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 존 카멕은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 같다. 있어야 하겠지만, 중요하진 않다."고 이야기했다:어쩌면 게임에 있어서 스토리의 위치를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은 하는 매체지, 이야기를 듣거나 보는 매체가 아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하는 점은 포르노에서도 서사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티쉬나 성적 환상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느슨하지만 확고한 기본골격들이 포르노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즉, 뒤집어서 본다면 게임에서도 여전히 이야기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는 매체인 게임에서도, 자신의 행위와 몰입을 정당화시켜줄 기제로써 플룻과 게임 서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게임 장르에서 스토리라 할 수 있는 메인 플룻이란 요소가 항상 중요한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게임 서사(메인 플룻, 시나리오를 떠나 게임을 묘사하는 다양한 기법과 환경들)를 통해서 통일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은 게임에 있어서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게임 서사는 RPG 장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폴아웃 4는 재앙으로 평가되어야 한다:이보다 더 끔찍한 게임들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폴아웃 4의 스토리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고 느낄만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RPG 장르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 평가받고 일가를 이루었다고 모든 이에게 인정받는 프랜차이즈가, 감히 '이 지경까지 떨어지다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시점에서 폴아웃 4의 문제는 이미 심각하다. 그것도 천문학적인 단위의 예산, 기록적인 단위의 시간과 인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단지 게임 서사와 이야기의 실패만으로 망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폴아웃 4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의 특징은 '종말 또는 멸망'Apocalypse이라는 파국적인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진다면 그 이후에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측면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특징은 사람들이 우리가 갖고 있었던 가치와 믿음,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반성이자 재고, 회고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같은 경우에는 멸망 이후에도 유지되는 질서정연한 사회와 시스템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통용되는(슬프게도) 페미니즘 담론을 적용시키면서 종말이란 모든 가치와 시스템이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는 테마를 기저에 깔고 이를 우직하게 정면으로 돌파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훌륭한 표본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와 같이 '종말'이라는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종말이라는 핵심적인 사건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핵심이자 주요한 매력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폴아웃 시리즈가 단순히 CRPG의 고전이 아닌 '포스트 아포칼립스 CRPG'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은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테이스트를 제대로 살려냈기 때문이다(물론 좀 더 하드코어한 사람들은 폴아웃 보다 웨이스트랜드 쪽을 더 상징적인 작품으로 꼽겠지만):전쟁,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War Never Changes의 유명한 격언으로 시작하는 폴아웃 시리즈는 전쟁 이후 도덕이나 가치관 자체가 파괴된 세계를 그려낸다. 마치 전쟁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았듯이, 인간이란 존재도 멸망이라는 파국적인 사건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지만 이러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컨트롤할 수 있는 외부적인 사회나 제도, 가치가 무너져서 사라졌다. 그렇기에 폴아웃 시리즈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에 있다:구세대의 도덕과 가치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본능에 충실하게 자신의 이익만 챙길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도 사악하게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타인을 마음대로 이용할 것인가. 폴아웃 시리즈의 핵심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부분을 펼쳐낼 수 있는, 게이머들을 매혹시킬만한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는데 있다. 그렇기에 수많은 게이머들은 클래식 폴아웃 시리즈가 시스템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고 칭송하지만, 그 자유도의 이면에는 플레이어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게임 내에서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과 이야기 및 시스템이 있었기에 폴아웃 시리즈의 재미는 가능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폴아웃 3는 이러한 강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작품이었다:아버지의 존재와 멸망한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는 아버지의 노력, 그리고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경계에 묶여서 코 꿰이듯이 끌려다니는 듯한 폴아웃 3의 스토리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비범한 출신성분을 가진 영웅이 세상을 구한다)에는 어울리는 내용이지만, 세상이 대충 멸망해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또한 아버지라는 절대선과 구세대의 가치와 질서가 게임의 시스템에 삽입되어 카르마 시스템을 구축하고, 게이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 카르마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점에서 게임은 마치 시시콜콜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마냥 게이머의 행동을 평가하고 은연중에 게이머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도록 강제하고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 엔딩 직전의 이벤트에서 게이머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경험한다:내가 어떠한 길을 걸었든, 아버지가 남겨놓은 과업을 내가 해야만 한다. 물론 ZAX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오염된 물을 뿌릴 수도 있고, 게이머는 메인 플룻 외적/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악한 행동이 전체 플룻 상에서 보았을 때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애시당초에 아버지의 유지를 잇지 않는 방향도 있지 않을까? 이미 게임은 정답을 정해놓고(구세대의 정의와 도덕), 게이머에게 선택지라는 거짓말과 속임수로 게이머의 선택을 보장해주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폴아웃 3는 메인 플롯 외부에서는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이지만, 정작 메인 플롯 내부에서는 게이머에게 사기를 치는 게임이라 악평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게임이었다.


