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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제 2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의 광기가 빚어낸 궁극적인 종착역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효율적'인 인종 청소, 민족 정체성 및 문화 말살, 동성애자 장애인 말살, 종군위안부 등 차마 입에 담기도 역겨운 수많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죠.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나치즘의 대부분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일본은 동경 재판 이후에도 A급 전범을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과거 군국주의자들로부터 정신을 계승받은 극우주의자들의 행위 등을 통해 과거 전범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특유한 국민성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지만, 6.25 이후 미국의 충견이었던 일본의 국제 정치상의 위치,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이 일본 전범 잔재 척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점 등의 다양한 국제 정치상의 요건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산물이기도 합니다.

일본 대중문화에 있어 이 시기는 극우적인 작품들에서 가끔가다 미화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 시기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시기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이 시기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하나의 '공백기'입니다. 잊고 싶은 역사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대중문화가 전쟁 중의 일본을 배경이나 주제로 다루지 않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 시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은 드뭅니다.(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간장 선생' 정도가 여기 들어가겠네요)

'지금 거기 있는 나'는 그러한 일본 대중문화의 금기를 넘어버린 작품입니다. 군국주의, 소년병, 학살, 집단광기 등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거침없이 다룹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부분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만들어 버리더군요.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한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개고생을 하고, 다른 세계의 문제를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거기 있는 나'의 독특한 부분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를 풀어내는 과정에 존재합니다. 소년이 소녀를 따라서 건너간 세계의 풍경은 한마디로 지옥도입니다. 황량한 사막, 군국주의라는 집단 광기, 학살, 살인, 종군위안부 등 인간이 치달을 수 있는 막장의 한도를 넘어선 공간이죠.

놀랍게도, 소년이 이러한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는 세계에 대한 긍정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소년은 밝은 미래를 긍정하죠.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였지만, 점점 악화일로로 가는 상황에 있어서도 미래를 긍정하는 소년의 모습은 치기를 뛰어넘어 숭고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근본은 선하다는 성선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전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선한 인물들이며, 심지어 이 모든일의 원흉인 독재자 조차도 자신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물로 표현되죠. 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광기에 빠져있어도 세상은 아직 긍정할 수 있다는 애니메이션의 주장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마지막, 황량한 대지는 물로 정화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 화해하여 공존의 길로 들어섭니다.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역사가 집단 광기의 산물이라고 대놓고 드러내는 작품이니까요. 기본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취하는 과거 역사와 현재의 관계는 '단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이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는 모습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이 당시의 피해자에 대한 관점에서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일본인들이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가 '우리도 전쟁 피해자'라는 점을 고려하면(잘 만들었지만 정치적 색체가 상당히 짜증나는 '반딧불의 묘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이만큼까지 표현하는데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거기 있는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일반인의 정신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세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또한 작품 자체도 연출이나 스토리 전개가 흠잡을 때 없이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당히 무리가 있는 스토리도 감상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지금 거기 있는 나'는 훌륭한 명작입니다. 한번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덧. 다음은 뭘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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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만한 사진이 암굴왕 말고는 없더군요...)




"여기 한 남자, 에드몽 당테스가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착한 청년이었으며, 유능한 뱃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리따운 약혼자가 있었으며,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큰 범선의 일등 항해사였고 곧 있으면 선장이 될 예정이었다. 세상의 불행과 전혀 관계없어 보였던 그는 인생의 정점에서 자신이 친구들이라 믿었던 자들의 손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14년 간의 감금과 형용할 수 없는 고통, 기적적인 탈출, 그리고 비정한 복수에의 맹세. 그리고 과거의 에드몽 당테스는 죽고 여기에 비정한 신의 대리인, 복수의 천사, 광기의 화신,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등장한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프랑스 낭만주의 시기의 대표적 소설가 중 하나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이자, 지금까지도 대중문학의 고전으로 취급받고 있는 이 작품은 후대의 수많은 대중문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케릭터는 현대의 대중문학에 있어서 많은 의미를 가지는 케릭터입니다. 완벽하지만 어딘가 뒤틀린 남자, 선의라는 가면 아래 완벽한 복수를 계획하는 인간, 초인적인 의지와 집요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나약한 인간 등등...이런 관념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행복한 인생을 살던 남자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리고 그 나락 속에서 기사회생한 뒤의 처절한 복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백작의 복수는 일반적인 숙적의 죽음이 아닌, 숙적에 대한 완벽한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자신의 목전에 이르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숙적들은 파멸이 눈앞에 닥치자, 절규합니다. 오 신이시여,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인과응보이며 사필귀정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복수를 끝내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자신의 연인과 함께 프랑스를 뜹니다.

