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아웃 4의 리뷰는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이전에 폴아웃 4의 리뷰를 썼을 때는 이것보다 더 엉망인 폴아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한 적이 있었다. 엉망진창인 서사, 그리고 이야기와 유리된 게임 시스템까지 폴아웃 4는 미인의 시체를 기워 만든 끔찍한 흉물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러나 역대 최악의 폴아웃 타이틀과 그해 최악의 게임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쥔 게임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폴아웃 76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쉐도우 오브 툼레이더는 무한한 자가 증식과 복제를 통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지만, 폴아웃 76 같이 애시당초에 게임 시스템 자체가 망가져서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런 경우는 인디쪽의 얼리 억세스 게임에서나 찾아볼 수 없는 조악한 마감에 가깝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폴아웃 76이 이미 오래전부터 논리적으로 예견된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재앙의 스케일이 논리적으로 예견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재앙의 시작은 토드 하워드와 베데즈다가 생각했던 RPG의 이상향부터였다. 베데즈다를 대표하는 엘더 스크롤 시리즈는 여타 CRPG들과 다르게 거대한 세계에서 퀘스트를 풀어나가는 것을 강조하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엘더스크롤이 구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RPG가 구체적으로 되었던 것은 아마도 스카이림이 최초였을 것이다. 게임은 거대한 필드를 던져두고, 그 속에서 채집할 거리와 할 거리를 던져두었다. 플레이어는 할 거리를 알아서 찾아가면서 자신만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후속작으로 나왔던 하스파이어 DLC에서는 불완전하게나마 하우징의 개념까지 도입하였다. 스카이림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RPG의 생활감과 게임 플레이가 함께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여기서부터 폴아웃 4와 76가 갖고 있는 문제의 싹은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RPG에 있어서 핵심은 여정이다:여정에는 목적이 있고, 행선지가 있으며, 그리고 끝이 존재한다. 이야기의 특성상, 좋든 싫든 이야기는 끝을 향해서 달려가는 방향성을 띈다. 플레이어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에 있어서 '특정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며, 이 특정한 역할이란 결국 이야기 내에서 구체화될 수 밖에 없다. 스카이림을 통해서 토드 하워드가 추구한 바는 의도하지 않게도 많은 RPG 장르 문법을 무시한 셈이었다:생활로서의 RPG란 결국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 내에서 플레이어의 역할을 버려두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용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그런 위급한 상황을 버려둔채 느긋하게 약초를 캐고 마을에서 흥정을 벌이는 셈이다.
물론 많은 RPG들이 옆길로 세는 것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카이림의 경우, 그 옆길로 세는 것이 핵심 메인 콘텐츠였던 셈이었다:플레이어는 통상적인 RPG와 달리 다양한 활동들(마법을 쓰거나, 물건을 만들거나 하는 등)을 할 때마다 보상을 받았으며, 게임 역시도 그것을 핵심으로 만들기 위해 게임 메인 퀘스트 동선에 다양한 생활 콘텐츠나 서브 퀘스트 라인을 조밀하게 배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카이림의 플레이어는 다양한 팩션 퀘스트나 서브 퀘스트, 생활 콘텐츠, 돈벌이 등을 하다보니 알두인과 세계의 위협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심지어 서브 퀘스트를 열심히 하다 메인 퀘스트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강력한 레벨과 장비, 아이템으로 알두인을 손쉽게 밀어붙여서 싱겁게 게임을 끝내는 경우도 다반사다. 오히려 게임에 있어서 핵심 서사가 곁다리에 잡아먹힌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스카이림의 경우에는 중심 서사가 존재감이 좀 적긴 하더라도 충분한 기능을 하고 있었던 편이었다. 이는 스카이림의 메인 서사가 '어디서 본듯하지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스카이림의 이야기는 복잡한 관계나 이야기도 없고,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흘러가는 편이었다(중간에 제국/스톰클록 어느 편을 들건가 결정하긴 하지만) 복잡하고 흥미롭고 재밌는 부분은 플레이어가 자의로 선택하는 서브 퀘스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었기에, 메인 서사의 가벼움은 상대적으로 커버가 되는 편이었다.