하지만 원작자들(옵시디언)의 손으로 돌아온 폴아웃 뉴 베가스는 달랐다. 그들은 폴아웃 3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운 부분을 훌륭하게 커버하는데 성공한다. 뉴 베가스는 핵전쟁 이후에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부딪히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와중에 절대악도 절대선을 표상하는 인물이 아닌 '배달부'라는 독특한 케릭터를 집어넣고, DLC의 연작 끝에 '전쟁이 바뀌지 않는다면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폴아웃 시리즈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말을 내렸다. 게임 자체가 버그가 많고 폴아웃 3 베이스이기 때문에 폴아웃 3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폴아웃 뉴 베가스는 클래식 폴아웃 시리즈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폴아웃 뉴 베가스의 성공은 폴아웃 4의 주요한 딜레마를 형성하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폴아웃 4의 가장 큰 변화는 워크샵이나 UCC 지향적인 게임 시스템보다도 '주인공에게 목소리가 생긴 것'이다. 사실상 전자는 모딩 커뮤니티의 개념과 마인크래프트에 관심이 많았었던 베데즈다의 성향(스카이림 하스파이어에서 찾아볼 수 있었듯이)을 감안하자면 그리 놀라웠던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자는 상당히 충격적인 부분이었다:목소리가 없는 주인공과 있는 주인공의 차이는 게이머가 그 케릭터에 얼마나 이입을 할 수 있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폴아웃 시리즈가 이전까지 게이머의 분신으로써 몰개성한 케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폴아웃 4에서는 자식을 되찾고자 하는 구세대의 아버지/어머니의 케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시나리오 라이터는 이를 통해서 강렬한 모티브를 설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 인해서 폴아웃 3가 만들어낸 거대한 실수처럼,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강렬한 연결고리로 묶인 메인 플룻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적 특성을 죽이는 문제가 있다:이미 폴아웃 4는 선택해야 하는 가치가 정해져 있다. 게임은 게이머에게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선택지를 던져놓고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답을 정해놓고 게임을 진행한다. 그렇기에 트레일러가 공개되는 시점에서부터 폴아웃 4는 폴아웃 3가 겪었던 문제를 고스란히 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게임의 메인 반전까지 고려해보자: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본인은 폴아웃 4의 메인 반전이 황당하고 뜬금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제작진은 이러한 반전의 핵심을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아들을 따라서 뭔가 구린 인스티튜트를 지원할 것인가, 그나마 도덕적으로 깔끔한 다른 집단을 도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구세대의 기술과 함께 덤으로 아들까지 싸그리 날려버릴 것인가)를 제공하려고 이런 선택의 기로를 제공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대략 몇십시간 정도 황무지 탐사를 끝마치고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때, 무슨 난장이 똥자루 처럼 늙어버린 노친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오'라고 이야기할 때 느끼는 것은 어떤 센티멘탈이나 충격이 아닌 황당함이다. 심지어 텔레포트 같은 최첨단 기술을 쓰는 집단의 수장이 치유불가능한 암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본인은 '사실 암세포도 생명이니까 그대로 있으려고'라고 이야기했던 모 한국 드라마가 생각날 정도로 작위적이며 편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작위적인 설정에도 기반하여 게임은 후술할 팩션의 가치와 맞물려서 아들을 따를지 버릴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폴아웃 3가 나은 편이었다:망나니 자식을 플레이하든 착한 자식을 플레이하든 아버지가 눈 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는 시퀸스는 게이머에게 섬세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감정을 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살짜리 아들이 납치되서 산전수전 하면서 겨우 아들을 찾았더니, 1)아들은 자기보다 나이 5갑자는 더 먹은 면상을 하고 2)보스턴 지하에 제 3 신동경도시 뺨치는 구조물을 만드는 기관의 수장이 되서 3)사실은 텔레포트도 할 수 있는 과학기술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불치의 암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고? 