이야기는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에드몽 당테스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되기까지의 과정, 후반부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완벽한 복수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백미인 후반부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복수극은 추리극의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극에 있어서 탐정은 극중의 인물이 아닌, 바로 독자 자신이죠. 독자들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매 장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행동과 말, 그리고 언뜻 지나가는 단상들을 통해서 그의 복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는지를 추리할 수 밖에 없죠.

이는 독자의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입니다. 복수의 계획을 보여주지 않고,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복수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킬 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추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독자가 작품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또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치밀하고도 완벽한 계획 아래서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는 숙적들과 복수, 그리고 감동적인 화해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충분히 매료시킵니다.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또한 당연하게도)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 자신입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 다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비정한 복수자입니다. 하지만, 총이나 칼로 하는 복수와 다른 형태의 복수를 지향하죠. 그것은 숙적들의 완벽한 파멸입니다. 단순한 죽음, 치욕,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숙적들의 인생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 백작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숨기고, 14년 동안 자신의 스승인 파리아 신부에게서 배운 귀족적인 교양과 지식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하지만, 14년 간의 고난은 백작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 염세, 그리고 14년 동안의 복수에의 갈망과 숙적들에 대한 증오입니다. 이로인해 백작은 뒤틀린 내면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문학적인 지식과 교양으로 우아하게 포장을 하죠. 그래서 겉으로 그는 괴팍하고 오만한 동방의 귀족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기에, 그 이면에 숨어있는 백작의 복수심과 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의와 무지를 가장하고 자신의 숙적들을 서로 이간질하고 파멸의 길로 몰아가는 백작의 모습은 소름끼치면서 매혹적인 것입니다.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백작은 자주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으로 칭합니다. 물론 이는 백작의 세상에 대한 염세와 경멸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내용에 있어서도 적절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는 백작은 남을 배신하고 악행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막강한 지위에 오른 악인들에게 완벽한 파멸을 선사하는가 하면, 선하게 살아왔지만 그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보답을 주죠. 이와 같이 어긋난 세상의 이치(악한 놈은 잘 살고, 착한 놈은 고생한다)를 바로잡는 역할을 백작이 수행한 것입니다. 또한 직설적이긴 하지만, 백작의 이름에서도 드러납니다.(Monte-Cristo, '그리스도의 산'이라는 의미)

이러한 독특한 백작의 케릭터는 소설이 쓰여질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살았던,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중반은 프랑스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과격한 프랑스 혁명이 지난 이후 나폴레옹의 집권, 나폴레옹의 몰락과 부르봉 왕가의 재집권,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 입헌군주제의 도래, 또다시 혁명...이렇게 격동의 시기를 겪는 당시 프랑스 문단은 봉건적인 과거와 귀족중심적인 문학 사조를 탈피해서 새로운 격변의 시대에 알맞은 흐름을 만들었어야 했죠. 이렇게 격변의 시기를 이끈 유명한 작가들, 발자크,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등의 작가들을 가르켜 '낭만주의 사조'라고 칭합니다.

