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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들어가면서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80년대 후반 창작 집단인 '헤드 기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화 및 TVA, 신 OVA와 구 OVA, 3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을 지칭합니다. 특히 89년에 나온 TVA와 신 OVA, 패트레이버 극장판 1기는 일반적으로 수많은 팬들과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에게서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패트레이버 극장판 1기와 2기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 작품으로, 공각기동대 이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성향을 대표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패트레이버 극장판 2기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느낌이 강해서 '공각기동대 제로'라는 평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사실 오시이 마모루 역시 '헤드 기어' 소속이었고 패트레이버 시리즈 자체에 공각기동대(특히 S.A.C.)의 테이스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80년대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로 패트레이버라는 작품 자체는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일단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질 이번 칼럼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패트레이버 전 시리즈는 공각기동대 S.A.C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SF 장르라는 점에서부터 특차 2과 2소대와 공안 9과 사이의 유사점, 이야기의 전반적 구조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패트레이버 시리즈 자체가 '공각기동대 제로'라고 칭해질 수 있을 만큼 작품이 서로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일단 상편에서는 주로 TVA와 신 OVA를 기준으로 패트레이버 시리즈의 특징을 규정하고, 하편에서는 극장판 1기와 2기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편에서 덤으로 3기 극장판을 다룰 예정입니다.

패트레이버 TVA와 신 OVA

패트레이버 TVA는 1989년 선라이즈 제작의 4쿨 길이의 SF 애니메이션입니다. 경찰용 로봇과 경찰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일상 생활 위주의 애니메이션 전개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물론 샤프트-그리폰 에피소드나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상당히 무게있는 내용을 다루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봇이 일상생활에 들어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까?'라는 컨셉 하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개성 넘치는 특차 2과 2소대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일상적인 드라마, 개그, 진지한 이야기, 전투 등의 다양한 요소를 완벽하게 융합시킨 작품으로서 패트레이버 TVA는 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패트레이버 TVA의 뒷 이야기를 이은 작품이 바로 패트레이버 신 OVA입니다. 신 OVA는 기본적으로 TVA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샤프트-그리폰 에피소드의 종결 및 TVA 스토리의 정리를 맡은 작품입니다. 특히 신 OVA 같은 경우, 상당히 독특한 에피소드들이 산재되어 있는데, 특차 2과 정비원들의 파업과 투쟁(?), 고토-시노부 대장 사이의 연애(?) 에피소드 등이 있습니다.





Labor?

패트레이버라는 작품은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과 달리 상당히 독특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일반적인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은 메카닉 또는 로봇 자체가 전투용으로 개발되거나 그 기원 자체가 신비에 쌓여있는 오버 테크놀로지 적인 존재로 많이 등장합니다. 사실,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에서의 로봇 자체가 '보는 시청자(주로 소년)과 로봇 사이의 동화 감정'을 노리고 만든 상업적인 코드적인 성격이 강하죠.

패트레이버는 특이하게도, 경찰용 레이버인 패트레이버 자체가 '레이버'라는 작업용 도구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겁니다. 심지어 애니 내에서 군용 레이버 역시, '레이버'라는 도구의 군사적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설정이죠. 즉, 작품 내에서의 로봇, 즉 레이버란 존재는 기본적으로 '노동'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작품 전반에 전제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레이버(Labor, 노동)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죠.

사실, 이러한 패트레이버의 설정은 로봇 개념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카랄 차페크의 희곡 '로봇'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라는 단어 자체가 체코어로 노동을 의미하죠. 즉, 두 작품 모두 '로봇'이라는 개념을 노동하는 도구로 인지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작품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큰 차이점이 있다면, 카랄 차페크의 희곡 '로봇'은 공산주의와 계급투쟁에 관한 암울한 이야기인데 반해서 패트레이버는 도구의 도입으로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는 거죠.

예를 한번 들어보죠. 패트레이버 첫 화의 도입부를 보면, 운전자가 술에 취해서 레이버를 음주운전 하는 것을 오오타와 아스마가 막죠. 그리고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 내에서 나오는 레이버 범죄는 그 자체가 일반적인 범죄를 레이버라는 도구를 통해 확장시킨 형태-도난, 난동, 음주운전, 싸움 등등-로 나타납니다. 물론 샤프트-그리폰 에피소드에서 그리폰 같은 경우는 오버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만든 실험용 레이버지만, 그리폰의 존재 의의 자체가 그러한 레이버를 개발할 수 있는 개발 인력을 팔기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도구와 과학을 통해서 생활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그려낸 전통적인 SF 장르라고 지칭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가 이전에 다루었던 공각기동대 SAC 리뷰에서 언급했듯이, 과학을 통한 생활과 삶, 인식의 변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패트레이버와 공각기동대 SAC는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SF 장르가 갖는 무거운 분위기를 생활 드라마와 개그를 통해서 가볍게 만든다는 점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오늘도 그들은 도쿄를 말없이 지킨다.

'경찰'이란 존재는 상당히 독특한 존재입니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선에서 일상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입니다. 즉, 경찰은 이쪽과 저쪽 모두를 보면서 다양한 유혹에 시달리죠. 일반적으로 대중 문화 작품에서 경찰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경찰의 본연의 임무는 수행하지만 저쪽의 유혹에 넘어가서 부패한 경우와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수행하는 경우죠. 전자의 경우는 최근 악한 히어로의 득세로 자주 보이는데 비해서, 후자는 너무 식상하다는 평을 많이 받죠. 당연히 패트레이버에 나오는 특차 2과 2소대는 후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내에서 경찰 경비부 소속 특차 2과는 상당히 독특한 존재입니다. 레이버를 이용하는 독특한 부대라는 점에 비해서 수도권에서 한참 벗어난 한지에 기지가 있다는 점, 전반적으로 경찰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사람들의 귀향지와 같은 성격이라는 점, 그리고 도저히 경찰 같지 않은 인간들이 경찰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 등에서 말이죠. 또한, 도쿄 등지에서 대활약을 하더라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부대이기도 합니다.

특히 특차 2과 2소대는 상당히 독특한 존재입니다. 레이버에 빠진 소녀, 집을 나온 대기업 총수의 자식, 열혈 바보 경관, 너무 순한 나머지 존재감이 없는 사람, 툭하면 폭발하는 사무원, 완벽주의자, 어딘가 나사가 빠지고 귀차니즘으로 무장한 소대장으로 구성된 2소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2소대가 조직으로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2소대는 관료주의나 시스템으로 무장한 기존의 체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죠.

이는 2소대라는 존재 자체가 경직화된 시스템의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2소대가 움직이는 모습은 관료주의의 대안적 개념 중 하나인 '프로젝트 팀 제도'와 비슷합니다. 역할과 서열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형태죠. 특히 2소대는 서로 극명한 성격 대비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신뢰와 유대로 서로의 문제점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거쳐야 하는 제도와 절차를 뛰어넘어서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점에서 관료주의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다만, 그 덕분에 애물단지 취급 받지만)

이와 같이 특차 2과 2소대의 개념은 공각기동대 SAC의 공안 9과의 그것과 많이 비슷합니다. 제도 밖에서 제도를 보완하는 대체적인 조직이라는 것이죠. 물론 패트레이버에서 2소대가 대처하는 상황은 많은 부분 일상적인 문제이지만, 몇몇 상황에서는 공안 9과의 활약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외 기타-'땅 끝에서'

특차 2과의 존재는 그 외에 다양한 의미에서 독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간적으로 수도권을 지키는 경찰의 본부가 수도권 외곽의 '한지'에 있다는 특징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인물들의 조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독특합니다.

