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https://medium.com/p/fa9dadff3f37 를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늑대인간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야성’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서, 오랫동안 신화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민담으로, 그리고 이야기에서 대중문화의 코드로서 기능해왔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달밤이면(서양에서는 보름달에는 광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일종의 미신이 존재한다), 사람 안에 숨어있던 야성이 울부짖으며 깨어난다. 그리고 늑대인간들은 자신의 야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희생양을 찾아서 어슬렁거린다. 이들은 거의 불사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은으로 된 무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입힐수 없다는 설정이 항상 따라다닌다.


현재 가장 위와 같이 알려진, 대중적인 ‘늑대인간’의 코드는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기반으로 헐리웃이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늑대인간의 코드가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보들리야르는 괴물을 ‘인간과 동물이 결합한 무언가’라고 규정하였다. 즉, 괴물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함이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도 동물도 아닌 그 어중간함, 동시에 인간도 괴물도 될 수 있는 이 쌍방향적인 그로테스크함이 드러나는 무언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늑대인간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괴물’이다:흡혈귀가 성병(카밀라 같은)/역병(노스페라투의 이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제노포비아(그들은 모두 머나먼 타국에서 왔다)의 결합이었고, 프랑켄슈타인이 과학과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시체를 기워서 만든 인조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늑대인간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야수성’을 야수의 이미지와 함께 합쳐버린 무언가(털복숭이 괴물이 두발로 걸어다니며 늑대의 울음소리를 내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늑대인간은 인간과 인간 내부의 흉포한 동물과의 사투이며, 이 사투는 동시에 인간이 늑대인간을 사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인간 내부의 야성을 배제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을 규정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왜 파트타임(?)으로만 활동하는 이 불쌍한 괴물을 은으로 만든 무기라는 귀찮은 방식을 이용해서 죽여야하는걸까?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공교롭게도 여기서 사냥당하는 이들 역시도 늑대인간이다)에서는 늑대인간 사냥을 인간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로 간주한다. 즉, 늑대인간을 죽임으로서, 순수하지 못한 것(늑대-인간 사이의 어중간한 것)을 죽이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작품에서, 늑대인간을 죽이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이자 ‘근대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 하다:물론 거기에는 늑대인간이 살인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은 늑대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도 성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도덕성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야수성을 쓰러뜨리는 것, 그렇기에 욕망이나 야수성을 제거하고 인간으로 회귀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울링은 정말로 독특한 늑대인간 영화다:하울링의 오프닝 시퀸스는 노이즈 낀 다양한 TV 화상들이 뒤범벅되면서 시작된다. 마치 거기에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을 거 같은 노이즈들 속에서, 영화는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 복선들을 깔아둔다. 마치,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홍수로 구성된 대중문화 속에 숨어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과 늑대인간이 처음으로 조우하는 장면을 포르노와 그 뒤에 숨어서 속삭이는 인간의 형태로 묘사한 것, 그리고 피해자로 나오는 주인공을 마치 관음하는듯이 흝어보는 대중의 모습은 단순히 현대에 늑대인간이 나와서 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울링은 전통적인 늑대인간 서사를 거부한다:물론 하울링에서도 늑대인간들은 컬트를 구성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지낸다. 하지만 하울링이 현대적인 해석을 거쳐서 새로운 지점을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초반에 늑대인간과 조우해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주인공을 그들의 컬트로 끌어들이는 방식, 즉 희생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정신의학의 탈을 이용한다. 그리고 요양원같은 대안공동체를 꾸며놓고서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늑대인간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섭한다:이 요양원 커뮤니티에서 주인공과 함께 친하게 지냈던 여인이 클라이맥스에서 정신과 치료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늑대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늑대인간이 되는 장면을 보자. 그리고 도시에서 떨어져있는 자연이지만, 동시에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완전히 숨어있는 공동체가 아닌, 세계의 연장으로서의 요양공동체) 그들만의 세계 역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단순히 ‘물어서 동료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하울링은 기묘한 명제를 제시한다:늑대인간은 더이상 세계와 동떨어져서 인간의 이성체계에 저항하는 반테제가 아닌, 시스템의 ‘일부’이다. 그것은 초반의 TV의 노이즈 낀 영상 기저에 깔려있는 일관된 ‘욕망’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욕망은 분석의 대상(정신의학)이며 사냥당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표출되는 무언가가 된다:늑대인간들의 기묘한 커뮤니티는 더이상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지 않고, 교외에서 자기가 키우는 소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자신의 파괴 욕구를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하울링이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인 것은 그것이 갖는 파괴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에 늑대인간 커뮤니티에 속한 한 여인에게 유혹을 받은 주인공의 남편이 늑대에게 물린 후에,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가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은 대단히 에로틱하다. 하지만 그런 정사도중에 이들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늑대인간으로 변하며 이들의 정사는 섹스가 아닌 파괴적인 폭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에로티시즘과 함께 파괴적인 그로테스크를 섞음으로서, 영화는 이들이 절대로 어떤 ‘대안’이라던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라고 선언해버린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이 늑대인간 커뮤니티가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대안적 커뮤니티로서의 이념을 제시한 정신과 의사가 가장 먼저 은탄환에 목숨을 잃고,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고맙네라는 대사)에서 드러난다. 이는 인간이 욕망에 휘둘리게 되면, 결국은 모든 것은 파멸하게 될 것이다 라는 영화의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울링의 결론은 전통적이다:하지만 동시에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늑대인간물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늑대인간에게 물린 주인공은, 진실을 고발한다:늑대인간은 실존하며, 그들은 이 시스템의 일부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위협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주인공은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늑대인간이 되며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동료의 은탄환에 의해서 ‘안락사’당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절절한 고발을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오히려 세상에 TV에서 저런것도 하다니 말세야, 재미도 없는데 말이지 라고 웃어넘겨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TV를 보는 늑대인간 커뮤니티의 생존자가 웃으면서 레어 스테이크를 주문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늑대인간 커뮤니티는 다시 한번 원점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이 글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본인이 정석적인 늑대인간 영화를 거의 본게 없다는 것이다:20세기 초반의 헐리웃 늑대인간 영화라던가, 혹은 과거의 늑대인간 물들 말이다. 직접적으로 보고 언급하는 ‘후세’나 몇몇 예시들은 오히려 본인이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에서는 상당히 떨어져있는 작품인데, 머릿속으롯 스테레오 타입을 상정하고 글을 만들어낸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하필이면 글을 80%정도 완성한 단계에서 나버리고 말았다…그렇기에 하울링은 어찌보면 대단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본인이 맥락 자체를 잘못 짚어낸걸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이 글은 하나의 지표로서 남겨두는 것일 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