그렇기에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따라 탄생했습니다. 굳은 의지로 고난을 해쳐나가고, 과학과 문학, 예술, 철학 등에 박식하며, 정의를 관철하고, 자신을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 인, 스페인 인이 아닌 세계인이라 칭하는 이 인간이야 말로 프랑스 혁명 이후 격변의 혼란기라는 역사가 원했던 철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중이 원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원래 극작가였으나, 돈을 벌기 위해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합니다. 당시 신문은 거의 최초의 대중매체라고 할 수 있었죠. 즉,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소설이 성공한 것은 당시 대중의 수요에 맞았던 것입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대중문학사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케릭터가 가지는 매력,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기법, 당시 대중과 대중문학 사이의 관계 등등 지금까지도 분석 및 재해석 되고 있으며, 이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나 전개 및 묘사에 있어서 흠잡을 때가 없지만, 지금으로서도 부담되는 소설의 분량(두꺼운 양장본으로 총 5권)은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 감미로우면서 우아한 광기의 이름이여!"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독자, 현재의 독자, 미래의 독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시대에 같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고전이며 불후의 명작이죠. 이 글을 끝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백작의 대사를 인용하겠습니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다음 리뷰는 암굴왕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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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가장 특이한 작품들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 리스트 중에는 꼭 스컬맨이 들어갈 것입니다. 복고적인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반제국주의적 성향과 의뭉스러운 스토리와 충격적인 결말로 시청자를 당혹하게 만든 작품이니까요. 특히 마지막의 주인공이 개조되어서 악의 총수가 되었다는 황당하고도 암울한 결말은 엔딩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품의 스타일은 스컬맨의 원작자인 故 이시노모리 쇼타로 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이 고 보다 전세대의 활동한 분으로, 가면 라이더 블랙과 사이보그 009, 그리고 인조인간 키카이더 등의 작품을 만들고 특유의 암울한 세계관과 스토리 라인을 구축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실제 스컬맨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가면 라이더 블랙의 결말[각주:1], 사이보그 009의 케릭터[각주:2]나 기믹[각주:3], 심지어 스토리적으로 연결되는 듯한 암시까지[각주:4], 작품의 거의 대부분을 원작자인 이시노모리 쇼타로에게서 차용하고 있습니다.

 스컬맨 작품 자체는 숙명적인 악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건의 조사자이자 관찰자였던 주인공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자 원흉인 사람의 아들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의 업적을 그가 뒤집어쓰고(해골 가면)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다는 점과 머나먼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순환론적인 구성으로 인해 악인 탄생에 대한 숙명론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부를 전까지는, 스컬맨은 과거의 죄악을 청산하는 존재와 과거의 망령들 사이의 초자연적인 싸움,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탐문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컬맨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스컬맨과 가호 계획(신인류 개발계획)이 만들어낸 산물 사이의 사투가 아닌, 주인공이 그들 사이의 싸움과 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과거 탐정물의 형식으로 풀어냅니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산물들을 추적해나가고,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이 작품의 또다른 핵심 축이자 주인공의 친구이자 신부, 그리고 前 스컬맨인 칸자키 요시오란 인물은 실상 그 가면의 정당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에서 세상의 끝을 보고 좌절해서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마야(주인공의 여동생)로 부터 가면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면을 받은 뒤 그는 과거 전쟁에서 보았던 개조 인간들, 즉 가호 계획의 산물들을 처단하기 시작합니다. 실상, '처단'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가 행한 것은 가호 계획으로 인해서 괴물이 된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들이 보았을 때는 무차별 엽기 연쇄살인에 불과했지만요.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은 채,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가호 계획의 산물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호 계획의 핵심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백령회의 교주, 동시에 이 모든 죄악에서 순수한 마야를 죽여서 이 비극을 끝내려 합니다.

