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p/db95961675b3 글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첫 번째, 발언과 표현의 자유(The 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두 번째, 신앙의 자유(The Freedom of Worship)

세 번째, 궁핍으로부터의 자유(The Freedom from Want)

네 번째, 공포로부터의 자유(The Freedom from Fear)

그리고 다섯 번째, 위의 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유.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2013)는 잠입액션 게임인 스플린터 셀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기존의 시리즈와 실험작이었던 컨빅션을 배합하여 만들어낸 블랙리스트는 기존의 성우였던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새로운 성우로 교채되기도 하며 제작진들이 샘 피셔의 케릭터성을 재해석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토리에 있어서 블랙리스트는 기본적인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부터 미국을 지킨다’라는 다소 진부한 모티브에 기반하고 있지만, 제작진들은 그러한 시나리오를 능숙한 완급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며 대적자와 주인공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스릴있게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섯번째 자유’는 그러한 클리셰스러운 이야기에 기반을 다지는 초석같은 기제로 작용한다:샘 피셔가 하는 모든 작전들, 행위들, 심지어는 대통령마저도 무시하는 그의 ‘월권’행위까지. 샘 피셔가 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다른 밀리터리 슈터류와 비슷하다:하지만 다섯번째 자유를 통해서 그의 행위는 근거를 얻고 뭔가 멋진 행위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지점에서 다섯번째 자유란 기존의 밀리터리 슈터류들이 전제에 깔고 있는 전제를 형식화하여 주인공을 빛내주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의 최대의 문제점은 게임 플래이나 미션의 구성 및 게임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닌, 스토리를 마무리 짓는 지점에서 생긴다:마지막 악역 사디크의 고문에 못견딘 국방장관이 미국의 모든 정보를 사디크에게 넘겨주려 하자, 샘의 부관인 브릭스는 ‘다섯번째 자유의 이름으로’ 국방장관의 목을 꺾어서 죽여버린다. 그리고 사디크를 붙잡은 샘 피셔는 그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은채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여’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버 린다. 재밌는 점은 이 모든 것을 플래이어가 마치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는 것처럼’(정작 플래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은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지만)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플래이어들은 이 장면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새롭게 디자인된 샘 피셔의 케릭터가 전작들에 비교해서 지나치게 미션 중심적인 기계적 인간이 되버린것에 불만을 가질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게임은 지극히 미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디자인들(이란 쿠츠포스의 비밀 훈련장-아무리 봐도 백악관과 미국을 의식하고 있는 등등)을 은연중에 삽입하고 있었으며, 문제는 이 QTE로 인해서 이런 디자인들은 더이상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 명백한 것이 되버리게 된다(미국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원칙도 무시할것이며, 어떤 희생도 감내할 것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보다는 미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찝찝함을 플래이어에게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클리셰스러운 스토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다섯번째 자유라는 기제와 마지막 QTE의 관계는 찝찝함과 별개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어째서 플래이어는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는 QTE를 거쳐서 엔딩을 보게 되는가? 그리고 만약 다섯번째 자유라는 기제가 기존의 클리셰스러운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자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면,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의 스토리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는게 아닐까?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2.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여기서 샘 피셔의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서 들고오는 기제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문법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것,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무엇이 예외상황임을 선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권력이자, 동시에 아감벤의 문제의식인 ‘생명정치’인 것이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수용소는 모든 법이 ‘멈추는 시공간’이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서, 무엇이 국민이고 비국민인지를 구별하는 생명-죽음 정치의 장을 연다고 보았다:나치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비국민’을 만들어내어 무엇이 ‘국민’인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보다 좀더 독특하며 명확한 지점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을 소개하려고 한 행위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왜 전쟁에서 패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치독일은 장애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많은 자원과 관심을 쏟은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국민인가’라는 테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권권력의 생명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There’s a man going around taking names

And he decides who to free and who to blame

Everybody won’t be treated all the same


한 남자가 이름을 모으고 있다네, 그는 누가 풀려날지, 

그리고 누가 비난받을지를 정한다네. 

모든 이들은 똑같이 대우받지 못할거야.

-자니 케쉬, When The Man comes around


그리고 샘 피셔로 돌아와보자:그는 법이 멈추는 지점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 지점이란, 비단 관타나모 같은 ‘수용소’라는 특수한 시공간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테러가 임박한 상황에서, 다섯번째 자유라는 미명하에 모든 법과 절차는 테러를 막기 위해서 멈춰진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면서 샘 피셔에게 있어서 주권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시공간은 ‘전세계’로 화하게 된다. 그는 중동과 적국(이란), 관타나모 수용소, 미국 내와 다른 이국적인 공간을 누비며 ‘누가 죽을지, 누가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별 영향이 없는 심문 QTE에서 드러나듯이)