적어도 폴아웃 3 같은 효과를 내고 싶었다면, 적어도 1~3번 중에서 두가지 정도는 뺐었어야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뉴베가스의 팩션 서사, 어떤 가치를 대변하는 세력을 게이머가 선택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태를 폴아웃 4는 취한다. 하지만 문제는 폴아웃 4의 각 세력들이 대변하고 있는 가치는 전적으로 가치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어울리지 않은 것들 뿐이라는 것이다. 폴아웃 4에는 크게 4가지의 팩션이 등장한다:신스 노예 해방을 추구하는 레일로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를 내거는 민병대 미닛맨, 폴아웃 시리즈 전통의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 전 기술 집단이었던 인스티튜트까지, 겉보기엔 각기 개성 넘치는 팩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 실상은 게임의 배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집단들이 뭘 위해서 싸우는지도 모르는 바보 짓거리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미국의 새로운 건국을 상징하는 미닛맨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지킨다라는 미국 전통의 민병대의 전통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닛맨이 보스턴을 침공하는 외부 세력인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과 대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스턴이 미국 독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점에서 미국 건국세력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일로드라는 조직은 19세기 중반의 흑인 노예를 빼돌려서 자유민으로 만들던 실제 역사상의 조직을 모티브로 두고 있다. 이 둘이 하나의 공간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묘한 상황이다:한 쪽은 외부의 적들과 싸우고, 다른 한 쪽은 내부의 도덕적 딜레마와 투쟁한다. 이들이 게임 내의 보스턴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 여지가 있는가? 게임 내의 이야기 전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기에는 어떠한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술로써 구시대의 세계를 다시 만들려는 인스티튜트와 미닛맨의 관계는? 사실 세력들이 서로 지향하는 가치와 이해관계가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과 인스티튜트, 레일로드와 인스티튜트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부딪힌다고 평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한 관계다.


동료 시스템은 그나마 다른 요소들에 비해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요소를 갖고 있다. 폴아웃 4는카르마 시스템이 사라지고 동료별 호감도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개성이 뚜렷한 동료들과 함께 다니면서 동료들이 좋아할법한 특정 행동을 주로 하는 것으로 게이머가 평가받게 된다. 어떤 절대적인 기준(카르마 시스템)을 삭제하고 상대적인 기준(동료마다의 평가)으로 돌아선 것은 나름대로의 참신한 시도라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 헛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게이머는 악한 짓을 좋아하는 동료와 다니면서 악한 짓을 밥먹듯이 하다가도, 그 동료를 돌려보내고는 착한 짓을 좋아하는 동료와 함께 다니면서 착한 짓을 하고 다닐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동료에 맞춰서 플레이를 하면 모든 동료와의 호감도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과연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측면에서 혼란이 올 수 밖에 없다. 플레이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사람들 안보는데서는 식인이나 도둑질을 밥먹듯이 하다가도 남들 보는 앞에서는 천사처럼 구는, 그야말로 위선자의 표본이자 이중인격자로 보이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폴아웃 4 메인 플롯 문제의 정점은 '신스'라는 인조인간의 존재다:원래 폴아웃 3에서도 서브 퀘스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등장하였던 신스가 폴아웃 4에서는 보스턴의 주민들을 바디 스내칭하고, 과연 인간과 신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이야기에 이러한 요소가 필요했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우리가 알고 있던 제도, 시스템, 인프라, 그 모든 것이 붕괴한 세계를 지칭한다. 