 또한 모든 일의 원흉이자 발단인 가호 계획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발견한 유적에서 인간 개조를 통해 우수한 개조 병사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전에 투입된 것이 칸자키가 참전한 전쟁에서부터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호 계획을 끊임 없이 저지하고 처단하려 했던 것은 일종의 과거 청산이자 단죄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칸자키는 과거 전쟁의 되풀이되는 과오와 전쟁을 일으킨 악에 대한 분노로 가면을 쓰고 스컬맨이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컬맨은 세상의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쓴 악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재밌는 점은 스컬맨이라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정치적인 성향입니다. 이야기에서 조금 마이너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과거의 영광'(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대동아공영권 이나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을 되찾으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가호 계획이나 전쟁처럼 과거의 망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 내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여전히 뒤틀린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과거 일본에 대한 풍자이자 비판입니다. 웃기는 점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인간들이 과거 자신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원자폭탄을 탈취하면서 '이제 저 코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앙증맞은(?) 제국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진정한 악에 의해서 괴멸되고 맙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난 뒤에 초 미래적인 4족 보행 전차와 개조 인간들에 의해서 말이죠. 사실상 그들의 정체는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무기상이었고 작품 내의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습니다. 즉, 제국주의자들도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악(무기상, 외세, 아니면 진정한 악?)의 꼭두각시였으며, 작품의 마지막에 일본은 그들의 손아래서 놀아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작자의 작품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복고적인 분위기의 작화와 내용, 일본 애니메이션치고 독특한 정치색을 띄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정작 13화 끝나고 나서도 이해가 힘든 스토리[각주:5]와 정말 찝찝한 결말, 보통 애니메이션과 다른 특이한 템포(나쁜 말로는 늘어지는 이야기 전개)로 아직까지도 괴작 취급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복장에 하얀 해골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중후한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를 읊는 스컬맨이라는 존재 하나 만으로도 이 애니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1. 주인공이 악의 총수가 된다 [본문으로]
  2. 실제 작품의 최고 악역이 이 작품의 모티브를 준 '스컬'입니다 [본문으로]
  3. 마지막 화에서 스컬맨이 어금니를 깨물자 초음속으로 움직인 것은 사이보그 009의 주인공, 009의 능력입니다 [본문으로]
  4. 원작은 그렇지 않지만, 스컬맨에서는 009의 아버지가 스컬맨인 것 처럼 나옵니다. [본문으로]
  5. 사실 라제폰의 각본가가 참여한 만큼 스토리가 쉽게 이해될거라는 편견은 버리시는게 좋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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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전반부(전편 읽으러가기)는 죽은 자와 산 자의 화해, 그리고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그 사이의 희망에 대하여 다루었다면, 작품의 후반은 이렇게 삶을 부정하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과 삶을 긍정하는 나키아미의 가르침으로 나누어져서 대립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다.





4.대립-나키아미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핍박받는 민족인 테시크 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히루코를 인도하는(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히루코를 시체에서 추출하는) 루아콘 교의 무녀로 선발되었다. 어느날 그녀는 시체 더미 속에서 한 소녀를 구하게 되고, 루아콘 교의 무녀의 의무를 포기하고 산노바의 곁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세상들과 만난다. 한 때 그녀의 이름은 '구름을 베는 자'였지만, 이제 그녀의 이름은 '나키아미'이다.

망념의 잠드라는 작품에서 나키아미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잠드들(라이교와 아키유키, 얀고)의 어머니이며, 아키유키와 더불어서 주제를 드러내는 작품 내의 중요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루아콘 교의 무녀일 때 배운 지식을 토대로 잠드들에게 가르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공존과 화해를 가르친다.

전번 리뷰에서 다루었듯이, 잠드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인 존재다. 일단 잠드라는 존재는 작품 내에 등장하는 루아콘 교적인 개념인데, 특이한 점은 잠드에 대한 나키아미의 가르침과 루아콘 교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이다. 루아콘 교 역시 잠드를 죽은 자와 산 자의 중재자로 본다. 하지만, 루아콘 교는 살아있는 것과 그 현제의 세계 그 자체를 고통이라 보고 이를 죽음으로 구원하고자 한다. 잠드는 산 자를 죽음이라는 영원한 평화로 인도하는 구원자인 것이다.

