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유령이란 무엇일까?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 어쩌면 순간의 고통...죽은 것도 어떤건 산 것처럼 보인다. 조만간 감정이 정지된다. 빛바랜 사진처럼. 호박 안의 벌레처럼.




주인공 소년이 스페인 내전 중 고아원에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이 고아원에서 지내던 소년인 '산티'의 유령을 보게 되면서 산티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 친구들과 힘을 합해 그 복수한다는 이야기. 1936년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인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스페인. 공화주의자를 부모로 둔 10살의 카를로스는 산타루치아의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유년 시절에 누구나 가졌던 무서운 기억들이 커서도 반복된다는 호러 드라마.(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블레이드 2, 퍼시픽 림, 헬보이 1과 2로 대중들에게 유명한 기예모르 델 토로의 커리어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극단적이다. 그는 헐리웃에서 서브컬처적 망상이 가득한 창작물들(거대 괴수 vs 거대 로봇, 크리처물, 온갖 요정과 악마가 현대사회에서 활개치는 이야기라던가)이었다면 그가 헐리우드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은 그런 그의 망상의 실현에서부터 뭔가 벗어나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벰파이어와 영생의 이야기를 노인의 젊음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하여 만들어낸 기괴한 판타지 영화 크로노스라던가, 스페인 내전의 경험과 한 여자아이의 환상을 모자이크처럼 짜집기 해서 슬프고도 아름다우며 잔혹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판의 미로라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 악마의 등뼈까지. 


유념해야할 것은, 악마의 등뼈는 전통적인 호러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카를로스가 도착한 이후 고아원 내부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산티의 유령은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호러영화라기 보다는 유령이 나오는 판타지 영화라고 이해하고 영화를 접근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적절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과 소녀의 환상 사이에서 명확한 알레고리를 보여주었던 판의 미로와 다르게, 악마의 등뼈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쟁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환상을 구축하였던 판의 미로와 다르게, 악마의 등뼈는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군상들과 고아원에서 음울하게 떠도는 망령에 초점을 맞춘다. 악마의 등뼈에 있어서 스페인 내전이란 하나의 풍경, 영화 내의 고아원 마당에 떨어진 불발탄과 같은 위치다. 그것은 영화 내에서 어떠한 사건도 일으키지 않지만(체호프의 총과 다르게 불발탄은 끝까지 터지지 않는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을 압박한다. 아이들은 그 폭탄이 살아있다고 믿으며 동시에 불발탄이 떨어진 그 날 밤, 산티가 죽었다는 사실은 스페인 내전과 산티의 죽음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더라도 일종의 묘한 복선과 은유가 깔려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악마의 등뼈는 작고 고립된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는 스페인 내전 바깥에서, 스페인 내전의 축소판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카사레스와 카르멘, 그리고 하킨토 사이의 삼각관계(플라토닉적 사랑과 에로스적인 육욕의 관계), 고아원에서 자라서 고아원을 떠나고 싶어하는 하킨토, 카를로스와 하이메가 서로 친해지는 과정, 산티의 유령에 대한 소문을 다루는 방식 등등 영화는 조근조근하게 드라마를 풀어나간다. 영화는 이들의 '인간적인' 이야기와 케릭터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심지어 이 영화에 있어서 모든 원흉이자 만악의 근원인 하킨토 마저도 그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씁쓸한 케릭터로(고아원이 불탄 폐허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고는 공모자들에게 그 추억을 이야기하는 모습이라던가)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적인 드라마 속에서 과연 '유령'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영화 중, 카를로스가 고아원에서 유령을 본것 같다고 하자 카사레스가 자신은 과학적인 사람이며 스페인은 미신에 가득차있고 유럽은 영혼의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카를로스에게 이야기한다. 결국 괴물(=유령)이란 그런 공포에서 보게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카사레스는 사산된 아이로 만든 럼주 '악마의 등뼈'를 보여주면서 이런 괴물의 진실이란, 결국은 빈곤, 질병들처럼 현실적인 것들이 깔려있다 라고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그리고 카사레스는 이게 정력에 좋다고 하면서 그걸 마신다. 으...) 즉, 카사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유령이란 인간의 공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고아원에 산티라는 유령은 실존하며, 카사레스가 마지막에 발기부전에 좋다면서 악마의 등뼈를 마시는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그 역시도 그런 민간요법적인 '미신'을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는 산티의 유령을 묘사하는 모습에서 유령의 존재의의를 규정한다. 산티는 다른 영화의 유령들처럼 적극적으로 희생자를 찾아 돌아다니거나 자신이 죽은 원한을 애꿎은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아원 내에 존재하는 풍경처럼(마치 마당의 불발탄 같이) 고아원을 떠돌 뿐이다. 불발탄과 함께 고아원에 나타난 풍경인 산티의 유령은 스페인 내전이 남긴 상흔이자 잊혀져버린 진실(하킨토에 의해서 살해당한)에 대한 고발의 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까지,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주기전까지 그들은 거기 하나의 풍경처럼 음울하게 떠돌뿐이다. 첫 인트로이자 마지막 엔딩에서 유령이 된 카사레스의 고백처럼, 스페인 내전 속에서 죽어버린 사람들, 빛바렌 사진처럼 감정이 정지되고 떠돌 수 밖에 없어진 기억들이 유령이 되어 산 자들을 마주한다. 이는 산티의 유령의 이미지에서도 두드러지는데, 기존의 소복입고 창백하게 돌아다니는 유령이 아닌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질감(산티는 살해당한 뒤 물에 수장되었다)과 창백하다기 보다는 빛바렌 사진과도 같은 색감은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음울한 이미지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금괴를 노린 하킨토가 고아원에 불을 지르고, 그 결과 카르멘과 카사레스가 죽자 남은 아이들은 힘을 모아 하킨토를 물리치고 산티에게 하킨토를 건내준다(정확하게는 하킨토가 산티를 수장한 웅덩이에 하킨토를 빠뜨린다) 이는 유령을 향한 일종의 장례제의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 내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배경인 고아원(동시에 불발탄이라는 스페인 내전이 풍경으로서 고아원을 지배하고 있는)에서 스페인 내전과 함께 생겨난 상흔들(불발탄과 함꼐 나타난 유령), 그리고 전쟁의 거대담론에 매몰된 이야기가 아닌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영화는 거대한 이야기들로 인해서 사라진 소소한 이야기들을 복권시키고 그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할 기회를 제공하고 유령과 화해하기를 희망한다.


영화 악마의 등뼈는 그런 의미에서 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애잔한 동시에 음울하며 아름답다. 그리고 단 한명의 케릭터도 무의미하게 낭비되거나 소비되지 않으며, 이야기는 조밀하게 구성되어 잔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끝까지 흡입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예모르 델 토로가 헐리웃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이야말로 델 토로를 대표하는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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