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애니메이션 신선조 동란 편(애니메이션 기준 105화)까지 감상한 후에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 이 검, 이 녀석이 날을 세우는 범위가 내 나라다!"


 잘 만든 코미디 작품은 찾기 어렵습니다. 잘 만든 코미디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서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페이소스를 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재미와 웃음을 동시에 잡는 것은 코미디 장르에 있어서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단순히 웃기는 것과 웃기는 것을 통해서 슬픔, 감동, 비애 등의 웃음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일본 점프에서 연재중인 '은혼'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먼저 장르 구분에서부터 그 모호성을 자랑하는 '은혼'은 진지한 내용에서부터 개그, 성적 유머, 서브 컬처 페러디까지 상당히 넓은 폭의 장르를 포섭합니다. 원래 은혼 장르를 구분할 때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SF 시트콤'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나, 정작 애니메이션 내부의 개그나 이야기 흐름 자체는 일본 특유의 만담 개그쪽에 가깝기 때문에 사실상 장르를 구분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은혼은 편하게 장르 구분하지 않고 '은혼'이란 특별한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혼 작품은 크게 진지한 부분과 개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일단 은혼은 '코미디' 치고는 상당히 진지한 부분의 비중이 높습니다. 작품에서 굵직한 에피소드들은 물론이고, 짧은 단편 에피소드에서도 진지한 코드를 집어넣을 떄가 많습니다. 또한 은혼은 개그 요소로 망가지는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것을 주된 포인트로 삼죠. 사실 은혼에 나오는 케릭터들은 그냥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인생의 밑바닥을 기거나, 정신 세계가 글러먹은 인간들뿐입니다. 즉, 은혼의 개그는 일상 생활과 그들의 막장같은 생활 사이의 갭을 보여줌으로서 생기는 웃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막장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진지한 이야기를 진행 시킬 수 있을까요? 물론 망가진 인간들이지만, 중요한 시기에는 '180도 사람이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전개하죠. 하지만, 그러한 전제만으로 '과연 두 가지 극단적으로 상반된 요소를 혼합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는가?' 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죠. 그리고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망가진 인물에게 깊이를 부여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죠.

 은혼 최고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개그 파트와 진지한 파트 사이의 전환이 대단히 매끄럽다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 유머를 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이야기를 하거나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멋진 대사를 날릴 때 분위기 전환이 대단히 매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드러운 전개를 통해 완성도 높은 인물를을 만드는데 성공하죠. 특히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사카타 긴토키 같은 경우 인물 자체가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락으로 빠지지만 동시에 작품 내에서 인상적인 명대사들과 명장면들을 그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묘한 깊이를 갖고 있는 케릭터입니다. 다른 케릭터들도 긴토키에 비하면 덜하지만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죠.

 또한 이러한 개그-진지 전환의 매끄러움은 작품이 질리지 않게 만듭니다. 진지함 일색 또는 개그 일색으로 작품이 흘러가게 되면, 작품 자체가 긴장감을 잃게 되고 물리게 되기 쉽습니다. 은혼 같은 경우, 개그-진지 전환이 대단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지기 떄문에, 감상자로 하여금 '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긴장감을 갖게 만듭니다. 또한 작품 역시 감상자의 기대에 많은 부분 부응하는 편이구요. 덕분에, 작품은 감상자를 질리게 만들지 않습니다.

 작품은 많은 부분 일본 서브 컬처에서 개그 요소를 따왔습니다.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일히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지만, 애니메이션 판을 기준으로 80년대를 풍미한 작품 '아키라'에서 나온 위성병기 'SOL'(여기서는 ストーカー・おしおき・レーザー, 대 스토커 결전 레이저 병기), 일본 내 최고의 온라인 게임 몬스터 헌터의 패러디인 몽키 헌터(몬스터 헌터-モンスタ ハンタ 줄여서 モンハン, 몽키헌터-モンキ ハンタ 줄여서 モンハン), DMC의 원형인 세카이마츠, 푸콘 가족, 에반게리온, 드래곤 퀘스트, 건담,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 심지어 로드리게스 감독의 신시티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에일리언 대 야쿠자), 아이 로봇 등의 영미권 대중문화까지 방대한 양의 대중문화들을 패러디 대상으로 삼습니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은혼은 애니메이션도 엄청납니다. 혹자는 '원작자와 같은 테이스트의 제작자들이 모여서 작품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죠. 실제로 은혼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애니메이션 치고 상당히 실험적인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형식과 경계, 그리고 표현의 수위를 갖고 노는 작품입니다. 원래 만화 '은혼' 자체도 상당히 성인 취향의 작품이었지만, 애니메이션도 이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일반적인 TVA에서 보기 힘든 성인 취향의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내보냈습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내에서 부족한 제작비 및 PTA(한국 YMCA 같은 집단으로 쉽게 이야기 하자면 대중문화의 '적')에서 까인 이야기, 골든 타임에서 밀려난 이야기 까지 애니메이션 외적인 부분까지 거리낌 없이 다룹니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 '은혼'은 '막나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막나가는 제작진들의 모습이 원작과 부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게다가 장기 연재작의 고질적인 문제인 작붕 현상도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장기 에피소드에서는 엄청나게 작화의 질이 올라가는(물론 2쿨 짜리 작품이나 본즈 같은 것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점은 상당히 높게 평가할 부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혼은 상당히 괜찮은 작품입니다. 사실, 작품의 각각 요소는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뭉치고 보니 결과물이 상당합니다. 원래 연재하는 작품은 리뷰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제가 작품에 매혹되서 리뷰를 쓸 정도니까요.(물론 각각의 에피소드가 작품 성격을 모두 반영하기 때문에 연재 종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어느정도 요소로 작용했지만) 은혼은 작가가 일주일에 6일을 스토리 구상에 전념하고, 단 하루 동안에 그림을 몰아쳐서 그린다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중시한 작품입니다. 결과물이 코미디 작품 치고는 감동과 개그를 둘다 잡은 작품이고, 봐서 후회는 하지 않을 작품이라는 것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네요. 



     
   
덧.뭐, 위에서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초반부는 별로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3권~4권 이후,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20화 전후로 
이야기나 특히 개그 부분의 완성도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첫 장편 에피소드인 '우미보우즈' 편(애니 기준 40~41) 부터는
꾸준하게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감상을 하실 분들은 '우미보우즈' 편까지는 버티면서 감상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