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Revenge solves everything."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FPS(First Person Shooter, 일인칭 슈터)가 시장을 지배하는 장르가 된 이유를 다양하게 뽑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FPS의 흥행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직관성'이라는 요소가 크게 개입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일인칭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일인칭으로 세상과 상호작용합니다. 즉, 비실재적이고 허구적인 액션 장르의 경험을 최대한 플래이어에게 어필하고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일인칭 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요즘 게임들에서 많이 보이는 파쿠르(벽타기, 건물 오르기 등등)나 화려한 공중콤보와 근접전(DMC 등) 등등의 경험을 할 수 없고, 전지적인 시점이 아닌 움직이는 케릭터의 시점에서 이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일인칭 시점에서 게임을 구성하기 쉬운 슈터 장르기 일인칭 시점 게임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콜옵의 블록버스터적인(+일자 진행형 롤러코스터 방식의) 연출 방식 덕분에 FPS는 하나의 흥행공식이자 페러다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콜옵의 성공 이후, '일인칭 시점=콜옵식 롤러코스터 슈터'라는 장르적 도식이 확고하게 굳어졌구요.


하지만 이러한 조류에 반하는 흐름 역시 존재합니다. 시스템 쇼크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오쇼크 시리즈는 이야기 구조 장치, 랩처라는 장소의 구성, 그리고 독특한 양손 사용 전투 시스템 등으로 기존의 FPS와는 차별적인 노선을 걸었습니다. FPS+잠입+RPG라는 독특한 조합을 보여준 데이어스 엑스 시리즈의 최신작 데이어스 엑스:휴먼 레볼루션은 능력의 해금에 따른 진행 방식의 다양화, 잠입에 있어 일인칭 시점이 시야확보의 불편함을 부분적인 3인칭 시점의 체택을 통해 해결한 점 등은 훌륭했죠. 그외에 1인칭 슈터에 콤보 개념을 도입한 블릿스톰, 일인칭 시점 퍼즐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버린 포탈 시리즈 등등...'FPS'라는 페러다임을 깨기 위한 시도는 콜옵의 성공 이전에도, 콜옵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콜옵식 FPS가 판치는 시대에서 디스아너드의 위치는 독보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이 '페러다임'을 깨부수는데 가장 근접한 게임이기도 하구요.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디스아너드라는 게임은 FPS가 아닙니다. 일인칭 시점 '액션'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죠. 잠입 암살 게임을 표방하는 디스아너드는 비슷한 게임 컨셉을 표방했던 데이어스 엑스:HR의 타협노선(일인칭에 엄폐 시 3인칭 시점을 섞은)을 취하지도 않고, 복잡한 스킬트리 형식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단순하다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스킬 구성과 스킬 효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스아너드는 이들을 교묘하게 엮어서 다른 1인칭 액션 게임들이 넘지 못했던 벽을 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디스아너드의 컨셉은 단순합니다:잠입 그리고 암살. 하지만, 디스아너드는 여태까지의 잠입 액션 게임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기존의 잠입 액션 게임들이 게이머에게 한 두가지 루트를 던져주고, 어떻게 들키지 않고(혹은 전투를 감수해서라도) 목표지점까지 도달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만들죠. 하지만 디스아너드는 한 두가지의 루트를 던져준다기 보다는 거대한 공간을 던져주고, 플레이어에게 '자신만의' 잠입, 암살 루트를 찾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데이어스 엑스:HR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데이어스 엑스나 다른 게임들과 크게 구별되는 큰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연성'의 존재입니다. 디스아너드의 레벨 디자인은 '스테이지의 구조'를 먼저 생각하고 레벨을 디자인 한 것이 아닌, '하나의 장소'를 먼저 구상하고 난 뒤에 그 위에 레벨로서의 튜닝을 거쳤다고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디스아너드의 레벨 구성은 처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데, 목표물을 가르키는 표시 HUD를 제외하고 웨이포인트 등의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플레이어 스스로가 어떻게 잠입할 지를 결정해야되죠. 


