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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약한 스포가 있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 감독인 이쿠하라 감독의 신작 돌아가는 펭귄드럼(2011)은 진짜 빈말로라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품에 빠져서 3편 씩이나 되는 특집 리뷰를 쓸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도 말이죠. 저는 이런 펭귄드럼 같은 작품들을 여럿 알고 있죠. 영화쪽에서 본다면 나홍진 감독의 황해라든가, 박찬욱 감독의 박쥐라든가, 아니면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이라든가. 만화나 애니 쪽에서 본다면 케모노즈메 등을 사례로 꼽을 수 있겠네요. 하나같이 작가나 감독의 의도한 바가 너무 원대한 나머지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려다 망한 케이스들이죠.

하지만 객관적으로 부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펭귄드럼이 인상적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이나 이야기들이 너무나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실패했다고 묻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추켜세우기에는 여러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띄는 미묘한 작품이죠.

제가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전작들을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특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죠. 우테나 당시 때만 하더라도 금기시되는 소재를 생뚱맞게 밝은 연출로 커버하는 등의 상당히 파격적인(?) 구조를 선보였고, 이러한 모습은 펭귄드럼에서도 똑같습니다. 1화에서부터 드러나는 근친상간을 묘사하는 듯한 위험한 장면에서부터, 스토커, 임신드립, 레즈비언, 약드립 등등 소재만 놓고 따졌을 때는 이미 18세 이상 관람가를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쿠하라 감독은 이러한 과격한 소재와 내용을 상당히 온순한(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파격적인) 연출로 커버합니다. 소녀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섬세한 연출이라든가, 서로 맞지 않는 소재와 연출의 접목 등(어린이 브로일러, 메리 씨의 세마리 양 이야기 등)을 통해서 소재가 갖는 파괴력을 중화하고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 방식 덕분에 이야기 자체가 묻혀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보통 펭귄드럼을 끝까지 감상한 사람들의 평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감동적이었다'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펭귄드럼에 이야기 구조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야기 자체가 불친절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펭귄드럼의 이야기는 구조상의 비약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초반 링고의 스토킹과 16년전 사건과의 연관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 등은 암시나 복선이 지나치게 불친절하여서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당혹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습니다. 작중에서 암시나 복선을 짤막짤막한 이미지의 형태로 대부분 처리하기 때문이죠. 또한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구조와 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도 이야기로 다루기 보다는 이 부분 역시 이미지를 이용해서 암시하는 걸 자주 사용하는 덕택에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작품이 꼬여버립니다.

사실 이는 감독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쿠하라 감독은 이야기의 인과관계 보다도 작품 내에 드러나는 이미지와 그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을 만든것 같더군요. 그덕분에 작품의 구조상 논리적인 설명으로 불가능한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몇몇 예시를 들 수 있지만, 강력 스포이니 생략) 그렇기에 펭귄드럼을 보는 사람들에게 작품은 마치 1000피스 짜리 직소 퍼즐의 전체 그림을 한두개의 퍼즐 조각만으로 유추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작품이 되어버렸죠.

그렇지만, 이런 저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아예 실패한 작품은 아닙니다. 엄청나게 뿌려댄 떡밥중 상당수를 회수하는데 성공하니까요. 게다가 떡밥과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주제의식이나 상징구조가 그냥 단순한 실패작으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 역시 그렇습니다.

펭귄드럼의 주제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만, 여타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의 사랑을 다룹니다. 펭귄드럼에서 다루는 사랑이란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기독교적인 박애론과 유사한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입니다. 또다른 의미에서는 에반게리온 이후로 애니메이션에 종종 나오는 '나-너'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이를 운명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내었다는 점, 그리고 결말까지의 결과물을 놓고 보았을 때 상당한 완성도로 나왔다는 점에서 펭귄드럼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자세한 내용의 분석은 중편, 하편으로 넒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 작품 자체가 모르고 본 상태에서 느껴야 감동받을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상편에서는 간단하게 전반적인 특징들만을 다루었으며, 중편 하편에서는 제가 분석한(물론 이제 공식 자료집이나 감독 언급에 따라서 부정될 수도 있지만) 내용들을 최대한 논리에 맞춰서 내놓을 생각입니다. 일단 보실 분들은 상편 부분만 참조하시고, 중-하편 부분은 감상 이후에 보시는게 바람직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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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스포가 있습니다)

1.

어느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모든게 끝나있었다. 삶이란 사람에 따라서 단순 복잡 미묘한 것인지라 뭐라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삶이란 공통적으로 '더럽게 빨리지나가는' 속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발을 헛디뎌서 추락할 때 '시-'라고 말하고 '-발!'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벌써 26을 찍고 내일 모레면 30을 내다보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의 청춘도 끝나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꽃답다는 청춘이란 시간에 나는 못해본 것만 잔뜩있어서(예를 들어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삶이란 불만과 후회의 얼룩으로 가득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누가 '만족스러운' 청춘을 보내겠는가? 그 누가 하늘과 땅에 맹새코 한점 후회없는 청춘, 대학생활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청춘 역시 인생의 지나가는 지점에 불과한지라 사람은 자신의 청춘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후회할 수 밖에 없다.

2.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여기 가련한 한 대학생이 있다. 그리고 이 대학생은 자신의 대학 2년을 허투로 보낸다. 그리고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대학 1학년으로 돌아가있다. 다시 삽질한다. 이하 무한 반복. 포인트는 이거다:아무리 주인공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주인공은 만족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멍청한 것도, 어디 아내의 유혹에나 나올법한 막장 비극의 주인공이라서도 아니다. 해답은 단순하다. 그것이 바로 삶이니까.

다다미 넉장반이 보여주는 세계는 희화화 되어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적인,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계적인 공통이라고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대학교란 의미심장한 상징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을 적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대학교뿐이다.(그마저도 취업 및 고시 준비 때문에 점점 없어지고 있지만) 그런 학생들이 갖는 판타지란 무엇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동아리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동시에 동아리에서 청순가련한 퀸카 만나서 연애를 하는 것.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학생이 갖는 판타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은? 현실은 어떤가? 현실은 이미 작품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차피 여친은 생길놈은 생기는데, 근데 그건 이 글을 보고 있는 너한테 해당 안되는 사항. 오즈 같은 친구는 덤. 동아리나 대학 생활도 생각과 다르게 고난과 역경의 연속인지라(다행이 나는 해당사항 없지만), 후배들이나 신입은 이해할 수 없는 선배들의 알력다툼, 동아리 회장의 1인 독재체제, 대학을 뒤에서 지배하는 비밀 서클(다른데는 모르지만 우리 대학은 실제 존재한다. 나도 가입권유 전화 오기전에 소주 한병만 덜먹었으면 지금쯤 KKK두건 쓰고 하일 히드라-! 이러고 있었겠지.) 등등 산넘어 산이요, 물넘어 물이로다. 결국 동아리나 대학생활 역시 자기 뜻대로 생각대로 생기지 않는지라 대학 졸업까지 늘어나는 것은 한숨이요, 후회뿐이며, 미래에 대한 걱정뿐이다.

