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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이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생각하는 '정형적인 모습'이자 '일반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가족의 형태는 부모가 모두 있는 4인 가족에 서울에 있는 자가 주택에, 아버지는 사무직, 어머니는 가정 주부이고...이런식의 요건들을 전제로 한다. 정상성에 대한 규범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에게 일종의 공감대와 무의식을 구성하는 영역이다:가령 우리가 머릿속으로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러한 조건을 가진 가족이 곧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정상성은 일종의 사회적 공통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 '정상성'으로부터 먼 범주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논할 수 있는 영역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통 담론의 영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상성에 정확히 부합하는 범주의 집단은 통계적으로 '극히 희귀한' 케이스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가령 아무 조건 없이 5500만 한국인 중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그 어떠한 조건없이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람의 성별을 특정지을 수 있다면, 5500만 중 절반인 2750만의 인원은 배제하고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사람의 주소, 연령대, 직업 등등의 조건을 찾아서 점점 범위를 좁혀 나간다면 그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프로파일링이라 불리는 영역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경향성을 추론하거나 검색 범위를 좁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범죄학이나 마케팅에서 고객 프로파일링의 영역이 이러한 특징을 십분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성 집단, 혹은 정상성 가족에 대한 영역은 순수하게 그 조건에 부합하는 집단만 찾는다면 극소수에 가깝다. 누구는 부모중 한명이 이혼했을 것이고, 어느 부부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 누구는 아파트가 아니라 빌라에 살 것이고, 누구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외곽이나 천안이나 이런 곳에서 출퇴근을 할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정상적인 가족이나 정상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정상성이란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상성, 특히 정상 가족에 대한 담론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작품들이나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그렇게 놀랍진 않다. 모두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않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집중하여 문제를 드러내어 그것을 풍자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이런 작품들의 주요 테마였다. 그리고 몇몇 작품들은 '정상성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비꼬아서 공포의 영역으로 끌고자 했다: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무의식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억압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작업이었다.

영화 페어런츠는 그러한 정상성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영화다. 부모가 사실은 식인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나중에는 그것이 진짜로 밝혀지지만) 소년의 어두운 성장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과 정상성의 이미지를 비튼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 1950년대 미국이라는 점이다:1950년대 미국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이후로 사회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미국은 겉으로는 밝고 행복한, 그야말로 정상성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것이 무너졌고, 베트남전이라는 충격을 통해서 히피즘과 거대한 아노미를 겪었던 것이다.

페어런츠가 눈여겨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아노미를 겪기 전, 곪아터지기 전의 들끓어오르는 열과 통증 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퍼져나가는 부패의 에너지를 음식과 정상 가족에 빗대어서 공포 영화의 장르로 묶은 것이다. 또한 '먹을 것'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부분도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부분이다. 얀 츠방크마이어가 이야기했듯이, 입이란 인간의 기관 중에서 가장 야만적인 이미지를 가진 기관이고, 식사란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식사는 정상성, 특히 가족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한다. 가족을 부르는 식구라는 표현이 같이 받을 먹는다라는 표현에 기반하듯이, 식사를 함께하는 가족,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라는 이미지와 식사를 주관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페어런츠는 이러한 이미지를 뒤틀어버리고 식인이라는 이미지를 섞음으로써 정상성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자체를 크게 왜곡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그 왜곡된 이미지가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섞였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이러한 식사의 이중적인 이미지와 본질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떻게 본다면, 정상성이야말로 근현대 사회가 보고 있는 가장 신화화된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차라리 중세 사회였다면 분절되어있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공존하였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하나의 사회를 유지한다는 신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을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면 1950년대의 정상성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상성이나 다양한 형태의 정상성들을 발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깨는 작품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행위 자체는 현대사회라는 개념이 새롭게 재정의되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