먼저 정비반을 보도록 하죠. 늙은 엔지니어를 대표하는 사카기 반장과 젊은 엔지니어를 대표하는 시게와 기타 정비원들은 큰 갈등 없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내내, 사카기 반장을 통해 드러나는 장인 정신과 젊은 세대의 정신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특히, 신 OVA의 에피소드에서는 사카기 반장과 젊은 정비원들 사이의 생각의 차이가 간접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대리전을 통해서 드러나는 점, 극장판과 전 시리즈 내내 사카기 반장이 컴퓨터를 배우려는 시도를 하는 점 등등을 통해서 말이죠. 즉, 작품 내내 특차 2과라는 공간은 신세대와 구세대가 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작품은 SF라는 장르치고 특이하게 기계에 대한 애착, 수동이나 구식 기계의 우수성을 드러냅니다. 그 중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시리즈 진행 내내 특차 2과에 신형 레이버 도입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1화에 도입되었던 잉그람이 시간적으로 한참 지나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수많은 신형 레이버를 제치고 계속 패트레이버로 자리매김하죠. 후에 AV-0 피스메이커가 정식으로 도입되도, 실질적으로 활약한 것은 잉그람이었구요. 심지어 시간적으로 한참 지난 2기 극장판에서는 구석에 쳐박아놓은 잉그람이 막판 대활약을 하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물론, 잉그람 자체가 패트레이버를 대표하는 메카닉이긴 하지만, 잉그람 내에 들어 있는 장인 정신이나 개개인에 따른 경험치의 축적, 기계에 대한 애착 등이 기술적으로 뛰어난 다른 매카닉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겠죠.

결과적으로, 작품은 상당히 독특한 시공간과 설정,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적인 개그, 블랙 유머, 드라마, 케릭터 등에서도 엄청난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기본적으로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보여주는 특성은 후의 공각기동대 SAC나 공각기동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편에서 극장판 1, 2기를 통해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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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안떠올라서 의자에서 빙빙 돌다가, 등 뒤에 붙은 대형 포스터를 보고 떠올렸습니다.

인류 과학 기술을 총 집대성한 대표적인 분야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분야는 바로 우주 항공 분야입니다. 이는 하늘과 우주가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미개척지이자 원시 인류로부터 지금까지 그 맥락을 이어온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이후, 최초의 위성 스푸트니크, 유인 우주선, 가가린, 라이카, 닐 암스트롱, 아폴로 계획, 무궁화호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날겠다/우주로 나가고 싶다 라는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해왔습니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우주 항공 분야가 갖는 특수성입니다. 우주 항공학은 물리, 화학, 의학, 천문학 등 과학의 최첨단을 비행기/우주선에 집약시킨 과학 기술의 결정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가의 문제는 과학기술의 최첨단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특히 한순간의 실수, 고려되지 않는 변수 또는 부품상의 작은 결함이 끔직한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과학 기술 분야에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군요)

따라서 과학 기술의 절정체인 우주선 또는 비행기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운행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자신이 한 개라도 결함이 생기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만개의 부품 복합체와 수천톤의 폭발성 연료를 깔고 앉은 뒤에 육지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지의 세계, 우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이 무사하게 끝날 것이라는 신념은 단순한 과학적 계산 또는 확신의 범주를 넘어섰죠. 그러한 의미에서 역설적이게도, 과학 기술의 최첨단인 우주 항공 분야는 인류 최고(最古)의 개념인 종교적인 믿음과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가이낙스의 1987년 첫 데뷔작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는 이러한 종교와 과학의 기묘한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군대 내부에서도 막장 취급받는 왕립 우주군 소속인 주인공은 자신의 꿈이었던 공군에서 낙방한 뒤,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거리에서 선교를 하는 소녀를 만나서 종교를 알게 되고, 무의미한 자신의 생활에 하나의 목표를 갖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방황하는 주인공이 종교를 통해서 어떻게 우주로 나가게 되는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전반적인 드라마의 완성도, 작화 등의 상태는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흥행은 도저히 안될 거 같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립우주군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지금의 애니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재밌는 점은 작품이 우주 항공 분야가 정치적 역사적으로 갖는 특수성을 잘 짚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우주 항공 과학 분야는 강대국의 정치적 선전, 즉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최초로 인류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아폴로 계획, 우주 왕복선, 유인 우주선 등등 우주 항공 분야의 대부분은 미소 양국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인 냉전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는 우주 항공 분야가 갖는 시각 및 인식에 대한 강렬한 충격(인간이 하늘을 넘어서 우주로 간다는 것)과 우주 항공 분야의 기술이 기본적으로 장거리 미사일 및 ICBM(Inter-Continental Ba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 미사일) 등과 같은 군사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애시당초부터 왕립우주군의 존재 의의 자체가 적성국의 관심 끌기용이었고, 우주개발 등의 인류의 이익과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발사 직전에 발사는 취소되고, 설상가상으로 적국의 육군이 발사장소로 진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와중에서 성공적으로 전장의 한 복판에서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데 성공하고, 우주선에서 라디오를 통해서 전세계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입니다. 주인공의 기도와 함께 인류의 전쟁과 비극적인 순간들이 오버랩됩니다. 인간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갈 수 있게 된 과학 기술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단 한번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기아, 가난, 자연재해 등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더욱 험악해질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올리는 기도는 어두운 세계에 작은 희망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최첨단의 과학 기술이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여태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희망, 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말이죠.

우주선이라는 과학 기술의 산물 위에서 종교적인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역설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이성의 극단인 과학 기술과 인류의 탄생과 함께 해온 종교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 어찌 보면 극과 극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 봐야겠죠.




덧. 역시 오랫만에 썼더니 마음에 안드는군요; 차츰 가다듬어야 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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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의 광기가 빚어낸 궁극적인 종착역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효율적'인 인종 청소, 민족 정체성 및 문화 말살, 동성애자 장애인 말살, 종군위안부 등 차마 입에 담기도 역겨운 수많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죠.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나치즘의 대부분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일본은 동경 재판 이후에도 A급 전범을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 군국주의자들로부터 정신을 계승받은 극우주의자들의 행위 등을 통해 과거 전범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특유한 국민성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지만, 6.25 이후 미국의 충견이었던 일본의 국제 정치상의 위치,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이 일본 전범 잔재 척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점 등의 다양한 국제 정치상의 요건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산물이기도 합니다.

일본 대중문화에 있어 이 시기는 극우적인 작품들에서 가끔가다 미화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 시기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시기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이 시기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하나의 '공백기'입니다. 잊고 싶은 역사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대중문화가 전쟁 중의 일본을 배경이나 주제로 다루지 않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 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은 드뭅니다.(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간장 선생' 정도가 여기 들어가겠네요)

'지금 거기 있는 나'는 그러한 일본 대중문화의 금기를 넘어버린 작품입니다. 군국주의, 소년병, 학살, 집단광기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거침없이 다룹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부분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만들어 버리더군요.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한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개고생을 하고, 다른 세계의 문제를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거기 있는 나'의 독특한 부분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를 풀어내는 과정에 존재합니다.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건너간 세계의 풍경은 한마디로 지옥도입니다. 황량한 사막, 군국주의라는 집단 광기, 학살, 살인, 종군위안부 등 인간이 치달을 수 있는 막장의 한도를 넘어선 공간이죠.

놀랍게도, 소년이 이러한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는 세계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소년은 밝은 미래를 긍정하죠.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였지만, 점점 악화일로로 가는 상황에 있어서도 미래를 긍정하는 소년의 모습은 치기를 뛰어넘어 숭고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근본은 선하다는 성선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전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선한 인물들이며, 심지어 이 모든일의 원흉인 독재자 조차도 자신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물로 표현되죠. 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광기에 빠져있어도 세상은 아직 긍정할 수 있다는 애니메이션의 주장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마지막, 황량한 대지는 물로 정화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 화해하여 공존의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역사가 집단 광기의 산물이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이니까요.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취하는 과거 역사와 현재의 관계는 '단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이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는 모습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이 당시의 피해자에 대한 관점에서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일본인들이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가 '우리도 전쟁 피해자'라는 점을 고려하면(잘 만들었지만 정치적 색체가 상당히 짜증나는 '반딧불의 묘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이만큼까지 표현하는데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일반인의 정신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세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또한 작품 자체도 연출이나 스토리 전개가 흠잡을 때 없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당히 무리가 있는 스토리도 감상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지금 거기 있는 나'는 훌륭한 명작입니다. 한번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덧. 다음은 뭘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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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소년이 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군 통수권자이며, 가정에 있어 아들과 아내에게는 완벽한 가장이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상하고 남편과 금슬이 좋은 현모양처다. 돈, 명예, 지위, 친구, 이 모든 것들을 가진 소년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한다. 그러던 와중에, 소년은 한 남자를 만난다. 소년은 이 남자를 존경한다. 소년도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소년은 모르고 있다, 그 남자가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남자라는 것을...“

암굴왕(2004)은 곤조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하여 이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저번 편에서 설명드렸듯이, 지금까지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많이 영화화 또는 만화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들이 소설을 그대로 옮기거나, 혹은 소설에 있어서 몇몇 중요한 포인트-대부분은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연적, 페르낭에 대한 복수-에 초점을 맞추어서 작품을 전개합니다. 이는 원작 자체가 분량이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따로 손을 댈만한 부분이 없을정도로 원작이 훌륭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암굴왕은 원작을 아주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암굴왕은 원작과 달리 ‘복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즉,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주인공이 아니라,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의 대상의 아들인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주인공이 되어 백작의 복수극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이죠.