스카이림은 몇몇 이슈가 있었지만, 베데즈다 RPG 라인업 중 위에서 언급한 문제가 노골적으로 두드려졌었던 것은 폴아웃 시리즈였다:돌이켜 보아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베데즈다가 이 인수한 이후 3편부터 4편을 거쳐 76까지 폴아웃 시리즈는 자사 엘더스크롤 프렌차이즈에 들어갈 요소들을 실험하기 위한 2군 프랜차이즈였다. 폴아웃 3는 기존 쿼터뷰 방식의 시리즈를 탈피해서 엘더스크롤의 엔진과 게임 시스템, 방법론을 적용한 작품이었다. 폴아웃 3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이 갖고 있었던 퀘스트 동선이나 던전 구성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점이다:1과 2편에 대한 개선이 아닌 엘더스크롤 시리즈와 비교되었다는 점에서 폴아웃 3는 폴아웃 시리즈의 정통 후계작이 아닌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변종처럼 느껴졌었다. 또한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3편이 참조한 것은 기존 폴아웃 1편과 2편의 테이스트가 아닌, 엘더스크롤 오블리비언식의 전형적인 영웅서사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폴아웃 3는 시리즈 전통 후계작이라기 보다는 엘더스크롤 폴아웃 버전이라고 평가받았어야 했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 CRPG 프랜차이즈가 살아돌아왔다는 점에 더 의의를 두고, 이러한 변화점에 대해서 크게 지적을 하지 않은 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3편 이후, 폴아웃 1과 2편을 만든 제작자들 손에서 폴아웃 뉴 베가스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폴아웃 1과 2편을 절대적인 경전으로 취급해야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뉴 베가스는 3편의 시스템을 끌어오면서 3편의 밋밋한 스토리 라인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1편과 2편이 가진 매력을 되살린 작품이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을 파묻은 악역을 찾아 개인적인 여정을 시작한 배달부를 따라서 거대한 사건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은 뉴 베가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시리즈를 만들었던 제작자들이 DLC를 통해서 내린 이 시리즈의 결론일 것이다:모든 것을 바꾼 배달부의 여정을 통해서 율리시즈는 '전쟁, 전쟁은 바뀌지 않는다....그렇다면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1과 2편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이질적이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뉴 베가스를 중심으로 전후의 폴아웃 시리즈를 살펴본다면 무엇이 이질적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때까지만 해도 폴아웃 시리즈는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주인공(뉴 베가스의 배달부와 볼트에서 나온 3편 주인공)들이 여정을 통해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결정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림을 거쳐 폴아웃 4로 넘어오면서 이야기는 180도 달라지게 된다.
폴아웃 4의 핵심은 스카이림의 DLC 하스파이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인크래프트와 모딩을 적절하게 섞어서 게임 시스템 자체가 지원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폴아웃 4는 스카이림 이전의 게임들과 완벽하게 다른 골격을 갖고 있는 게임이었다. 게임 내의 모든 아이템은 특정한 자원으로 분해/환원될 수 있으며, 플레이어는 잡동사니를 긁어모아서 더 나은 무기와 아이템을 만들거나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 폴아웃 4에서 높게 평가할 부분은 마인크래프트에서나 볼법한 시스템이 기나긴 시나리오를 갖고 있는 트리플 A RPG에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스카이림부터 내려온 토드 하워드의 RPG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터뜨린 기폭제가 되었다. 폴아웃 4에서 서사는 더욱 의미없어지고 산만해졌으며, 게임 내 콘텐츠는 배경과 맞지 않을뿐더러 시스템 상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플레이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지 수는 적었다. 차라리 게임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는 모딩이나 모든 것이 자유로운 마인크래프트에 비하면, 폴아웃 4가 거둔 성공은 반쪽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폴아웃 4는 여정과 생활이라는 두가지 게임 플레이 스타일에서 큰 충돌이 일어난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핵전쟁 이후, 모든 것이 멸망해버린 세계에서 자신의 가족을 찾아 여정을 떠나는 부모의 역할을 맡았다. 폴아웃이나 엘더 스크롤 시리즈 최초로 주인공 케릭터에 목소리가 도입된 것도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이 여정의 서사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려 했었던 것이다. 또한 납치당한 가족을 찾아 황야를 해매다 결국 변해버린 가족을 만나고 거기서 주인공이 결단을 내린다는 점은 존 포드의 고전 서부극 수색자에서 받은 부분이다. 하지만 폴아웃 4가 나름대로 여정의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에 비해서 게임 플레이의 방점은 생활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플레이어는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마을과 구조물을 만들고, 그 구조물을 지키기 위해서 다양한 활동들(사람을 구한다던가, 처들어오는 적들을 죽인다던가)을 해야한다. 