그렇기에 샘 피셔의 대모험(?)은 어떤 의미에서 서부극의 현대적 변용이다:황폐화된 사막은 이제 법이 멈춘 전세계이며, 동시에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은 멍청한 연방정부(=미국)가 아닌 일선에서 뛰는 외로운 보안관이자 집행자인 샘 피셔인 것이다. 그리고 샘 피셔는 법이 멈추는 곳에서, 총을 뽑아 ‘무엇이 정의(또는 법)인지’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그는 결정하는 권력이다:그리고 그에게 권위를 주는 다섯번째 자유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강조하였으며, 아감벤이 주된 모티브를 얻은 칼 슈미트적으로 ‘주권권력’ 그 자체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람이 결국 주권자라면 실제로 그는)일반적으로 타당한 법질서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질서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헌정을 ‘전면’ 중단시켜야 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 정치 신학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던 2차세계대전 때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법 바깥에서 법을 결정하는 권력, 주권권력이 무엇인지를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발터 벤야민이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통해서 ‘법은 예외를 통해서 규정된다’라고 선언하는 지점과 맥이 닿아있다. 무엇이 예외인지를 결정하는 주권 권력을 통해서, ‘예외를 통한 테두리 짓기-규정’이 일어나게 된다:그리고 샘 피셔가 행사하는 다섯번째 자유는 주권 권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다섯번째 자유를 통해서 모든 절차와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예외상황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서, 그는 역으로 평화(의 탈을 쓴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 패권주의적 질서)를 확립한다:예외를 통해서 질서를 확립한다, 그렇기에 다섯번째 자유는 주권권력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것은 칼 슈미트가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였으며, 그의 ‘결정권력’에 대한 이론은 독일 게르만 민족의 유일무이한 총통 히틀러가 법과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려고 다섯번째 자유를 휘두르는 샘 피셔 역시 그런 지점에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나치즘’적이며 ‘파시즘’적이고 동시에 서양인들이 금기시하는 ‘민족 유일의 구원자 총통 히틀러’적이라는 외설적인 논지까지 전개가 가능하다:그는 모든 민주적 절차와 법들을 무시하며, 심지어 그러한 자유를 부여받은 상급기관인 ‘대통령’마저도 무시한다. 그렇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있는것일까? 샘 피셔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근거는 ‘그가 결국은 평화(=팍스 아메리카나)를 수호했다’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실패했으면 어떘을까? 그의 결단 때문에 무고한 피해가 났었더라면? 게임이 펼치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나 아슬아슬하다:샘 피셔는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심지어는 미국 국방장관을 ‘자의적 결단 아래’ 죽이기까지 한다. 그가 영웅이 아니라 범인 또는 악인이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수많은 행운들(그의 직감에 따른 독단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밝혀지는 지점들)이 따르지 않았다면, 블랙리스트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끔찍한 재앙이 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논지를 확대해보자:만약, 다섯번째 자유가 주권권력적이라고 보고, 다섯번째 자유가 처음 지적하였듯이 밀리터리 슈터물, 더 나아가서 게임 전반을 지배하는 기제라면, 게이머는 왜 위험천만한 생명-죽음정치의 근원인 ‘주권권력’ 권력에 끌리는가?


(법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은 폭력이 법에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은 폭력이 법 외부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칼 슈미트의 법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저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폭력(Gewalt,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폭력Violance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으로, 어떤 강제력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독어로서 폭력Gewalt는 상당히 폭넓은, 몽둥이라는 의미도 내포하는 단어이다)의 국가 독점과 그 독점이 ‘예외를 통해서 규정된 법’ 개념을 다루는 에세이이다. 재밌는 점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발터 벤야민은 대중이 무법자에 끌리는 것은 그 극악무도한 비도덕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외부에 (국가가 독점하는)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게임에 적용시켜보면 상당히 기묘한 지점이 발생하게 된다. 보통 게임에 있어서 게이머가 비도덕한 행위들(살인이라던가) 행함으로서 그로부터 쾌락을 얻는다는 인식과 반대로, 무법자의 매력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은 이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게이머들은 게임의 ‘폭력’에 이끌리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위에서 다룬 (게임 이야기에 숨어있는 동력의 근원으로서의, 주권권력적인)‘다섯번째 자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보자:우리가 서부시대에 매료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총을 뽑아서 사람을 쏴죽이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부시대에 열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시대가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들이 시스템 바깥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그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일상의 제약들, 법, 규율, 관습, 사회 등등은 서부의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집행’한다:이것이 바로 서부시대의 본질인 것이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적용해보자:게임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단’의 문제이다. 게이머가 게임의 폭력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게임속의 폭력은 그것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인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규율’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숨어있지만 ‘자유’의 형태로 구현이 된다:비상상황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유’가 주어진다. 이 자유는 법 밖에서 뛰놀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총을 뽑아서 악당을 어떠한 절차도 과정도 거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것, 그리고 위급상황에서 고문을 해서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정보를 빼내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은 폭력을 독점하는(물론 그것이 옳다/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사실의 선언으로서의 폭력 독점)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도덕이라는 것을 짓밟아서 얻는 비도덕적 쾌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언젠가 이는 또 다룰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비도덕적인 요인’이 게이머를 끌어당기고 게임을 하는 것이라는 논지는 전적으로 비논리적이다. 라프 코스타가 자신의 재미 이론에서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은 것을 한번 보자.