3.

그렇기에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판단한다:어차피 뭘해도 실망할 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다다미 넉장반의 자취방-에 틀어박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지가 될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각 에피소드마다 나오는 늙은 점쟁이는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호기는 눈앞에 있으니 놓치지 말라고(그리고 1화에서부터 마지막화까지 받는 복체도 점점 올라간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각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의미로 이 점괘를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 평행세계에 주인공이 빠지게 되었을 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겠다는 선택을 한 주인공에게 내려진 형벌은 바로 자신만의 세계로 만들어진 감옥에 빠지는 것이었다. 언뜻 보았을 때는 이는 그의 선택에 부합하는 완벽한 '해답'일수도 있다. 완벽하게 '자신'만 존재하는 세계이니까.

 4.

주인공은 그리고 이 다다미 넉장반 은하계를 탐험한다. 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방의 카스테라를 먹고, 먹고, 또 먹으면서, 그리고 어딘가에 짱박혀 있었던 돈을 줍고, 줍고, 또 주으면서, 읽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하지만 그런 생활을 지속할수록, 역설적으로 주인공은 무한한 평행세계의 다른 주인공들을 동경하게 된다. 왜일까? 해답은 명확하다. 無선택이란 선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선택의 유보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한 자신의 세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저 다른 주인공들의 삶을 훔쳐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주인공들은 어떤가? 동아리 독재체제를 유지하던 선배를 골탕먹인 주인공 1, 선배들 사이의 이상한 알력 다툼에 낀 주인공 2, 단백질 인형을 사랑한 주인공 3, 다단계 종교행사에 참여한 주인공 4 등등...물론 모든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 주인공과 나머지 평행세계의 주인공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은 스스로 의지로 청춘을 살았다는 점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내렸다. 인간은 스스로 끊임없이 선택하지만, 동시에 그 선택에 끊임없이 시달릴수 밖에 없으니까. 각 주인공들 역시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스스로의 선택에 실망할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고 그 선택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을 살았다. 인생에 있어서 '호기', '좋은 때'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감독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 청춘이란 결국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최초의 시기고, 스스로를 누구의 간섭 없이 정의내릴 수 있는 축복의 시기라고.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든, 결과에 상관 없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5.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의 우주를 해매던 마지막 주인공은 그 의미를 깨닫고 결국 대오각성하여서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의 방 밖으로 뛰쳐나온다. 청춘이란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개소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독일놈이 쓴 시가 있다. '가지 못한 길은 왜 나는 가지 못했는가'. 이건 그저 개소리에 불과하다. 내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했다면 결과가 어찌되든 그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청춘이란 시기는 돌이켜봤을 때 결국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시기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좌절하지마라. 그렇다고 청춘을 살았던 시기의 자신의 선택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청춘은 빛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2년전에 나온 이 작품을 지금 리뷰를 쓴다는 것은, 아니 2년 가까이 미루었다가 리뷰를 썼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리뷰를 내 청춘에 끝을 맺는 의미로 쓰고자 했다. 재작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듯이 쓸 기회가 날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이 리뷰를 뒤로 미루었다. 왜일까. 마음한편에서는 내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점은 어느 시점에서든 질질 끄는 것은 멈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이 글로서 내 청춘에 종말을 고한다.

이 글은 내 청춘에 받치는 장송곡이며, 마지막 조화다.

청춘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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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는 고전 명작 발레입니다. 이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죠. 마법에 빠진 백조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마법이 풀려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된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살하게 된다는 애절한 스토리의 이 발레는 어찌보면 남녀차별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여자는 순수한 존재로 나오는 거죠? 그리고 왜 여자는 순수를 잃으면 죽어야 하는거죠? 물론 옛날의 작품에 이런 식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블랙 스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순수한 인간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그 두 상극이 하나의 인물에 녹아들면 어떻게 될까 말이죠.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를 재해석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 인간은 순수한 부분도 있는 동시에, 사악하고 욕정에 사로잡힌 모습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백조와 흑조를 한 발레리나가 동시에 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로 인해서 백조의 호수는 의미심장해집니다. 순수한 사랑과, 강렬한 욕망의 유혹. 결국 유혹에 굴복하여 순수성이 소멸하죠. 이렇게 보면, 두 역을 하나의 발레리나가 연기하면, 순수한 소녀의 사랑과 비극에 대한 이야기가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묘한 메타포로 변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지만, 다면적으로 극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순수하면서 욕정에 사로잡힐 수는 없고, 남자를 유혹하면서 소녀적인 수줍음, 순수함의 감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면, 그것은 예술적인 완전함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함, 이것이 블랙 스완의 영화 내내 나오는 중요한 소제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나의 편집증적인 광기며, 자기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니나는 훌륭한 발레리나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발레리나는 아닙니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을 풀어주지를 못하고, 끝없이 연습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항상 조역을 맴돌죠. 그러한 그녀가 기회를 잡아 여왕 백조와 백조의 역을 동시에 맡게 됩니다. 하지만, 두 역을 동시에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왕 백조 역할, 그녀의 욕정과 갈망,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죠. 그렇기에 그녀는 여왕 백조 역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 결국은 자살에 가까운 자학을 하게 됩니다.

재밌는 점은 니나 자신 역시 어두운 부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나죠. 단장이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자 깨무는 부분, 동료 단원의 물건을 훔치는 부분 등에서 말이죠.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대해서조차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드러나는데(동료단원과의 동성애 장면, 햘퀴기 장면 등등), 그녀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망상의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녀의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 니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순수한 존재-욕정에 사로잡힌 존재로 이분하여 자아분열을 일으키지만, 그 미쳐가는 과정조차도 자신일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완벽함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고 미치는 것, 블랙스완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인 모습에 대한 탐미적인 해석입니다.

