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미군 포로로 잡힌 무하마드(끝까지 이름이 나오지도 않고 대사도 없으나, 이는 스탭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는 포로 이송 중에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탈출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익숙한 중동의 황무지가 아닌 눈으로 뒤덮인 북유럽의 낯선 자연환경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를 쫒아오는 미군들을 피해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땅을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에센셜 킬링은 문명과 문명의 충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포로로 잡힌 아랍인이 눈을 떴더니 이역만리 설원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다소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구도는 스콜리모프스키 감독 본인이 조국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뉴스(폴란드에 미군 기지가 있는데 거기서 아랍인 포로들을 고문하고 있었다)를 보고 얻은 영감에 기초하고 있다. 이역만리 타국 낯선 환경과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홀로 탈출을 감행한다는 액션 장르에서 자주 써먹는 클리셰를 영화는 주인공이 겪는 고독과 소외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스릴러로 바꿔버렸으며, 또한 명백하면서도 압도적인 구도와 이미지(아랍인과 유럽의 낯선 세계, 그리고 소리)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아랍-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을 겨울 폴란드의 숲(실제로 영화의 배경은 폴란드이다. 영화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안나오지만)이라는 평범한 동구 유럽의 자연 경관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명백한 환경과 주인공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눈덮인 설원과 숲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고독감, 그리고 위협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 주인공이 한겨울의 폴란드로 끌려가는가? 영화는 주인공이 처하는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음으로서 대립구도를 만드는 것이 아닌 던져지는 상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관객들은 주인공이 차에서 튕겨져나와서 눈밭에 내던져졌을 때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같이 느끼게 된다. 


이러한 환경의 압박, 쫒아오는 미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낯선 환경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영화의 구도는 전적으로 아랍 세계가 서구 문명에 대해서 느끼는 압박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감은 주인공 역을 맡은 빈센트 갈로의 연기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불쌍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근 10년동안 이 세상에서 불쌍한 케릭터 TOP 10을 꼽을 때 꼭 집어넣어야 할거 같은 의무감 마저 들게 만드는 마스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헌트에서 메즈 미켈슨이 관객에게 호소하는 사슴의 눈망울 보여준것과 반대로,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전적으로 낯선 환경과 절박한 상황에서 느끼는 압박감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대사 '한 마디'도 없이 신음 소리와 다급함, 피곤함, 굶주림의 다양한 원초적인 고뇌를 연기와 숨소리로 구현하는 빈센트 갈로의 연기는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대립구도의 원인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상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은 소리의 형태로 구현된다. 초반의 이명 현상으로 심문하는 미군의 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점이나, 폴란드 어-영어-아랍어가 모두 존재하지만 서로서로를 향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대사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점과 중저음 또는 굉음에 가까운 BGM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다급함, 절망감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주인공이 살인을 하는 3번의 살인 장면은 모두 소리라는 표현이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며 주인공이 느끼는 서구 문명에 대한 압박감과 소통불가능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 군견의 울부짖음, 벌목 현장에서 엔진톱들이 낸는 굉음) 재밌는 점은 아랍 문명의 세계관을 잠든 주인공의 꿈속에서 낭송되는 꾸란의 형태로 구현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꾸란에 대한 이미지와 서구 문명에 대한 적대감의 근원적인 모티브를 어렴풋하게 제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성스러운 모티브와 반대로 살인을 할 때 주인공이 보여주는 처연하고 불쌍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그 역시 그러한 이슬람의 모티브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강렬한 소리의 이미지가 주요한 모티브로 제시되는 영화의 세계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대안은 '언어와 소리가 필요없어도 소통할 수 있는 침묵의 세계'이다. 주인공 스스로도 대사 한마디 없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를 보듬어주는 존재가 '귀머거리면서 벙어리'라고 규정함으로서, 영화는 자신의 문제 의식에 대해서 기묘한 미학적 대안을 내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와 소리로 소통할 수 없는 세계에 있어서, 정상적인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변두리 존재들의 동류의식, 동질감 혹은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공감을 통해서 소통의 가능성을 언뜻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이 벙어리 여인이 죽어가는 주인공을 백마에 태워보내는 일종의 장례의식을 치룸으로서 영화는 이 소통할 수 없는 세계에 있어서 유일하게 남은 침묵의 휴머니즘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백마를 타고 선혈을 토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에센셜 킬링은 초현실주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현실적인 영화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영화라고 보기에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와 빈센트 갈로의 명연기로 그 어디에도 붕뜨는 애매한 이미지 영화가 아닌, 문제의 핵심(두 세계의 소통불응)에 대해 강력하게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덧.재밌는 점은 영화 케스팅에 있어서 빈센트 갈로는 공화당 지지자, 벙어리 여인으로 나온 엠마뉴얼 자이그너는 사르코지 지지자, 심지어 영화에서 이스라엘 출신 유대인까지 기용되는 등 영화의 메세지와 성향과 정반대라 할 수 있는, 노리고 한 독특한 캐스팅이라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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