사실, 원작에도 이런 컨셉이 다소 존재했습니다. 그 부분은 알베르가 백작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자 결투를 신청하고 나서 진심으로 백작에게 사과 하는 부분이었죠. 이는 원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원작에서 알베르가 다혈질의 올곧은 청년이었음에 반해 암굴왕에서는 다소 다르게 나옵니다. 암굴왕의 알베르는 아직 세상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사춘기의 소년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에서 인생의 지표를 찾기를 갈구하고, 결과적으로 백작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죠.

암굴왕이라는 작품은 그렇기에 원작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였던 원수의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들에 대한 케릭터성을 강화합니다. 그렇기에 작품은 젊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자식들이지만, 백작의 가혹한 복수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갈등을 겪고, 이로써 세상에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원작의 케릭터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립니다. 특히 알베르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친우였던 백작의 배신에 분노하고, 자신의 가족에 끝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백작을 증오했지만, 백작의 복수를 이해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어 원작보다 더 깊은 케릭터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원작은 백작이 행하는 복수의 정당성을 높이는 도구적인 케릭터에 불과하였지만, 암굴왕에서는 스스로의 주체를 확립한 케릭터로 변모하였습니다.

암굴왕에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그야말로 악의의 화신입니다. 원작에서 신의 대리인으로서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철퇴를 가한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 있는 케릭터였지만, 암굴왕에서는 원작의 흡혈귀 같은 모습과 뒤틀린 완벽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원작의 백작이 어느정도 인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벽했다고 할 수 있었다면, 이와 달리 암굴왕의 백작은 완벽한 동시에 너무나 위험하고 사악한 인물로 변모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희곡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 많은 부분 닿아있습니다. 마치 메피스토가 선의를 가장하여 파우스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유혹하듯이, 암굴왕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선의를 가장하여 자신의 적들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유창한 달변과 우아한 외모 속에 감춰진 심연과도 같은 악의와 뒤틀림. 그리고 이를 모르고 접근한 이들은 자신의 과오와 죄악의 업보를 받아 파멸하게 됩니다. 완벽한 파멸, 그것이 그가 원한 복수였죠. 하지만, 알베르는 그의 분노와 복수심을 이해하고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이로 인해 백작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물론 원작에 비해서 백작의 케릭터가 비교적 단순합니다. 원작에서는 그가 선하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암굴왕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없지요. 특히 막시밀리안 모렐과 백작 사이의 독특한 우정이나 그가 자신의 복수극이 점점 큰 불행을 낳자 결심이 흔들리는 부분 등을 제거하여 백작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 역인 나카타 죠지의 퇴폐적이면서 귀족적인 목소리, 우아하지만 그로테스크한 백작의 외모 등은 이미 여태까지 나왔던 번안작이나 리메이크 작 중에서 가장 인상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 전체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는 독특한 색감과 화려한 배경, 원작의 배경을 적절하게 SF의 형식으로 바꾼 점 및 원작과 케릭터에 대한 독특한 해석 등은 작품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높입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화에 알맞게 적절히 소설 내용을 편집한 것도 훌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알베르와 백작의 결투 장면까지의 분량은 충분히 이 작품을 완벽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아쉽게도 완벽한 작품에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알베르와 백작과의 결투 이후의 내용 및 작화가 전반적인 작품의 질을 악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부분이 정말 눈뜨고 못 봐주겠다, 쓰레기다, 뭐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아쉬워 하는 것은 거기서 뒷심을 발휘했었더라면, 원작에 대한 훌륭한 변주곡이 되었을텐데 그 뒷심을 발휘하지 못해서 주저 앉아 버린 점에 대한 것입니다.

알베르와 백작의 결투, 대략 18화 후 22화까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친구를 위한 프란츠의 희생 이후, 알베르가 그 상실감으로 방황하고 좌절하는 장면이 대략 5화 정도 진행되죠. 하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알베르가 유약한 성격이고 그에 상처받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상실감에 대해서는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서술했어도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백작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어서 왜 이 남자가 냉혹한 복수자가 되었는가를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백작이 24화 내내 자신의 숙적들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몰골로 만드는 복수를 하는데, 그 동기가 되는 회상이나 설명은 전 24화 통틀어서 고작 10분도 채 안된다는 것은 백작에 대한 모욕이 아니겠습니까? 18화에서 22화까지 부유하는 알베르를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백작에 대한 묘사를 강화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게 들더군요.

게다가 원작에도 없는 ‘암굴왕’이란 설정은 도대체 뭡니까? 물론 원작에서는 파리야 신부가 그의 스승으로 그에게 부와 지혜 그 모든 것을 주었고, 그를 신의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스승적인 존재는 냉혹한 복수자인 백작에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고, 암굴왕이라는 암흑의 존재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암흑의 존재가 백작을 악의 존재로 만들고 냉혈한으로 만들었다는 설정은 좀처럼 납득하기 힘듭니다. 원작의 백작은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과 강철보다 더 굳센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복수는 그의 치밀한 계획과 인내심 끝에 이루어 진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타자도 개입이 되지 않았죠. 백작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철인적인 인간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암굴왕에서는 이를 전지전능한 악에 ‘휘둘리는’ 케릭터로 묘사되었죠. 스스로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몬테크리스토 백작 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암굴왕의 영향력 아래 놓인 백작의 모습은 뭔가 모순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차라리, 스스로 뒤틀린 길을 선택했었더라면 더 박력있는 케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물론, 끝마무리는 훌륭했고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들은 ‘아쉽다’ 수준의 문제이지, ‘망했다’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물론 흥행에서는 망했지만요. 원작을 읽지 않아도 원작의 매력을 충분히 잘 살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원작을 읽고 나서 봐도 나름의 독특함을 가한 훌륭한 변주곡이기도 합니다. 취향은 조금 타겠지만(완전히 주류에서 벗어난 작품이니), 추천 작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전반부(전편 읽으러가기)는 죽은 자와 산 자의 화해, 그리고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그 사이의 희망에 대하여 다루었다면, 작품의 후반은 이렇게 삶을 부정하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과 삶을 긍정하는 나키아미의 가르침으로 나누어져서 대립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다.





4.대립-나키아미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핍박받는 민족인 테시크 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히루코를 인도하는(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히루코를 시체에서 추출하는) 루아콘 교의 무녀로 선발되었다. 어느날 그녀는 시체 더미 속에서 한 소녀를 구하게 되고, 루아콘 교의 무녀의 의무를 포기하고 산노바의 곁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세상들과 만난다. 한 때 그녀의 이름은 '구름을 베는 자'였지만, 이제 그녀의 이름은 '나키아미'이다.

망념의 잠드라는 작품에서 나키아미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잠드들(라이교와 아키유키, 얀고)의 어머니이며, 아키유키와 더불어서 주제를 드러내는 작품 내의 중요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루아콘 교의 무녀일 때 배운 지식을 토대로 잠드들에게 가르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공존과 화해를 가르친다.

전번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잠드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인 존재다. 일단 잠드라는 존재는 작품 내에 등장하는 루아콘 교적인 개념인데, 특이한 점은 잠드에 대한 나키아미의 가르침과 루아콘 교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이다. 루아콘 교 역시 잠드를 죽은 자와 산 자의 중재자로 본다. 하지만, 루아콘 교는 살아있는 것과 그 현제의 세계 그 자체를 고통이라 보고 이를 죽음으로 구원하고자 한다. 잠드는 산 자를 죽음이라는 영원한 평화로 인도하는 구원자인 것이다.