니나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은 이러한 붕괴의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니나는 소녀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죠. 하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그녀의 히스테리컬한 발작이나 파괴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니나 자신의 어두운 일면, 또는 그녀의 소녀적인 모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나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의 행동 자체는 그녀라는 존재에 비추어봤을 때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 오묘한 케릭터를 훌륭하게 재현한 데는 나탈리 포트만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로 데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기존의 정형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레슬러, 레퀴엠) 비판을 벗어나서 한 차원 높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그 점에서도 의의가 깊은 영화죠. 또한 영화 자체가 그가 여태까지 감독했던 영화 스타일들의 집결체인 만큼, 영화적인 편집이나 카메라워크 등의 완성도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 스완은 훌륭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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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롯 브론테 소설, 제인 에어는 상당히 독특한 소설입니다. 페미니즘 작품의 효시로 분류되면서도 동시에 신데렐라 스토리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상당히 모순적인 구조를 보여주죠. 제인 에어는 이성적이면서 기존의 권위에 반항적인 여성이지만, 동시에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했던 불운한 과거를 지닌 여성입니다. 예쁘지도 않지만 남성 위주의 권위적 사회에 대해 당돌한 태도를 지니는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로체스터라는 외부의 존재로부터 찾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모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인 에어는 여러차례 영화화 되었지만, 그러한 모순점에 대해서 상당히 취약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하지만 2011년에 만들어진 제인 에어는 이러한 모순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다루어야 하는 논점이 있습니다.

 흔히, 제인 에어를 표현할 때, 권위에 저항하는 신여성적인 모습을 강조합니다. 소설 전반에서 다루고 있는 제인 에어의 매력은 권위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뛰어난 외모를 지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분이나 직위, 사회적 권위를 뛰어넘어서 당돌한 태도를 지닌 제인 에어를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평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여성이라도 깨어있으면 어떤 지위나 어떤 외모를 지녀도 제인 에어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소설의 절반만을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제인 에어의 사랑입니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제인 에어의 이야기 구조는 대단히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남자에게 당돌한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여 예속된다라는 모순적인 구조를 취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 심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할 점은, 제인 에어의 러브 스토리는 제인 에어로부터 시작되는게 아니라 로체스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에게 반했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알다시피, 제인 에어는 예쁜 여자하고 거리가 멀며, 신분이나 재산, 그리고 남자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당시의 이상적인 여성상하고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끌리죠. 영화나 소설은 그러한 로체스터의 기이한 끌림에 대해서 많은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맥락에서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끌리는건 명확한 실체를 가집니다.

 먼저, 로체스터는 원래 아내이자 미쳐버린 정신병자, 버사 메이슨을 자신의 저택에 가두어놓고 있죠. 그러나, 로체스터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정신병원이 아닌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버사가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할때, 로체스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다시 불타는 저택으로 뛰어들죠.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와의 결혼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몇몇 사건들을 통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끌리는 것은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를 사랑한 것, 그리고 제인 에어로부터 자신의 '죄'를 구원받고자 한 것은 로체스터의 눈에는 제인 에어와 버사 메이슨이 서로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과거의 당돌하고 세상에 대해서 열린 시각을 가졌던 페미니스트 버사 메이슨을 사랑했기에, 미쳐버린 그녀를 부양하면서 동시에 버사 메이슨의 분신인 제인 에어로부터 구원받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그 시대가 버사 메이슨, 페미니스트를 미치게 만들었거나, 혹은 페미니스트를 '미친년' 취급했다면, 도대체 소설 속에서 무엇이 제인 에어를 제정신으로 붙잡고 있을까요? 영화는 대답을 제인 에어의 불행했던 인생에서 찾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정당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죠. 그녀의 부모가 죽은뒤에 친척 집에 맡겨졌을 때도, 그녀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그녀가 로체스터에게서 떠난 뒤에 목사 집에서 묵었을 때도, 모두 그녀에게 정해진 역할로서의 여성 모델을 강요합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정열은 제한을 받죠. 하지만, 그녀가 로체스터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변하게 됩니다. 정열에 대해서 눈뜨는 거죠. 그녀가 여성의 누드화를 보러 나오는 장면이나, 그녀의 그림 그리는 모습 등등에서 그러한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제인 에어가 버사 메이슨과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자기 자신이 그러한 정열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인 에어가 처음 로체스터에 대해서 갖는 미묘한 거리감이나, 로체스터의 사랑에 대해서 두려워 하는 모습은 그녀의 정열보다 그녀의 이성이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죠. 하지만, 그녀가 로체스터의 비밀, 버사 메이슨을 알게 되고 로체스터를 떠났을 때, 이성적으로든 정열적으로든 자신과 같은 신여성이 있을 곳은 로체스터 곁밖에 없다는 걸 결국 알게 됩니다.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를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다양한 곳에 숨어있는 복선들이나, 인물의 위치, 소리, 소품들을 사용해서 감정적인 이야기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러한 소설 원작의 영화들이 어느정도 표현이나 주제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판 제인 에어는 그러한 문제를 훌륭하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질적으로 러브스토리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영화들과 같지만, 2011년판 제인 에어는 다른 제인 에어 영화들과 차별되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http://shoggoth.tistory.com/2 에 올렸던 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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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본문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짤방)

2002년, 세월이 흐르며 특차 2과의 말썽쟁이들도 이리 저리 흩어져 나가고, 고토와 시노부 정도가 남아서 2과를 지키고 있었다. 바빌론 프로젝트도 거의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서 레이버 범죄도 많이 감소해 그럭저럭 평온하고 무난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 정체불명의 전투기가 미사일을 이용해 도쿄 베이브릿지를 공격하는 사건이 터지고, 그것은 연달아 도쿄의 교량들과 주요 시설이 공격헬기의 습격을 받는 일대 테러 사건으로 번진다. 그 와중에 의심을 받던 자위대는 계엄 선포에 의해 전국을 장악하며 경찰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등 정국은 엉망이 된다. 사건을 한 걸음씩 조사해나가던 고토와 시노부는 '츠게 유키히로'란 남자가 그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페트레이버 2기 극장판은 페트레이버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옴니버스 형식의 괴작 폐기물 13을 제외하고) 작품입니다. 우선 2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특차 2과의 인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신의 갈 길을 걷고 있으며, 레이버라는 요소는 거의 등장하지 않죠. 즉, 기존의 패트레이버 시리즈라기 보다는 다른 작품이라는 느낌조차 들 정도니까요. 오히려 이 때부터 오시이 마모루 감독 특유의 무거운 철학적 정치적 주제들이 드러나는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식뿐인 평화, 일상에 잠복한 위협 등등의 요소가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가식적인 평화에 사로잡혀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가 등에 대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진지한 고찰이 묻어나는 작품이죠.

