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나치를 죽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다:마치 클래이 사격처럼, 일정한 서사(나치가 등장하고, 세계가 위험에 빠진다)와 함께 게이머는 모서리마다 튀어나오는 나치 군복을 입은 나치 군인들이나 하켄크로이츠를 이마에다 박아놓고 나 죽여줍쇼 하고 달려드는 표적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화려하며 빠르게 처리하는가를 테스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죽이는데 있어서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게임 서사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근래의 게임들이 ‘마땅히 죽여야 하는 적’에 대한 개념에 의문을 품고, 서사에 있어서 분명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닌 적마저 서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복잡한 서사를 보여주는 경향이 생기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를 죽이는 것은 어떠한 서사의 설명도 절대적으로 필요가 없다:나치니까 죽여도 된다. 사람들은 나치 군복을 입은 허수아비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너그러울 정도로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나치즘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전인류를 향한 적대행위이자, 파괴행위이다. 하지만, 과연 나치즘이 나치의 ‘군복’을 입은 자들과 하켄크로이츠의 기치를 내걸은 자들로만 ‘한정’지어서 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재기하였던 문제들, 나치즘이 존속할 수 있게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의 ‘악’의 문제라던가 나치즘이 본격적으로 전인류를 향한 전쟁행위로 이어지기 전, 유럽 전역에서 나치즘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바라본 시각도 존재했다는 점 등등은 나치즘이 단순하게 하나의 군복, 상징으로 좁혀서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임을 암시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울펜슈타인이나 다른 게임들이 나치즘을 특정한 군복과 상징을 입은 존재로만 한정짓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그것을 비판하려면, 단순히 게임을 넘어서 다양한 대중문화의 성향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덧붙이자면 울펜슈타인은 그러한 비판을 하고 싶지 않은 잘만들어진 게임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문화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상징과 군복이야말로 간편하게 적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기 떄문이다:타란티노의 바스타드-거친녀석들에서 이야기했던 것 처럼, ‘너희 나치들은 군복으로 구분이 가능하지, 하지만 군복을 벗고 있을 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걸(이마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새기는 것) 하는 거지’처럼 군복과 상징이야말로 아주 편리하게 기능하는 피아식별 장치이며 서사를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군복이 내가 나치를 쏴죽이기 위한 도덕적 양심을 덜기 위한 방책에 불과한 것일까? 적이 군복을 입는 것 자체는 게임플래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단순하게 적을 나치로 설정한 것 이상을 넘어서 게이머의 행위, 즉 게임 플래이와 군복입은 적과의 상호작용 측면인 정당한 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토포필리아와 게임을 접합시키면서 게임 서사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의내린 적이 있었다. 게임서사란 개념은 게임의 표피, 겉으로 묘사되는 요소들의 총칭으로서 게임의 이야기, 그래픽, 사운드, 미술 컨셉 등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게임에 있어서 게임서사라고 스스로 정의내린 게임의 표현 양식 일체들과 다르며, 게임만이 갖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고유하며 본질적인 특색이 존재한다:그것은 게이머의 행위에 의해서 게임은 향유되어진다는 것이다. 