시험삼아 우물 모양의 가스실이 있는 대학살 게임을 떠올려보자. 플레이어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떨어뜨리게 되는데, 여기는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뚱뚱한 사람, 키가 큰 사람 등 크기와 모양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우물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서로를 붙잡고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어 우물의 꼭대기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들이 우물 밖으로 나가게 되면, 플래이어는 지고 게임은 끝난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이들을 빈틈없이 잘 막는다면, 맨 아래쪽에 있는 희생자들은 가스에 질식해서 죽고만다.

나는 이런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테트리스’이다.

-라프 코스타, 재미 이론.


게임의 근육과 뼈대(게임의 구조와 재미를 만들어내는 기본 테제)를 뒤덮는 가죽만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프 코스타가 예시로 든 변형된 테트리스는 정말로 하기 역겨운 형태의 게임이 되어버렸다:앞으로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셀수 없이 많은 변형을 갖고 있는 테트리스가 이런 게임 이었으면 과연 이 게임은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라프 코스타가 지적하는 게임의 매력은 단순히 그 내부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표면적인 것들도 포함을 한다. 심지어 우리는 AVGN이 리뷰하였던 아타리 포르노에서 라프 코스타가 지적하였던 역겨운 형태의 게임들, 게임의 기본 구조는 이미 입증되어 재미 자체는 분명하지만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게임들의 실례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앞서 논의하였던 게임에서의 수단으로서의 폭력, 그리고 목적으로서의 자유는 이와 같이 연결이 된다:게임에서 서사가 게이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핵심이지, 게이머가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서 얻는 비도덕적인 쾌감 또는 그것을 학습하는 것은 게임이 지금 갖는 매력의 본질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것은, 이는 또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블랙리스트에서 무의미한 심문을 통한 죽일것인가/살릴 것인가-이 또한 주권권력적이다-의 결정은, 역으로 우리가 실제에서 그렇게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들리야르가 제기한 학살을 다루는 대중문화가 동시에 또다른 학살을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과도 같이, 대중문화 전반은 이러한 무감각한 대중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첨병같은 역활을 맡고 있다)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중략)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렇기에 다섯번째 자유는 게임의 내용을 넘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명제가 된다:그것은 제도적인 권력이 아닌 법 바깥에 설 수 있는 자유이자 절대적인 권력으로서, 법/사회/도덕 등의 시스템의 바깥에서 내부를 규정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텍스처 덩어리의 적이라는 ‘호모 사케르’들을 통해서 게이머는 누구를 살리고 죽일 것인지를 판단한다. 이는 위에서 푸코가 설명하였듯이, 이는 ‘쾌락적’이다. 하지만, 이는 비도덕적이지 않다:결과적으로 게임의 서사는 세계를 지키고 질서를 재수복하는 것이지, 그것을 강제로 점유하고 새디스틱한 파괴를 통한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단순히 그런 주권권력적인 자유가 드러나는 하나의 ‘표현 형태’일 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게임은 경계상황(법과 질서가 멈출수 밖에 없는 지점들, 전시-비전시, 또는 완전한 전시, 혹은 완벽한 위험상태 등등)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게이머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은유나 비유, 혹은 분석으로서의 주권권력적 자유가 아니다. 영상문화의 첨병답게, 게임은 전적으로 이 자유와 권력을 시각화해서 드러낸다:그것은 첨단 무기들과 가젯, 혹은 과학적 설명이 양념처럼 들어간 초능력이나, 과거의 미신적 신앙에 기반하고 있는 마법의 형태를 빌고 있으며, 동시에 이는 파괴적인 현상들을 통해서, 아주 강렬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이 있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푸코 이론을 반박한다:권력은 쾌락을 줄 수 있으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권력의 본질이자 핵심은 ‘살아남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외부를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좀더 도발적으로 본다면, 대중이 권력의 문법을 체화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권력이 나오는 구조에 대해서 무의식적인 레벨에서 순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조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연스럽게 그 구조의 ‘세포’인 개인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것처럼 인식하는 것처럼? 물론, ‘쾌’의 문제로만 본다면 이러한 논제가 과하게 나가는 경향이 있으나, 은연중에 이러한 문제가 깔려 있는게 아닐까…)


(그런 지점에서 스펙옵스 더 라인은 기묘한 위치에 서있는 게임이다. 부록에서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