패트레이버 2기 극장판은 감독과 감독이 속한 세대에 대한 고민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일본은 미소 냉전에 의해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최종 방어선(1950년대 미국이 발표한 이데올로기적 최종 방어선인 에치슨 라인만 보더라도 한국은 포함되지 않고, 일본까지만 포함이 되어있죠)으로 정해졌죠. 사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당시 공산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방파제와 같은 역할이었고, 냉전 체제가 붕괴한 지금은 미국의 최우방으로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최우방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즉, 일본이란 나라 자체는 세계 정세, 특히 과거에는 미소 관계, 요즘은 중미 관계에 따라서 흔들리는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 사회와 국민들은 스스로 그러한 아슬아슬한 평화 관계를 자각하고 있을까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고민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일본은 전쟁 이후 한번도 내전이나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어 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이란 국가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 제국에서 약간 변화점을 준 것에 불과하죠.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과거에 대해서(메이지 유신, 전통문화, 극우, 심지어는 일제 시대 및 그 시대의 전쟁에 대해) 향수를 갖고, 이것이 대중문화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즉, 과거에 대한 미화된 기억으로 현재의 미국과 일본, 그리고 동북아에서의 파워 게임 내의 일본의 위태로운 위치에 대해서 상당히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는 능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틀에 갇혀서 양식되고 사육되게 됩니다. 즉, 일본이란 나라가 처한 국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추상적인 신념(우리나라는 전쟁과 무관하며, 평화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에 근거하여 평화와 국가 수호라는 주요 명제를 명목화, 제도화 시키고, 그 결과 제도화된 틀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관료주의와 늦장대응, 부서 간의 파워 게임-이 생겨나게 됩니다.

작품은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작품의 도입부, 츠게가 속한 레이버 소대가 복잡한 지휘계통 및 조약에 의해서 전투에서 반격도 못하고 전멸하는 이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핵심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부터 츠게의 분노가 시작되죠. 그것은 형식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 평화와 세계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단 한발의 폭탄과 허세만으로 일본이란 나라가 누리는 평화를 박살내어버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본이란 나라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가 진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무능력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츠게의 계획에 이용된 것은 미국의 극비 계획입니다. 일본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일본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국이 어떤식으로 개입할 여지를 마련하는가에 대한 전쟁 시나리오였죠. 상당히 과격한 소재이기는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일본의 정세를 신랄하게 꼬집는 대목입니다. 즉, 오시이 마모루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일본이 누리고 있는 평화란 미국의 암묵적인 동의와 국가간의 위태로운 균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짓뿐인 평화이며, 일본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관료주의와 제도로 이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츠게의 계획에 일본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됩니다. 처음 베이브릿지 폭파 이후, 자위대와 경찰은 범인 색출 및 치안 유지라는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서로의 관할권 다툼 및 파워 게임만 일으키다가 결국은 도쿄를 두고 자위대가 도쿄를 점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의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의 본질인 츠게에게 접근하지 못하죠. 아니, 정확하게는 이러한 혼선 속에서 츠게라는 본질은 망각됩니다.

여기서부터 특차 2과와 고토 경부보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그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을 끝까지 추격하여 종국에는 사건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그가 문제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이를 설파하려 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이를 듣지 않았죠. 결국 그는 그의 독단으로 특차 2과 前 소대원들을 모아서 그들만의 전쟁을 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 진실을 위한 제도 밖에서의 전쟁을 말이죠. 그리고 특차 2과는 승리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단지 제도 밖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받아야 하는 합당한 대우를 못받고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재밌는 점은 츠게나 특차 2과 모두 공통적으로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전 페트레이버들에서 드러나는 특차 2과의 모습, 제도 밖에서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적인 모습을 드러내죠. 하지만 츠게는 제도 밖에서 제도의 문제점을 보았고 이를 무너뜨려서 진실을 알리려 하지만, 특차 2과는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찬밥 대우하는 제도 그 자체를 지키려 노력하죠. 이는 상당히 역설적인 구도입니다. 제도에서 쫒겨난 자들이 제도를 지키려 드는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서 고토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설령 거짓된 평화라도, 우리의 의무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기에 지켜야 한다, 라고.

결국 츠게와 특차 2과의 싸움은 세상의 부정에 대한 순수한 분노와 세상을 지키려는 순수한 신념과의 싸움입니다. 평화의 알고리즘 바깥에서 일어난 아웃사이더들의 싸움. 그것이 바로 페트레이버 2기 극장판을 관통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표현이나 주제, 분위기, 작화 등에서 페트레이버 2기 극장판은 정말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일본 거품 경제의 끝자락에서 나온 대단히 과잉적인(긍정적, 부정적인 의미 양측 다) 작품이죠. 하지만 페트레이버 시리즈 연장선상에서 과연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라는 질문에 저는 부정적으로 답하겠습니다. 2기는 확실히 어렵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와는 별개로 2기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정체성을 다 집어 던져버렸습니다. 레이버, 일상적인 소소함, 특이한 케릭터 등등의 페트레이버 시리즈의 좋은 미덕들은 죄다 갖다 버리고, 오로지 오시이 마모루에 의한, 오시이 마모루를 위한,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죠. 만약 제가 이 작품을 극장에서 어떤 정보도 없이 처음 보았다면, 시리즈의 팬으로서 대단히 분개하였을 것입니다. 1기 극장판 역시 상당히 무거운 작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저건 페트레이버구나'라는 아이덴티티는 존재하였죠. 하지만 2기는 케릭터와 배경만 빌은 아예 다른 작품이라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페트레이버 2기 극장판은 역설적이게도 '페트레이버'라는 제목을 때고 보아야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객관적인 완성도와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 표현력 역시 훌륭했지만 문제는 그러한 표현의 방식이 시리즈 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충격적이면서 불쾌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레이버는 오시이 마모루라는 감독이 공각기동대 전에 어떤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가를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작품 자체로도 한번쯤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덧.이제 폐기물 13이 남아있는데, 이건 나중에 짧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포함)

1.

이 글은 사실 리뷰라기 보다는 에바:파에 대한 감상글입니다. 사실 제가 감상과 리뷰의 개념이 혼재하여서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체로 감상은 아직 완결되지 아니한 작품에 대해서, 리뷰는 완결된 작품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에바:파를 보면서 느낀 것은 아직 가이낙스가 완성된 형태의 새로운 에반게리온은 전체 작품을 보아야 알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즘이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나 감상의 포인트로 잡았던 부분, 예상 및 전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는 한 작품을 4편의 작품으로 쪼개놓았다는 느낌이 강하기에 뭐라 평가하기가 미묘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번 작품이 전체 작품을 놓고 보았을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점이죠.

2.

