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디아블로 2가 RPG 장르에 미친 영향은 실로 무지막지하다고 할 수 있다. 접미사, 접두어 등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랜덤으로 아이템을 생성하는 시스템이나, 스킬 트리와 다른 RPG들과 차별되는 특유의 액션성, 로그라이크 류에서나 볼 수 있었던 던전생성 시스템 등등의 조합은 게이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지난 12년 동안 수많은 RPG들은 디아블로 2의 재림을 꿈꾸며, 디아블로 2의 시스템에 나름대로의 해석과 양념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타이탄 퀘스트의 경우 정형화된 직업 분류를 떠나 다양한 카테고리의 스킬트리에 포인트를 투자해서 자신만의 케릭터를 만들도록 장려한다던가(킹덤 오브 아말러도 이와 유사), 세이크리드의 경우 스킬 콤보 개념을 도입하여서 디아블로 2와 다른 액션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보더랜드 같이 FPS에 디아블로 2의 랜덤 아이템 생성 방식을 도입한 RPG 까지 나오는 등 디아블로 2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디아블로 3는, 그렇기에 실로 대단한 게임이다. 디아블로 3는 전작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아이템 생성 및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부분을 싹다 갈아엎었다. 오히려 디아블로 3는 전작보다 자사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특히 대격변을 많은 부분 밴치마킹 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러운 난이도 증가와 이벤트 중심의 게임 흐름, 그리고 심지어 보스 디자인(바닥 피하기)까지 말이다. 하지만 디아블로 3는 그런 와우'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대단히 혁신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다.
RPG 장르에 있어서 케릭터 육성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게임 장르에 비해서 RPG는 케릭터가 게이머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디아블로 2 이후로 케릭터 육성의 개념은 게이머의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획일화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면서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디아블로 2 이후로 케릭터가 레벨업을 하면서 얻는 스킬 포인트와 능력치 포인트를 투자하는 방식 자체가 이러한 획일화를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할 것은 게이머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째서 케릭터 육성의 자유를 저해하는가 라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케릭터 육성에 들어가는 포인트는 레벨업에 따라 얻을 수 있는 한정된 '자원'이고, 기본적으로 게이머들은 자신의 케릭터가 '강해지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몇몇 실험적이거나 개그 성격의 트리를 제외하면 스킬트리는 대중적인 몇가지 트리의 형태로 획일화 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포인트 투자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아블로 3는 이러한 포인트 배분 방식의 시스템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차용했다. 디아 3에서는 케릭터가 레벨이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능력치가 올라가고, 그리고 스킬은 스킬과 스킬 효과를 결정하는 룬석 조합에 의해서 스킬의 조합을 결정한다. 즉, 룬석과 스킬 조합에 따라서 케릭터가 생존을 포기한 극단적인 딜링을 하는지, 아니면 딜을 포기하고 파티원들을 위해 메즈 및 버프만 거는 유틸리티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케릭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별도의 육성 없이 하나의 케릭터가 '스킬조합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한의 가까운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케릭터 육성 자체는 RPG 장르에 있어서 파격적이라 할 수 있지만, FPS나 액션 게임 쪽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로 가장 유명한 Perk 시스템. 자신의 플래이 스타일에 따라서 다양한 특성 조합하는 시스템으로, 게이머의 플래이 스타일과 개성, 성격을 단적으로 표출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디아블로 3의 스킬 시스템은 오히려 이러한 콜옵 시리즈나 기타여하 다른 액션 게임에서 보여진 Perk 시스템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만든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데, 디아블로 시리즈 특유의 액션성을 감안하자면 훌륭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더이상 게이머는 겉으로만 자유로운 스킬트리 시스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출 할 수 있는 분출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Perk 시스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추천 조합이 생겨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조합이 같이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디아 3에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을 보여주는데, 현재 정형화된 스킬 조합보다는 이런저런 스킬 조합과 실험이 공존하는 형태이며, 아이템 파밍이 어느정도 되어 조합이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는 아마도 기존 전작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스킬 조합이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그외에 게임은 디아블로 2를 와우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 컨텐츠가 전작에 비해서 짧아졌다고는 하나,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전작의 컨텐츠는 쓸데없이 방대했다고 하는편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디아 3는 오히려 그러한 긴 부분들을 딱딱 잘라내고 쳐냄으로서 게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앉은자리에서 엑트 1에서 엑트 4까지 쭉쭉 밀고 진행하는 스피디한 진행도 가능할 정도. 게다가 자연스럽게 난이도가 올라가는 구조를 취함으로서, 일반-악몽-지옥으로 게이머가 난이도에 별다른 산통없이 적응하게 만든다. 물론, 불지옥 난이도는 예외로 쳐야겠지만. 그러면서도 디아 2가 갖고 있었던 장점들(아이템 모으기, 파밍 등등)을 모두 흡수했다.
디아 3의 이런 혁신적인 부분과 훌륭한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디아 3는 아쉬운 부분이 몇몇 부분 존재한다. 일단 일련의 서버 대란은 둘째치더라도, 전작에 비해서 컨텐츠 자체가 성급하게 마무리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있다. 엑트 2까지의 분량은 상당히 방대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하려던게 눈에 보이나, 엑트 3는 묘하게 성급하게 진행되는 느낌이 없지않아 있으며(허세의 군주 아즈모단...) 엑트 4는 절정 바로 직전에서 게임을 끊은 듯한 느낌이 난다. 전작이 생각보다 괜찮은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면, 디아 3는 와우와 대격변을 통해 정점을 찍은 블리자드식 이벤트 연출 및 게임 진행에도 불구하고 뭔가 미묘하고 어색한 스토리 텔링을 보여준다. 특히 블리자드 전매 특허인 '타락'이 뭔가 어색하게 보인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이다.
결론을 내자면, 디아 3는 혁신적이며 훌륭하고 재미도 있는데다 중독적인 게임이다. 하지만, 미묘하게도 후반부의 완성도가 어느정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며, 추후 나올 확장팩(확실하지는 않으나, 블리자드 성격상 거의 확정적...)으로 이를 커버한다 하더라도 개발 도중의 게임을 급하게 다듬어 낸 느낌이 없지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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