루아콘 교라는 종교 자체는 불교, 티벳 불교, 이슬람 교, 기독교 등등을 복합적으로 혼합한 종교이다. 루아콘 교의 교리 자체는 '일체는 고통(苦)이다'라는 불교적인 사고방식과 이슬람교의 성지 순례 개념, 기독교의 중보자적인 존재 잠드,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종교적 지도자 '황제'까지 다양한 종교 개념이 혼재되어있다. 이러한 루아콘 교의 교리는 인류 종교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루아콘 교는 인간이 현세적인 고통을 구원받기 위해서 만들어낸 극단적인 종교 개념이다. 즉, 인간은 극단적인 삶의 부정, 즉 죽음으로서 구원하고 새로운 삶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물론 현실 종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유의하시길)

그런 루아콘 교를 표상하는 것이 '황제'라는 개념이다. '황제'는 죽은 자에게 히루코를 심어서 만들어진 잠드이다. 그리고 대순례의 때, 황제가 깨어나 태동굴에 있는 순례자들(요호로기)을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좋은 말로 하면 이렇지, 하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죽음이다), 다시 한번 삶을 만들어내는 대순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키아미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반대로 가르친다. 살고 싶다면, 소원하라. 자신을 잃지 마라. 그녀가 가르치는 것은 명백히 루아콘 교의 '황제(잠드)'와는 다르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삶의 아름다움을 긍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으면서 동시에 그 둘을 아우르는 존재인 잠드를 잉태한다.

나키아미는 자신의 여동생인 쿠지레이카와 한 때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산노바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 끝에 쿠지레이카를 만났지만, 테시크 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잠드가 된 쿠지레이카를 본 나키아미는 더 이상 자신이 고향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타는 고향을 뒤로한 그녀는 산노바를 만나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태동굴로 향한다. 동시에, 하루와 아키유키도 잠드가 모이는 태동굴로 향하고, 이슈와 라이교는 금강탑을 둘러싼 일전에서 승리하여 히루켄 황제를 쓰러뜨리는 듯 하지만, 오히려 황제를 깨우게 된다. 그리고 히루켄 황제가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대단원으로 흐른다.




5.화해-대단원,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

영웅들의 이야기는 막바지로 흘러 죽은 자와 산 자, 삶의 부정과 긍정이라는 극단적인 세계가 화해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히루켄 황제다. 히루켄 황제는 누구인가? 그는 그 누구도 아니다(Nobody). 그는 죽은 아이며, 이름도 자아도 없는 존재다. 그는 대순례의 때, 태동굴에 모인 순례자들의 영혼을 삼켜 세계를 정화하고 세계를 유지한다(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한 막중한 의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외로워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내에서 황제는 삶에 대한 고통과 공허감, 일체의 삶의 부정적 모습을 환기시키는 존재다.

대순례의 의무에 얽메여, 누구인지도 모르는 히루코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그(혹은 그들? 아니면 모든 죽은 자들?)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자신의 존재의 소멸,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에게는 '대적자'가 필요하다. 자신과 대칭되는 존재. 황제는 아키유키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자아를 잃었을 때) 도움을 준다.

황제는 금강탑에서 풀려나(아이러니 하게도 이슈가 황제를 죽이기 위해 설치한 폭탄에 의해)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태동굴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선택한 대적자 아키유키와 대결한다. 이 대결은 상징적인 싸움, 삶의 희망과 절망의 대리전이다. 아키유키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은 대단히 작다. 그러나 황제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부정, 고통은 엄청나게 크다. 아키유키와 황제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며, 거대한 슬픔과 작은 희망의 싸움이다.




나키아미는 산노바와 만난다. 거기서 그녀는 산노바에게 자신이 산노바를 떠나서 깨달은 것들ㅡ작은 희망과 삶에 대한 긍정ㅡ을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에 대한 긍정은 대단히 지독한 긍정이다. 핍박받는 민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수많은 비극을 봐온 그녀가 산노바 앞에서 세상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노바는 나키아미의 의지와 소망을 받아들여,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태동굴을 봉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키아미는 태동굴에 모인 수많은 히루코들을 정화하고 태동굴을 자신과 같이 봉인하면서 천년 동안의 긴 잠을 자게 된다.




나키아미가 태동굴을 봉인할 무렵,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의 싸움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황제는 아키유키와의 싸움에서 스스로 사라지길 원했지만,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자신의 소중한 '이름'을 준다. 희망과 절망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절망을 감싸 안으면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의미('아키유키'라는 소중한 이름)를 부여한다. 결국 황제는 아키유키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자아를 잃고 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어둠은 물러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된다.




6.귀환-Life Goes On.


그리고 영웅은 다시 한번 자신이 구했던 일상으로 귀환한다.




나키아미와 아키유키의 모험은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는가? 아니다. 그들의 모험은 세계를 일시적으로 구했을 뿐, 세계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남과 북은 그 이후 휴전을 했지만, 여전히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언제라도 문제는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험은 무의미한 헛수고였을까? 아니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희망'을 찾아냈다.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자신과 함께 태동굴의 히루코를 정화하고, 태동굴을 닫은 것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소망, 그 소망이 있으면 언제든지 세상이 나아질 희망과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그리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일상으로 귀환한다.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고,
계속해서 마음을 전해주려고 했던 소중한 사람, 하루에게로.



※후기


4개월이었다. 리뷰 하나 완성시키는데 걸린 시간이 4개월이었다. 사실, 리뷰 자체를 포기할 뻔도 했었다. 리뷰를 중간까지 썼다가 뒤엎기도 했었다. 사실 4개월만에 리뷰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쁘다기 보다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실상, 작품의 핵심만을 짚어서 리뷰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품 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교향시편 에우레카 7을 보면서, 이런 작품을 적어도 10년 안에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즈는 그러한 나의 전망을 비웃듯이 약 3년만에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방영 당시 어느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26화 하나 하나가 모두 몇 년간 공을 들인 극장판처럼 느껴졌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사실, 4~5개월 정도를 질질 끈 리뷰를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시원 섭섭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다. '드디어 끝냈으니까, 다른 리뷰를 쓰러 갈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보면서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글 솜씨가 좀 괜찮은 사람이라면 더 축약적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 글 솜씨가 후달리는 관계로 글이 장황하게 길어진 점을 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 올리며,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0.들어가면서

애니 감상은 이미 5개월 전에 끝이난 작품이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도대체 어떤 틀에 기초해서 리뷰를 써야 할지 막막했었다. 처음 글을 요한 갈퉁의 평화 이론에 근거해서 전개하려고 했으나, 거의 반 논문처럼 변해버린 리뷰를 보고는 기겁해서 중도하차(.....)하였다. 여러 가지 분석틀이나 글 구조를 생각했었지만, 결국은 조셉 켐벨의 영웅 신화 구조를 통해서 분석하기로 결정했다.

1.세계로의 입문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세계 정세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 자라고, 친구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의 평범한 삶은 살았다. 항상 타고 다니던 통학 버스에서 자살 테러가 일어난 그 날까지는.

망념의 잠드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타 다른 애니메이션과 같이 갑작스런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모험의 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고, 혹은 복수의 길이다. 각자는 자신만의 사명을 띄고 원래 속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세계,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세계로 나선다.

망념의 잠드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아키유키가 일상을 떠나 당도한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잊어버린 공간이다. 전쟁과 차별, 증오, 죽음, 테러 등의 비극적인 사건이 넘쳐나는 세계,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일부이자 세계의 추한 면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쉽사리 잊어버린다. 심지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재'로써 소비한다. 수잔 손텍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은 스펙터클로 변해버린다고.

망념의 잠드의 세계 또한 그렇다. 세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폭력과 차별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통학버스에서 일어난 자폭테러는 아키유키에게 일상적인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통해 아키유키의 몸에 죽은 자의 혼인 히루코가 깃들고, 그는 잠드, 일상적인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존재로 화한다.

그가 처음 잠드로 화했을 때, 그는 무의식 중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형과 전투를 벌이고 폭주하여 돌로 변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나키아미가 아키유키에게 외친다.




살고 싶다면, 그렇게 맹세하라!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는 돌이 되어 죽어가는 아키유키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어서 원혼이 된 히루코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잠드란 존재 자체가 죽음과 삶의 양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소망한다. 살고 싶다고.

나키아미는 아키유키를 데리고 센탄도를 떠난다. 이는 아키유키에게 있어서 기나긴 모험의 시작이었다.

2.소명의 인식

처음 잔바니 호에 승선한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일상을 떠나야 하는지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의 모험에 있어서 자신의 소명을 거부하는 단계인 것이다. 물론 영웅은 결과적으로 소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나, 아키유키가 소명을 거부하는 경우는 좀 특이하다. 아키유키는 위대한 영웅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의 생각에는 자신과 무관한 폭탄테러에 휘말린 다음 영문도 모른체 이역만리 우편선에 끌려와서 이상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왼팔에 깃든 존재, 히루코와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을 알아간다.