디스아너드는 여기서 '블링크'라는 순간이동 기술과 파쿠르 요소를 도입해서 실제 플래이어가 갈 수 있는 공간을 넓힙니다. 사실 '블링크'라는 요소는 디스아너드란 게임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한 지점으로 빠르게(거의 순간이동 수준의 속도이지만, 빠르게 이동한다는 점 때문에 막힌 벽은 통과할 수 없음) 이동하는 블링크는 게임 내에서 주인공인 코르보의 움직임과 행동 반경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제작진들이 '디스아너드의 잠입은 적들이 나를 못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블링크) 미쳐 못보는 것'이라고 표현한 만큼 디스아너드의 잠입은 빠르고 호쾌합니다. 그리고, 1인칭 엑션 게임에서는 불가능했던 파쿠르의 요소를 접목시키는데 성공했구요. 사실 예전까지 일인칭 액션 게임에서 파쿠르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안그래도 좁은 시야와 자칫 잘못하면 게이머가 죽도밥도 아닌 곳에 끼어서 빈번히 세이브&로드 노가다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이죠. 하지만 디스아너드는 블링크라는 요소를 이용해서 손이 닿지 않는 지형 지물에 쉽고 빠른 접근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블링크 난타로만 게임을 진행하기에 디스아너드는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블링크로 순간이동 하는 지점에 적이 몇명 있는지, 무슨 보안장치가 달려있는지, 혹은 코너 너머의 상황이 어떤지 등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게임은 다크 비전이라는 투시+시야 확보 기술과 빼꼼샷을 게이머에게 줌으로써 게이머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줍니다. 재밌는 점은 다크비전의 투시 및 감지 범위가 그렇게 넓지 않은 점, 게임 내의 맵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디스아너드의 게임의 흐름이나 완급은 다른 잠입 게임들과 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뷰포인트를 차지한 후에, 적들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합니다. 시야를 확보하고 적들을 관찰할 때의 묘한 긴장감, 그리고 순식간에 파고드는 상쾌함과 쾌감은 다른 게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4.


사실, 게임 자체는 다크비전+블링크만 잘 사용하면 다른 기술은 안쓰고도 쉽게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게이머에게 매력적인 마법과 기술들을 보여주면서, 게임 풀이에 의무적으로 '필요하다기' 보다는 '게임을 하면서 한번 써보고 싶어지는' 그런 구조를 보여줍니다. 


디스아너드의 '마법' 개념은 다른 게임들에 비해서 대단히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간이동인 블링크, 시야확보 기술인 다크 비전, 영혼 빙의 기술인 포제션, 장풍(......) 윈드 블라스트, 적들을 갉아먹는 쥐때 소환, 시간 멈추기 정도가 다입니다. 게다가 패시브 스킬은 4개(체력 강화,근접전 강화,민첩성 강화,암살시 적 시체 소멸) 밖에 안되구요. 여기에 작은 변화점을 추가해주는 요소인 '부적'을 집어넣었습니다. 같은 컨셉의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데이어스 엑스의 경우, 아무리 열심히 프락시 노가다를 해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파츠가 60%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디스아너드의 스킬들은 간결하다 못해 단순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디스아너드는 스킬의 수를 극단적으로 축소한 대신에, 그 스킬들로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플레이어는 흰 쥐를 섭취하면 마나를 회복하게 만드는 부적과 흰쥐를 만날 확률을 올릴 부적을 동시에 장착하고 쥐때 소환으로 적들을 조용히 처리하면서 동시에 쥐때에 섞여있는 흰쥐를 먹어서 마나를 회복하는 플래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플레이어는 시간을 멈춘 뒤에, 자신에게 총을 쏜 적에게 빙의한 뒤에 총알 앞으로 걸어가게 만든 뒤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하여서 스스로 쏜 총에 스스로 맞게 하는 상황을 만들었죠. 이와 같이 다양한 능력과 부적들을 조합하여 자신이 원하는 진행과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디스아너드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저 그 순간만 다양한 능력을 한꺼번에 쓰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게임은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능력의 사용을 장려합니다. 물고기나 쥐에 빙의하는 것이 잉여스러운 발상이라구요? 실제로 게임은 사람이 가지 못하는 작은 통로들이 많으며, 위급한 상황에는 자신의 모습 자체를 숨길 수 있습니다. 시간 정지는 문자의미 그대로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적들 입장에서는 게이머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으로 인식되어 잠입에 상당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쥐때 소환은 최강의 공격 스킬이자, 시체와 소음을 남기지 않는 훌륭한 처리 기술로 쓰이기도 하구요. 즉, 각각의 기술이 게임내 스테이지와 다양한 형태로 상호작용함으로서 게이머는 게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공략 또는 다른 사람들의 루트와 경험과는 차별되는 자신만의 경험을 발견합니다.



5.


디스아너드는 잠입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전투 부분이 상당히 호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석궁 또는 권총, 스킬 등을 장비해서 싸우는 스타일은 바이오쇼크나 언다잉 등에서 본 방식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디스아너드 전투의 가장 기본은 바로 '칼을 사용한 근접전'이라는 건데요, 자칫 잘못하면 대단히 어려워질 수 있는 부분을 게임은 아주 단순하게 극복합니다. 가드와 공격, 이렇게 두개가 근접 공격의 전부이지만 공격 타이밍을 딱 맞춰 가드할 경우 경직을 유도해서 원킬을 낼 수 있다던가, 스킬들과의 조합을 통해서 전투 경험 자체가 뒤바뀌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보죠. 적이 가드를 풀고 있는 상황에서 적 앞으로 블링크+근접공격을 연타하면 어새신 크리드 처럼 즉사 공격이 나가기도 합니다. 이래나 저래나 적들이 귀찮으면 그냥 쥐때같은걸 끼얹고 총으로 조질 수도 있구요. 