미연시 같이 행위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케이스에 있어서도, 게이머는 선택을 통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소설과 미연시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게이머가 게임을 자신의 행위로 플래이할 수 있더라도, 게임은 게이머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다:가령 테니스 게임에서는 라켓으로 심판을 때린다든가 관객에게 라켓을 던진다든가 등의 행위는 가능하지 않다. 게이머의 행위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규칙에 의해서 장려되거나 금지되는데, 이러한 게임의 규칙이야말로 게이머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내린 게임서사와 게임 규칙을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장기라는 게임에 있어서, 게이머들은 각각 정해져있는 규칙에 따라서 장기말을 움직여야 한다. 즉, 장기의 룰은 게이머의 행위를 규율한다. 하지만,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규칙들은 각각의 장기말들과 장기판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서 구현된다. 이러한 표현물과 상징물 일체들, 그리고 장기라는 판과 그것이 초나라-한나라의 싸움을 모사하는 것이라는 맥락까지 합해져서 게임이라는 표면을 이루는 게임서사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게임 서사와 규칙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가끔식은 서로가 구분이 불가능할 때도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섞여있는 회색의 지점에도 불구하고, 게이머의 행위라는 기준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 두 개념은 분리가능하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던 정당한 전쟁이라는 감각은, 게임 서사(역사의 악 나치를 적으로 설정) 이외에도 ‘게임 규칙’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칼 슈미트의 저서 파르티잔은 민족주의 국가와 국민이념, 그리고 전쟁기술의 발달이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비정규군의 존재, 파르티잔(군복을 입지 않고, 무기를 휴대하지 않으며, 책임을 질 지휘관이 없는)을 만들어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비정규군의 존재는 근현대사 내내 일어났던 전쟁들에 등장하면서 재래적인 전쟁의 관념을 바꾸었다. 그에 반해 구세대의 산물이라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전쟁 개념의 산물인 헤이그 육전 ‘규칙’은 다음과 같은 전쟁 규칙을 정하였다:전쟁은 피아식별이 가능한 군복과 상징물을 착용하고, 그리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한한 정규군 당사자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지휘관의 명령 하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물론, 2차세계대전 이후, 유명한 파르티잔 중 하나인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비정규군의 비중이 커짐으로서, 비정규군도 육전규칙 하에 전쟁법 상 교전 당사자로 포로의 지위 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이며 구세대적인 전쟁관념은 민간인과 군인의 절대적인 구분, 서로가 서로를 죽일 권리가 있는 교전주체들 간의 살육의 개념이 강했으며, 이는 군복으로 표지되는 국가간의 정당한 싸움이라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게임의 규칙도 ‘적과 나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피아식별이 가능힌 상황에서 싸움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헤이그 육전 규칙괴 실제 세계의 공정하며 정당한 전쟁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 정당한 전쟁관념을 토대로 규칙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전쟁에서의 폭력을 학습하는 효과를 갖지는 않는다. 게임을 살인자 양성 시뮬레이터라 비판한 참전용사들의 비난은 게임속의 전쟁이 실제와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점을 묵과하고 있기에 절대적인 오류라고 볼 수 있다(비록 게임이 게이머를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비인간적인 폭력에 둔감하게 만들지언정) 게임 속의 전쟁은 현실과 극단적인 괴리가 있으며, 게임 속의 규칙이 게이머를 즉각적으로 옭아멜 수 있는 절대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면, 실제에서의 규칙은 사후처방적이며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맥락들이 얽메여서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은 게이머의 작위와 부작위를 규정지음으로서 ‘공정함’이라는 관념을 구축하는데 있다.