아키유키가 받아들인 히루코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원혼이다. 산 사람에게 히루코가 깃들게 되면, 인간은 죽은 자의 원념에 휩싸이고 잠드-다른 말로는 人形(히토카타)-로 화한다. 그렇기에 잠드란 존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 서있는 중재자이다. 자신의 팔에 깃든 히루코 존자 자체를 받아들이고 잠드는 히루코와 공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루코에서 나오는 원념 및 부정적인 감정만을 받아들인다면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먹혀서 살아있는 자신을 잊고 돌이 되어 죽을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히루코, 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잠드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원념이 누구인지는 작중에서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히루코는 전쟁에서 죽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즉,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히루코와 자신 사이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세계 및 산 사람과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나 전쟁의 비극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고 조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잔바니호 승선 초기에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여기있는가?' 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에 있어서 소명의 거부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깃든 다른 존재 혹은 세상에 만연한 비극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아키유키만의 이기심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왜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 하나, 가족 챙겨서 살기도 바쁜 인간이라고.

하지만 비극은 외면할 수 없고, 설령 외면한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비극을 화해할 수 밖에 없다.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배운 것은 보통의 세계에서 부정당한 존재들과의 화해였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자신에게 깃든 또다른 존재를 긍정하면서 새로운 존재, 잠드로 화한다. 그리고 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기적이자 희망ㅡ망자와 산 자를 아우르고, 이들을 중재하여 세계를 평화로 이끈다ㅡ이 된다.

3.귀환의 실패와 위기

아키유키가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히루코와의 조화를 이루어내었을 때, 그는 나키아미와 함께 자신의 고향 센탄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깨달음을 얻은 영웅이 자신이 떠나온 일상적 세계와 조우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마주친 것은 일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정적 기운과 존재ㅡ후루이치의 잠드화ㅡ였다. 그는 친구와의 대면 이후, 나키아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된다. 그리고 그는 군의 ASP에 요격당해서 살아있는 자신과 기억을 잃는다.

영웅의 귀환 단계에서 영웅이 귀환을 거부하거나 귀환의 과정에서 외부적인 시련이 흔히 존재한다. 하지만, 아키유키가 겪은 경우는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이는 귀환의 거부나 외부의 시련에서 오는 갈등이 아닌, 자신이 깨달음을 전파하려는 일상적 세계 자체로부터 거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아키유키에게 그 어떤 시련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아키유키는 잠드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자아를 잃는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절망 속에 빠진 아키유키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아키유키의 친구, 니시무라 하루이다. 그녀는 아키유키가 센탄도를 떠난 뒤에도 계속 그와 소통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기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루는 아키유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아키유키를 만나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하루가 아키유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도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은 단순히 아키유키에 대한 연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존재와 간절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루의 소망은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며,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에서 아키유키와는 다른 또 하나의 작은 희망이다.

그러한 그녀의 소망은 그녀에게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아키유키의 목소리, 잠드나 인형의 감정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상징이자 북쪽을 대표하는 히루켄 황제까지. 이렇게 그녀는 다른 인물들 보다 세계의 비극이나 문제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판단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정상의 세계에서 비정상으로 몰리고, 위기에 처한다.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탈출한 그녀는 다양한 조력자와 북쪽으로의 모험을 통해서 아키유키에게 도달한다. 아키유키가 자아를 잊고 추락하는 도중, 하루는 아키유키의 이름을 힘껏 부르고, 아키유키는 다시 자아를 되찾는다. 하루의 소망이 아키유키를 다시 한번 구원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을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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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제작년에 한국 국적의 선박이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서 납치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 반응은 '아직도 해적이 있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현제까지도 태평양 및 인도양 등지에서는 작은 소형 쾌속정을 이용해서 대형선박을 나포, 몸값을 요구하거나 물건을 갈취하는 해적질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형선박을 운행할 때는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서 무기를 비치하거나, 혹은 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해적'이라는 존재나 노예제, 스너프, 마약 등등은 아직도 이 지구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세계에 있어서 어두운 면은 없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구 위에 존재하였지만, 막상 우리가 그것을 마주칠 때는 대단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우리가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역을 우리가 사는 정상 세계와 떨어뜨려서 생각하게 됩니다.

블랙 라군은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 두 세계'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만화에서는 현대판 해적과 깡패, 온갖 인간 쓰래기들이 나오고, 그러한 인간 쓰레기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하는 로아나프라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막장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고, 주인공 록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자로써 목격하게 됩니다.

블랙 라군의 공간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정상적인 삶과 논리가 통하는 빛의 세계, 또 하나는 인간의 광기, 변태성, 탐욕 등에 의해서 돌아가는 어둠의 세계 로아나프라로 나뉘어집니다. 하지만 만화 내에서 이러한 두가지 공간은 완전히 별개의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입니다. 현실의 정상세계에서 실패 하거나 버려진 존재들, 혹은 정상 세계가 숨기고 싶어하는 사건이나 존재나 정상 세계에 있어서 안되는 존재들이 로아나프라에 모이는 것입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낙태 금지 정책으로 생겨나고 스너프 필름에 등장한 전력이 있었던 킬러 고아들, 전직 경찰, 버려진 전공투 세대, 버려진 퇴역 아프간 참전 군인, 네오 나치, 남미 카르텔, 게릴라 등등 소위 정상세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정상세계에는 존재해서 안되는 존재들이 로아나프라로 쫒겨오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정상세계는 자신들의 어두운 욕망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로아나프라를 이용하고, 그 곳에 존재의 의의를 부가합니다. 미국 CIA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로아나프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 모니터링하고, 일본의 대기업은 자신이 벌인 경영상의 미스를 매꾸기 위해서 비밀리에 로아나프라에서 해적을 고용합니다. 또한 포르노, 마약 등등 정상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하는 물건들을 공급하는 역할을 로아나프라가 떠맡기도 하죠.

재밌는 점은 로아나프라나 정상세계나 결과적으로 운영되는 원리는 같습니다. 그것은 '돈'이라는 것이죠.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고,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고, 상대방 앞에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것은 로아나프라나 정상세계나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로아나프라는 그러한 '돈이면 뭐든지 된다'라는 논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록은 이러한 어둠과 빛의 세계에서 진실을 보고 그 목격자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한 때 속했던 정상세계는 만화의 처음 레비와 더치에게 얻어맞으면서 끝나버렸고, 후에 자신은 그저 회사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 장기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정상세계의 정체성(오카지마 로쿠로)을 버리고 로아나프라(록)를 선택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정상 세계와 이 쪽ㅡ로아나프라ㅡ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하지만, 그가 로아나프라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는 정상인의 사고와 도덕관을 버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록은 로아나프라에서 중재자 혹은 협상가로 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재자나 협상가로서의 록의 역할은 만화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록이라는 인물이 로아나프라라는 어둠의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상적인 빛의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과 빛의 어스름 사이에서 사건을 관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거의 모든 사건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지만, 동시에 작품 내에서 인물들에 대해서 쓴소리를 내뱉고 그에 대한 단평을 하는 인물이죠.