하지만 여기서 생활에 정착하여 멈추려는 동력과 자식을 찾아 떠나려는 여정의 동력이 서로 충돌하게 된다. 여정의 서사와 여정의 과정중에 만나는 세력들이 모두 나사 빠진 족속들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폴아웃 4는 스카이림보다 더 강력한 여정의 동력을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여정이 진행되지 않게끔 더 큰 족쇄(정착지와 건설 콘텐츠)를 플레이어에게 부과하였다. 그 결과, 실제 게임에 몰입하여 정착지를 꾸미고 사람들을 정착지에 정착시킬수록, 플레이어는 핵전쟁 이후 잃어버린 혈육을 찾고 다양한 팩션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중심 서사가 점점 더 이상하게 느끼게 된다. 정착지를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지키는 이러한 과정이 중심 서사를 구성하는 핵전쟁 이후의 세계와는 너무 동떨어진 감각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글쓴이는 폴아웃이라는 프랜차이즈와 테마를 빼면 폴아웃 4의 게임 플레이나 시스템이 재밌고, 몇몇 조건 하에서 더 나아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도 폴아웃 4의 등장 전후로 베데즈다에서 스타필드라는 코드 네임을 가진 새로운 RPG 프랜차이즈를 만든다는 루머가 돌았을 때(실제 스타필드의 존재는 2018년 E3에 확인되었다), 글쓴이는 폴아웃 4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거쳐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감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스타필드의 루머가 돌던 2015년에서 2016년 경, 스타필드에 멀티플레이가 탑재될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고 실제 이것이 좀 빠르긴 하지만 폴아웃 76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내부사정은 알 수 없지만 폴아웃 76은 여전히 베데즈다가 폴아웃 시리즈를 테스트용 2군 프랜차이즈로 보고 써먹는 연장선에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폴아웃 76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최악의 형태로 나왔다. 웃기는 점은 글쓴이는 76의 멀티플레이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폴아웃 4에서 나름 검증되었고, 훗날 4인 정도 규모의 코옵 멀티플레이를 지원하는 폴아웃 4기반의 게임이 나온다면 그것 나름대로 훌륭하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제 등장한 폴아웃 76은 그야말로 수습이 불가능한 형태의 게임이 되었다: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한 세션에 수십명이 들어가는 세미 MMO의 문법을 취했고, MMO 주제에 타인과 상호작용은 거의 무의미해졌으며, 최근 MMO의 성장 곡선 트렌드(재미없는 부분은 빠르게 넘길 수 있게끔, 로스트 아크가 그랬던것처럼)를 무시한 단조롭고 지루한 흐름, 설정 붕괴, 들어갔다 나오면 자동적으로 철거되는 플레이어의 캠프, 쓰레기 같은 UI, 불안정한 서버 환경, 말도 안되는 버그, 실시간으로 옮겨서 재앙이 되어버린 VATS 시스템, 분명 부분 유료화 가챠를 염두에 두고 만든 퍽 시스템 등등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베데즈다가 자사의 엘더 스크롤 온라인을 나름대로 오랫동안 운영한 전력이 있었다는 점, 여타 모딩 커뮤니티에서 멀티플레이 모드나 여타 모드들에 대해서 조사만 했어도 이러한 문제의 80%는 빗겨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폴아웃 76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심지어 한정판 캔버스 가방을 둘러싸고 플레이어에게 기만적인 행위를 한 점은 게임의 완성도를 넘어서 76을 둘러싸고 베데즈다가 기업으로써 최소한의 도리조차 하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러한 폴아웃 76의 엄청난 마감을 설명하는 데는 '외부로는 공개될 수 없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썩어 곪아 터졌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한 것은 폴아웃 4,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베데즈다의 RPG 이상향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기존 RPG 전통인 여정의 서사와 베데즈다가 추구하는 생활로서의 RPG와 이야기 사이를 중재하려는 그 어떤 노력이나 보완없이 스카이림을 넘어서 폴아웃 4, 그리고 76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폴아웃 시리즈를 실험하는 용도로 항상 사용했던 베데즈다의 성향을 비추어보았을 때, 76의 실패는 엘더스크롤 6과 스타필드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 20년 이상 유지되었던 유명 프랜차이즈와 팬덤을 그저 갖다 버리는 패 정도로만 사용하는 회사에게 장기적으로 팬덤과 소비자가 지지를 보낼지는 부정적이다.
'게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대난투 얼티밋 - 스피릿을 중심으로 下편 (0) | 2018.12.30 |
---|---|
[리뷰]대난투 얼티밋 - 게임 매커니즘에 대하여 上편 (0) | 2018.12.25 |
[칼럼]오픈월드 게임과 트리플 A 게임에 대한 짧은 고찰 (0) | 2018.12.20 |
[칼럼]모탈컴뱃 11은 한국에 정식 발매될 수 있을까? (2) | 2018.12.09 |
[리뷰]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 4 - 블랙아웃과 콜옵의 미래에 대해서 (0) | 2018.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