루아콘 교라는 종교 자체는 불교, 티벳 불교, 이슬람 교, 기독교 등등을 복합적으로 혼합한 종교이다. 루아콘 교의 교리 자체는 '일체는 고통(苦)이다'라는 불교적인 사고방식과 이슬람교의 성지 순례 개념, 기독교의 중보자적인 존재 잠드,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종교적 지도자 '황제'까지 다양한 종교 개념이 혼재되어있다. 이러한 루아콘 교의 교리는 인류 종교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루아콘 교는 인간이 현세적인 고통을 구원받기 위해서 만들어낸 극단적인 종교 개념이다. 즉, 인간은 극단적인 삶의 부정, 즉 죽음으로서 구원하고 새로운 삶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물론 현실 종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유의하시길)

그런 루아콘 교를 표상하는 것이 '황제'라는 개념이다. '황제'는 죽은 자에게 히루코를 심어서 만들어진 잠드이다. 그리고 대순례의 때, 황제가 깨어나 태동굴에 있는 순례자들(요호로기)을 삶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좋은 말로 하면 이렇지, 하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죽음이다), 다시 한번 삶을 만들어내는 대순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키아미는 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반대로 가르친다. 살고 싶다면, 소원하라. 자신을 잃지 마라. 그녀가 가르치는 것은 명백히 루아콘 교의 '황제(잠드)'와는 다르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삶의 아름다움을 긍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으면서 동시에 그 둘을 아우르는 존재인 잠드를 잉태한다.

나키아미는 자신의 여동생인 쿠지레이카와 한 때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산노바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 끝에 쿠지레이카를 만났지만, 테시크 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잠드가 된 쿠지레이카를 본 나키아미는 더 이상 자신이 고향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타는 고향을 뒤로한 그녀는 산노바를 만나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태동굴로 향한다. 동시에, 하루와 아키유키도 잠드가 모이는 태동굴로 향하고, 이슈와 라이교는 금강탑을 둘러싼 일전에서 승리하여 히루켄 황제를 쓰러뜨리는 듯 하지만, 오히려 황제를 깨우게 된다. 그리고 히루켄 황제가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대단원으로 흐른다.




5.화해-대단원,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

영웅들의 이야기는 막바지로 흘러 죽은 자와 산 자, 삶의 부정과 긍정이라는 극단적인 세계가 화해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인물은 바로 히루켄 황제다. 히루켄 황제는 누구인가? 그는 그 누구도 아니다(Nobody). 그는 죽은 아이며, 이름도 자아도 없는 존재다. 그는 대순례의 때, 태동굴에 모인 순례자들의 영혼을 삼켜 세계를 정화하고 세계를 유지한다(루아콘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한 막중한 의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외로워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 내에서 황제는 삶에 대한 고통과 공허감, 일체의 삶의 부정적 모습을 환기시키는 존재다.

대순례의 의무에 얽메여, 누구인지도 모르는 히루코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그(혹은 그들? 아니면 모든 죽은 자들?)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자신의 존재의 소멸, 죽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에게는 '대적자'가 필요하다. 자신과 대칭되는 존재. 황제는 아키유키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자아를 잃었을 때) 도움을 준다.

황제는 금강탑에서 풀려나(아이러니 하게도 이슈가 황제를 죽이기 위해 설치한 폭탄에 의해)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태동굴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선택한 대적자 아키유키와 대결한다. 이 대결은 상징적인 싸움, 삶의 희망과 절망의 대리전이다. 아키유키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은 대단히 작다. 그러나 황제로 대변되는 삶에 대한 부정, 고통은 엄청나게 크다. 아키유키와 황제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며, 거대한 슬픔과 작은 희망의 싸움이다.