이러한 록의 케릭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블랙라군의 최고의 에피소드라 할 수 있는 일본 에피소드의 유키오가 큰 역할을 합니다. 일본 야쿠자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나서, 주변 인물들이 철저하게 그녀를 어둠의 세계에 닿지 않도록 보호하지만, 아버지의 조직이 위험해지자 유키오는 스스로 조직의 대표가 되어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야쿠자들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록에게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주사위와 같이 자신을 끊임없이 내던져야 합니다. 당신과 같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하지만, 록은 빛과 어둠, 어느쪽도 선택하지 않고 경계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어느쪽의 세계이든 간에 결과적으로 같고, 자신은 그러한 세계의 진실과 양면성을 바라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블랙 라군은 만화와 애니 장르를 포함해서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느와르 작품입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분석이 없어도 강렬하고 농후한 그림체, 흡인력 있는 스토리, 인물들의 걸쭉한 입담(속어도 시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건 처음입니다) 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단히 재밌다고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대단히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덧1.애니판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작 120% 초월 애니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작붕이;;)
덧2.다음은 슈발리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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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져:무황인담은 2007년 본즈 오리지날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전국 시대의 사무라이 물입니다. 스토리는 간단합니다. 일본 전국시대, 명나라 황제가 불사의 약을 만들기 위해서 모월 모일에 태어난 아이의 피를 얻으려 하고, 모월 모일에 태어난 코타로를 죽여 그 피를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코타로가 고향인 일본으로 도망가게 되자, 명나라 황제는 코타로를 잡기 위해서 추격대를 파견합니다. 한편 코타로는 나나시(名無し, 이름 없는 사람)를 만나고 그를 보디 가드로 고용하고, 자신을 시라토의 만각사로 데려가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트레인져:무황인담은 전형적인 장르물의 공식을 따릅니다. 아무런 죄없이 쫒기는 어린아이, 그와 관련된 음모,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뭉친 사람들, 그리고 능력은 좋지만 과거를 알 수 없는 수수깨끼의 보디가드 등 서부 영화나 기타 대중 문화를 표방하는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클리셰들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뻔한 스토리 구조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인져:무황인담은 여기에 ‘욕망’이라는 코드를 삽입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장르 영화들과 다른 특징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스트레인져는 애니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의 행동의 동기의 기반에 ‘욕망’이라는 코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서 인물들이 행동의 동기로서 많은 부분 욕망이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나오기도 하지만, 스트레인져에서는 이러한 욕망이라는 물질적이며 사람을 파멸시키는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이는 애니의 배경인 전국 시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전국시대에는 전국 통일 혹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주군이나 동료들을 죽이고 배신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등의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인져는 이러한 배경의 성격을 전면에 부각합니다. 애니의 처음서부터 끝까지 케릭터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배신합니다. 애니의 처음 라로우 일행에게 덤비는 산도적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어린아이의 생피를 마시려는 명의 황제, 자기도 거기에 어떻게든 껴보려는 명의 추격대 대장, 명의 속셈을 알아체고 더 많은 황금을 요구하려는 성주, 언젠가 명령 받는 자리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리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진 장수 등등...이와 같이 전국 시대는 욕망과 욕망의 물고 물리는 아수라장입니다.

또한, 그러한 욕망들은 다 부질없고 헛된 것들입니다. 대표적으로 황제가 추구했던 불사라던가, 성주나 장수가 추구했던 전국통일이나 부귀영화 등은 하나같이 말도 안되게 허황되거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는 황제가 코타로의 피를 얻기 위해서 정확한 시간에 피를 뽑아서 그 피를 마셔야만 불사를 얻는다는 것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두 주인공은 '이방인'입니다. 라로우는 서역인, 나나시는 남만인이죠. 이렇게 둘은 욕망으로 인해서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기는 했어도, 그 자신의 순수를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나나시 같은 경우, 원래 남만인이었지만 자신을 키워주었던 주군에 의해서 훌륭한 무장으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후에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자, 자신의 손으로 주군을 베어버리게 되죠. 그러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는 세상에서 떨어져서 스스로 주류사회의 이름을 버리고 이름없는 자(名無し)를 자청한 것입니다(거기에 검을 봉하기까지) 그러다가 코타로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자신이 예전에 했던 과오를 뉘우치고자 합니다. 이는 나나시가 비록 과오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순수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라로우 같은 경우는....나나시와 많이 다릅니다. 그는 애시당초부터 나나시 같이 착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한 마리 야수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찾아다니는 야수. 하지만 아편류의 약을 복용해서 통증을 없애고 힘을 비약적으로 증진시키는 다른 추격대원들과 달리 그는 순수하게 육체적인 힘과 무술을 추구합니다(나나시가 약을 거부하자 '좋아, 매우 좋아'라고 한 부분) 또한 황제가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것이나, 주류사회의 욕망이나 문제를 대단히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건 그 나름대로의 '순수'의 개념입니다. 순수한 강함이야말로 라로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제이며, 그 외의 세속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죠.

애니가 막바지로 다다를수록 각자의 욕망에 이끌린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들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애니에 나온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고, 피를 뽑기 위한 재단은 다 부숴지게 되죠. 그러한 아수라장 위에서 나나시와 라로우, 코타로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애니의 클라이막스인 나나시와 라로우의 대결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나나시와 라로우, 이 둘 모두 이 세상에 있어 순수한 자들이었고 힘 또한 호각이었지만, 나나시가 코타로에게 배푼 선업이라는 작은 차이로 대결은 나나시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스트레인져:무황인담 은 기존의 장르영화의 코드에 '욕망'이라는 단어를 삽입함으로써 나름대로의 독특한 작품성을 가진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물론 애니는 기본적으로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요. 이와 같이 재미와 내용, 두가지 측면을 다 충족시키는 재밌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작년 SICAF에 온 감독의 코멘트에 따르면 나나시는 죽는다고 합니다.
덧2.동생놈이 가서 감독 사인을 받았더군요. 근데 거기서
스트레인져 초회 한정 블루레이 디스크 박스에 사인 받아가는
인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흠좀무...

다음은 망념의 잠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들어가기 앞서서

이 작품은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나는 것을 더듬거리면서 완성한 칼럼입니다. 은근히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지적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罪惡業 3부: 위치헌터 로빈-그것의 이름은 원죄(原罪)

위치헌터 로빈은 2002년에 나온 선라이즈 제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은 선라이즈 작품 치고는 대단히 독특한 아우라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심지어 혹자는 '앞에 선라이즈 로고만 없으면, 이걸 어떻게 선라이즈 작품으로 알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군요. 정갈하고 깔끔한 그림체, 조용한 음악, 차분한 성우들의 연기, 도회적인 분위기 등 일본 애니에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를 지향하는 작품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의 구도는 일견 단순하게 보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일반인과 초능력자, 쫒기는 사람과 쫒겨지는 사람 등 이분적인 구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로빈은 엄밀하게 그 어느쪽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애니는 그러한 로빈이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지, 그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을 통해서 독특한 심리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위치헌터 로빈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위치(Witch)'입니다. 위치헌터 로빈에서의 위치는 단어 그대로의 마녀(Witch)를 지목하는 게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위치는 철저하게 유전적으로 그 능력을 이어받는데, 이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위치의 가계에 속한 사람이면 위치의 능력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는 원죄(原罪)입니다. 더러운 피, 태어날 때 부터 순수하지 못한 인간,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위치는 애니 내에서 그런 취급을 받습니다. 과거 조상이 위치였으면, 자신이 능력이 있던 없던 감시받게 되고, 의심받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위치를 사냥(Hunt)하는 집단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들은 역사시대가 도래한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러한 위치를 사냥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어떤 능력도 없는 나약한 인간들이고, 위치는 엄청난 초능력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과학과 기술을 써서 밀어붙인다고 해도, 솔로몬이 많이 후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위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것은 똑같이 위치의 힘을 빌어서 위치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위치의 가계를 이어받은 사람들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서 위치헌터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주인공 로빈처럼요.

사실, 이런 설정은 이제 거의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설정입니다. 인간이 비일상적인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들의 기술이나 능력을 쓰지만, 정작 이들 역시 적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정체성의 혼란이 오게 되는 내용 말입니다. 하지만 위치헌터 로빈은 철저하게 로빈이라는 캐릭터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세세한 감정묘사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클리셰적인 설정을 써도 '너무 흔한 이야기다'라는 평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 로빈은 솔로몬 일본 지부인 STN-J에 새로운 헌터로 도착하게 됩니다. 로빈이 STN-J에 온 것은 본부가 STN-J를 지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STN-J에서 위치의 능력을 상쇄시키는 오르보에 대한 감시와 견제, 그리고 STN-J의 위치를 죽이지 않는 헌트 정책에 대한 견제 등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STN-J의 헌터들이나, 본부에서 온 로빈이나 서로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처음 만남에서 지부장에게 인사를 한 로빈이 '오르보는 기분이 나쁘니까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장면 등에서 암시적으로(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STN-J에 도착할 시점의 로빈은 대단히 완고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위태로와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솔로몬 본부에서 철저하게 위치를 사냥하는 법에 대해서만 교육을 받고, '좋은 위치는 죽은 위치 뿐이다'등의 사고방식(물론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으로 무장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본부와 다른 STN-J만의 마취탄으로 위치를 잠재워서 헌트하는 방식과 오르보의 사용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구요. 하지만, 크래프트 사용자(Craft使い)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녀 역시 위치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녀의 능력 사용 방법인데, 애니 초반 그녀의 크래프트는...뭐랄까 대단히 ‘위태롭습니다’. 헌트 대상인 위치에게 불을 붙이려고 하는 것이 주변일대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든다던가, 조준이 안되서 딴 데 불붙이기 일쑤이지 않나, 옆에 있는 사람을 대단히 위태롭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로빈도 STN-J에서 아몬, 사카키, 카라스마 등의 동료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처음 대단히 완고해 보였지만, 같이 생활하고 헌트를 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이는 그녀가 점점 소녀적인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죄ㅡ자신이 위치라는 것ㅡ에 대해서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계기가 되는 것이 아몬이 건내 준 안경ㅡ아마도 능력 사용에 있어서 초점이 안 맞는다고 본 것이겠죠?ㅡ인데, 안경을 통해서 그녀는 애니에서 처음으로 능력을 똑바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로빈은 이에 대해서 대단히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능력을 쓰거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사고를 당하자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로빈이 자신의 능력이나 임무에 상관없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로빈의 평화로운 시간도 STN-J의 산하 기관인 팩토리가 그녀를 헌트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깨지게 됩니다.