 기본적으로 에반게리온 파는 전작인 서에 비해서 엄청난 변화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전작이 기본적으로 원 TV판에서 스토리에 약간 약간식의 변화를 준 정도의 미묘한-사실 비주얼적인 측면이나 설정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변화점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의 변화점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순한 편입니다. 일단 사도가 붙은 에바를 처리하는 장면이나 에바 5호기와 신 파일럿, 느부갓네살의 열쇠, 중간의 레이가 신지와 겐도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 등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정점에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지오프론트 교전이 존재하는데, 사실상 그 자리에서 "끝!"이라고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를 몰아놓고서는 하늘에서 카오루가 내려오면서 의미심장한 대사를 날리고는 서드 임펙트를 막는 장면은 충분히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들을 벙찌게 만들정도로 충격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카오루의 등장 포인트나 마지막 지오프론트에서의 결전 등은 TV원작의 스토리 노선을 완전히 벗어난 부분이었죠. 어찌보면, 신 극장판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팬들이 기대한 것은 이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3.

이러한 극장판 파의 급격한 변화점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원작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그리고 원작과 파의 차이점을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파가 어떤 작품을 지향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이제는 전설이 된 에반게리온 원작 TV판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죠. 우리가 이미 익히 아는데로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이제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뛰어난 심리묘사, 뒤틀린 슈퍼 로봇물의 클리셰, 모호하고도 복잡한 상징체계 등등...에바의 특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엄청나게 많습니다만, 이들을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코드는 주인공 이카리 신지라는 소년의 성장입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신지가 에바 초호기에 타면서 생기는 다양한 사건과 인간관계, 좌절, 희망, 절망, 극복 등의 과정을 통해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높은 완성도로 묘사하였고, 이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신지의 분노가 마치 나의 분노처럼 느껴졌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감응을 이끌어냅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야기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바로 이야기의 네러티브가 총 두개라는 점입니다. 하나는 신지와 아스카, 레이, 그리고 그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과 사건이고, 또다른 하나는 아이들에 대한 제레, 겐도, 네르프 등의 어른들의 완성된 음모입니다. 아이들은 행복해지고 싶지만, 어른들의 음모와 짜여진 이야기에 부딪히고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큰 음모에 대해서 순응하거나(레이), 그 속에서 행복을 찾거나(아스카), 혹은 방황하며 반항하는(신지)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아이들은 조금씩 어른이 되갑니다. 이러한 정해진 이야기, 답답한 세계 속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의 노력과 좌절을 뛰어난 심리묘사를 통해 드러내었고, 그리고 전반적으로 암울하면서 정적인 분위기를 지향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그 케릭터의 고뇌를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서드 임펙트(낡은 생명체, 즉 구세대, 어른은 멸망하고 새로운 아이들의 세계가 열린다), 어머니와 오이디푸스 콤플랙스(에바 초호기와 겐도, 그리고 신지), 인공양수와 인공자궁(LCL과 엔트리 플러그), 에반게리온(Evangelion, 복음을 전도하는 자, 어떤 복음을?), 사도, 사해 문서, 리리스, 아담 등의 기독교 상징체제를 이야기 네러티브에 유기적으로 잘 활용하였고, 결과적으로 작품에 깊이가 있어보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 TV판 자체의 결말은 예산 부족으로 인해 상당히 난감(?)하면서 성급한 결말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가이낙스는 에바의 후폭풍을 이용해서 훗날 진정한 결말이라 주장하면서 만든 등장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내놓게 됩니다. 화려한 비주얼, 나름대로의 납득이 될만한 결말을 내리는데 성공을 하나, 역시 대부분의 이야기의 복선은 회수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모르겠다'라는 팬들의 원성 및 비난을 사게 되었죠. 그리고 이제 시간은 흘러 新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등장하게 됩니다.

4.

破는 이러한 기존의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뒤트는 결정적인 터닝포인트입니다. 그 중 가장 특이하다 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기존의 두 개의 네러티브-어른과 아이의 이야기-의 관계가 변화하게 되죠. 즉, 기존의 에반게리온에서는 '어른의 음모에 의해서 행복해질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종속된 이야기 구조 형태가 종속되었지만 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는 레이, 아스카, 그리고-특히-신지의 행동과 심리묘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레이가 신지와 겐도를 이어주기 위해서 식사 준비를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던가, 아스카가 에바 이외의 타인에게 신경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 등 케릭터들의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이 두 케릭터들이 기존의 어른들의 시스템 내에서 종속되거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변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누군가 행복해지길 기원한다는 점은 전작에 비해 큰 변화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은 과거의 감정의 모호성, 정적인 구도, 사이코 드라마 등의 요소가 아닌 적극적인 대처와 감정 교류를 보여주어서 오히려 예전의 작품보다 시원시원 해진 느낌을 주죠.

특히 이는 신지의 케릭터 변화는 위의 두 케릭터 보다 더 극적이고, 에바 파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일단 기존의 TV판에 비해서 케릭터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자기 감정을 표출합니다. 또한 분노의 표현 강도 또한 상당히 올라가는데, 원작에서 출연비중이 적었던 토우지가 아닌 중요 케릭터라 할 수 있는 아스카가 3호기 테스트 파일럿이 되고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관객에게 큰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신지가 표현하는 분노를 원작에 비해 역동적(아버지 같은거 죽어버려! 라던가...)으로 표현하여 신지가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관객들에게 납득시킵니다. 특히 극중 클라이맥스 부분인 제르엘-통칭, 휴지사도-과 초호기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신지가 '모두'를 구하는 것이 아닌 '레이'라는 특정한 인물을 구하기 위해서 초호기를 타는 점-미사토의 표현대로, "모두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에바에 타고 싸우는 것"-이나 제르엘과의 전투에서 밀리자 방어기제로서 초호기가 폭주하는 것-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과보호-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플러그 심도를 높여서 레이를 구하는 모습은 신지가 이미 원작에서의 수동적인 모습이 아닌 적극적이며 반항적인 케릭터로 변모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에바 파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어른들이 준비한 각본-제레의 인류보완계획이나 겐도의 계획-이 아닌 자신들의 행복을 찾아서 자립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에바를 통해서 묶여졌지만, 에바가 주된 것이 아닌 에바 바깥에서 찾게 되고, 그리고 거기서 에바는 아이들의 분신이자 도구가 됩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신지는 자신의 의지로 서서 행복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어른들의 각본을 깨뜨리고 서드 임펙트, 즉 신세대의 강림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파는 그러한 결말이 아닌 기막힌 반전, 갑작스러운 카오루의 등장과 기존 에반게리온 스토리의 붕괴를 불러 일으키고 이야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끕니다.

5.

에반게리온 파는 신 극장판의 방향성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에반게리온과 다른 이야기를 선택함으로서 기존의 작품을 떠나 새로운 작품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야기의 구도, 다른 디테일과 세계관, 하지만 거대한 틀에서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이 기묘한 상황을 과연 Q나 결에서 어떤 식으로 마무리 지을 것인가, 그리고 과연 이번에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물론, 이미 파에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전환을 보여주었기에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6.

