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챗 지피티가 마음대로 상상한 영화의 이미지입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영화 더 몽키는 유명했던 시리즈 공포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연상케 한다: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으며, 인물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데스티네이션이 황당한 죽음이 가져다 주는 긴장감(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롯되는)과 영화의 양식에 기반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죽을 사람은 결국은 죽는다)에 기반한 양식적인 재미가 있었다면, 더 몽키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전에 리뷰했던 롱레그스처럼(https://leviathan.tistory.com/2661) 영화는 감독의 가장 내밀한 경험(게이였던 아버지와 그걸 숨긴 어머니라는 그의 가족사)에 기반하고 있지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 아닌 독특한 결론으로 이끈다는 것이 인상 깊은 영화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가장 큰 모티브는 '어떻게 어린시절의 경험이 다 자란 성인을 지배하고 고통받게 만드는가'이다. 더 몽키도 비슷하다:아버지의 부재, 어머니만 존재하는 편모 가정에서 자란 쌍둥이 중 동생인 주인공은 죽음을 불러오는 원숭이 인형에 의해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영화는 결혼에 실패하고 자식과 아내, 심지어는 아내의 재혼 상대에게도 무시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재밌는 점은 여기서 주인공이 가족을 꾸리고 실패하는 과정 자체가 완전히 통으로 생략이 되었다는 점이다:이는 어떻게 보면 유년기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 내내 그가 과거의 망령인 원숭이 인형에게 쫒기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망령에게 언제고 뒤를 잡힐것이라는 강박 때문에 자신의 인생마저 즐기지 못하고 자식마저도 밀쳐낸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을 쫒아오는 그 망령은 바로 '죽음' 그 자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와 더 몽키는 닮은 부분이 있지만, 고어의 미학에서 본다면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죽음 기본적으로 '사고'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나는 사고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아무리 준비가 잘 되어 있어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라는 양식미를 구축한다. 하지만 더 몽키에서 죽음은 부조리함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사고와 사뭇 다른 점은, 더 몽키의 죽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인 것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는 생각조차 못하는 현상에 가깝다. 단순히 기막힌 우연의 확률로 뇌동맥류가 터져서 죽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캠핑하다가 야생마들에게 짓밟혀서 다진 곤죽이 된 외삼촌, 머리에 불붙은 채로 뛰어다니다가 표지판에 머리가 관통 당해 죽은 외숙모, 심지어 수천마리의 벌이 입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린 인물까지 더 몽키에서 죽음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울 정도로 기이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데스티네이션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끝에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더 몽키에서는 돌이켜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도 안되는 사건으로 인해서 삶이 불현듯 끝나버리는 것에 가깝다. 즉, 더 몽키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대단히 일상적이면서도 바람을 불면 훅하고 날아가듯이 아주 가느다라고 위태로운 실 위에 지탱되는 곡예사의 곡예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조리한 죽음(원숭이 인형)을 만난 주인공은 그 경험의 포로가 된다. 원숭이 인형이 북채를 치고 북을 칠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러한 법칙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는 쌍둥이 형이 죽기를 바라면서 원숭이의 태엽을 감는다. 그러나 그 결과 어머니와 외삼촌이 죽게 되자, 주인공과 쌍둥이 형은 그 인형을 토막내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경험의 극복은 아니다: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 비록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태엽을 돌려서 어머니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등이다. 이 와중에 재밌는 점은 원숭이 인형의 작동 방식인데, 태엽을 감아서 작동하는 것도 원숭이의 마음대로이고 죽이는 대상도 원숭이의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엽을 감아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죄책감과 무관하게 허구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박스 포장지에 적힌 실물의 삶처럼Like a Life 이라는 문구처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즉,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통제하지도 못하는 것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 유년기에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갇히는 함정에 갇힌 것이다.

재밌는 점이자 이 영화의 가장 거친 부분은 바로 쌍둥이 형의 존재다: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주인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인형의 태엽을 감았다는 사실을 알고,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형의 태엽을 감아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과 어색한 화해 장면에서 어색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인형이 북을 치는 바람에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 시퀸스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찝찝한 기류가 계속 흐르는 영화의 결과 맞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다. 영화 전체는 주인공이 자신의 편집증과 강박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과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그 화해하는 장면을 대단히 어색하게 희화화 함으로써 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쌍둥이 형의 존재는 이 영화의 인물들과 맥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레그스나 더 몽키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자면, 다들 평면적이긴 하지만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서 뒤틀려버린, 강한 유압프레스에 눌려버린 시체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짓눌려버린 모습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이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강렬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다양한 면모들을 캐치하는 것이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살아있는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케릭터가 '비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하나의 인물로 보기에는 인물과 서사가 비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는 쌍둥이 형이 처음부터 인물이었다기 보다는 동생인 주인공의 인격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고 잘 놀았지만, 동시에 그 어린 시절의 유치함에 사로잡힌 존재, 그리고 똑같이 죽음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했지만 죽음에 다른 방식으로 집착한 존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와 체벌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게 된다. 즉, 쌍둥이 형이 화해를 하는 척 하면서 어설픈 장난을 치는 모습이나 쌍둥이 형과 끝끝내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장면은 자신의 유년 시절과 작별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쌍둥이 형이 죽고, 인형을 다시 찾은 주인공은 앞으로 이제 어떡해야하냐는 아들의 질문에 가족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이 겪었었던 강박과 편집의 대물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 앞을 지나가는 죽음(흰 말을 타고다니는 창백한 기수)을 보고서 주인공은 생각을 바꾸고 이야기를 한다. 춤추러 가자고.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이전까지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고립시켰다면, 이제는 죽음이 있음을 담담이 받아들이고(더불어 자신의 유치했고 죽음에 집착했던 자신의 모습도 버리고) 삶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오즈 퍼킨스의 더 몽키는 공포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영화는 어딘가 삐걱거리고 비약으로 차있으며, 쌍둥이 형과의 화해 장면은 기괴하다할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다. 그러나 오즈 퍼킨스 영화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것은 카메라나 플롯에서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어떻게 자신이란 인간이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이상을 더 나아가려고 한다. 공포 영화 감독으로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