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게임이 영화라는 대중매체의 문법을 벤치마킹했었던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산업화된 문화양식으로서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꿈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문화적 매게체였으며, 영화라는 영역 바깥에서도 다양한 산업 및 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었던 중요한 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게임과 영화가 공유하는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관객과 극의 '유리'일 것이다:흔히들 연극에서 이야기 되는 '제 4의 벽'의 존재, 관객과 무대 사이에 놓여있는 이 가상의 벽은 극과 관객, 가상과 현실, 실제와 허구 등을 나누는 중요한 경계였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은막이라는 형태로 물리적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관객들에게 은연중에 영화가 허구임을 강조하는 장치로도 기능하였다. 그리고 연극과 영화들 사이에서 이러한 제 4의 벽이라는 전제를 무시하려는 시도들이 끊임 없이 있어왔다. 관객 모독은 의자에 엄숙하게 앉아있는 관객들에게 물을 뿌리고 조롱하였다. 영화 하녀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 극부분에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4의 벽의 존재, 이 가상선의 존재가 영화라는 장르 상에선 근원적으로 무너질 수 없었다.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은 전적으로 '카메라'라는 물리적인 한계에 사로잡혀 있다:관객은 카메라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카메라 바깥의 세계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선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곳으로 옮겨가며 다양한 곳을 보게 된다. 그렇기에 영화의 세계, 카메라 내부의 세계는 엄밀하게 보자면 우리가 보는 세계와 다른 부자연스러운 세계이다. 하지만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를 숨기기 위해, 혹은 드러내기 위해서 다양한 기법을 이용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영화를 자연스럽게 영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도 영화와 비슷한 물리적인 환경을 공유하고 있다:게이머는 스크린 앞에서 게임을 플래이하며, 게임 속의 케릭터와 게이머는 컨트롤러라는 정해진 문법 양식 형태로 게임 내의 케릭터와 상호작용한다. 게임 산업이 영화 산업을 밴치마킹한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비슷한 고객층, 산업화된 대중문화라는 공통점 등) 게임과 영화가 같는 공통점 중에 그러한 소비자와 콘텐츠 사이에 물리적으로 유리가 존재하고,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에 대한 훌륭한 선례였기 때문이었다. 


북미쪽 콘솔 게이밍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하면서(대충 모던 워페어 같은 롤러코스터 형식의 밀리터리 FPS가 나오는 2007년쯤을 기점으로 볼 수 있겠다), 게임들이 헐리웃의 영화 연출을 게임에 도입하고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QTE나 콜옵식의 롤러코스터 연출, 언차티드 같이 게이머의 시선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영상 연출 등의 다양한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기법들과 게임의 기법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그것은 바로 게임은 게이머의 행위에 의해서 진행되는 매체라는 점이고, 게임이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게이머의 모든 행위를 통제할 수 없고, 게이머는 끊임없이 게임 내의 세계에 대해서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버튼을 눌러서 애도를 표하세요'라는 콜옵 어드밴스드 워페어의 밈일 것이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 글을 참조하시라:http://leviathan.tistory.com/1922


물론 모든 게임이 이런 것은 아니다. 스펙옵스, 스탠리 페러블이나 너티독의 라오어, 그리고 다양한 게임들이 그들의 벤치마킹 대상이자 선배 매체인 영화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카메라와 연출을 이용하여 실험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영화가 가졌던 근원적인 전제이자 한계, 물리적인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상현실 VR, HMD(Head Mount Display,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형태)라는 새로운 형태의 디스플레이는 이러한 장벽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스크린이라는 유리된 막의 형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의 눈높이에서 게이머의 머리와 시선과 함께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연동되는 형태의 VR의 발상과 개념은 고정된 카메라를 가진 기존의 게임매체와 다르게 유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써머레슨을 보자(링크는 여기로):써머레슨의 개발 일지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다. VR이라는 기기가 갖고 있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써머레슨은 데모의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장르인 액션이나 FPS가 아닌 어드벤처의 형식(여름날의 과외 같은)을 사용하였고, 동시에 우리가 게임에서 접하는 것과 다른 형태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문법과 형식은 게임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게이머와 컨트롤러, 그리고 스크린과 게이머 사이의 유리라는 장르적 문법에 새로운 변주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깊게 볼만하다.


사실 VR이나 HMD의 개념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닌텐도의 대표적 삽질로 유명한 버추얼 보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째서 지금에 와서 VR이 다시 하나의 미래로 각광받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좀더 명쾌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기기들이 싸게 보급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뒷받침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오큘러스 리프트나 프로젝트 모피어스 같은 제품들이 30만원 전후의 파격적인 가격에 보급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서 많은 게임들이, 특히 제한된 시야와 사람의 머리에 연동되어 움직이는 스크린이라는 개념과 결합한 1인칭 인디 호러 게임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VR은 만능이 아니다:사람과 스크린 사이에는 여전히 물리적이며 절대적인 막이 존재한다. 이 막은 디스플레이 자체가 스크린이 아닌 정보화되어 인간과 결합하는 형태(메트릭스 같이 신경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가 되지 않는다면 넘을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FPS나 3D 카메라에 멀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듯이, VR에 멀미를 느낄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그 수는 3D 멀미를 느끼는 사람들보다 더 많을 것이다. VR은 여전히 검증을 받아야 하는 기술이자 표현방식이며, 이것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도 전에 콘텐츠 부족으로 소멸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VR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주의깊게 눈여겨 볼만하다. VR을 통해서 우리는 게임이 여지껏 보아왔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 새로운 형태의 세계, 더 나아가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며, 이것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 뒷세대의 게임이나 게이밍 환경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