결론적으로 이번 작품은 신 극장판 다운 기존 작품에 대한 재해석 및 이야기 구조의 변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며, 기본적으로 조금 미묘한 전작에 비해서 더 극장판 스러워진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기존의 에반게리온을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신 극장판 역시 기대할만한 물건이 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작품으로서의 신 극장판에 대한 판단은 좀더 유보하고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덧.분명히....페트레이버 2기 극장판 리뷰가 순서상 먼저 아니었나?

덧.다시보면서 느낀것이지만....신지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더군요. 사실 어렸을 때, 아버지란 인간이 아들을 갔다 버리다시피하고, 겨우 거기서 벗어나서 멀쩡하게 중학교 다니는 놈을 갑자기 끌고 와서는 로봇인지 인간인지 햇갈리는 물건에 태우고 '니가 안타면 세계는 좆ㅋ망ㅋ'이라고 협박하면 부처나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에야 다들 찌질거릴 수 밖에 없을거 같습니다. 게다가 자기손으로 친구를 죽일뻔한 경험까지 하면 '아버지 같은거 죽어버려!'라고 외칠 수도....하여간 요즘 보면서 느낀점은 신지가 찌질한게 아니라 주위 상황이 존나 캐막장이구나...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만화 원작의 이준익 감독의 신작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준익 감독의 팬이면서 동시에 원작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이 작품에 대해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오늘에야 그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네요.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먼저 원작은 임진왜란과 정여립 모반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 군상의 만남과 해어짐, 그리고 자유롭게 사는 것,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라는 핵심 문구 아래서 세상도 차별도 과거도 모든 것을 초월한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작 자체가 분량이 상당하다는 것과 각도에 따라서 핵심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죠. 물론 이준익 감독이 좋아하는 감독이긴 하지만, 원작이 원작인 만큼 과연 감독이 모든 것을 커버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죠.

 일단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이준익 감독은 원작에서 몇몇 케릭터와 컨셉을 차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였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팬으로서도 만족스러웠고, 원작의 팬으로서도 납득가능한 작품이었죠. 일단 이준익 감독은 영화의 핵심 소제를 '정치'로 규정합니다. 임진왜란 전에 혼란스러운 상황, 서로 갈라져서 싸우기만 하는 조정, 서얼 차별과 불평등한 세상, 뜻있는 자는 핍박받고 역적으로 몰리는 부조리 등등을 통해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왕의 남자에서부터 님은 먼곳에 까지-과 다른 정치적인 냉소주의에 가득찬 시선을 영화 전반에 걸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냉소주의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준익 감독의 데뷔작 '황산벌'에서 아주 강하게 드러나기도 했죠. 이게 왜 냉소가 가득한 블랙 코미디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는데, 역사에 따르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 삼천 결사대는 전멸 하였고, 그러한 역사적인 전제 아래에서 백제-신라군의 소풍과도 같은 초반 탐색전과 김유신의 계략에 의한 후반의 전투 장면의 대비는 정치가와 지배계급에 대한 혐오와 냉소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인간을 장기말로 두고 장기를 두는 것이죠.

 뭐 하여간, 이준익 감독에 대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사실 따지고 본다면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닙니다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러한 정치적 냉소주의의 확대 재생산의 결과물입니다. 그러한 결과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텅빈 경복궁 근정전에서 견자와 이몽학이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왜군은 경복궁으로 밀려들어오고, 스승, 동료, 백성, 그리고 자신을 이끄는 추종자와 이상을 버리면서까지 무능한 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한 이몽학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이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씁쓸함과 허무감을 안겨줍니다. 이 장면에서 이몽학 역을 맡은 차승원은 현실을 버리고 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열연을 통해서 꿈에 미쳐서 산 자가 결국 꿈에서 깨어 그 꿈의 허무함을 깨닫는 자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황처사의 마지막 유언이자 이 영화의 주제인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 나오게 됩니다. 지는 해(썩어빠진 왕조)를 쫒는 것이 아닌, 구름에 가렸어도 그곳에 존재하는 달(현실, 민중 등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 가능합니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주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원작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구에서 새로운 구조를 도출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작품이지만,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원작에 비해 견자의 케릭터 자체가 개연성과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며(이게 큰 문제인데 배우의 연기가 떨어진다기 보다는 이 케릭터로 인해서 영화에 큰 구멍이 뚤렸다는 느낌), 원작을 아는 사람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수준의 원작훼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단점들을 영화는 황정민의 맹인 검객 황정학 연기로 커버 합니다. 원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케릭터인 황처사를 황정민이 훌륭하게 표현하였는데, 능청스럽고 희극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그 속에 진득한 페이소스를 갖고 있는 복잡한 케릭터를 연기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황정민의 검술 연기는 정말이지 '한국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이 영화의 최고의 하이라이트 입니다.

 비교를 해보죠. 일본의 유명 맹인 검객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토이치'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빠르면서 호쾌한 칼놀림을 통해서 직선적이며 강렬한 느낌을 심어주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황처사의 칼놀림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유연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능청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근래 한국 영화에서 보았던 액션 장면 중 가장 멋있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결론을 내리자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전형적인 이준익 감독 영화입니다. 특유의 페이소스와 현실에 대한 냉소, 하지만 삶에 대한 따듯한 시선(논쟁의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등은 이준익 감독의 특징이죠. 하지만 그런 닳고 닳은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똑같은 구조, 똑같은 플룻, 똑같은 케릭터지만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진득한 그 무언가죠.(저는 페이소스라고 표현합니다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도 그러한 이준익표 영화 중 하나이며,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서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영화라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덧.이 영화의 최고 명대사는 황처사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이지만
영화 중에서 가장 임펙트 있는, 아니 올해 영화중에서 이 이상의 임펙트를 줄 대사가 없다고
단언코 이야기 할 수 있는 대사가 바로
선조의 '가자'.
아니, 이건 보면 올해 영화 최고의 명대사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관계없는 짤방입니다.)



패트레이버 극장판 1기 및 2기 소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1기와 2기는 각각 1990년과 1993년에 개봉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TV판의 극장판입니다. 1기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많은 팬들에게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2기 같은 경우에는 호불호가 심각하게 갈리는(정확하게는 이것이 과연 페트레이버인가 아닌가를 두고) 작품이 되었죠. 그외에는 원작 만화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만든 세번째 작품인 폐기물 13호가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평가에서 상당한 괴작으로 취급받습니다. 물론 저 자신 역시 폐기물 13호는 상당히 괴한 센스를 지닌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뭐, 폐기물 13호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중심으로 칼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패트레이버 1기 극장판-이것이 바로 패트레이버다.