6.


디스아너드의 그래픽과 음악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건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기 보다는, 분위기나 미적인 관점에서 훌륭하다는 겁니다. 디스아너드는 게임 내 세계를 그래픽적으로 정교하고 디테일이 넘치는 세계로 만들기 보다는 하나의 인상과 이미지로 만들려 했습니다. 유화의 느낌이 나는 텍스처는 언뜻 보기에는 덕지덕지 쳐바른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만, 멀리서 보면 이것들이 뭉그러져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모네의 연꽃 처럼 말이죠. 인물들도 텍스처 자체에서는 차이가 많이 안나지만, 개개인의 인상을 놓고 따졌을 때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구요. 음악이나 효과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잔하면서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죠. 하지만 몰아칠때는 확실하게 몰아칩니다.



7.


하지만 디스아너드에는 몇몇 치명적인 문제점들이 있고, 이 문제점들은 자칫 잘못하면 게임이 쌓아올린 모든 업적을 송두리채 파괴할 정도입니다. 이는 게임 플래이보다는 게임 스토리와 게임 구성에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뭔가 실제 개발 단계에서 뒤엎어서 원래의 스토리 위에 무난한 스토리로 덮어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던월이라는 19세기 산업혁명을 배경으로한 가상의 공간, 고래 기름과 산업의 발전,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지와 대역병이 파괴한 던월의 편린들은 제작진들이 던월이라는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스토리는 평범하다 못해 병맛까지 느껴지는 배신과 추격의 이야기입니다. 누명을 쓴 호국경 코르보가 충성파에게 구출되서 반역자들을 처단한 뒤에...충성파에게 배신당합니다. 응? 사실 뭔가 여기에 뒷 이야기를 덧붙이면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스토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나버리고 플레이어가 자신을 통수친 멍청한 놈들을 묻어버리면서 게임이 끝나버립니다. 세상에, 도대체 어떤 시나리오 작가가 돈받고 이런 스토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면요.


또한 게임은 흐름상 기묘한 구조를 몇몇 부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위 감찰관 암살과 황금고양이 암살 스테이지는 공통된 입구에서 출발해서 그곳에 도달하는 루트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이드퀘스트도 존재했습니다. 즉 게이머가 두번 이상 오는 장소를 만들었다는 거죠. 하지만 미션 2 이외에는 게이머는 단 한번만 그 장소에 머무릅니다. 마치 단발성 스테이지(규모를 생각하면 이런 표현은 그렇지만)처럼요. 마치, 미션 2까지는 반쯤은 오픈월드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아케인 소프트의 패기가 엿보이지만, 뭔가의 사정에 의해서 엎어질 수 밖에 없었던것 같습니다. 


심지어 엔딩의 경우는 그때까지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데, 최종흑막 또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아웃사이더가 코르보의 여생 이야기를 해주면서 끝냅니다. 이게 도대체 뭐죠? 마치 용사의 여생이야기를 마왕이 나레이션 해주면서, '용사...너는 멋진 놈이었어 ㅠ'라고 하는거 같아요. 게다가 고래잡이라는 코르보와 같은 부류(아웃사이더에게 선택받은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구요. 사실상 고래잡이들은 게임내에서 그저 돈받고 일하는 청부살인업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 공개된 트레일러에서는 게임의 진행과 다르게 충성파가 아닌 아웃사이더가 코르보를 구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최종 흑막의 포스를 풍겼습니다. 이건 확실하게 한번 엎었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엎었던 엎지 않았던, 디스아너드가 시간에 쫒겨서 낸 게임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심지어 앞으로 DLC 발매 계획에 따르면 아캄시티 같은 첼린지 맵 요소를 DLC로 추가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까요. 이건 분명하게 게임과 함께 나왔었거나, 아무리 못해도 초회한정으로 뿌렸어야하는 DLC였습니다. 여기에, 아케인 소프트는 포경 산업과 고래 이야기, 그리고 고래잡이들의 수장인 다우드를 주인공으로 한(!) DLC를 낸다고 했습니다. 이쯤되면 확신범이에요.



8.


뭐 엎어지든 엎어지지 않았든 디스아너드는 재밌는 포인트도 분명한 작품이고, 단점도 극명한 작품입니다. 사실, 장점이 너무 대단해서 왠만한 단점은 커버해주고 싶지만, 단점이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쉽게도 있는걸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디스아너드가 제공하는 게임의 경험은 너무나도 독특해서 외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랫동안 새로운 것을 갈구한 게이머라면 이러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구요. 만약 아케인 소프트가 다음 작품을 만들 생각이 있다면, 다음번에는 좀 제대로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