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패킨파의 2차 세계대전 영화, 철십자 훈장은 독기로 가득찬 작품이다. 다른 전쟁영화들과 다르게, 추축군, 그것도 독일의 입장을 다루고 있는 철십자 훈장은 전쟁의 광기와 허무, 그리고 폭력에 중독된 마초의 장엄한 최후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패색이 짙은 동부전선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임무에서도 살아남는 전설적인 군인, 슈타이너 하사의 부대에 스트랜스키 대위가 들어온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슈타이너 하사와 그의 소대원과 다르게, 스트랜스키 대위는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 안달이 난 전형적인 프러시아 귀족 군인이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련군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 오는데...
샘 패킨파의 미학적인 주된 관심사가 폭력과 스러지는 것들이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그 정점에 대한 미학이라는 걸 상기하면, 그가 전쟁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군을 선택한 것은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슈타이너 상사(스트랜스키가 부임하자 마자 곧바로 그를 상사로 진급시킨다)와 그의 소대원들은 살아남기 위한 발악을 할 뿐이며,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더러운 상황과 분위기로 그들을 옥죄인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패퇴했지만, 영화속에서 그들은 소련군에게 당하며 상관에게 버림받아 낙오당하고, 심지어 아군에게 사격당하기 까지 하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한다.
재밌는 점은, 철십자 훈장이 보여주는 슈타이너 라는 주인공의 케릭터이다. 샘 패킨파 특유의 마초적 케릭터에, 뼈속까지 폭력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폭력'이라는 메소드는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영화 내에서 가장 인간적인 존재이다. 포로로 잡은 소련군 소년병을 풀어주는 장면이나, 소련 여군들을 포로로 잡았을 때 보여주는 그의 모습, 그리고 스트랜스키가 철십자 훈장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브랜트 대령이 고발하려 하자 '당신들이나 스트랜스키나 모두 똑같아'라고 비판하는 장면 등등에서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폭력에 중독된 마초이기도 하다. 그가 전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장에 복귀하는 점, 그리고 농담으로 '이제 막 전쟁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말야!'라고 이야기 하는 점 등등에서 결국은 이 폭력과 광기의 순환을 빠져나갈 수 없는 슈타이너의 숙명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와일드 번치에서는 주인공들이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 의해서 스스로 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철십자 훈장은 그보다 더 큰, 빠져나갈 수 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보여준다. 슈타이너와 그의 소대원들의 파멸이 소련군이나 그들의 과오가 아닌, 스트랜스키의 철십자 훈장에 대한 개인적이고 어리석은 집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기묘하다. 슈타이너가 요양원에 있었을 때, '야채는 몸에 좋습니다! 야채를 많이 먹으십시오!'라고 나치 당원이 소리치자 마치 시체뜯어먹는 좀비처럼 혐오스럽게 야채를 주워먹는 부상병들의 이미지나, 철십자 훈장을 받기 위해서 슈타이너를 꼬드기는 스트랜스키가 '사회도 군대하고 마찬가지지. 결국은 줄을 잘서야 한다는걸세'라고 이야기하면서 슈타이너를 은연중에 협박하는 장면은 이미 전쟁의 광기가 전쟁터가 아닌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부분이다.
결국 자신의 범행(철십자 훈장을 못받게 슈타이너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까봐)을 숨기기 위해서 스트랜스키가 슈타이너의 소대원을 쏴죽이라고 명령을 하고, 결국 슈타이너의 소대원들은 슈타이너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죽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압도적으로 몰려오는 소련군과 싸우면서 이 총은 어떻게 장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외치는 스트랜스키와 그걸 보면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슈타이너, 그리고 소련군 소년병들이 총을 쏘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내내 겪었던 고난과 소대원들의 희생의 원인이 결국은 총도 하나 제대로 장전 못하는 병신 장교의 훈장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 웃기지도 않는 사회의 광기를 처절하게 비웃는 슈타이너의 광소는 영화를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데 성공한다.
영화 철십자 훈장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있을 전쟁 비판 영화이다. 하지만, 철십자 훈장이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폭력에 찌든 마초가 나와서 전쟁과 사회를 비웃고,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샘 패킨파 특유의 폭력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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