나키아미는 산노바와 만난다. 거기서 그녀는 산노바에게 자신이 산노바를 떠나서 깨달은 것들ㅡ작은 희망과 삶에 대한 긍정ㅡ을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에 대한 긍정은 대단히 지독한 긍정이다. 핍박받는 민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수많은 비극을 봐온 그녀가 산노바 앞에서 세상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노바는 나키아미의 의지와 소망을 받아들여,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태동굴을 봉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키아미는 태동굴에 모인 수많은 히루코들을 정화하고 태동굴을 자신과 같이 봉인하면서 천년 동안의 긴 잠을 자게 된다.




나키아미가 태동굴을 봉인할 무렵,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의 싸움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황제는 아키유키와의 싸움에서 스스로 사라지길 원했지만,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자신의 소중한 '이름'을 준다. 희망과 절망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 절망을 감싸 안으면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의미('아키유키'라는 소중한 이름)를 부여한다. 결국 황제는 아키유키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자아를 잃고 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어둠은 물러가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된다.




6.귀환-Life Goes On.


그리고 영웅은 다시 한번 자신이 구했던 일상으로 귀환한다.




나키아미와 아키유키의 모험은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는가? 아니다. 그들의 모험은 세계를 일시적으로 구했을 뿐, 세계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남과 북은 그 이후 휴전을 했지만, 여전히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언제라도 문제는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험은 무의미한 헛수고였을까? 아니다. 이들은 모험을 통해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희망'을 찾아냈다. 나키아미가 천년 동안 자신과 함께 태동굴의 히루코를 정화하고, 태동굴을 닫은 것도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소망, 그 소망이 있으면 언제든지 세상이 나아질 희망과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그리고 아키유키는 다시 한번 일상으로 귀환한다.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고,
계속해서 마음을 전해주려고 했던 소중한 사람, 하루에게로.



※후기


4개월이었다. 리뷰 하나 완성시키는데 걸린 시간이 4개월이었다. 사실, 리뷰 자체를 포기할 뻔도 했었다. 리뷰를 중간까지 썼다가 뒤엎기도 했었다. 사실 4개월만에 리뷰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쁘다기 보다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실상, 작품의 핵심만을 짚어서 리뷰를 작성하였기 때문에, 작품 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교향시편 에우레카 7을 보면서, 이런 작품을 적어도 10년 안에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본즈는 그러한 나의 전망을 비웃듯이 약 3년만에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방영 당시 어느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26화 하나 하나가 모두 몇 년간 공을 들인 극장판처럼 느껴졌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사실, 4~5개월 정도를 질질 끈 리뷰를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시원 섭섭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다. '드디어 끝냈으니까, 다른 리뷰를 쓰러 갈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보면서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글 솜씨가 좀 괜찮은 사람이라면 더 축약적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 글 솜씨가 후달리는 관계로 글이 장황하게 길어진 점을 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 올리며, 부족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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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19세기 유럽은 역사적으로 대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루이 16세 때, 프랑스 혁명을 시발점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변혁의 바람이 불고, 오랜 기간 지속해 되었던 절대왕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완전하게 붕괴되었으니까요.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과정은 많은 작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수많은 문학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크나큰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춥니다. 슈발리에 또한 이러한 문학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발리에는 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프랑스 혁명 직전의 시기인 루이 15세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애니의 내용 자체는 프랑스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충성심 깊은 4명의 기사들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의 왕과 국가에 대한 충정을 시험받고, 결과적으로 '변혁기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의 누나인 리아 드 보몽이 시체가 되어서 파리 센느강변에서 발견되고, 그 동생인 데온 드 보몽은 충직한 왕의 신하였던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데온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누이를 영접(흔히 이야기하는 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데온은 그 동료들과 함께 누이의 원수를 찾기 위해, 그리고 프랑스 왕조를 위협하는 적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재밌는 점은 슈발리에는 많은 부분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등극, 루이 15세 때의 오를레앙 공의 반역과 진압, 귀족에 의해서 변두리로 밀려난 영국의 왕조들 등의 유럽 역사에 있어서 절대왕정의 막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절대 왕정의 막바지에서는 다양한 계층(농민, 부르주아, 시민 등)의 계층 의식이 성장하고, 이러한 계층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고 기존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왕이나 귀족 세력에 대해서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떄문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서 왕들이 기존의 귀족 세대를 대체하고 새로운 사회 체제를 새우려하고 이에 귀족 체제가 반역하는 과정이 있기도 하거나(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에피소드), 이미 귀족에 의해서 내몰린 왕이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흥하여 다시 절대 왕정을 확립하려는(영국의 왕조의 에피소드) 모습 또한 보여줍니다.