물론 팩토리가 로빈을 헌트하려는 것은 본부가 그녀에게 내린 임무도 하나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위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녀가 좋은 일을 하고, 사람과 소통하면서 사람 속에서 섞여지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치'라는 주홍글씨는 지울수 없는 것이지요. 즉, 로빈은 지울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로빈은 자기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부를 위해서 위치를 사냥했지만 역으로 이제 자신이 솔로몬에 의해서 헌트당할 위험에 놓였다면,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로빈은 STN-J에서 도망간 이후, 아몬의 친구인 나기라의 사무실에 몸을 숨깁니다. STN-J에 있으면 동료들과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펙토리가 STN-J 본부를 습격하고 난 뒤, 로빈을 헌트하기 위해서 본부에서 헌터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로빈은 어쩔 수 없이 본부의 헌터들을 죽이게 됩니다. 또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위치'들이 단지 선조 위치와 혈통이 이어졌다는 이유로 헌트당하는 광경도 목격하게 되죠. 이러한 과정에서 로빈은 극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로빈의 꿈ㅡ아몬이 로빈에게 총을 겨누면서, '위치는 헌트해야만 한다'라고 하고 로빈이 아몬을 불태우는 내용ㅡ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로빈의 고민은 점진적으로, 극적인 전개없이 해결됩니다. 그것은 그녀가 나기사의 사무소에서 다른 위치들을 만나고, 자신을 헌트하러 온 헌터들에게 저항하는 등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다시 로빈과 재회한 아몬이 로빈에게 총을 겨누지만 쏘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헌터였다는 것, 그리고 위치라는 사실에 얽메이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다가오는 적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그냥 쉽게 이야기하면 벌려놓은 이야기는 마무리 짓기 위해서), STN-J의 동료들과 함께 펙토리를 습격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여러 작품에서 많이 보였거나 변용된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로빈의 정체성 혼란과 자아 찾기 과정이 대단히 식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지요. 하지만 애니는 철저하게 로빈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인극의 모습과 대사의 자제, 음악의 적절한 사용, 절제된 그림체 등을 통해 그러한 원죄에 대한 인물의 심리와 그 변화를 효과적으로 잘 다루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시 만나게 된 아몬과 로빈, 그리고 STN-J의 맴버들은 팩토리에서 오르보의 정체ㅡ살아있는 위치로부터 뽑아내는 물질ㅡ와 로빈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로빈은 로빈의 아버지가 인공적으로 실험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해서 만든 위치이며, 그 능력은 다른 위치에 비해 대단히 월등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STN-J의 지부장은 로빈의 아버지의 기록과 로빈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이구요. 이는 일반적인 애니에서는 후속작을 예고하는 대단한 떡밥이 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로빈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나 원죄에 얽메여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게, 고작 그런거였나' 라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결국 로빈은 자신의 출생과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홀가분해진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로빈과 아몬은 잠적하게 됩니다.

위치헌터 로빈은 클리셰와 진부함으로 가득찬 작품이지만, 그러한 클리셰와 진부함을 분위기와 절제된 감정묘사, 연출로 커버하고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무라세 슈코의 다음작인 에르고 프록시를 본 것이죠.

...네, 다음 작품은 에르고 프록시입니다. 아마 반쯤은 욕설로 도배를 한 칼럼이 될 것이라 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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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서

 워낙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보니까,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군요. 사실, 건그레이브는 과장 좀 보태서 제 인생에 있어서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이거 보다 더 좋은 작품도 많죠. 하지만, 뭐랄까 지금봐도 참 여러생각이 드는 애니입니다. 쓸쓸한 분위기, 친구, 인생 등등...뭐, 단순한 애니를 보면서 별의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면서 본다고 비웃을 분들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재수 시작 당시 뇌리에 박히는 내용을 보여준 것이 바로 건 그레이브였습니다.(그러고 보니 재수 할때 본 것들은 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건그레이브를 죄악업 칼럼에서 다루려하니까, 심경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안그래도 재수 시절보다 어려운 한해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이런 글을 쓰려니까 여러 잡상들이 들었구요. 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요소들을 배제하고, 애니 자체에 대한 글을 쓰려 노력했고, 장장 A4 5장에 걸친 칼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결론을 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군요.  

2부 건그레이브:순수의 비가

과거 PS2 시절 캡콤이 만들었던 스타일리쉬 액션 게임이 2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Devil May Cry 시리즈였고, 나머지 하나는 건그레이브였죠. 사실 DMC 같은 경우에는 성공을 거두어서 지금까지도 그 시리즈가 나오고 있지만, 건그레이브는 PS2 때 후속작 O.D(Over Dose)까지만 나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니판 건그레이브는 그러한 PS2 게임인 1편이 나오고 Over Dose가 나오기 이전 그 사이에 나온 매드하우스 제작의 애니입니다.

사실, 원작 게임을 해보고 애니를 본 사람들은 이 애니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감상한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애시당초부터 원작 게임이 지향했던 게임의 컨셉은 '스타일리쉬하게 총을 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이라는 것이었고, 게임 제작자도 '그레이브가 탄창을 갈아끼지 않는 이유는 탄창을 갈아끼면 멋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힐 정도로 과도한 파괴와 살상의 미학을 추구하던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니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원작 게임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애니의 내용의 절반 이상은 비욘드 더 그레이브의 인간 시절의 이야기 브랜든 히트의 이야기 분량이고, 그레이브는 폼난다기 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우울해졌으며, 애니 내에서는 총알이 다 떨어져서 탄창까지 갈아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본다면 원작 게임에서 큰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당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건그레이브는 원작보다 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원작이 과거 친구였던 그레이브와 해리의 현재의 싸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애니는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선택의 과정을 대단히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흑가 사람들의 우정과 배신 등을 다룬 장르를 우리는 흔히 '느와르'라고 칭하는데, 느와르 장르가 인물의 감정묘사 등에 약한 애니 장르에서는 힘듭니다. 그러나 건그레이브는 그러한 애니라는 매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서 애니에서 보기 힘든 느와르 장르로 대단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흔히 보통 느와르 장르에 있어서 악은 배신입니다. 암흑가는 언제 어디서 누군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배신이라는 행위는 오로지 죽음으로서 밖에 속죄할 수 없습니다. 느와르 장르에 있어서 믿음과 배신이라는 코드는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건그레이브의 독특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동력이 배신에 대한 응징인 복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우리는 이러고 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브랜든과 해리는 서로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해리는 브랜든과 빅데디를 위시한 밀레니엄의 믿음을 배신하였고, 브랜든은 해리와 자신과 함께한 동지들-특히 쿠가시라 분지-의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해리와 브랜든은 각자의 신념에 충실했습니다. 해리는 자신의 ‘자유’라는 신념에, 브랜든은 밀레니엄의 신조에 말이죠. 그렇게 본다면, 그 어느 누구도 잘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브가 애니 첫화에서 읇조리듯이, ‘어디서...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라는 것처럼 어떻게 본다면, 이 죄와 악은 처음도 끝도 없는, 머리와 꼬리가 물린 우로보로스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해리 맥도웰이란 인물은 건그레이브에서 브랜든 히트에 대항하는 일종의 악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가 악인일까요? 일단 해리의 역할은 극중에서는 악역이 맞습니다. 애니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미카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고 억누르며, 살아있는 인간을 잡아서 괴물로 만드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가 단순한 악인으로 그레이브에 반대되는 역할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는 애니 초반부, 해리가 브랜든에게 했던 대사 '자유롭게 되자, 브랜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 그는 그냥 머리가 대단히 잘 돌아가는 3류 양아치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유를 위한 힘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친구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린 충격에서부터 가속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는 밀레니엄에 들어간 후,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길 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밀레니엄의 이념과 신조보다는 자신에게 열린 자유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브랜든과 함께 나누길 원하죠. 하지만, 그의 무차별적인 팽창과 조직의 이념과 신조에 반하는 행동들은 결국 조직의 창립자이자 수장인 빅 데디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해리는 결국 빅 데디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 했던 브랜든을 죽이고, 빅 데디를 죽임으로서 밀레니엄이라는 조직의 최상부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됩니다.