1990년에 만들어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TV판 및 OVA 버전의 페트레이버를 총집대성한 작품입니다. 알 수없는 레이버들의 폭주와 천재 프로그래머의 자살, 다가오는 위협과 특차 2과 2소대의 활약은 기본적으로 원 페트레이버 시리즈의 확장입니다. 특히 초반 도입부의 군용 폭주 레이버를 막는 장면이나 폭주 레이버가 빈민가를 때려부수면서 돌진하는 장면 등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버블 경기 막바지의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그려진 화려한 작화, 그 자체입니다. 이 덕분에 페트레이버 1기 극장판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팬들에게서 사랑 받고 있죠.

물론 1기가 기존의 페트레이버 시리즈와는 다른 부분도 다수 존재합니다. 먼저 원작에 없었던 상징 체계와 독특한 도입힌 직품입니다. 성서의 바벨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1기 극장판은 바벨과 천재 프로그래머 에바 호이치의 별명 에호바(히브리어로 신의 이름을 지칭하는 여호와, 야훼, 야후 등 중에서 여호와를 지칭하는 듯합니다.)라는 상징을 통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바벨이라는 붉은 글자를 내보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HOS나 클라이맥스 부분의 까마귀와 갈매기 장면의 연출 등은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하죠. 또한 시작부에서 자살한 에바 호이치가 존재감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점 역시 훌륭합니다.

이는 오시이 마모루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바로 '그' 공각기동대를 만든 감독으로 유명하고, 특유의 무거운 연출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전매 특허이긴 했지만 공각기동대 이전까지는 우르세이 야츠라(국내 번역 '시끌별 녀석들')나 패트레이버 구 OVA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개그 센스로 유명한 감독이었으니까요. 물론 오시이 마모루 자체가 sf영화 감독 지망생이었다는 점이나, 영화 붉은 안경 등의 케르베로스 연작 등에서 공각기동대의 원형을 어느정도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제 구체화 되고 완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 1기 극장판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시이 감독의 2기 극장판은 패트레이버가 아닌 공각기동대에 가까운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런 의미에서 패트레이버 1기 극장판은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감각과 대중성이 작절한 접점을 만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 작품이 대부분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의 연출과 패트레이버 특유의 완성도 높은 일상 개그 부분과 드라마, 케릭터들이 적정 수준으로 섞이게 되면서 작품으로서 무게도 있고 재미도 있는 두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작품이죠. 사실, 이후의 2기 극장판 같은 경우에는 거의 오시이 마모루 취향의 작품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패트레이버 라는 이름을 붙이기 좀 껄끄럽기도 합니다. 뭐, 저 같은 경우에는 어느정도 이에 대해서 변명(?)을 해주려 합니다만, 기본적인 입장은 역시 패트레이버 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겁니다.

그외 특이한 사항은 극장판 1기는 원작에 비해서 상당히 비장하다는 점입니다. 뭐, 2기는 더 심각하지만 1기도 보면 2과 전체의 목숨을 걸고,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로 방주를 때려 부수는 장면은 원작에 비해 비장미가 넘쳐흐릅니다. 원작도 2과 2소대라는 곳 자체가 경찰 내에서도 겉돌면서 권력의 한지라는 점 덕분에 제도를 뛰어넘는 행위를 상당히 많이 하기도 합니다만, 극장판은 아예 내놓은 자식, 버린 장기말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2과 2소대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싶은 부분입니다.

뭐, 결론적으로 패트레이버 극장판 1기는 80년대 말에 쏟아져 나온 명작 극장판 중에 하나이고,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여기서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기 극장판 역시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만, 오히려 이는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아닌 작품으로서 판단했을 때 입니다. 또한, 2기 극장판은 훌륭한 부분도 많지만, 패트레이버 라고 부르기에는 껄끄러운 부분도 많기 때문에 팬으로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한 둘이 아니죠.

그러한 이야기들은 다음 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기본적으로 야구란 스포츠는 다른 스포츠들과 달리 힘이나 육체적 능력보다 '머리'를 굴리는 게임입니다. 타자와 투수의 볼카운트를 통한 심리전, 복잡한 수비체계 및 공격체계 등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서 선수나 감독들의 전략이나 생각이 들어서기 쉬운 구조를 취하고 있죠. 단순하게 팀워크나 선수 개개인의 능력에 많은 부분 의존하는 축구나 미식축구 등의 운동과는 많은 차이가 나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인 것입니다.

원아웃은 바로 야구의 심리전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작품입니다. 사실 야구 만화가 점점 무협지(?)화 되어가는 추세를 고려하자면, 원아웃도 천재 승부가 토구치 토아의 원맨 쇼에 가까운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야구 만화와 다른 점은 토아의 능력이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심리전적인 측면에 강하다는 겁니다. 시속 120km, 구질은 오로지 직구 밖에 던지지 못하는 토아가 어떻게 신체적으로 뛰어난 다른 선수들과 팀을 제압하는가가 바로 이 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죠.

그런 분야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원아웃은 상당히 성공한 작품입니다. 일반적인 야구 만화들이 '적이 빠른 공을 던진다.'->'나는 더 빠른 공을 던진다.'라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게 됨으로써 작품의 진행이 무뎌지고, 이야기가 단순화되는 문제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원아웃은 '적이 빠른 공을 던진다.'->'적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허를 찌른다.'라는 이야기 구조를 취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진행은 긴장감을 갖게 되고 독자는 뒷이야기를 기대하기 됩니다.

또한 원아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 규칙의 헛점을 이용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폭우 콜드 게임, 대주자 시스템, 원포인트 릴리프 시스템, 선수가 오너인 구단, 성과급 제도 등 평상시 야구에서는 보기 힘든 상황을 자주 연출합니다. 이로 인해 원아웃은 이야기 전개를 상상하지도 못한 부분으로 이끌게 되죠. 이러한 튀는 이야기가 작품 내에서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묘미입니다.

원아웃은 매드하우스에 의해서 애니화되었는데, 만화에 비해서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토구치 토아의 성우가 상당히 여린 목소리의 선으로 연기를 합니다. 사실 토아라는 캐릭터 자체가 갖는 옴므파탈 적인 카리스마가 이로 인해서 상당부분 깎여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연출이나 작화 상태는 상당히 뛰어나기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만, 가장 큰 문제는 애니메이션 자체가 만화의 최고 클라이맥스의 전부분에서 끝났다는 겁니다. 사실 작품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블루 마즈의 트릭 스타디움 이후라고 할 수 있기에, 애니메이션은 원작을 반토막 내버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원아웃은 근래 나온 야구 만화 중에서는 발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야구 만화장르가 걸어온 클리셰를 한번에 뒤집어 버린 통쾌한 작품으로 야구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필히 감상하셔야할 작품이라 단연코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애니메이션 신선조 동란 편(애니메이션 기준 105화)까지 감상한 후에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 이 검, 이 녀석이 날을 세우는 범위가 내 나라다!"