하지만 폴아웃 4에서 등장하는 인스티튜트와 신스의 무지막지한 물량은 멸망한 세상에 부적합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게임적인 수사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라기 보다는 SF의 세계마냥 온갖 휘황찬란한 기술들이 폴아웃 4의 시대에 만들어지고 굴러다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게임의 메인 플룻에서부터 후술할 빌리징, 크래프팅 등의 게임 플레이에까지 적용되는 이야기이며, 게이머에게 보스턴이라는 공간은 핵전쟁 이후의 멸망한 세계가 아니라 납 대신 방사능이 들어간 수돗물을 마시고 사람들 머리가 죄다 훼까닥 돌아버려서 완벽하게 망하지도 못하고 정말로 대충 망해버린 현실의 플린트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결과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한 폴아웃 4의 게임서사는 그냥 '재밌어 보일만한 것들을 다 때려넣은' 수준의 잡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게임은 빌리징과 크래프팅의 개념을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특히 빌리징의 경우에 있어서 폴아웃 4는 게임 내에서 편리하게 빌리징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건물과 인프라를 만들고 자신만의 마을을 꾸며서 여러 지원(물자에서부터 심지어는 포격 지원까지)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베데즈다가 생각하는 게임의 이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크래프팅의 경우, 베이스가 되는 무기에 업그레이드 파츠를 조합해서 무기 자체가 다양한 속성을 지닐 수 있게끔 만들었다. 실제로 이러한 플레이를 게임은 장려하고 있고, 또한 게임의 많은 재밌는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빌리징과 크래프팅이 재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원래 이러한 요소들은 과거 폴아웃 3과 뉴 베가스의 모딩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이 자체가 매우 혁신적인 게임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원래 게임의 문화로써 있었던 부분을 게임 내 시스템으로 통합시킨 것에 불가하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게임 내로 들어오면서 게임이 정말로 요상한 모양새를 지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게이머는 이제 황룡사지 9층 목탑이나 피사의 사탑을 뺨치는 거대한 구조물들을 만들 수 있는데, 문제는 폴아웃 4의 배경이 핵전쟁으로 대충 망한 세계라는 점이다. 이게 재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 본 리뷰어도 이 컨텐츠에 수십시간을 투자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정, 이것이 폴아웃 4라는 게임에 필요했었단 말인가? 게이머는 핵전쟁으로 대충 망한 세계 속에서 리어카 끌고 다니는 고물상 할아버지 마냥 폐품을 열심히 주워야 한다.(이런 점에선 오리지널 디아 3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내에선 엄청나게 많은 자원이 필요한데, 그럴 때는 상인들로부터 수십 kg의 재료들을 날이면 날마다 무한정으로 병뚜껑을 내고 살 수 있다. 이 병뚜껑을 모으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이 주는 퀘스트를 해결해야 하는데, 거의 게임 속 시간 내 3일의 한번 꼴로 생기는 납치, 습격 등을 막아내고(심지어 버그였는지 본인은 거의 모든 납치 습격 방어 퀘스트가 마을 한 곳에서만 생겼다, 이쯤되면 아방가르드한 재미까지 생긴다) 주민들에게서 병뚜껑을 갈취하여 또다시 마을을 꾸미기 위한 재료를 사야한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이러한 게임의 흐름을 MMORPG에서 볼 수 있는 반복 노가다 퀘스트의 흐름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폴아웃 4의 지향점은 스토리가 끝나도 계속 할 수 있는 게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DLC 내용 자체가 크래프팅과 빌리징에 내용을 추가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폴아웃 4에 어울리는 내용이었는지, 그리고 게임이 이러한 변화를 게이머에게 납득시키고 있는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폴아웃 4는 이미 상술한 내용면에 근거하여 충분히 낙제점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시 존 카멕이 했었던 말로 돌아와야 한다:"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 같다. 있어야 하겠지만, 중요하진 않다." 핵심은 폴아웃 4의 스토리와 게임서사는 포르노가 갖고 있는 그것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풍요 속의 빈곤이다: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갖추기 전보다 더 엉망이다. 폴아웃4는 폴아웃 3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걸 확대 발전 재생산시켜 버렸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게임이 어느정도의 재미를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그렇다면 폴아웃 4를 클리어하고 남았을 때, 게이머에게 무엇이 남는가? 자기보다 더 늙은 면상을 한 아들을 죽인 죄책감? 세상이 대충 멸망하고 난 뒤에 황룡사지 9층 목탑을 만들어낸 성취감? 식인과 선행을 반복하면서 얻은 동료와의 관계? 폴아웃 4에는 남는 것이 없다:차라리 무언가 남는 게임을 하고 싶다면, 폴아웃 뉴 베가스나 폴아웃 3를 사서 모드를 깔고 플레이를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라고 본인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