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는 그의 대표작들과 비교해서 봤을 때,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스캐너스는 브루드가 보여주었던 크로넨버그의 가능성이나, 비디오드롬이 보여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인간 종말론, 폭력의 역사나 이스턴 프라미스의 폭력과 인간의 관계론에는 한참 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스캐너스의 이야기는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그저그런 B급 SF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평범한 B급 SF영화를 그의 일관된 표현방법과 독특한 설정을 통해 장르영화의 진부함을 뛰어넘는 독특한 영화로 승화시킨다. 


사실, 스캐너스의 이야기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부하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여기에 하나의 설정을 추가한다. 보통 초능력자들이 사람의 정신을 ‘읽거나’ ‘조종’한다는 설정들은 대단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대단히 편리한 능력(?)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무한 일종의 결과론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데, 스캐너스는 이 과정에 대해서 재밌는 설정을 부여한다. 초능력자인 스캐너스가 자신의 뇌와 신경 시스템을 다른 인간의 시스템에 덧씌운다는 이 기묘한 설정은 크로넨버그가 그의 작품 세계에서 끝없이 추구한 인간과 이물의 결합과 맥락을 함께한다고도 볼 수 있다.


크로넨버그는 이 마인드 콘트롤의 과정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형태로 폭력적으로 묘사한다. 스캐너들이 타인의 정신에 융합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도 기괴하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저음의 BGM과 발작을 일으키는 듯한 모습의 스캐너, 그리고 피를 흘리거나 구토를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상대방의 묘사 등등은 타인과 나의 결합이라는 기괴한 설정을 잘 살려낸다.


혹자는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에 대해서 ‘폭력과 섹스’ 그 자체라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에 비추어본다면 스캐너스라는 영화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육체적 결합인 섹스를 스캐너스는 불쾌하고 극심한 편두통의 형태로 재해석했다. 그 유명한 머리를 날려버리는 장면이나 비디오드롬의 끈적하고 음습한 결합, 자동차 충돌과 성욕을 기계적으로 결합한 크레쉬, 망가진 정신의 육체 발현을 뒤틀린 모성과 결합해서 표현한 브루드 등등과는 다르지만, 초반의 리건이 스캐너 능력으로 사람 머리통을 날려버릴 때 보여주는 기묘한 미소, 주인공이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하면서 보여주는 기묘한 자신감들 등등 양자의 불쾌하고 폭력적인 결합과 섹스의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스캐너스는 크로넨버그의 주제의식 등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는 아니다. 하지만, 스캐너스는 일반적인 B급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 식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영화라 할 수 있으며, 장르 공식을 뒤틀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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