 잘 만든 코미디 작품은 찾기 어렵습니다. 잘 만든 코미디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서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페이소스를 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재미와 웃음을 동시에 잡는 것은 코미디 장르에 있어서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단순히 웃기는 것과 웃기는 것을 통해서 슬픔, 감동, 비애 등의 웃음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일본 점프에서 연재중인 '은혼'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먼저 장르 구분에서부터 그 모호성을 자랑하는 '은혼'은 진지한 내용에서부터 개그, 성적 유머, 서브 컬처 페러디까지 상당히 넓은 폭의 장르를 포섭합니다. 원래 은혼 장르를 구분할 때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SF 시트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나, 정작 애니메이션 내부의 개그나 이야기 흐름 자체는 일본 특유의 만담 개그쪽에 가깝기 때문에 사실상 장르를 구분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은혼은 편하게 장르 구분하지 않고 '은혼'이란 특별한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혼 작품은 크게 진지한 부분과 개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일단 은혼은 '코미디' 치고는 상당히 진지한 부분의 비중이 높습니다. 작품에서 굵직한 에피소드들은 물론이고, 짧은 단편 에피소드에서도 진지한 코드를 집어넣을 떄가 많습니다. 또한 은혼은 개그 요소로 망가지는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것을 주된 포인트로 삼죠. 사실 은혼에 나오는 케릭터들은 그냥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인생의 밑바닥을 기거나, 정신 세계가 글러먹은 인간들뿐입니다. 즉, 은혼의 개그는 일상 생활과 그들의 막장같은 생활 사이의 갭을 보여줌으로서 생기는 웃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막장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진지한 이야기를 진행 시킬 수 있을까요? 물론 망가진 인간들이지만, 중요한 시기에는 '180도 사람이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전개하죠. 하지만, 그러한 전제만으로 '과연 두 가지 극단적으로 상반된 요소를 혼합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는가?' 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죠. 그리고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인물에게 깊이를 부여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죠.

 은혼 최고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개그 파트와 진지한 파트 사이의 전환이 대단히 매끄럽다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 유머를 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이야기를 하거나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멋진 대사를 날릴 때 분위기 전환이 대단히 매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드러운 전개를 통해 완성도 높은 인물를을 만드는데 성공하죠. 특히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사카타 긴토키 같은 경우 인물 자체가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락으로 빠지지만 동시에 작품 내에서 인상적인 명대사들과 명장면들을 그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묘한 깊이를 갖고 있는 케릭터입니다. 다른 케릭터들도 긴토키에 비하면 덜하지만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죠.

 또한 이러한 개그-진지 전환의 매끄러움은 작품이 질리지 않게 만듭니다. 진지함 일색 또는 개그 일색으로 작품이 흘러가게 되면, 작품 자체가 긴장감을 잃게 되고 물리게 되기 쉽습니다. 은혼 같은 경우, 개그-진지 전환이 대단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지기 떄문에, 감상자로 하여금 '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긴장감을 갖게 만듭니다. 또한 작품 역시 감상자의 기대에 많은 부분 부응하는 편이구요. 덕분에, 작품은 감상자를 질리게 만들지 않습니다.

 작품은 많은 부분 일본 서브 컬처에서 개그 요소를 따왔습니다.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일히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지만, 애니메이션 판을 기준으로 80년대를 풍미한 작품 '아키라'에서 나온 위성병기 'SOL'(여기서는 ストーカー・おしおき・レーザー, 대 스토커 결전 레이저 병기), 일본 내 최고의 온라인 게임 몬스터 헌터의 패러디인 몽키 헌터(몬스터 헌터-モンスタ ハンタ 줄여서 モンハン, 몽키헌터-モンキ ハンタ 줄여서 モンハン), DMC의 원형인 세카이마츠, 푸콘 가족, 에반게리온, 드래곤 퀘스트, 건담,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 심지어 로드리게스 감독의 신시티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에일리언 대 야쿠자), 아이 로봇 등의 영미권 대중문화까지 방대한 양의 대중문화들을 패러디 대상으로 삼습니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은혼은 애니메이션도 엄청납니다. 혹자는 '원작자와 같은 테이스트의 제작자들이 모여서 작품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죠. 실제로 은혼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애니메이션 치고 상당히 실험적인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형식과 경계, 그리고 표현의 수위를 갖고 노는 작품입니다. 원래 만화 '은혼' 자체도 상당히 성인 취향의 작품이었지만, 애니메이션도 이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일반적인 TVA에서 보기 힘든 성인 취향의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내보냈습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내에서 부족한 제작비 및 PTA(한국 YMCA 같은 집단으로 쉽게 이야기 하자면 대중문화의 '적')에서 까인 이야기, 골든 타임에서 밀려난 이야기 까지 애니메이션 외적인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다룹니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 '은혼'은 '막나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막나가는 제작진들의 모습이 원작과 부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게다가 장기 연재작의 고질적인 문제인 작붕 현상도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장기 에피소드에서는 엄청나게 작화의 질이 올라가는(물론 2쿨 짜리 작품이나 본즈 같은 것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점은 상당히 높게 평가할 부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혼은 상당히 괜찮은 작품입니다. 사실, 작품의 각각 요소는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뭉치고 보니 결과물이 상당합니다. 원래 연재하는 작품은 리뷰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제가 작품에 매혹되서 리뷰를 쓸 정도니까요.(물론 각각의 에피소드가 작품 성격을 모두 반영하기 때문에 연재 종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어느정도 요소로 작용했지만) 은혼은 작가가 일주일에 6일을 스토리 구상에 전념하고, 단 하루 동안에 그림을 몰아쳐서 그린다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중시한 작품입니다. 결과물이 코미디 작품 치고는 감동과 개그를 둘다 잡은 작품이고, 봐서 후회는 하지 않을 작품이라는 것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네요. 



     
   
덧.뭐, 위에서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초반부는 별로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3권~4권 이후,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20화 전후로 
이야기나 특히 개그 부분의 완성도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첫 장편 에피소드인 '우미보우즈' 편(애니 기준 40~41) 부터는
꾸준하게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감상을 하실 분들은 '우미보우즈' 편까지는 버티면서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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