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1.

일전에 muhootsaver 님이 블로그 글에서 지적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요즘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런 트렌드 내에 각 작품의 플룻이 크고 작은 결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muhootsaver님의 지적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유행이라는 트렌드에 비해서 각본이나 작가들이 극장판이라는 형식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도기적인 작품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골자의 이야기 였죠. 대단히 좋은 글이고, 저 역시 트랙백을 보내드리고 싶지만 영문 블로그만 운영하시는 터라 댓글 및 트랙백을 보낼 수가 없더군요(....) 이 글은 어찌보면 muhootsaver님의 지적, 특히 세번째 문단에 대한 저의 의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문은 여기입니다.(http://muhootsaver.tistory.com/1060)

2.

아마 이 글을 쓰게 된 모티브는 저번주 비평회에서 다루었던 스트레인져:무황인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비평회 내용은 둘째 치고 그때 토론중에 나왔던 이야기들이나 토론의 진행 방향을 살펴보았을 때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하나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벌일 때는 항상 의견을 두고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거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문제가 항상 발생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의 코드-이방인-이라는 코드를 놓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희들은 비평회에 대해서 '서로 물고 뜯는 맛에 하는 모임'이라고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오랫만에 복귀한 비평회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저는 상당히 놀랐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 그리고 해석의 공존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스트레인져라는 작품이 갖는 단순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즉, 단순한 만큼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으며, 동시에 다른 해석의 근거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특이한 결과가 단순함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독은 코멘터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나 자신은 애니메이션은 B급 장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단순하고 명쾌해야 한다, 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인져란 작품 자체는 B급 덩어리입니다. 단순 명쾌한 구도,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인물들, 그리고 앞 전개가 뻔히 보이는 이야기, 세르지오 레오네로 대변되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향취 등등 스트레인져는 과거 대중문화의 오마주이자 산물인 것 입니다.


3.

제가 스트레인저를 이야기 한 것은, muhootsaver 님이 지적한 각본과 플룻의 문제는 어쩌면 일본 애니메이션 각본가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B급으로 대변되는 애니메이션 장르가 작품 영화, 예술 장르로 탈바꿈하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플룻과 각본의 흠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게 20년 동안 애니메이션의 경향은 점점 알 수 없는 무언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이코 드라마, 표현 형식의 다양화, 주제의식의 등장, 복잡한 인물 구도, 설정과 플룻의 복잡화 등등 애니메이션은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서 제작자들의 사고방식 역시 바뀌고 있죠.

에르고 프록시(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의 각본가 사토 다이는 치유물이란 장르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아무런 내용도 없고,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절대 옳지 못하다 라는 류의 비판이었죠. 그리고 타니구치 고로는 코드기아스라는 문제작을 만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관과 미국 비판론을 펼치겠다 라는 주장을 하였고, 하늘의 소리의 제작진들은 전쟁과 소녀의 심도있는 관계를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하였죠. 물론 여기 예시로 들은 작품들이 하나같이 문제작들이라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만, 이러한 흐름은 아주 중요한 변화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이라는 사고 방식인 것이죠. 이에 대해서 데즈카 오사무나 과거의 대가들은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지 않는가 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들의 작품들은 살펴보면 오히려 지금에 비해서 정형적인 대중문화 양식을 철저히 지켰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경향들이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반론도 존재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노이즈 마케팅이든 아니든 간에 애니메이션 제작진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형화된 흥행공식, 플룻 등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자의식 과잉적인 작품들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저는 봅니다. 즉, 애니메이션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다고 그러한 애니메이션의 작품화가 애니메이션의 대중문화 탈피화 또는 예술작품화를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애니메이션 계는 과거 80년대의 전성기 보다 불황이며,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쪼들리고 있다는 편이 타당하겠죠. 하지만, 90년대 이후로 급부상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적 위상, 그리고 수준 높은(?) 소비자들의 등장으로 이러한 작품화 경향은 하나의 소비적 트렌드로 변화하였고 정착하기 시작하였죠.


4.

저는 이런 변화를 과거 영화가 예술의 한 장르로 정착하는 역사와 유사하다고 봅니다. 몇몇 선구자들-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데즈카 오사무 등-과 그들의 추종자, 그리고 추종자들이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 끝에 새로운 경향의 등장, 새로운 추종자들의 등장, 그리고 이하 반복...물론 이것이 일본이라는 지엽적인 문화와 정서, 경제 체제, 시스템에 의해서 상당히 특이한 형태로 등장하고는 있지만, 현재 일어나는 변화의 개요는 대략 이러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정형화된 틀을 따르기 보다(B급),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작품) 시도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기에 플룻의 헛점보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 제 분석입니다.


5.

물론 현재의 변화를 마냥 좋게 볼수만은 없는 것이, 제가 보았을 때는 현재의 소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무엇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자의식 과잉과도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 중에서는 정말 성공적인 것도 있지만, 그와 180도 반대로 완전히 실패한 작품도 있죠. 이는 하나의 감독이나 각본가 아래서 평가가 엄청나게 갈리는 작품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등의 현상으로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끔찍한 현상은, 이러한 작품화의 경향이 하나의 허세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르고 프록시 같은 경우, 보는 사람 입장에서 플룻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햇갈리는 이 작품이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현상 자체가 이미 허세 트랜드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국내 최고의 머리들만 모여있다는 곳에서 에르고 프록시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걸 보고 저는 진짜 할말을 잃었습니다) 흔히 중2병적이라 불리는 이 트렌드는 엄밀히 이야기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것이 상당히 의미있는 트렌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중2병적인, 즉 자아정체성의 혼란 및 허세적인 것에 대한 코드가 정형화 되면서 머리가 빈 감상자들과 머리가 빈 제작자들을 동시에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제작자는 대충 그런 코드들만 짜집기해서 작품을 만들고, 감상자들은 대충 그런 코드를 소모하면서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라고 생각하는 이런 경향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소비/생산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을 뿐더러, 특정 계층에게만 소모적으로 소비되는 소비형태를 보이고 있어 자칫 애니메이션 시장을 더욱 위축 시킬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뭐, 기본적으로 감상의 자유 및 해석의 다양성을 저는 존중하겠다는 것이 제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기본적으로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베이스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단 두가지의 단순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죠. 1)내가 봐서 이해가 되야 한다. 2)감상 전에 사전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6.

뭐,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글이 되버리고 말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대중문화 장르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비자, 그리고 제작자, 소비의 형태 모든 문화적 양상에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기에 생기는 문제도 있지만, 저는 그로 인해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더욱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폐단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문제겠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인져 같은 작품들은 계속 살아남아서 나온다는 것을요. B급은 B급만이 갖는 매력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에 대해서도 다뤄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