사실, 기존의 악역이나 악인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다가 후에는 변절하거나 망가지는(예를 들어서, 건X소드의 갈고리 손톱 남자의 마지막이라던가) 케이스가 많았습니다만, 해리 같은 경우는 거의 끝까지 자기 원칙에 대해서 일관됩니다. 그가 후에 밀레니엄의 보스가 된 후에, 그의 자유의 대원칙인 ‘원하는 만큼 빼앗고,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겠다.’에 충실합니다. 경쟁자들이나 자신에게 대항하는 판사를 눈하나 깜작하지 않고 죽이는 동시에, 고아원에 가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모습은 해리의 가식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가 추구한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는 브랜든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설였던 브랜든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에게 조직의 배신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웁니다. 해리에게 있어서, 브랜든의 배신은 곧 자신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레이브가 등장했을 때, 그를 과거의 망령 취급합니다. 그레이브는 해리에게 있어서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이고, 그러한 과거가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십 몇 년 가까이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과거의 망령의 등장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해리는 스스로가 배신했던 과거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마음에 듭니다. 사실, 해리의 파멸을 불러온 것은 다름아닌 해리 그 자신이니까요. 결과적으로 그가 죽였던 브랜든이 망령으로 돌아와서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것이 결국은 너무나 쉽게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브랜든은 어떨까요? 브랜든은 동네 양아치 시절 절친했던 친구들이 죽고, 그 후 해리를 따라서 밀레니엄에 들어갑니다. 사실, 해리는 밀레니엄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과 자유를 보았다면, 브랜든은 역으로 조직의 신념을 깨달아갑니다. 빅 데디가 조직을 세우면서 삼았던 이상, 그것은 바로 ‘지킨다’(守る)입니다. 자신과 자신을 믿는 가족(Family)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것이 빅 데디의 밀레니엄이었고, 브랜든이 이해한 밀레니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빅 데디와 해리, 그리고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밀레니엄의 스위퍼, 즉 살수(殺手)가 됩니다.

하지만, 그도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밀레니엄에 깊이 발담그면 발을 담글수록, 역설적으로 지키려는 자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온갖 더러운 일을 맡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순수하지 못하다고 특히, 그를 사랑한 마리아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순수를 버렸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괴감과 함께, 자신과 관련되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그의 신념도 해리의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해리가 역으로 자신의 신념인 조직을 그 근간서부터 문란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빅 데디가 만약 해리가 조직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물었을때 가차없이 제거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을 때 브랜든은 해리를 쏘지 못합니다. 분명히 자신의 신념과 기대를 배신한 것은 해리였고, 해리로 인해서 조직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뻔히 잘 알면서 말이죠. 결국 브랜든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브랜든이 자신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는 해리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 후의 브랜든의 네크로라이즈화 된 모습인 비욘드 더 그레이브는 닥터 T가 이야기 하듯이, 브랜든이라는 사람은 죽고, 여기 있는 사람은 무덤에서 일어난 망령(Beyond The Grave, 무덤을 넘어선 자)입니다. 해리가 자신을 죽일 것을 미리 예견한 브랜든이 해리를 다시 원래 조직의 신념 체계내로 끌어들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초 강경수이지요. 하지만, 해리의 배신 이후 죽어서까지 조직에 충성하려는 브랜든의 유지를 본 빅 데디는 그러한 브랜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면서 닥터 T에게 더 이상 브랜든을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뻔한 브랜든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해리였습니다.

오랫동안 잠들었기 때문에 기억에 혼선을 겪는 그레이브에게 남은 것은 조직의 신념, '지킨다'와 그 지킬 대상인 마리아와 빅 데디의 딸 미카였습니다. 그는 차례로 밀려오는 조직과 과거의 자신의 친우들-해리를 위시한 발라드버드 리, 밥 파운드멕스, 베어 워큰, 쿠가시라 분지-을 차례로 묻어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조직의 신념을 배신한 죄를 과거의 망령인 그레이브가 과거를 대신해서 처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니에서 비추어지는 그들의 싸움은 악과 선의 대립이 아닌, 뭔가 다른 것입니다. 떠오르는 희미한 햇빛을 받으면서 폐허 속에서 죽어간 밥 파운드맥스, 아무도 없는 철로에서 석양을 받아가면서 죽었던 발라드버드 리, 눈 오는 폐허에 죽은 베어 워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는 폐허가 된 밀레니엄 본사에서 쓸쓸히 죽은 쿠가시라 분지. 이들의 죽음은 전형적인 악인의 죽음과 질서의 회복의 이미지보다는 허무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그 중 브랜든에게 가장 의지했던 쿠가시라 분지는 그레이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해리를 배신했느냐? 당신은 해리와 함께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었느냐?

결국은 브랜든 시절의 기억이 싸움을 통해서 돌아오기 시작한 그레이브도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조직의 신념, 그리고 지킬 것을 지킨다는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 행동한 그였지만, 그러한 복수와 처벌의 과정에서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아니, 사실 그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애니의 첫부분의 그레이브의 독백)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무엇이 잘못된걸까? 그는 마지막 복수의 대상인 해리를 남겨두고 갈등합니다.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조직과 이상은 이런식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레이브가 그의 복수를 거의 끝내가고 있을 무렵, 해리는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엄청난 양의 재산과 권력,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발악으로 오그맨을 이용해서 자신을 배신한 조직을 향해서 공격을 가하지만, 그 공격조차 내부의 배신자(해리 입장에서 본다면)에 의해서 허망하게 무화되어버리고 맙니다. 해리는 도망치면서 생각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걸까? 그는 도주중 그레이브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작되었던 시작점, 최초의 장소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이 비유가 마음에 들어요. 목숨을 걸고 언제나 함께 해왔지만, 결국은 해어지게 된 두 친구가 다시 자신들의 첫 시작점으로 돌아와서 서로를 대면하는 것, 서로의 마지막 장소를 처음 시작한 장소에서 맞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니까요. 해리가 묻습니다. 그때 왜 쏘지 않았냐?

왜 쏘지 않았는가? 네가 나를 쏘았으면, 자신의 신념과 조직을 지킬 수 있었는데 왜 쏘지 않았는가? 결국 네가 이야기 하고 싶은게 뭐냐? 그 질문의 끝에 브랜든이 이야기 합니다.


너를 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몇 십년만에 망령이 되어서 돌아온 브랜든이, 자신의 신념, 조직,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해리에게 내놓은 대답은 자신의 친우를 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하죠. 조직은 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집을 포위합니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으로 내몰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눕니다. 다시, 다시 한번 원점으로 회귀하자. 조직, 신념, 자유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서로에게 순수했던 옛날로.

결론적으로 건그레이브에 있어서 죄와 악은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서로에게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파에 너무 찌들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죠. 그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건그레이브가 내놓은 결말은 처음, 순수로의 회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 마지막에 브랜든과 해리가 만났던 첫 시점으로 돌아가는 점은 여러 가지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둘이 세상에게서 버림받았을지언정, 마지막에 진정한 우정이라는 순수를 되찾은 것이니까요. 그들이 저 세상에 가서 평화롭기를 빕니다.


Rest In Peace, Brandon & Harry



덧. 작년에 마지막화만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덧.첫화 제목이 '황혼의 파괴자들',
 그리고 마지막화 제목이 '파괴자들의 황혼'입니다.
제목 정한 센스가 멋지더군요.

덧.이건 그냥 제 망상일수도 있지만,
건그레이브가 일종의 인생에 대한 메타포처럼 느껴지더군요.

덧.진짜, 원래 대사는 '해리를 쏠 수 있을리가 없잖아?'인데,
머릿속에 그 대사가 박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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