이러한 절대 왕정의 말기에 있어서 기사(혹은 귀족) 계급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대변해서 일해야 하는가? 자신이 섬기던 국가? 혹은 국가를 대변하는왕? 국가를 구성하는 일반적인 민중 계급인가, 혹은 자기 귀족계급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가? 데온 일행은 이러한 혼란기에 처하게 됩니다. 충실한 기사 계급인 그들은 가장 정석적인 답, 바로 '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일반적인 답을 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여행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신념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왕이 자신에게 충성했던 충실한 귀족계층을 희생하려는 모습, 혹은 힘없는 왕이 잘 운영되는 국가 체계를 뒤엎고 다시 절대적인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편하려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왕정을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하려는 왕조와 대면하게 되죠.

작품의 구조는 데온 일행의 기나긴 여정ㅡ오딧세이아ㅡ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데온 일행은 진실(누나를 죽인 원수, 혹은 왕정을 위협하는 적들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속해있던 안정적인 프랑스(루이 15세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전의 폭풍전야로서 조용한 시기였습니다.)에서 벗어나서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를 들여다 보고, 자신들의 역사적인 위치를 자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정은 대단히 가혹하기 때문에, 그들의 왕조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고, 혹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슈발리에에서 핵심되는 키워드는 '왕가의 시'입니다. 프랑스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이 신비한 힘을 가진 시집은 왕의 미래를 예언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하며, 심지어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절대 왕정 시기의 왕권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절대적이면서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시대 정신 같은 개념이지요. 하지만, 이는 역으로 개개인의 자유와 인간성을 옭아매는 폭압적인 존재기도 합니다. 데온의 누이 리아 같은 경우에는 왕가의 시와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로부터 배격당했으며, 루이 15세는 스스로의 의지로 죽을 수도 없는 가련한 상황으로 이끕니다.

데온 일행의 여정은 이러한 가혹한 시대 정신과 흐름을 직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혹한 시대 정신과 조우한 기사들은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다른 충성의 대상을 찾거나, 충성보다 기사 사이의 신의를 지키거나, 혹은 이 모든 걸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을 꾀합니다. 슈발리에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여정의 과정에서 변혁기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가의 시편을 찾으려 했던 기사들의 여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초라하게 늙은 데온이 '프랑스여, 영원하라!'라는 글을 바닥에 쓰고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는 제가 여태까지 본 애니메이션의 엔딩 중에서 가장 씁쓸한 느낌을 주는 엔딩인데, 더 이상 지켜야할 가치도 신념도 국가도 없는 상태에서 과거 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힌 가련한 노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발리에는 06년도에 했던 애니메이션의 숨은 걸작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탄탄한 구조, 미려한 작화, 독특한 소재 등 근래 찾아보기 힘든 걸작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극이라는 마이너한 분야와 탄탄한 드라마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코드 등은 이 작품을 묻히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프로덕션 IG 20주년 기념 작품(맞나?)으로 나온 거 치고는 대단히 조용하게 막을 내린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발리에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며, 기회가 된다면 한번 꼭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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