화하면서 언어가 그에 맞춰서 따라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다. 언어의 통일과 통제는 근대국가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언어와 팬텀패인의 접점이 생긴다. 국가와 인간, 그리고 언어라는 관계 속에서 코지마는 국가의 성립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지만 무시당하기 쉬운 전제를 건드림으로써,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 그리고 팬텀 패인 이후 이어지는 아우터 헤븐의 명제를 위한 초석을 다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로 세상을 통제하려는 제로와 국가의 전장의 혼탁한 상황속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저격수(콰이어트), 국가를 스스로 져버린 현자(코드토커), 국가와 체제로부터 버림 받은 자들(다아몬드 독스, 빅 보스, 밀러 등등)이 국가와 체제 바깥에서 언어를 통해 국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면, 팬텀패인이 언어를 중요한 키워드로 들고나온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한 부분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상당히 흥미로운 은유를 접합시킬 수 있다: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의 이야기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며 신의 권위에 저항하기에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다가 신이 언어를 흩뿌림으로써 실패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하나의 언어로 인간이 공통된 사유를 하는 것이 '인공적'인 행위라면 역으로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사고, 하나의 체계를 무너뜨려 원래 그 각자의 인간들에게 신이 오롯이 돌려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역으로 빅 보스 역시도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려 언어를 인류 개개인에게 돌려주었던 것처럼 국가라는 바벨탑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닐까? 국가의 붕괴를 통해서 인류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바벨탑을 붕괴시킴으로써 인류는 말을 서로 이해할 수 없어서 갈등하게 되었고 흩어지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붕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혼돈과 파괴는 현대 인류 사회를 완전히 뿌리채부터 박살내버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빅보스에게는 그러한 혼돈과 파괴에 전혀 개의치않는다. 그는 총이다. 그는 그가 생각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직선으로 나아가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기에 팬텀패인은 위대했던 한 영웅이 악마가 되는 중요한 지점을 다루게 될 것이다.


팬텀패인은 메탈기어 원년으로 흘러가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팬텀패인을 통해서 메탈기어 시리즈는 거대한 원환을 구축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서 메탈기어 사가는 완결될 것이다. 물론 코나미는 팬텀패인 이후에 메탈기어 시리즈를 만들 것이라고 입을 털고는 있지만, 코지마가 없는 메탈기어 사가는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고 또한 팬텀패인을 통해서 메탈기어 사가의 원환이 완성된다면 더이상 여기서 다루어야 할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팬텀패인은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그것이 엉망으로 끝나든 훌륭하게 끝나든, 우리는 여기서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마무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