게임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는, 좀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여기 하나의 FPS 게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게이머는 코너마다 튀어나오는 적병들을 모조리 쏴죽이고 앞으로 쭉쭉 전진하여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된다. 콜옵 처럼 적이 단 한 종류만 출현한다면, 게이머는 고민할 필요 없이 적을 죽이면서 계속 앞으로 진행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적병 이외에도 난민 소년들과 비무장한 여인들이 나와서는 ‘쏘지마세요!’를 외치더니, 갑자기 플래이어에게 다가가서는 자폭테러를 가하는 패턴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게이머들은 상당한 좌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사실은 쏘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게이머들은 거부감을 느끼면서 총으로 이들을 사살해야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인터미션에서 게이머가 총으로 사살한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이 나와 게이머를 성토한다면, 게이머는 더이상 이 게임을 플래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죽어마땅한 절대적인 적의 개념도, 우리의 양심의 부담을 덜면서 상대편을 죽일 수 있는 절대적인 전쟁의 규칙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복잡한 맥락과 상관관계들이며, 그 무엇도 흑백으로 뚜렷하게 구분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게임은 ‘공정한’이라는 감각을 심어주기 위한 단순한 규칙에 의해서 통제되며, 현실의 모사가 아닌 ‘가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현실의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판단의 난해성을 들어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뚜렷한 흑백을 나눌 수 없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아래서 고통받았으며, 누군가는 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그것이 설령 단순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그 자체를 넘어서서 그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묵인한 사회 전체를 향한 고발이며 공동의 책임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해자, 죄인-단죄자의 구분을 통한 정의의 바로세움이 아니라, 더이상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비인간적인 폭력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케이스이며, 이런 케이스는 게임 속에서 찾아보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가벼운 사례를 들어보자:버추어 캅 시리즈의 경우, 게이머는 총알이 빗발치는 사건현장 한 가운데서 범죄자들을 총으로 쏴 잡아야한다. 하지만 중간중간 민간인들이 양 손을 들고 나와서는 쏘지마세요! 라고 외치는 지점에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민간인을 총으로 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건 게이머가 비도덕적인 새디스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것이 특징인 게임 규칙 특성상 실수를 유발하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케이스를 다른 게임 장르에다 비유를 하자면, 빠른 음악에 맞춰서 노트를 눌러야하는 리듬게임 장르에서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노트가 내려오면서 옆에다가 ‘이 노트는 누르지 마시오’라고 적어놓은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게임 서사의 문제라기 보다는 규칙 자체(게이머의 빠른 반응을 테스트를 하기 위한)가 갖고 있는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울펜슈타인과 나치로 돌아와보자:나치는 이미 서사적으로 정당한 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군복은 적과 아군을 분명하게 나누기 위한 ‘규칙’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경험을 구축하기 위해서 나치를 게임 서사로 표현하였으며, 동시에 적과 나의 구분을 나치의 군복을 통해서 이루어냄으로서 게이머는 전쟁터에서 정당한 적(서사로도 정당화되었지만, 동시에 게임 규칙으로도 정당화된)에게 마음껏 폭력을 분출해도 되게 되는 것이다.


군복, 적과 나를 구분하는 표지,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며 정당한 전쟁을 요구하는 규칙에서 새로운 규칙이 파생되기도 한다:게임을 하다보면 게이머들은 약점을 보란듯이 드러내는 적들이나 보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문법에서는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현실의 전쟁에서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적들이 공격할 수 있게끔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다르다:게임이 만들고자 하는 정당한 전쟁의 관념은 게임의 규칙으로서 처음보는 적이라도 한 눈에 그 약점을 알아볼 수 있게끔 만듬으로서, 게이머가 불공정하게 느끼지 않고 공정하다고 느낄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덧붙이며:본인의 생각들임. 게임 규칙-게임 서사는 분명하게 구분이 가능할까? 이 둘은 서로 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서사 없이는 규칙을 표현할 수 없으며 행위를 제한하는 규칙 없이는 게임 서사는 무의미.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둘은 결합, 그리고 게이머는 이 둘을 경험을 통해 느낌. 분리 가능성은 희박해 보임. 그러나 가장 한계상황을 가정해본다면, 극단적으로 서사를 제외하거나 규칙을 제외해서 본다면-예를 들어 이야기의 요소를 게임 플래이에서 제외해서 본다던가, 극단적으로 게임 플래이를 서사로부터 유리시켜서 개념화 단순화시킨 ‘여기로 가서 아이템을 먹으시오’ 등의 원리와 게이머 행위를 제약하는 개념-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며 영향을 끼치지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봄.)


 (게임의 규칙은 게이머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기에, 그 규칙이 지키고자 하는 것, 법에 있어서 헌법이나 헌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게임의 규칙 전체를 포괄하며 통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헌법제정자가 헌법과 법을 만들어낼 때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그려내듯이, 게임 제작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게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글을 1개월 가량 방치하였다가 마무리 지은 것이기에 흐름에 부자연스러운 지점이 있기도 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